극악서생 1부 – 120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큰절을 하고 그러냐는 말이 대교의 촉촉이 젖은 눈빛 때문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교의 큰절이 ‘감사합니다. 살아 주셔서…!’라는 의미임이 느껴졌던 것이다. 쳇…! 고마운 건 난데 말이야. 녀석… 깨어나자마자 코끝 시리게 하는군. 후우… 정말 죽어 버린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끔찍한 지옥을 겪은 뒤라 그런지 처음엔 대교가 눈앞에 나타난 현실이 오히려 피부에 닿지 않는 기분이었는데 이제야 살아서 대교를 만난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음… 미령이는……?”
“무사합니다. 이미 저희 쪽 고수들을 안내해 혈의문주와의 싸움을 도우러 갔습니다.”
“좋아… 이제 됐군.”
비로소 대교와 미소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와 대교를 주위로는 수십 명…? 아니, 이 정도면 백 명도 넘으려나? 하여간 꽤 많은 숫자의 남녀 무사들이 둘러싼 채 호위를 서고 있었다. 내가 남긴 춘전이 다행히 계획대로 외당 요원들에게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대교까지 나타난 것은 뜻밖이지만 당연히 더 잘 된 일이다. 혈의 승의 무공이 하도 예상 이상이라 외당의 지원만으로는 불안했었는데 대교가 왔다면 대교의 호위 병력은 물론이고 야후 장로와 그의 제자들까지 왔다는 얘기이니 이제는 정말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제군들! 곡주께서는 무사하시다.”
대교는 별안간 돌아서서 주변을 향해 외쳤고 사방에 포진하고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와아아아~! 하는 환호성을 울렸다. 거- 쑥스럽구만. 고맙긴 한데 치이… 손을 들어 답례하는 것도 힘들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통증은 예상보다 심하지 않았으나 전신 어디에도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이다. 그래도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어 난 대교에게 빨리 혈의승과의 싸움 장소로 돌아가자고 명령했다. 현재 내가 눕혀져 있는 이건 부서진 마차의 조각을 이용해 만든 일종의 임시 야전 침대인 모양인데, 대교에게 차출된 사내 네 명이 한 쪽 귀퉁이씩 잡아들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혈의문주의 무공이 비록 알려진 바를 일축할 정도로 놀랍다고는 하나 야후 장로님의 제자들과 남해오신룡들이 합세하였으니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옆에서 바짝 붙어서 걷던 대교의 말이었다. 새삼 안심이 되는 말이긴 하다만… 남해오신룡? 가만있자… 들어보긴 한 명호이긴 한데, 그 애들은 정파 아니었나? 내가 여기 온 때와 비슷한 시기에 강호에 등장한 신진 고수들로써, 어느 문파 출신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행동 패턴이 분명 정파에 속하는 녀석들이라는 것으로 들었다. 가장 최근들은 거로 말하자면 분명히 문교촌 근처의 어느 지방에 떴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문제는 그 친구들이 왜 날 도우러 왔다는 거지?
“후후… 남해오신룡은 최근 강호에서 냉화절소 장청란에 못지 않은 무명을 떨치고 있는 젊은 고수들이며 구름 속의 용처럼 신출귀몰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곡주님의 안배로 키워진 인재들이었다니… 과연 곡주님이십니다.”
엥? 뭐야? 먼저 안 물어 보길 잘 했네. 내가… 아니, 원판이 키운 애들이었단 말야?
“사실, 저의 일행은 조금 늦게 외당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남해오신룡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혈의문의 천라지망을 뚫고 곡주님을 구출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원판녀석… 쳇, 이번엔 할 말 없다. 땡큐다! 대교는 계속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간의 일에 대해 보고 겸 잡담을 해 주었고 그 사이 내가 누운 이동식 침대는 ‘꽃이 피는 순간 지는 장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음… 아까 멤버에다가 더해진 우리편들이 떼거지로 우글우글 하고 그에 가려졌는지 괴물 노친네 혈의승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돌아온 것을 발견하고 날아오는 흑주… 최소한 겉으로는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아 다행이다. 소교, 소령, 미령이도 무사한 듯하고 저기 혈월도 있다. 근데 제기랄, 혈월을 제외한 천인군도의 살수들은 발견할 수가 없었고 외당 무사들의 시체와 부상자들도 사방에 적지 않게 보인다. 그래도 저 괴물 노인을 상대한 것치고는 양호하다…고 해야 하나? 쳇! 나까지 엑스트라 급 인물들의 희생에 무감각해진 것 같아 기분이 꿀꿀해지는군. 강호에서 칼밥 먹고 사는 자들이라면 언제나 그런 일을 각오하고 살았을 터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어디서 엄한 죽음을 당한 것보다는 이번처럼 주인을 구하고 그에 대한 대가라도 보장되는 죽음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완전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후우~ 앞으로는 더 희생이 없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현재 상황은?”
슬며시 흑주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흑주에 이어 달려온 자매들 중 소교에게서 나왔다.
“다른 고수들의 지원을 받아 조금 전 혈의문주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직 목숨을 끊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승리의 보고지만 소교의 음성에는 그리 힘이 없었다. 하긴 패싸움도 아니고, 덜렁 한 명의 노인네에게 수십 명의 젊은 것들이 달려들어 몰매로 간신히 이겼으니 사실 무지 쪽팔린 일이다.
“혈의문주…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군. 그의 진짜 신분에 대해서는 현재 누구까지 알고 있지?”
“예? 아… 그건 처음에 곡주님의 말을 들은 이들 뿐일 것입니다. 차후 도착한 이들은 아직……”
“좋아, 가보자.”
날 비롯한 일행이 다가가자 늘어서 있던 인원이 모세 앞의 바다처럼 좌우로 촤아악 갈라섰고 그렇게 생긴 통로의 저 앞에 혈의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처연한 모습이었다. 왼 쪽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고 있는데 그 손의 안쪽에서 짙은 선혈이 비져 나오고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져 숨을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적은 총 여섯 부위의 대소 자상(刺傷)을 입고 있으며 그 중 심장의 손상이 심해 생명 유지 및 더 이상의 반격이 어려울 것으로 추정됩니다. ]
몽몽의 의견도 같군. 치명상을 입힌 건 사영이나 흑주일까? 아니면 나중에 왔다는 남해의 용 다섯 마리 중 하나일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 찢겨진 복면 사이로 흰 수염의 일부가 보였으나 아직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뭐라고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쉽게 첫 마디가 떠오르지 않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내려다보고만 있자 혈의승 역시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남해오신룡은 내 계산 밖이었다. 결국, 네가 이겼구나.”
“…이기고 싶었기는 한 거요?”
“……”
“왜… 이 딴 일을 벌인 거요. 날 죽이고 싶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기랄, 꼭 말을 해야 아나?”
치이~ 왜 갑자기 신경질이 나는 거야? 사실 내 일도 아닐텐데 말이다.
“후후… 틀렸다. 난 널 반드시 죽일 생각이었다. 넌 그의 유일한 후계자이므로……”
혈의승, 아니 이제는 성승으로 돌아온 듯한 분위기의 노인네는 짧게 힘든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또한 난 널 죽일 수가 없었다. 넌 ‘그녀’의 유일한 핏줄이므로……”
뭔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비화곡의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원판의 출생에 관한 얘기인가? 중요성을 떠나 무지하게 궁금한 얘기다, 하지만……!
“난 평생 내 마음에… 충실했다. 달콤한 명예… 애틋한 사랑… 가슴 벅찬 우정… 겨울처럼 메마른 방황… 바다 속처럼 고요한 불심… 재미있지 않으냐?”
“…무엇이 말이요.”
“지금 내게는 후회가 없구나.”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빌어먹을 ‘선문답 중독 노인네’와 정상적인 의사 소통이 될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잘 나셨소. 그럼 죽기 전에 선택이나 하나 해보시오.”
“……”
“그냥 혈의문주로 죽고 싶소? 아니면 좀 더 모양새가 나은 신분으로 남고 싶소? 천하인들의 기억 속에 말이오.”
뭐, 뭐야. 이 노인네, 최소한의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혼자 껄껄대고 웃기 시작하잖아? …이봐요, 성승 할아버지. 그 상태에서 그렇게 웃어 제끼면… 으… 내 그럴 줄 알았다. 죽기 전에 할 일이 그렇게 없소? 피를 토할 때까지 웃게?
“…후후… 쿨럭~! …여, 역시 그녀로다. 또 내게 ‘선택’을 요구한단… 말이지…? 후후… 쿠, 쿨럭! 쿨럭-!”
우이 쒸~! 나름대로 호의를 가지고 한 제안이었건만 웬지 병을 앓고 있는 불쌍한 노숙자 노인네를 붙들고 억지로 마이크를 들이대는 몹쓸 기자가 된 기분이다.
“크흐, 읍. 후후… 그녀에겐… 또… 원망을… 듣겠군… 잘…있……”
당금 무림 최고의 고수이자 만인으로부터 생불(生佛)로 추앙받았으며 한 편으로는 혈의문이라는 살수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사람… 이 알 수 없는 노인은 앉은 채로 잠들 듯 눈을 감았다.
…뭐야… 결국… 그렇게 결국… 죽는 거요? 제기~ 뭐야! 이중 인격자에, 날 죽이려 했으며, 별로 친하진 않았어도 현재 내 부하인 자들을 다수 해친 노인네가 죽어버린 것뿐인데 기분이 왜 이렇지? 왜… 저 까마득한 겨울 하늘빛이 눈에 시린 거냔 말이야. 제기…랄!
하늘은 흠집 하나 없이 푸르고 높은 겨울 하늘의 전형적인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새로 구한 마차에 탑승하여 창가에 팔을 걸친 채 주변을 감상하는 여행길이 아직까지는 지극히 평화롭다.
성승의 선문(禪問)이자 혈의문의 암호 문장이기도 했던 ‘꽃이 피자마자 지는 장소’에 성승을 묻고 돌아 나온 지 이틀 째, 여전히 꿀꿀한 기분은 남아있었다. 성승의 이중 인생과 원판 사부의 관계, 성승이 마지막에 언급한 ‘그녀’와 원판, 원판 사부, 성승이 대체 어떤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인지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몇 가지 가설이 성립되긴 하지만 가설은 가설일 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는 형편이었다. 뭐… 사실 나로서는 원판 사부와 성승이 ‘그녀’와 삼각 관계였는지 아니면 누구 한 명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는지, 심지어 원판이 둘 중 누구 한 명의 아들(혹은 손자)인지 그런 비밀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나중 한가할 때 알아볼 일이고 지금은 ‘대교 VS 장청란’을 어찌 잘 치를 것인가가 당면 과제인 것이다.
그간 내 존재가 대교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애써 왔건만 이번에 맛이 간 나를(거의 스스로 망가진 셈이지만) 내공을 소모해가며 치유한 것이 대교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간 뭔 짓을 하며 온 건지 허무하기만 했었다. 대교는 물론 며칠 뒤의 대전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 강조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영 마음이 편치가 않다.
“곡주님. 식 때도 되었으니 잠시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어, 그래. 그러자.”
에고, 목적지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대교가 묻는 바람에 무심결에 OK하고 말았다. 에… 하는 수 없지 뭐.
“허허~ 노부가 강호를 유람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나, 곡주님과는 처음이라 각별한 느낌이 드는 구려.”
여전히 중요한 일전을 치르러 가는 건지 소풍 나온 건지 구분을 못하는 듯한 야후 장로는 술병부터 챙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라 조금 얄미운 생각도 들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걸 따지는 건 우스운 노릇이고…
“딱, 한 잔만 같이 합시다.”
“곡주의 상세가 아직 걱정스러우니 그렇게 하지요. 게다가 이건 상처에 효험이 있는 복설주(復雪酒)이니 약이라 생각하면 되는 게지요. 허허허~!”
사실 한 잔 마시는 것도 대교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야후 장로의 술이 정말 약주라 생각하는지 지금은 막지 않을 기색이라 다행이다. 음… 마차 밖으로 나와 조금 걸어보니 대교와 몽몽의 연합 치료가 굉장했다는 것이 실감난다.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터보모드의 후유증은 매우 ‘피곤하다’는 느낌 외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 같고 칼에 찔린 어깨의 상처가 쑤시긴 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다들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야후 장로가 따라 준 술을 홀짝 홀짝 아껴 먹으며 현재의 병력을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기본적으로는 우리와 대교 일행이 합쳐진 형태이지만 몇 가지 변동 사항이 있었다.
우선, 젊은 나이에 노친네에게 맞아 죽은 불쌍한 천인군도 살수들… 수하들을 모두 혈의승에게 잃고 홀로 남은 혈월이 조금 외로워 보인다. 나중 저 친구 직속 주인이라는 혈해삼사왕까지 함께 포상해 주는 건 물론이고 상황 봐서 혈월을 아예 비화곡에 차출해 버리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다.
다음은 사영… 이 아저씨는 현재 이 자리에 없다. 혈의승의 죽음과 함께 사건이 모두 종결되었을 때, 사영은 알아서 먼저 내 앞에 무릎을 꿇었었다. 혈의문의 고정간첩 사영과 그런 사연을 알고 있는 소교 이하 자매들까지 주르르 꿇어 엎드린 상황이 다른 모든 이들까지도 썰렁하게 만들어 놓은 가운데 나는 짐짓 목소리를 높였었다.
“사영과 비연대의 무사들은 부주의하여 날 위험에 빠트린 죄가 크다.”
나의 질책… 실은 엄한 소리를 들은 사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었다.
“허나, 다들 합심하여 무난히 위기를 넘겼고 중요한 일전을 앞둔 시점을 고려하여 이번만은 용서를 해주겠다.”
내 말이 끝나자 대교의 충동질(?)에 힘입어 다시 전 무사들의 함성이 계곡을 울렸고, 사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말없이 고개를 숙였었다. 제대로 감동을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지금까지의 우리 사이에 어색함을 더해 줄 것 같아서 나는 핑계 김에 사영에게 다른 일거리를 주었었다. 잠시 있고 있던 비인사기! 기간이 얼마가 되었던 그 인간들을 찾아 놓고 가능하면 모용란의 과거도 좀 캐보라는 나의 명령을 받고 떠나간 사영… 돌아올 때는 처음 내가 보았던 모습으로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음… 사영과 그렇게 잠시 헤어진 대신 새 식구는 다섯 명이 늘었다. 다들 내가 비밀리에 키웠다가 이번 비상사태에 적절하게 써먹은 것으로 알고 있는 남해오신룡! 사실 나로서는 예상도 못했던, 그야말로 뜬금없이 나타난 지원 세력… 그들은 통합 명칭 그대로 다섯 명의 소년 소녀로 이루어진 독수리 오 형제 아니, 오 남매라고 할 수 있었다.
오신룡의 짱인 남해협룡(南海俠龍) ‘정권’의 나이는 불과 18세로 대교와 동갑, 둘째인 남해미룡(南海美龍) ‘일지’라는 미소녀도 18세로 동갑, 그 아래 두 명은 한 살 아래… 이 정도만 해도 보이스카웃 멤버들을 만난 선생님 기분이 들었지만 마지막 막내를 보면 아예 할 말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비교적 평범한 명호의 네 명에 비해 독각소아룡(獨角小兒龍)이라는 튀는 명호를 가진 막내 ‘종소’는 현재 11살짜리 꼬마 계집아이였다.
지금도 저 앞에 모여 서서 저희들끼리 뭐라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고 있는 다섯 어린 용들… 음, 꼬마 종소 녀석 또 슬며시 내 쪽을 보는군. 후후~! 장난으로 윙크해 주니까 깜짝 놀라며 잽싸게 언니인 일지 뒤로 숨는다. 저렇게 귀엽고 천진한 꼬마 아이가 명호에 원판과 같은 ‘독각’이라는 말이 들어갈 정도로 독(獨)에 능숙하다니 웬지 실감이 나질 않는군.
원판과도 만난 지 상당히 오래되었다지만 나로서는 이틀 전 생전 처음 만난 녀석들이라, 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계속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짱인 정권은 내가 농담을 걸어도 적당히 대꾸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아직도 내 앞에서는 바짝 얼어버리는 상태라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에… 그건 그렇고, 처음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원판이 비화곡 역대 최고의 천재 짱답게 뭔가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남해오신룡을 키우고 숨겨온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들로부터 과거 얘기를 들어 본 바로는 원판의 의도가 아무래도 좀 미심쩍었다.
처음 정권이 대표로 나서 들려 준 이야기에 여기까지 오면서 다른 동생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나온다.
남해의 한 귀퉁이에 자그마한 어촌이 있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와용촌(渦溶村)이라고 불렀다. 사립문을 열면 바로 넓디넓은 바다가 펼쳐진 어촌이었고 당연히 그들의 생업은 그물을 드리워 고기를 낚는 것이었다.
다음날의 출어를 위해 그물 손질에 여념이 없는 어부들의 능란한 손놀림과 멀찍이 떨어진 모래사장 위를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은.. 조용하고 평범한 어촌이었다.
일견 평화스러워 보이고, 여정에 지친 나그네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지을 정겨움이 있었다. 중년의 아들과 함께 그물 손질을 하던 어느 늙은 어부가 담배쌈을 찾아 옷깃을 더듬던 손을 문득 멈춘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나타난 불청객이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뜩 기울어진 태양빛을 등져 얼핏 자세한 모습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늙은 어부의 가늘게 떠진 눈으로 불청객의 오른 손에 들린 긴 쇠붙이가 보였다. 시퍼렇게 선 한쪽 면만의 날을 가진 장도(長刀)… 그리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음침하고 낡은 갑옷을 불청객은 걸치고 있었다.
“왜, 왜구(倭狗)……?”
맞은 편의 아들이 절망적인 목소리를 냈다.
노인의 얼굴이 경악의 빛을 띠었고, 다음 순간, 시퍼런 일본도가 그의 머리를 단숨에 갈라버린다.
왜구… 옛부터 한반도와 중원의 외곽 해변에서 악명을 떨치던 일본의 해적들이었다.
늙은 어부의 머리를 단칼에 벤 왜구가 뇌수와 피가 흐르는 도를 들고 크크큭! 하는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터트린 것은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다.
노략질과 살인, 방화에 능숙한 왜구들은 순식간에 와용촌을 휩쓸었다.
평화롭던 마을은 불타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처참하게 도륙 당하고 있었다.
그 민족성을 자랑하듯 왜구들은 잔인했다. 힘없는 어부들과 식솔들을 짐승처럼 사냥하고 있었다.
지옥, 인간 스스로 만든 지옥이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 펼쳐지고 있었다.
마을 왼편에는 마을이 멀찍이 보이는 바위 언덕이 하나 있었다.
그 위에 12, 3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엎드린 채 마을의 참극을 보고 있었다.
얼마 후, 소년은 아래, 다른 아이들에게 손짓으로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위를 오른 아이들 중 그 소년과 동갑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마을이 눈에 보이는 순간 재빨리 자신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몸집의 어린 소녀의 얼굴을 안고 손으로 그 눈을 가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도 불타는 마을과 비명소리를 외면했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소녀의 품안에서 어린 소녀가
“언니 왜 그래. 언니 왜 그래.”
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을 돌리지 마.”
처음의 소년이 입술을 악물며 말했다.
“사성, 대오, 똑바로 봐! 저걸 보란 말이야!”
소년이 낮으나 복받친 음성을 내자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두 소년이 그 말에 따라 두 손 사이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 두 눈에 눈물과 공포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것을 보아야 해. 하나도… 빠짐없이…….”
마을의 비극은 절정에 이르렀고 그 처절함에 소년들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나 다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하나, 하나… 두 눈에 새겨 두어야 해… 나중에… 우리가 힘이 생기면 반드시…….”
소년의 바위를 움켜쥔 두 손과 아래 입술 위에는 붉은 선열이 맺혀 있었고 두 눈은 용암처럼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었다.
그날, 바위 언덕 너머에서 놀고 있다가 살아남은 세 명의 소년과 두 명의 소녀…
가장 나이 많은 소년이 열세 살, 작은아이가 여섯 살……
“어, 엄마!”
사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약간 뚱뚱한 소년의 눈이 커졌다.
한 왜구에게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가고 있는 여인을 본 사성 소년은 두려움도 잊고 바위 위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대장! 엄마야! 우리 엄마야!”
“아, 안돼! 사성, 숨어!”
소년들의 외침이 엇갈렸다.
어느 사이 사성 소년의 허리를 대장이라 불렸던 소년이 휘어 감았다.
두 소년은 그대로 엉겨붙은 채 바위를 굴렀고 아차 하는 사이에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십여 장 아래 모래사장 위에 널브러진 두 소년 중 대장 소년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사성 소년은 아직도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대장! 큰일이야. 들킨 것 같아!”
대오 소년이 소녀들을 앞세워 바위 위에서 뛰어 내려오며 외쳤다.
대장 소년의 얼굴이 굳어지며
“제길!”
소리를 낸다.
“사성! 정신 차려! 너도 죽고 싶어?”
대장 소년이 별안간 사성 소년의 뺨을 몇 차례 때리며 외쳤다.
잠시 후 그들은 엉엉 울기 시작한 사성 소년과 소녀들을 앞세워 뛰기 시작한다.
백여 장쯤 떨어진 다른 바위 언덕 쪽으로 그들은 정신없이 달렸다.
그 외에는 달리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왜구들의 고함이 들려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몇 명의 왜구들이 소년들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추격하기 시작한다.
“뛰어! 뛰란 말야!”
대장 소년은 절규하듯 외친다.
그러나 다음 바위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한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널브러진다.
돌을 잘못 디뎌 발목을 다친 것이다.
“아아-아!”
“일지 누나!”
소녀의 비명과 소년들의 외침이 얽혔다.
대장 소년이 일지라는 소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나머지 소년들에게 달아나라고 외친다.
망설이던 소년들은 결국 바위 언덕 위로 올랐지만, 대장 소년과 소녀는 이미 그럴 수가 없었다.
씩씩대며 달려온 왜구들은 소녀를 발견하자 벌써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웃음과 표정, 거친 숨소리에 담긴 잔인한 탐욕을 느낀 소녀가 몸서리를 친다.
대장 소년의 이가 악물어지고 어느 사이 땅바닥에서 돌을 하나 쥔 채 소녀 앞을 막아선다.
그 모양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왜구들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비웃음을 던지며 낄낄대는 왜구들을 노려보며 대장 소년이 외친다.
“사성, 대오. 빨리 달아나! 돌아오면 용서하지 않을 테다. 돌아오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왜구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대장 소년은 돌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준다.
“칙쇼!”
한 왜구가 달려든 것과 대장 소년이 움켜쥐고 있던 돌을 놈에게 던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억! 하는 비명과 함께, 달려들던 왜구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소년이 던진 주먹만 한 돌덩이가 정확히 놈의 이마를 깨트린 것이다. 나머지 왜구들이 무어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대장 소년은 눈을 감지 않았다. 이어 자신의 전신이 난도질될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던 왜구들 주위로 몇 줄기의 섬광이 교차하는 것을 본 소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다음 순간, 일곱 명, 여덟 명의 왜구들이 거의 동시에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대장 소년의 멍한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이미 검을 검집에 넣고 있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소년보다 조금 클 정도의 왜소한 체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보여 준 무서운 검법에 대장 소년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 날, 소년은 생전 처음으로 무림 고수의 수법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그 충격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대, 대장!”
언덕 위에서 다른 소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두 소년이 뛰어내려왔다. 사성 소년은 자그마한 어린 소녀를 안고 있었다.
“대장! 일지 누나! 무사한 거지?”
“너희들……”
“도망갈 수 없었어. 우리들끼리 도망갈 수 없었어.”
“이, 이 녀석들……”
소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다섯 소년 소녀들이 울음을 멈춘 것은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 때문이었다.
“왜구들이 감히 중원에서 살인한다는 얘긴 들었지만… 직접 보니 상당히 불쾌한 걸?”
분노가 담긴, 그러나 믿기지 않게 맑은 음성이었다. 소년 소녀들이 고개를 돌린 곳에 서 있는 사내. 순간적으로 미모의 여인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용모의 사내가 혀를 차고 있었다. 왜구들을 베어 대장 소년을 구해냈던 노인은 그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에게 포권하며 보고했다.
“마을엔 혈랑소대를 급파했습니다만… 조금 늦지 않았나 합니다.”
노인의 말처럼 이미 다른 왜구들은 도살과 약탈을 마치고 철수해 있었다. 혈랑소대라 불리운 자들이 돌아와 하는 보고대로라면 그야말로 완벽한 전멸이었다. 총 21가구, 98명의 와용촌 주민들 중 생존자는 그들 다섯 명의 아이들뿐이었다.
“모두 죽었어… 모두……”
사성 소년이 넋을 잃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녀들은 아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불길을 노려보고 섰던 대장 소년의 입술이 움찔거리다가 몇 마디의 말을 토해냈다.
“…갚아준다… 또, 똑같이… 똑같이 해 줄 테다.”
작은 해안마을 소년이 그 마을을 태우는 불길보다 더 짙은 분노의 불길을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도와줄까?”
소년이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별다른 표정이 없는 사내가 잔잔한 시선을 소년에게 보내고 있었다.
“으, 은공?”
새삼스럽게 바라본 그 신비한 분위기의 남자. 그의 손에 들려 펼쳐진 부채에는 피처럼 붉은 부처상이 새겨져 있었다. 부채의 붉은 부처상 너머로,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너, 맘에 든다. 하겠다면… 도와주지. 복수할 수 있는 힘, 강한 무공을 원한다면 내가 주마. 이 독각와룡 진하운이.”
우연히 남해의 외진 어촌에 들렀다가 소년들을 구해 준 강호의 실력자와, 왜구에 대한 원한에 사무친 소년의 뜨거운 시선이 만나고……
영화식 마무리라면 갑자기 웅장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며 소년의 앞날을 예고하듯 몰아치는 광풍에 머리칼과 옷자락이 멋있게 날리는 그런 장면… 뭐, 대충 그런 상황이 남해오신룡의 탄생 순간이었던 것이다.
말로는 지가 준다고 해놓고는 실제로 이들을 가르친 건 대장 소년, 아니… 그때나 지금이나 다섯 명 중 짱인 정권을 구해주었던 노인이었다고 한다. 그 노인의 이름은 남해마옹 고학사.
현 비화곡 9대 장로 중 두 명인 비화쌍선의 사형이며, 현재로서는 전대마인으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5년 전 노환으로 은퇴하였다고 들었는데, 실은 원판의 명령에 따라 이들을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저런 사연을 얘기할 때의 표정이나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남해오신룡에게 있어 원판에 대한 감정은 비화곡 주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았다. 목숨을 구해준 데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니, 이들이 원판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사실 내 생각에는 원판이 그 마을에 들른 건 순전히 마을 이름이 자기 명호와 비슷해서였을 것 같다. 와용촌…? 나도 와룡인데…?라면서 말이다. 뭐, 그건 그렇다고 해도 원판 녀석, 무슨 변덕이었을까?
사람을 구해 주지를 않나 무공을 익히도록 도와주지를 않나… 그때 원판 녀석 뭐 잘못 먹은 상태였나? 녀석 타입이 별로 상관도 없는 아이들을 구해 줄… 음, 아이들… 소녀…? 다섯 명 중 당시 열세 살, 여섯 살 소녀가 두 명, 일지라는 소녀는 지금의 미모로 보아 어렸을 때도 미소녀였을 것이다.
“음… 내가 그때 말이야. 너희들과 얼마나 같이 지냈었…더라?”
식사를 마치자마자, 조금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묻자, 역시 정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은공께선 따로 급한 일이 계시다 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셨습니다. 한 사나흘 정도…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종소 저 아이를 친절히 보살펴 주셔서, 부모를 잃은 종소가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셨으니 그 또한 감사하고 있습니다.”
종소를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고…? 일지도 아니고 종소를…? 에이~ 설마, 아무리 원판이 로리왕변태라도 당시 여섯 살짜리를 어쩌겠어.
“종소, 넌 항상 은공을 다시 만나고 싶다 하더니 막상 뵈니 계속 숨어만 있구나. 이리 나오렴.”
정권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불렀지만, 종소는 그 인형처럼 깜찍한 얼굴을 붉힌 채 여전히 일지의 뒤에 숨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현재 나이는 열한 살일 텐데, 발육 부진인지 나이보다 두어 살은 더 어려 보인다.
원판과는 전혀 다른 이유, 즉 나는 정말 순수한 이유로 아이들을 좋아한다. 길 가다가도 귀여운 꼬마들을 보면 괜히 뭐라도 맛난 거 사 주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지곤 했는데, 종소를 보면 부대로 면회 온 큰누나 뒤를 따라왔던 수줍음 많은 조카아이가 떠오른다.
한창 수줍어하는 아이에게는 손을 내밀어 봤자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종소, 저 아이와 친해지려면 시간 깨나 걸릴 것 같은데… 앞으로 같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을 테니 좀 아쉽군.
“곡주님, 척후에서 들어온 보고입니다.”
갑자기 달려온 소교의 표정이 조금 굳어있었다. 제기, 얼마간 편하게 잘 왔다 싶더니 결국 또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