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21화
“현재까지의 이동 속도로 한 시진(時辰,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작은 촌락(村落)이 발견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좋은 소식이 아니다. 현재까지 우리 일행의 평균 이동 속도가 시속 30km 정도 되니까,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는 건데, 우리 취사하는 사이에 척후병은 참 멀리도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인가(人家)입니다만, 현재 그곳에 수상한 자들이 다수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수상하다는 건, 아무래도 정의의 협객 같아 보이더라는 얘기겠지만… 하여간 우리로써는 적의 매복이 발견되었다는 거다. 적과 마주치는 일 자체는 당황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적 병력의 규모와 수준이었다.
“화산파로 보이는 고수들이 십여 명, 종남파(終南派)와 개방(丐幇)으로 여겨지는 거지들도 비슷한 숫자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평범한 촌민(村民)으로 보기 어려운 자들이 최소한 이삼십은 된다 합니다.”
“…평범한 촌민이 있기는 하데?”
“아, 그건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곧 촌민들의 동태를 포함하여 더 정확한 사항을 조사토록 하겠습니다.”
“에, 내 말은……”
쳇, 촌락이라고 불릴 정도의 작은 마을에 5-60명의 강호인이 우글거린다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아냐, 보고된 거나 마저 말해봐.”
“정확한 것은 아니나 개방은 사결(四結) 제자가 수장인 듯하며, 다른 방파에도 그 이상의 고수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척후 2조를 직접 침투시킨다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됐다. 일단 대기시키고 1조 아이들이나 내가 먼저 지시한 대로 움직이라고 해.”
“존명!”
으흠— 역시 저 소교 녀석도 이번 혈의승 사건 이후 태도가 많이 굳어 있는 것 같다. 비화곡주 호위담당 비연대(飛燕隊) 수석무사(首席武士)의 공식적인 자세로써야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무지 예민한 나에게는 그게 느껴진다.
사실… 성승 정도의 초고수가 맘먹고 납치하려 들었다면 녀석들의 무공으로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고, 굳이 책임소재를 따지자면 대교와 야후 장로가 먼저 추궁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누구든 그 일로 씹을 마음이 없는 나로서는 자매들이 혈의승에게 납치되어 인질로 이용되었던 일 자체를 언급하지 않기로 했고, 비공식적으로는 대교에게 동생들 너무 야단치지 말라고 따로 말해주기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그때부터 매일 저희들끼리 북쪽 어딘가에서 처절한 자아비판(?)이라도 하는 건지 녀석들 셋 모두 초기의 ‘원판 극악 섬김 모드’로 돌아가 있어서 좀 씁쓸하다.
에효…! 내가 긴급 보고를 받고 있는 지금도 한쪽에서 지 혼자 술병을 기울이고 있는 저 야후 장로의 넉살을 자매들이 조금만 닮았어도……
어쨌거나, 보고된 대로의 인원이면 분명히 적지 않은 규모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천하의 극악서생을 노리는 목적을 가진 병력치고는 오히려 너무 조촐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척후병의 안목으로 판별하지 못한 고수가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일단 보고된 것만으로 상황을 분석해 보자.
말 그대로 조촐한 병력이라는 사실은 아직 내 행로가 모든 적의 레이다에 걸린 건 아니라는 추정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우연히 그 정도 병력이 길목에 배치되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결국 날 치려고 나선 자들 중 일부가 내 행로에 대해 유력한 소스를 얻어서 꼬여든…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유력한 소스라면 나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던 대교 일행의 이동 경로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것 때문일 테고… 일단 가까운 곳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면 조만간 얼마 전에 만났던 영기진인 일행 정도의 초고수들이 나타날 가능성도 높다는 생각이 든다.
음… 결국, 전투력 만땅의 특수부대에서 냄새 맡기 전에 일반 보병들이 주둔하고 있는 초소를 후다닥 깨버린 후 목적지로 달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건데, 그렇게 하자면 당연히 적병,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착한 편(?) 사람들을 사뿐히 즈려밟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도 적도 피해가 적게 하거나 아예 희생자가 없는 방법… 그걸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저희들이 거들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대빵룡 정권… 눈치도 빠르지. 무심결에 내 시선이 자신들에게 머무르는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포권하며 나선 것이다. 이번 일에 남해오신룡을 이용한다면 확실히 수월하게 처리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과연 저 녀석들을 써도 좋은지 망설여진다.
“…그래, 아무래도 한 번 더 너희들 도움을 받아야겠다. 특히 종소가 특기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한데… 할 수 있겠니?”
내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작은 인형 종소는 또 언니인 일지의 뒤로 숨어버렸다. 정말 저 아이를 믿어도 될까 싶어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문득 일지(종소와 비교하면 잰 바비 인형 수준이다.)가 비스듬히 상체를 숙였다. 종소, 저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할 말이 생기면 일지의 치마 단을 살짝 당겨 신호하는 모양이었고, 그러면 저렇게 일지가 몸을 낮추어 종소에게 귀를 가져다 대는 것이다. 지네 형제자매가 아닌 사람들 앞에서는 일지 뒤로 숨는 것도 그렇지만 혼자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못하는) 성격도 웬지 녀석과 너무 잘 어울려서 몽몽에게 음성 증폭을 시키지 않고 기다려 보았다.
종소가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말을 들은 일지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몸을 세웠다.
“독각소아룡의 명호를 걸고 자신 있다 합니다. 후훗~! 종소가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인 것은 처음입니다.”
해설까지 곁들여진 것이 불만인 종소가 언니의 등에 투정 섞인 주먹질을 한 모양이지만, 키득대고 웃고 있는 것은 다른 오빠 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참 독특한 적극성(?)이지만 하여간 자신 있다니 믿어 보기로 하자. 아무리 강호의 소문이 과장되기 마련이라도, 종소도 최소한 고무줄 놀이로 ‘독각(毒角)’이란 명호를 획득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좋아. 하지만… 난 역시 너희들을 비화곡의 틀에 구속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지금부터 내 지시대로 하되, 결코 그 이상을 도모하지는 마.”
녀석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얌전히 경청하고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 내 입에서, 일이 끝나면 그대로 떠나 최소한 1년 이상 나와 비화곡을 찾지도 말라는 말이 나오자, 다들 미간을 좁히며 불만 어린 표정이 되었다. 예상대로 정권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명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은공에 대한 세간의 평에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뭐, 그걸 더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거야. 가능하면 어린 시절의 인연도 잊어. 그리고 현재 너희들의 눈과 귀로 나와 사마외도에 대해 더 보고 듣고… 그러고도 오고 싶으면 오도록 해. 그땐 받아주지.”
결국 정권이 깊숙이 상체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으로 내 뜻을 받아들이자, 다른 아이들도 저희들끼리 한 번씩 시선을 교환하고는 별 말 없이 손을 모아 일제히 인사를 해왔다. 종소가 가장 불만이 많은 눈치였지만 여전히 쭈뼛거리다가 끝내 아무런 표현을 하지는 못했다.
홍콩배우 정이건을 닮아 부드럽고 침착한 인상의 협룡 정권. 역시 홍콩배우 곽부성을 닮아 날카로우면서도 빼어난 미소년인 교룡(蛟龍) 대오. 이 놈이야말로 비화곡스럽다 싶은 강호동 체구와 얼굴에, 거기다 헤어스타일까지 깍두기 머리인 철룡(鐵龍) 사성. 오래 전 실수로 종소의 독을 뒤집어썼을 때 머리가 금발로 변해버렸다는, 그래서인지 더 중국판 바비 인형 같은 미소녀 미룡 일지. 오신룡의 마스코트 격인 왕수줍움쟁이 소아룡 종소… 며칠 같이 있지도 못했지만 웬지 정이 가는 다섯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공연히 기분이 묘해진다.
멀어지기 전에 뒤를 돌아본 종소가 그 작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인 것 같았는데… 웬일로 몽몽이 시키지도 않은 중계 방송을 해주었다.
[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보중(保重)하소서…라고 했습니다. ]
고 녀석, 말투는 생각보다 노숙한가 보군 그래.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잘 꼬드겨서 목소리를 좀 들어봐야겠다. 훗-! 흑주의 음성을 듣고 나니까 새로운 의문의 음성이 나타난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