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1부 – 125화


삼태자 조명환 나으리가 반가운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얘기를 통해, 나는 그가 류혼을 앞세워 내가 진하연이었을 때의 행적을 계속 추적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추적은 우리 일행이 탄 배가 비인사기의 습격을 받고 가라앉은 시점까지 계속되었고, 집요한 주인을 닮은 성격의 류혼은 끝내 생존자인 모용세가와 무림맹 사람들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거기서 조명환은 모용사랑을 통해 진하연이 (어쨌든 나.) 세외의 대한특공가 출신이며 강호에 온 것은 오라버니(이 것도 ME.)와 약혼자(또 我.)를 찾기 위함이라는 정통한(?) 정보까지 얻었던 것이다.

“진공자. 어서 진소저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시오.
그리고… 그 약혼자…라는 남자는 누굽니까. 아직, 살, 아, 있, 기, 는 합니까?”

빌어먹을 놈!
내 원래 몸이 죽으라고 아예 고사를 지내지 그러냐…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았으나 아아~ 권력 앞에서 비굴한 자여, 그대 이름은 진유준.

“그 약혼자 말인데…요. 어려서 정혼을 시키기는 했지만… 남자가 워낙 방랑벽이 있어서 난 별로……”

“오-! 현재 유일한 혈육이며 보호자이신 진공자께서… 아니, 이제부터 형님이라 부르겠소이다. 형님! 형님께서 잘 말씀해 주시면 동생 된 입장에서 진소저가 어찌 고집을 부리겠소. 하하핫~! 이 조명환! 비록 형님과 태생이 다르다 하나, 영웅 호걸은 난 곳을 가리지 않는다 했소이다. 앞으로 이 아우에게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생긴 거 답지 않게 아부를 떠는 모습이 심히 불쾌했지만…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던 나는 얌전히 조명환의 형님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으… 앞으로 일이 어찌 되려는지 모르겠다.

그날 저녁, 나와 조예린은 예비 사돈끼리(?)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오라버니께 모두 들으셨겠지만……”

조예린은 특유의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고, 난 현재 강호에서는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그들의 사연을 들을 수가 있었다.

예상대로 신수성녀 조예린은 본래 조명환의 여동생이었고 당연하게도 이 나라의 PRINCESS (황제의 딸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황제인 형이하학적 관계의 주체를 뜻하는 명칭. 몽몽표 전자 한영 사전 참조.)이다. 집안 빵빵하고, 몸매 늘씬에 얼굴 이쁜 것도 모자라 똑똑하고 심지어 성격 좋기까지! 한 그녀는 그야말로 완벽한 킹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흠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원판 극악과 같은 약점… 즉,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원판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허약 체질인데다 이름도 비슷한 지병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전문용어(?)만 보면 원판보다 한 술 더 뜨는 천형칠음절맥(天刑七陰切脈)이라나? 내게 상세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다행히 당시 황실의 어의(御醫)였던 천수성자(天手聖者) 덕분에 원판처럼 남의 피를 뽑아 먹는 짓 같은 걸 하지 않았어도 오늘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충격을 먹은 건 서로에게 한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 만큼 일란성 쌍둥이, 혹은 거울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서로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닮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특이 질병에 의해 핏기가 사라진 대신에 남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하고 고운 피부와 그 위에 수술 칼로 조각한 듯 날카롭고 섬세한 이목구비와 신체의 선… 전체적으로 인간에서 조금 벗어난 듯한 미모가 바로 닮은 꼴이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원판은 두 눈에 은은하게 붉은 빛이 서려 있어 요사스럽다는 느낌을 주지만 조예린의 눈동자는 공들여 닦은 거울처럼 맑게 빛을 반사한다는 것 정도……?

이 닮은 꼴 남녀는 걸어온 운명의 길도 유사성이 있는데, 그건 그들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이비인지 진짜인지 모를 승려나 도사(道師)라는 점이었다. 원판은 혈불(血佛)이라는 자에게 배운 온갖 주술로 육체 교환을 노리다가 졸지에 내게 육체를 빼앗기는(?) 사고를 당하여 현재 나도 누구도 알 길 없는 곳으로 영혼이 사라져버렸고, 조예린은 그녀의 아버지인 황제가 당시 총애하던 도술사의 말에 따라 아기였던 그녀를 황실에서 내보내는 바람에 본래의 신분으로 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음… 그래도 당근, 조예린이 원판보다는 많이 나은 운명인 셈이다. 아직 말짱한 자기 영혼이고 황실에서 나온 것도 보기 싫다고 쫓겨난 것이 아니라 천형칠음절맥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만…이라는 조건을 달고 나온, 소위 ‘액땜’을 위해 황족의 신분을 놓고 지내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의 병을 연구하고 치료하느라 짱 박혀 있다가 가끔 강호에 등장할 때 이 배를 포함한 엄청난 재물을 동원하여 무료 의료 활동을 벌일 수 있는 것도 모두 황실의 지원이었던 것이다.
암튼… 그런 이유로 난 어느 정도, 조예린은 엄청 많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식한 말로, 동병상련(同病相憐)!

다음 사연은… 조명환!

황제에게는 여자가 많고 당근 자식들도 많다. 당금 황제는 미신을 잘 믿는데다가 성격이 우유부단한 사람인 듯, 그 많은 자식들을 놓고 누굴 태자로 삼을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하다가… 처음엔 본처에게 아들이 없어서 세 번째인가의 후궁이 낳은 큰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는데, 그 직후 본처로부터 아들을 얻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고민을 하다가, 하다가… 결국 본처의 아들을 두 번째 태자로 책봉했다.
근데, 세월이 좀 지나면서 보니까 가장 아름답고 여자다워 자신이 오래도록 총애한 아홉 번째 후궁의 아들이 너무나 잘났다고 황실 곳곳에 소문이 짜-하고, 자기가 봐도 하는 짓이 이게 내 아들인가 싶게 훌륭해 보였던 것이다.
결국… 그 잘난 아홉 번째 후궁의 아들인 조명환을 세 번째 태자로 삼아 버렸다.

한 나라에 무슨 후계자가 세 명이나 되냐는 말들은 현 황제의 건강이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최근 몇 년 전부터인데… 당근, 현재 황실은 세 명의 태자를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져 난리가 아니라고 한다. 가장 잘났다는 조명환의 상태를 봐서는 대체 다른 태자들은 어떤 수준인가 궁금해지는데, 조명환의 말이나 전에 얼핏 들었던 소문을 근거로 하면 현재 막내인 삼태자 조명환 추종자들의 세력이 가장 강한 것 같았다.
남의 나라 태자들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조명환의 형들은 좀 찐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아니, 그 부분은 내가 너무 편견을 가지고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명환이 나름대로의 애절한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렇지 다른 행동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가만 보면 사내답고 리더십이 강한 스타일인 것도 같다. 음… 이건 또 내 매제(?) 지망생이라고 너무 좋게 본 걸까?

…에효, 티타임이 끝나고 밤늦게 내게 배정된 선실에 누워있자니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에효, 내 팔자야! 하필이면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가 내 분신인 진하연의 남편 후보라니…”

다시 여장을 하고 조명환 앞에서 곰살을 떠느니 차라리 칼을 물고 싶지만, 그렇다고 현 상황에서 진하연의 존재를 간단히 폐기 처분하기도 어렵다. 아까 조명환의 분위기로 보아 지금 와서 ‘조명환에게 사실 진하연은 그 강물에 빠져 죽었어’라고 했다가는

“얼른 살려내지 않으면 너도 죽어!”

라며 미쳐 날뛸 것 같았고, 심지어 “그럼 니가 대신해(?)”라는 끔찍한 반응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두려운 것이다.

일단 내 동생(말할 때마다 엄청 짜증난다) 진하연은 큰 부상을 입어 모처에서 요양 중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있지도 않은 여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엄청 집요하게 조를 것이 분명한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지…

“음… 차라리 내가 선수쳐서 그의 친동생인 신수성녀를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떨까, 흐흐… 그럼 먼저 사돈지간이 되니까 녀석도 할 수 없이… 아, 아니다. 겹사돈이란 것도 있다.”

으… 그보다 내가 왜 이러지?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금방 배신 때릴 생각을 하다니, 대교야 미안해~!

음… 으음… 으으… 심란해 죽겠는데 흑주 넌 왜 침상 옆에 와서 귀신처럼 내려다보고 난리냐. 에효, 주인의 상태가 영 아닌 것 같아서 걱정해 주는 모양이다.

훗… 그래도 첨 보았을 때보다 흑주가 갈수록 인간적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음, 내가 이 세계를 떠나기 전에 꼭 흑주를 제대(?)시켜 주어서 그 후엔 흑주도 자신의 인생을 찾아 나섰으면 좋겠다.

“그래 흑주야. 꺼꾸로 매달려도… 음, 넌 본래 그거 잘한다는 거 안다만 하여간 그래도 비화곡 국방부 시계는 간다. 못난 주인이지만 그 때까진 잘 지켜 줬으면 좋겠고 그렇게 버티다 보면 화려한 제대의 날이… 음…? 버틴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난 조명환 문제를 너무 길게 봤구나.”

내가 이 시대에 언제까지고 있어야 한다면 몰라도 미래 여자 싸가지, ‘진’이 데리러 올 몇 년만 잘 버티면 되는 거였다.

“가만있자… 그 때는 최후로 여장을 한 상태에서 조명환에게 ‘난 사실은 천상 옥황상제의 딸인 천녀(天女)였어요’라는 개뻥을 친 다음, 곧바로 전에 진이 그랬던 것처럼 조명환의 눈앞에서 섬광과 함께 사라져 버리면… 그렇게 하면 뒤탈도 없겠지? 지가 설마 하늘을 상대로 날뛸 거야, 뭐야?”

후후훗~! 됐다. 대책 마련을 위한 나 홀로 작전 회의 끝났다.

“후… 이젠 내일을 위해 자자… 흑주도 굳 나잇~!”

신수성녀 조예린의 전용선 백아에 탑승하여 항해를 시작한 지도 어언 6일 째. 강을 타고 가는 것이 육로보다 오히려 상당히 도는 거라 처음엔 걱정을 좀 하기도 했지만 중국인의 널널한 시간 관념을 생각하면 대결 장소에 지각할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이 시대에의 한국이나 일본도 그럴 것 같지만 중국인들, 특히 무협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끼리의 약속 장면을 보면 아래와 같이 좀 심한 경우가 많다.

“강호인 A: 허허허~ B대협. 오늘 우리가 이렇게 친교를 맺었으니 다음에는 내 반드시 신야성으로 김대협을 만나러 가리다.”

“강호인 B: 음왓하~! 내 그 때까지 천하의 명주를 창고 가득 쌓아 두리다. 꼭 오시구려. B대협!”

“강호인 A: 그럼, 내년 중추절(中秋節, 8월 절, 8월 15일 추석.)을 전후해서 봅시다.”

“강호인 B: 좋소이다. 아주 좋소이다.”

이런 식인데, 추석 전후 며칠이라는 시간 개념도 웃기지만 장소도 그 넓은 성안의 어디라는 말이 없다. 근데도 그게 약속 내용의 다인 것이다. 강호인 A 입장에서는 대충 날짜가 되었을 때 신야성에 도착해 강호인 B가 어디 사는 지 물어 보고 다니면 되겠지만 강호인 B는 중추절 전 후 최소 일주일은 자신이 사는 곳을 벗어나지 않고 마냥 손가락 빨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호인 A가 마냥 유리한 건 아니다. 강호인 B가 별로 유명하지 않을 경우 강호인 A도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격으로 고생 좀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지내며 보니 실제로는 나름대로 머리들을 써서 위의 예처럼 항상 버벅대며 약속 지키러 다니는 건 아닌 듯했지만… 하여간 시간 개념이 우리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한 건 사실이었다.

이번 대교와 장청란의 대결 약속도 비슷했다. 내가 장청란 측과 한 번 서신 교환을 하는데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렸었는데, 그 쪽이 말한 ‘6개월 후의 비무’라는 것이 내가 그 쪽의 편지 받은 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 내가 보낸 답장을 그들이 받은 날부터인지를 언급하는 사람이 없어 처음엔 당황했었다. 그 후 이런 저런 편법으로 주변의 의견을 알아보았더니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비무일은 3월 ‘쯤’.

음… 지금이 3월 15일 오전이고, 한 시진 정도면 약속장소인 목야평이 보이기 시작할 거라고 했으니까, 내 나름대로는 약속 일에 가장 정확하게 도착하는 셈이다.

“후… 이 배를 타고 온 6일 동안도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시대에 무슨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신수성녀의 백아를 타고 목야평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이 어찌나 빨리 전달이 되었는지 배가 가는 곳곳에 우리 쪽 사마외도인들이 모여 있다가 환호성을 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건 정파 쪽도 만만치 않아서 툭하면 강가에 나타나 조예린에게는 정중히 인사한다거나 넙죽 절을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게는 조용히 싸아~늘한 시선을 보내거나 욕을 퍼붓는 몰상식한 정파인도 있었다.

뭐… 그런 경우들이야 그냥 봐줄 만했는데, 처음 탑승하던 날처럼 툭하면 지들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것이 골치였다. 결국 신수성녀 친위대인 12명의 청년 고수들과 우리 측 혈월이 뭐 빠지게 바빴다. 패싸움을 벌이는 자들에게 신수성녀의 전언,

“제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주세요.”

와 내 전언,

“쓸데없이 쌈 박질 하면 주-우-거!”

를 전하느라 말이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비화곡을 떠난 후 이토록 맘 편히 여행을 한 건 처음이라 그 전까지의 노력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조예린은 환자들을 돌보는 와중에도 짬짬이 나와 티타임을 가지며 의학에 대해 의견 주고받기를 원했는데 나는 몽몽의 도움을 받아서 적당히 대꾸해주며 천하제일미와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첨엔 엄청 부담이었던 조명환도 일단 진하연이 살아 있다는 믿을 만한(?) 소식을 듣고 나서는 여유가 생겼는지 그리 조르

지는 않았고 오히려 내 비위를 맞춰 주는데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이거 잘 만 다루면 떠나기 전까지 요긴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차츰 들고 있다.

“후후~! 유력한 차기 황제의 빽이라… 어쩌면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 어쨌든 이제 얼마 후면 드디어 지금까지 대교와 내가 준비해왔던 일의 성과를 확인하는 자리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까 공연히 가슴속의 심장이 바빠지는 것 같다.

“좋아, 좋다구 진유준. 비록 내가 직접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내 손으로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우리 대교가 내 대신 싸우는 거니 마찬가지이다. 자, 화이팅, 진유준! 화이팅, 대교!”

3월 17일.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팔 개월하고도 일주일째의 날. 나는 지금 최초 떨어졌던 장소로부터 1000리 행군을 두 번 연속해야 도착할 만한 곳에 위치한 목야평(沐野平)이라는 곳에 와 있다. 형주 지방에서 장강 하류를 따라 100여 리 정도 이어져있는 평야지대에 붙여진 명칭 목야평은 수 백년 전 ‘패도광협(刀狂俠) 유운일’이라는 사나이가 당시 사마외도의 최강으로 꼽히던 ‘사마지존(邪魔至尊) 현무’를 꺽으며 강호를 뒤흔들었다는 전설의 장소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길이 100여 리, 폭 20여 리 정도의 공터에 갈대밭보다 장강이 실어 나른 황토 흙이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잠시 후 대교와 장청란이 대결할 비무대(比武臺)는 장강으로부터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에 설치되어 있는데 대형 뮤지컬 무대로써도 좋을 정도의 넓이였다. 해남파와 무림맹의 무사들로 이루어진 정파의 진행 요원 격인 자들이 비무대 동쪽 구역을, 현재 야후 장로의 아들이 주인이라는 천살막(天殺幕)의 살수들이 서쪽 구역을 맡아 각각 주변의 사람들을 통제 관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난리굿을 생각하면 오늘까지 중원 각지에서 몰려들어 비무대 주변을 메우고 있는 저 많은 정파의 고수들과 사마외도의 고수들이 얌전히 진행 요원들의 통제를 따르고 있는 것이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역시 천살막에서 제작했다는 사마외도의 고위급 인사들 전용 관람석의 중앙인데 비무대보다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라 관람 자체가 무척 용이할 것 같았다. 반대편에도 우리 쪽과 비슷한 높이의 정파 인사들 관람석이 있었고 거기엔 물론 소림사의 고승들과 무림맹주, 각파의 문주나 그에 준하는 원로들이 앉아 있었다. 근데 처음 이 곳에 도착하여 서로 인사를 나눌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소림사에서 배분이 높은 고승이라는 승려들을 비롯해 현재 정파를 이끌고 있다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직접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는 모습이 재미있다.

경험이 적은 정파의 젊은 고수들, 무엇보다 전에 직접 원판을 겪어 보지 못했던 자들은 날 만나도 그렇게까지 쫄 진 않고 오히려 적개심을 불태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지금 건너편의 원로들처럼 전에 한 번이라도 원판과 전쟁을 치뤄 본 사람들은 원판과 눈만 마주쳐도 자신들의 속마음을 들킨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훗~!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청정한 수행으로 유명한 고승들까지 저러는 걸 보니 좀 우습군.

그리고… 쳇, 저 자식 장명…! 말단이라도 그런 자리에 앉아있게 되니까 지도 꽤나 출세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지?

“흥, 이 추악한 돼지녀석아, 넌 지금 거기서 실실 쪼개고 있을 때가 좋은 거다. 나도 무슨 대단한 여성 옹호론자는 못되지만, 넌 그냥 상식 선에서 봐도 같은 남자들을 망신시키는 Dog새끼라고 생각한다. 구월화를 대신해서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 테니까 각오하고 있는 것이 좋을 걸?”

음… 어떻게 된 게, 실제 대결을 앞둔 당사자 대교보다 내가 더 떨리고 긴장이 풀리질 않는 것 같았는데 장명 녀석 보면서 열 받아 하다가 긴장이 많이 풀린 것 같다.

어제 밤에도 못난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태도로 걱정하지 마시라며 잔잔히 웃어 보이던 대교… 그녀는 지금 비무대 바로 아래의 좌석에 정좌한 채 기를 가다듬고 있었다.

대교는 강적과의 대결을 코앞에 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곳에서 전설적인 무공을 펼쳐 보였던 패도광협… 자신의 이상형으로 여기는 그 기인에 대한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후… 아무래도 좋다. 오늘은 질투 같은 거 안 한다. 누굴 생각해도 좋다. 그래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상관없다. 침착하게 싸워서 이겨만 다오. 제발… 다치거나… 제기, 하여간 잘 해다오, 대교야.”

…어? 뭐, 뭐야. 나 방금 순간적으로 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 표현하긴 어렵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 목덜미로 징그러운 벌레가 스르르 기어간 것처럼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으, 뭐야 이 찝찝한 기분은?

“응? 설마, 방금 저 놈은……?”

옆에 앉아있던 야후 장로가 소리나게 중얼거려서 돌아보니 야후 장로는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우리 쪽 관중들이 모여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야후 장로.”

“아니, 아닙니다. 노부가 벌써 눈이 어두워 진 모양입니다. 그 놈이 다시 강호에 나타날 리가 없지요. 더구나 제 놈이 감히 곡주님이 계신 이 곳에 나타날 엄두를 낼 수 있겠습니까.”

“…대체 누굴 말하는 거요?”

“기억하실 겁니다. 그자는……”

야후 장로가 말을 맺지 않은 것은 고의로 내 말을 씹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때 마침 비무를 진행하는 링 아나운서 역할을 맡은 무림맹의 고수 한 명과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우리 사마외도 쪽의 고수 한 명이 동시에 비무대에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그 것은 곧 비무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어서 이번 정사간 비무의 경품(?) 역할인 두 사람, 우리측에서는 야후 장로가, 반대편에서는 장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기 전에 야후 장로는 나에게 몇 마디를 남기며 걸음을 떼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었지요. 그 놈, 사갈서생(蛇蝎書生)은……”

대회의 살아있는 경품답게 비무대 옆의 지정석으로 향하는 야후 장로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갈서생…? 그건 또 뭐야.

처음 들어 본 명호인 것 같은데도 웬지 기분이 나쁜 걸? 원판과 같은 무슨 서생…이라는 명호라서 그런가?

으음… 조금 전의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도 그렇고 야후 장로가 언급한 사갈서생이라는 인물도 웬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곰곰이 따져 보거나 조사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드디어 비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처음으로 잠깐 얼굴을 보았던 대교의 상대 냉화절소 장청란.

천하제일미의 한 사람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 꽃 같은 얼굴에 일체의 표정이 없어서 웬지 정이 가지 않았던 장청란이 기분 나쁠 정도로 매끄러운 몸놀림으로 비무대에 뛰어 올라왔다. 화천루 전통의 백의 복장이 그녀의 깔끔한 인상과 상당히 잘 어울렸지만, 역시 어딘지 너무 차가웠다. 그에 반해 일견 평범한 회의(灰衣)의 대교에게서는 봄바람처럼 따스함이 느껴진다고 하면… 역시 편견인 걸까?

난 다시 잔득 긴장하면서 오른 손의 손가락을 움직여 허공의 가상마우스 화살표를 실시간 시청각 터보 모드 메뉴 위에 올려놓았다. 이 곳까지 오는 동안 오늘을 위해 매일 꾸준히 단련해 왔다. 혈의승 사건 때 망가져 놔서 조금 불안한 감은 있지만 그저께 내가 세운 기록은 최소한 부작용으로 15분 연속 사용. 오늘은 한계까지 사용하여 장청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을 각오였다.

“…어쩌시겠소. 어서 결정하시오.”

…뭐야, 저 링 아나운서인지 심판인지 비무 전에 대교에게 뭔 말을 하는 거며 대교는 또 왜 내 쪽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하는 거야?

“곡주님! 이거……!”

아, 이런. 난 대교가 자신의 면포를 살짝 들어 보이고서야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다. 난 대교에게 면포를 벗으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녀는 그 동안 대유화 행세를 하느라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포를 시원스럽게 벗어 던졌다. 주변 관중들로부터 탄성이 터져 나왔다. 베일에 싸여 있던 대교의 미모가 잠시 관중들을 웅성거리게 했고 노골적으로 장청란과 대교의 미모를 비교하는 소리를 내는 자들도 있었다.

대교와 내 입장에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현재 이 곳에서 대유화가 바로 대교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한 사람… 야후 장로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놀라는 표정… 그러나 이내 알겠다는 듯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기, 사람 마음이란 것이 참 간사하다. 쓰잘데기 없는 걸로 다투기도 하고 특유의 넉살이 얄밉기도 했던 노인네가 이 순간 내게는 가장 믿음직한 동료로 느껴지고 있었다.

대교가 정체를 드러내며 일어난 작은 소동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장청란이 먼저 움직였다. 두 발이 약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싶은 순간 이미 장청란은 환영처럼 대교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게도 익숙한 월하무주흔(月下無走痕)이라는 경공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장청란의 검이 벼락처럼 대교의 머리 위로 내리 꽂혔다.

기습을 당한 대교는 재빨리 몸을 틀며 옆으로 피했지만 장청란은 대교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 따라 붙으며 연달아 몇 번을 베었다. 가는 은빛의 섬광이 세 번 허공을 달렸고 그 것은 반쯤 뽑혀진 청명검의 광채와 부딪친 후 허공으로 괘적을 바꿨다.

그 후에야 대교는 전부 모습을 드러낸 청명검을 비스듬히 든 채 세 걸음 정도 물러나 자세를 바로 했다. 장청란은 첫 번째 공격 이후, 마치 가벼운 잽을 날려 본 권투 선수처럼 제자리에 서서 여유롭게 검 끝을 자신의 발치로 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보고 있는 나와 대교가 거의 동시에 이를 악물며 장청란을 노려보았다. 장청란의 침묵 속에 ‘어때, 할 만한 거 같아?’라는 비웃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대교는 한 쪽 무릎을 굽힌 낮은 자세에서 불연 듯 무릎을 펴고 서더니 장청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좀 전의 장청란과 대조적으로 느릿느릿하기만 걸음이었지만 장청란은 발을 떼지 못한 채 대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교의 검이 그냥 의미 없이 내밀어지듯 스스슥- 장청란의 목 줄기로 찔러졌다. 그 느릿한 찌르기를 하기 위해 장청란은 다급한 몸놀림으로 상체를 틀었다. 그러나 이미 씨악-!하는 냉기 띤 소리와 함께 장청란의 옆 머리칼이 몇 올 잘려져 나간 후였다.

화천루의 대표적인 상승 경공 월하무주흔과 눈부신 쾌검으로 상대가 검을 뽑을 틈도 없이 한 차례 몰아 붙였던 장청란과 반대로 느려 보이지만 빈틈없이 상대를 압박하는 잠종보(潛踪步)를 밟으며 다가가 요하만검(曜 慢劍)이라는 역시 느려 보이지만 빠른 변화를 숨기고 있는 초식으로 반격에 성공한 대교… 두 아름답지만 강한 소녀들의 시선이 차츰 불꽃을 튀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이번엔 약속이나 한 듯 둘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새어나왔고 비슷한 순간에 검이 춤추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쨍-! 쨍-!하는 유리잔 부딪치는 것 같은 맑은 소리가 거의 일정하게 울리고 있는 가운데 두 소녀는 수십 합의 공방을 교환하고 있었다.

팽팽한 균형을 먼저 깬 것은 대교였다. 상대의 검을 청명검의 검집으로 막으며 반 박자 정도를 획득한 대교의 검이 지금까지 보다 조금 느리게 대각선으로 그어 내렸다.

대교의 검이 장청란을 포함한 허공에 섬세한 균열을 일으킴과 동시에 장청란은 재빨리 몸을 날려 피했고, 그 직후 좌아악-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서 있던 바닥에 검흔이 파여졌다. 그 것이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었다.

두 소녀의 검은 그 전까지보다 느려지고 무거워 보이거나 때때로 과장되게 큰 괘적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바닥이 목재로 된 비무대 여기 저기 패이거나 아예 부서져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무대를 이루고 있던 파편이 허공에 흩날리는 범위가 커져가자 비무대 주위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차츰 뒷걸음질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내 앞을 지키던 소령이와 미령이가 번갈아 가며 내 쪽으로 날아드는 파편과 검기의 여파를 막아내느라 분주했고 지금까지 긴장하며 지켜보던 대결 장면이 자꾸 소령이나 미령이에게 가려지곤 하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전에 대교가 가상의 장청란과 대결하는 걸 볼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 거리면 괜찮을 줄 알았더니… 제기! 나야 정확히 모르니까 그렇다 치고 천살막 녀석들, 좀 아는 놈들이면 아는 놈들답게 특등석을 아예 멀찍이 지어 놓을 것이지…

쳇, 신경이 분산되기 시작하니까 내 오른 쪽에 앉아 있는 두 사람, 현재 비화곡 본단 소속은 아니지만 마도의 원로격인 ‘귀박자(鬼剝者) 저인오’라는 노마인과 중견급이지만 굉장한 실력자라는 ‘파해신조(破海神爪) 와호강’, 두 마도인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음… 과연 마봉후 님의 전인이로군. 화천루주와 저 정도로 호각을 이룰 줄이야.”

“…방금 시전된 건 마봉후님의 독문절기인 요하진천뢰(曜 震天雷)가 아닙니까!”

“잘 보았네. 뇌검자 님의 뇌전일식 못지 않다는 그… 흠, 이보게 자네는 저 대결의 향방을 어떻게 점치고 있는가.”

“글쎄요. 비록 지금은 마봉낭자가 선전하고 있긴 합니다만… 화천루주가 아직 보따리를 다 풀어놓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하군요.”

“내 생각도 그래. 이번 대의 화천루주는 월형신공의 끝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으음……”

이런, 썅~! 대교가 점점 불리해 질 거라는 얘기잖아. 이봐들, 꼭 그렇다고 볼 수만은… 음? 뭐지…? 제기, 옆에 신경 쓰다가 조금 전 장면 못 봤다. 왜 갑자기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한 거지?

“아니! 서, 설마 방금 마봉낭자가 시전한 것은……?”

“마, 맞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 패도광협의 독문 절기인 삼시전결(三矢電訣)……!”

“틀림없어. 오오~ 설마 마봉낭자는 패도광협의 ‘생사 금마도결’마저 얻었단 말인가?”

음… 대교가 생사금마도결을 펼쳤던 모양이군. 하지만 그건 본래 도법이라 검법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지 입으로 그랬었잖아. 사람들은 패도광협의 무공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설마, 대교가 벌써 밑천이 다 떨어진 거 아닐까? 그리 익숙치도 않은 도법을 써야 할 만큼? 으… 안되겠다.

“소교, 동생들과 날 따라와!”

난 터보모드를 일시 중단하고 특별 관람석에서 뛰어 내려왔다. 돌발적인 내 행동에 놀란 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끄고…! 난 비무대로부터 좀 더 멀리 떨어진 관람 포인트를 잡기 위해 황급히 달렸고, 살아있는 신(정확히는 악마?)이 나타나자 성경의 기적처럼 좌악 좌우로 벌어지는 사마외도의 인파들 사이를 통과해 나갔다. 소교 자매들은 아직 무리라지만 흑주는 내가 말하는 걸 대교에게 전음으로 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저 실제의 장청란을 분석하여 대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텐데… 우쒸~! 비겁한 짓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대교가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은가. 장청란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아, 아니,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저런 상태에서 전음을 보내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다. 저렇게 격렬한 싸움 와중에 전음을 들었다고 해서 바로 적용할 수 있을까? 오히려 정신이 산만해져 안 좋은 결과를 낳으면 어쩌지? 으… 이 등신, 머저리 같은 진유준, 이놈아! 이제와서 네가 버벅대면 어쩌자는 거냐! 정신차리자, 정신! 작전 타임… 그래, 일단 어떻게 든 비무를 중지시키면 여유가 생길지 모르겠다. 으… 그렇지만 어떻게? 어떤 방법이 있지? 흑주나 누굴 비무대로 올라가 깽판 치라고 해? 제기! 그건 지려고 작정한 짓이고! 으아~ 차라리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졌으면 좋겠다아~!

꽈쾅~!

…응? 정말… 벼락이… 떨어졌다……?

“곡주님, 위험합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앉아 있던 특별 관람석이 원인 모를 폭발로 박살이 나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를 소교 자매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자빠트려 버렸다.

“으와, 윽~! 야, 뭐 하는 거야, 너희들! 야, 야아~ 어깨, 어깨에~!”

날 보호하겠다는 의도겠지만 세 명에게 동시에 깔려 버린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고 그제서야 자매들이 황망한 얼굴로 내 위에서 비켜났다. 난 어깨의 상처가 다시 터졌겠다는 생각에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지만, 우쒸-! 아무래도 어깨 상처 정도는 문제가 아닌 분위기다. 그 많은 인파들, 다들 나름대로는 한 칼 하는 무림인들이 시장 통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중간 중간으로 연이어 폭발이 일어나며 흙 파편과 사람이 함께 하늘로 솟구친다. …미치겠군. 설마 여기와 2차 대전쯤 되는 장소의 시간대가 겹쳐지기라도 한 거야? 뜬금없이 이 무슨 전쟁 상황이란 말이냐.

“화포인 것 같습니다. 그 것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굉천포(轟天砲)가 아닌가 합니다.”

[폭발력과 추정 발사 지점의 거리로 보아 이 시대, 원거리 포의 평균 성능의 50% 이상을 발휘하는 병기가 현 지역을 공격 중입니다. 추정 발사 지점의 위치는……]

소교와 몽몽이 동시에 지껄이는데, 전에 비인사기들이 배에서 쐈던 대포보다 강력한 것 같은 포탄들이 사방에서 작렬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아참. 대교, 대교는?

“곡주님~! 무사하십니까?”

내가 주변을 살피려고 했을 때, 저 쪽에서 대교가 먼저 우리들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비, 비무는……?”

“무사하신 겁니까?”

“난 괜찮아, 너는?”

“어디 봐요. 정말 괜찮으신… 아아~ 너희들은 뭐하고 있었던 거니? 응?”

대교는 내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동생들에게 한 소리 하며 날 부축해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때, 허공에 붉은 경고 표시가 떠오르며 몽몽의 기계음이 빠르게 울려왔다.

[위험! 포착되었음! 위험! 포착되었음!]

“모두 피햇-!”

피하라고 고함을 지른 건 나였지만 재빨리 나를 감싸안으며 동시에 몸을 던진 건 대교와 흑주였다.

우리가 몸을 날려 피한 직후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무서운 굉음이 귓속, 아니 전신을 강타했다. 이어 무수한 흙 조각들이 우리들의 몸 위로 우박처럼 부어졌다. 아득해 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평야의 저 편으로 무성한 갈대밭이 보였다.

몽몽이 굳이 화살표로 알려주지 않아도 그 갈대밭의 사이에 시커먼 포대가 눈에 띄였는데 얼핏 봐도 열대 가까이 되는 숫자가 연이어 불을 뿜고 있었다.

융단 폭격이라니, 이 시대에 이래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을 접하며 터보모드를 재 가동 시켰다.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정확히 볼 정도는 아니더라도 순간적으로 어디 떨어질지 파악하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근데… 저 자식은 대체 뭐야. 지금 포격을 지휘하고 있는 저 녀석. 생긴 건 꼭 쥐새끼 같이 생겨 가지고 왜 이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깽판 인 거지? 가만, 설마 저 녀석……

“곡주님, 흑주님과 함께 피하십시오. 저와 동생들이 막아 보겠습니다.”

“그만 둬. 저길 봐.”

내가 가리킨 것은 지금도 포격을 계속하고 있는 굉천포 포대를 향해 정파와 뒤섞여 구성된 용감한 무사들이 일제히 돌진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곳곳에서 굉음과 함께 솟아오르는 불꽃과 포연, 냉동 피자 치즈처럼 흩어지는 인간의 살점과 팔다리, 벽에 던져진 붉은 과일 같은 머리들……

“세상에, 땅속에도 지저포(地底砲, 지뢰?)를 설치해 놓은 모양입니다. 아…! 도대체 누가 이런 가공한 짓을 벌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궁금하다. 난 단지 공격할 사람들 많으니까 너희들까지 위험한 일에 나서지 말라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빌어먹을.

“강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교의 의견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자 흑주가 대뜸 등을 내밀었다. 제기… 쪽팔리지만 하는 수 없었다. 현재 내 몸으로는 전체적인 기동력을 저하시킬 뿐일 테니 말이다.

“뛰어욧-!”

대교의 신호에 맞추어 동시에 출발한 우리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강물을 향해 달렸다. 포탄은 강물 부근에 더 많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일단 도착만 하면 물 속이 훨씬 더 안전할 것 같았다.

다만… 아직 군인으로써의 감정이 남아있어서일까?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흑주의 등에 업혀 가는 기분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러웠다. 이 와중에도 코 속으로 스미는 화약냄새가 반가운 것은 군대가 더럽다 더럽다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특공병이라면 진짜 전쟁을 치뤄 봐야만 진정한 특공병의 면모가 갖추어 질 것이라는 치기에 사로잡혀있던 시절의 습성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물 속에 뛰어드는 즉시 상류로 헤엄쳐가! 그럼 거기 신수성녀의 백아가 있을 거야!”

“존명~!”

달리면서 잘도 대답들을 한다. 하여간 좋아, 가자~!

[ 위험! 위험! 위험! 위험! ]

쿠웡-!

웃, 우와악-!

…쿠웡…? 물 속에서… 포탄이 터지면 그런 소리가 나는… 건가? 아니면… 아아… 흑주… 대교… 모두 어디로 간 거지…? 아니 모두 살아는 있는 걸까…? 물 속에 뛰어드는 순간… 바로 근처의 물 속으로 포탄이… 떨어진 것… 같고… 모두… 어디에… 제기… 눈앞에 물… 황토색… 뿌옇게… 흐린 물 속……

[ …긴급 생명 유지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기도 강제 폐쇄 유지 중. 각 장기 활동 응급 제어 중. 인체 자체 방어력 상승을 위한 가사 상태로 변환 중…… ]

아아아……

“지겨워…….”

그렇게 말했다. 근데… 내가 한 말 맞는 건가?

“진짜… 지겨워.”

음, 내가 한 말. 내가 머물고 있는 육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 현재 내 기분을 달리 뭐라 표현할 것인가. 나 진유준, 지금까지 미친 듯 술 마시고 뻗어 버린 적은 많았어도 외부 충격에 기절 따위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근데 이 세계에 와서는 툭하면 이러는 데 정말이지 지,겨,워 미치겠다. 애초에 엄한 여자가 시간 여행하는데 부록으로 딸려온 처지도 스팀받는 판국에 뻑하면 졸도해서 시간을 날려먹으니, 이게 무슨 팔자인지 모르겠다.

으… 이번엔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이며 여긴 대체 어디인 걸까? 현재 자동으로 조금 떠진 눈에 보이는 건 흐릿하고 흔들리는 조명과 서늘해 보이는 빛깔의 돌 바닥… 어째 낯이 익은 기분이 드는 건… 그래. 비화곡 성지의 동굴 벽과 닮았군.

“으…음…곡…주님……!”

나른하던 눈꺼풀과 고개가 전자동으로 철컥 위로 올려졌다.

“어… 대교야. 나 여기 있어. 너 괜찮니?”

“으음… …아, 여, 여긴……?”

“그게… 나도 모르겠다. 나도 조금 전에 깨어난 데다 보시다시피 너와 비슷한 처지라 말야.”

애써 가볍게 말해 보았지만 그 정도로 이제 막 깨어난 대교의 표정을 밝게 하기는 무리인 듯 싶다.

하긴,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으슥한 동굴 속 석실에 결박당한 채 갇혀 있는 처지가 되어있는데 누군들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나도 사실 대교 못지 않게 우울함의 폭풍우를 맞고 있는 심정이라 딴 때 같으면 좀 신경질 적이 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대교를 의식해서 그런지 기분이 남다르다.

한 편으로는 현재 혈도가 잡혀 있는 상태라 무공을 쓸 수 없는 대교 앞에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 줘야겠다는 의욕도 일고… 하여간 힘내자, 진유준.

난 우선 몽몽에게 상황 보고를 듣고 대책을 마련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불행히도 그 전에 세 명의 사내들이 석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두 명은 각각 검고 흰 면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한 명은 맨 얼굴에 서생 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젠장, 몸 풀기도 전에 링에 오르게 되는 건가?

“후후후~ 이제 깨어 나셨습니까, 위대한 비화곡의 주인이시여.”

느물거리는 말투의 이 놈은 아주 낯선 놈이 아니다.

아까 굉천포인지 뭔지로 포격을 가할 때 지휘하던 놈이었는데, 살점이 없는 얼굴에 매우 작고 둥근 두 눈… 거기다 앞니가 튀어 나와 있어 쥐를 닮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굉천포로 비무장을 난장판 만들던 그 새끼였고, 아무래도 야후 장로가 말한 ‘사갈 서생’과 동일인인 듯 싶다.

“넌 알겠는데, 다른 두 사람은 대체 누구지? 누구기 에 이렇게 간들이 큰 것일까?”

현재 전혀 그런 여건이 아니지만 종 울리자마자 롱 훅 날리는 기분으로 큰 소리 한번 쳐봤다.

어디 반응을 좀 볼까?

“우린 그리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검은 면포의 남자, 가성(?聲) 사용.」

흠… 얼굴을 가린 데다 가성까지 쓴다 이거지?

그러고 보니 애초에 힘도 없는 나나 혈도를 잡힌 상태인 대교까지 철저하게 결박해 놓았다는 건 그만큼 우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가?

비화곡의 주인에게 이 정도로 근본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면 사마외도에 소속된 인물들이 아닐까?

“당신이 비록 전 사마외도의 주인이라 하나, 오늘은 운이 없었소. 순순히 운명을 받아 드리시오.”

흰 면포 남자도 가성이었다.

“무슨 운명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구체적으로 한 번 말해 봐.”

“그, 그건… 당신 비화곡주,는, 우리에게 한 가지 무공을 알려 주어야겠소.”

피식피식 웃으며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니 면포 남자들은 둘 다 쭈볏거리는 기색이 있었고 비화곡주라는 말을 할 때 조금 버벅댔다.

확실하군. 이 두 녀석 비화곡 영향력의 아래다.

“흠… 생사금마도결 말인가? 그 딴 걸 어디다 쓰게?”

“무슨 말이오. 생사금마도결은 도를 든 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호오~ 그러니까 자네도 도를 쓰는 자라 이거지?”

자신이 실언 한 걸 깨닫고 입을 다물어 버린 검은 면포 남자는 물론이고 흰 면포도 동요의 기색이 역력했다.

말이 없던 대교도 눈치를 챘는지 표독스런 음성으로 외쳤다.

“흥! 이제 보니 당신들은 몰염치한 배신자들이었군요. 어서 곡주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세요!”

저런 소리에도 반박을 못하는 걸 보니, 순간적으로 최강의 무공에 눈이 뒤집혀 짱에게 손을 대긴 했는데 역시 미친 짓이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흠, 이 자들은 그냥 가벼운 말빨 잽으로도 해결될 수도 있겠는걸?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 쥐새끼로군. 아주 큰 쥐새끼.

“후,후,후… 과연 그런 처지에 떨어져도 극악서생은 극악서생이라는 거군.”

나와 두 면포 사내들과의 대화를 들으며 빙글빙글 웃고 있던 쥐새끼… 네 명호는 사갈서생이라고?

그런 아류작이 원판을 어쩌겠다는 거냐, 응?

“어쨌든 실망이로군요. 당신들 두 사람의 배짱이 고작 이 정도였다니… 그러려면 지금이라도 저 위대한 분께 무릎 꿇고 용서를 빌지 그래요?”

“다, 닥쳐라, 사갈서생. 우린… 우린 다만 이 동굴에 남겨진 진전이 아까워…….”

“쓸모 없는 자들…! 지금 당장 죽어 버려.”

“뭣이? 무슨 헛소리를… 헉, 으으욱!”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둘 다 제법 내공 수치가 높은 고수들이었는데 제대로 반응도 못 해보고 목을 움켜쥔 채 털썩 주저앉더니만 입으로 검붉은 피를 푸아악 뿜어내며 쓰러져 버렸다.

면포에 적셔지고도 남은 핏방울들이 내 바지의 일부에 튀어 붙었다.

“후후후- 어떻습니까. 저도 당신처럼 무공을 쓰지 못하고 힘도 약하지요. 그리고 당신 못지 않게 사람도 잘 죽이지요.”

전쟁도 아닌데 무수한 사람들을 폭격으로 살상해대던 목야평에서도 그렇고, 이 인간 아무래도 싸이코다.

쥐 중에서도 가장 징그러운 시궁쥐를 닮은 두 눈이 지금 기묘한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목야평에서 내가 느꼈던 그 불길하고 불쾌했던 기분은 이 싸이코가 근처에서 날 노리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헌데, 10년 전 당신은 이런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그건 나도 별일이라고 생각된다.

둘이 단짝 콤비로 어울릴 것 같은데……

“후훗~! 지금도 이렇게 내게 경멸을 담은 시선을 주고있고…

내가 아직도 당신보다 덜 사악해서 인가요?

목야평에 쌓인 시체 정도로는 당신의 마음이 흡족해 지지 않나요?”

우쒸! 이거 지금 자기가 극악 추종자라는 건지 철천지 웬수라는 건지 모르겠다.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해도 미친놈에게 뭔 소리를 해야 할지 원.

“그럼… 이건 어때요. 당신이 꽤 아끼는 계집 같은 데…

어떻게 망가트려 보일까요?

알다시피 난 미녀의 피부를 벗기는 걸 좋아하지만,

당신처럼 이 하얀 목에서 샘솟는 피를 마셔 보는 것도…….”

“이 새끼, 너 죽고싶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내 반응에 사갈서생은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이거, 이거 뜻밖이군요. 이 계집이 그렇게 대단해요?”

“…닥치고. 한 가지 물을 테니 대답이나 해봐.”

“말씀하시지요.”

“너 누구냐?”

“무슨…….”

“난 네가 누군지 몰라. 쥐새끼 같은 게 아까부터 왜 자꾸 친한 척이야. 재수없게.”

나도 맘먹으면 사람 속 후벼파는 말은 좀 한다.

어떤 식이 되었든 원판에 대한 감정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기분이 어떠셔?

우두둑-!

…이런, 좀 심하게 후벼팠나?

지 손으로 지 부채를 꺽더니만 그 부러진 날카로운 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긁고 있다.

“아-핫! 그거… 진심인가요?”

자해로 한 쪽 볼을 피투성이로 물들이며 되묻는 사갈서생…

너 실수 한 거야. 원판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 진유준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류가 바로

지가 지 몸 자해하는 너 같은 놈이란 말이다.

“훗~! 혼자 잘 노는군. 하지만 역시 보기 싫어. 이 만 내가 끝내주지.”

“끝내 준다고…? 지금 그 상태의 당신이?”

“내 상태가 뭐 어때서.”

사갈서생의 그 작은 눈이 조금은 더 커지고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 사이 몰래 몽몽을 이용해 끊어 놓았던 밧줄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쓸모 없을 뿐 아니라… 배신까지……?”

사갈서생은 독살당한 두 면포 사나이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헛소리하지마, 새꺄! 배신은 네가 한 거잖아.

그래서 넌 안 되는 거야. 대교! 눈감아!”

대교는 재빨리 내 명령을 따랐고 나는 몽몽 이용 사상 최초의 ‘전투 명령’을 내렸다.

“가능한 한 많은 혈도 봉쇄!”

“뭐, 뭐야, 이건… 으으으~.”

뭐 긴 뭐냐 몽몽의 촉수 공격이다.

몽몽의 촉수는 사실 좀 약해서 무공 조금만 하는 사람에게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누가 스스로 동료 고수들을 죽이래 이 놈아.

“이…이건 요괴? 당신 요괴술까지 익혔구나!”

사갈서생은 허공을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몽몽의 촉수들을 향해 정신 없이 팔을 휘둘렀지만

이내 몇 군데의 혈을 촉수에 찔리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휴우- 됐다. 쥐새끼 사냥 성공!

그 때, 원판의 아류인지 라이벌인지 모를 사이코 변태 살인마 사갈서생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나는

곧 대교의 혈도도 풀어주었고 다시 자유의 몸이 된 우린 얼싸안고 한참을 기뻐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지금… 우린 아직도 이 동굴에 남아 있다.

본래 사갈서생을 잡고 나서는 바로 이 곳을 떠나 우릴 찾고있을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했겠지만

사갈서생에게 독살당한 자들의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우린 먼저 동굴의 모든 석실을 샅샅이 조사해보기로 했었다.

그리고 우린 세 번째의 이 석실에서 지금 내가 내려다 보고있는 기록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었다.

기록지는 애초 은근히 기대했던 무공기서는 아니었지만 대교나 나로서는 꽤나 반가운 기록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명한 어떤 남녀의 일기문, 혹은 회고문이라고 해야할까?

300년이 넘게 흘렀건만 아직도 유명한 이 커플은 다름 아닌 패도광협 유운일과

아미파의 청명신니(淸明神尼)였다.

패도광협의 독문절기와 청명신니의 청명검을 한 몸에 지니고있는 대교가

그 두 사람이 노년의 마지막을 보냈다고 여겨지는 이 동굴에 오게 된 건 그녀와 선대의 질긴 인연이랄지,

아니면 무협지식 기연의 연속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암튼 대교는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장청란과의 재 비무에 대한 부담감을 잊을 정도로

선대 커플의 회고록에 푹 빠져 버렸고 그 사이 나는 몽몽과 함께 나머지 석실을 조사해 진짜 무협지다운(?) 기연을 발견해 냈다.

그 것은 처음 우리가 이 동굴로 납치되어왔을 때 묶여져 있던 석실에서 발견되었는데,

역시 어떤 무공기서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석실자체 즉, 석실의 바닥과 벽 천장 등이 바로 무공기서라고 할 수 있었다.

추측컨데, 이 금실 좋은 노 커플께서는 당시 패도광협과 친분이 있었던 비화곡주의 도움을 받아

비화곡의 지하성지에서 조용한 노후를 보내다가, 말년에는 다시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졌는지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 동굴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동굴을 조금 손보아 마지막 보금자리로 삼은 노 커플은 결국 동굴의 한 석실(총 세 개의 석실 중 남은 하나.)에서

여생을 마치게 되는 데, 그 전까지 과거를 회상하며 이런 저런 회고록을 쓴다거나

자신들의 무공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석실에 새겨져있는 것은 글로 무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직접 무공을 펼쳐 보이며 생긴 흔적들이었고

중간중간 새겨져 있는 글들은 상대방의 무공을 칭찬하는 말이라던가 새로운 깨달음을 그 때 그 때 메모 식으로 남겨 놓은 것이었다.

사갈서생에게 독살 당한 두 면포인(아직 이름도 모른다.)은 아마도 우연히 동굴을 발견하고는 패도광협의 최후 은둔지라는 것을 알게 되자 엄청 흥분하여 생사금마도결을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석실에 새겨져 있는 몇몇 글들과 무공이 펼쳐진 흔적만(그것도 어떤 건 일부, 어떤 건 아예 새로운 것.)을 가지고 생사금마도결을 재현해 내는 일이 그들에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언제 처음 발견했는지 몰라도 계속 아쉬움을 안고 지내던 그들은 비무장에서 대교가 생사금마도결을 펼치는 것을 보고는 대교와 나(대교 매니저니까.)라면 이 동굴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음, 이들과 사갈서생의 기본적인 관계라던가 불확실한 건 많았지만 최소한 그 두 사람이 우리의 납치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대충 위와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암튼, 불운했던 그들과 달리 난 슈퍼울트라칩 그 자체인 미래 로봇 몽몽의 사용자이다. 몽몽은 강력한 스캔 능력으로 석실 벽에 펼쳐진 인위적인 무공 흔적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조리 찾아낼 수 있었고, 거기다가 전에 이미 생사금마도결의 원본이 입력되어 있기에 그걸 바탕으로 무공 흔적을 실제의 모습으로 재현해 내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일종의 ‘버그 패치’라 할 수 있는 노 커플의 메모도 참조하고… 흠, 말은 쉬워도 이게 보통 작업은 아니었다. 잘 나가는 우리 몽몽도 업그레이드 및 버그 패치까지 끝낸 ‘생사금마도결 최종판’을 내놓는데는 자그마치 이 틀이나 걸렸던 것이다.

그 후로 한 일주일 정도는 나도 바빴다. 대교에게 생사금마도결 최종판을 전수해 주고 그녀의 수련에 도움이 역할을 하느라 말이다. 따지자면 기연도 참 기특한 기연인 것이, 이번 생사금마도결의 최종 업그레이드에는 본래 검법의 대가였던 청명신니가 참여한 탓인지 검법으로의 수정이 용이하고 일부는 아예 공용의 개념이 도입되어 있었다.

후우~ 대교에게 더 이상 내 도움말이 필요하지 않게 된 후 하루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난 지금 무지 심심하다. 먹거리도 흑주가 알아서 잡아오니까 사냥 다닐 필요도 없고 주변 지형이 험해서 혼자 돌아다니기도 그렇고…

음, 흑주 말인데, 녀석도 참 대단하다. 애초에 내가 그리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은 폭격 때문에 생긴 충격파를 흑주가 거의 카바한 덕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흑주도 한동안 의식을 잃은 채 강물에 떠내려갔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도 어떻게 이 동굴까지 추적해 왔는지 몰라도 동굴 생활 오일 째인가에 느닷없이 나타나 절을 하는데 무지 놀랐었다.

워낙에 한 과묵한 흑주인데다 또 억지로 목소리 내게 하는 것도 미안하고 해서 자세한 것까지는 물어볼 수 없었지만 대충 중요한 소식들은 흑주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소교와 소령, 미령이 이 세 자매는 모두 부상을 당한 모양인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고, 야후 장로는 말짱한 몸으로 행방불명 된 나와 대교의 수색 작업을 진두 지휘하고 있단다.

흑주를 통해 야후 장로와 소교 자매들에게 우리 소식을 알리면서 당분간 열심히 찾는 척만 하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장청란도 무사하다니까 느닷없이 나타난 사갈서생의 깽판으로 중단된 비무는 우리가 복귀하면 언제든 다시 재개할 수 있을 것 같고… 음, 하여간 지금 나는 달리 할 일이 없다.

지난번에 막상 실제 비무를 참관해보니 내가 아무리 현장에서 장청란의 데이터를 분석해도 그걸로 비무 중에 대교를 돕기가 막막했었다.

그래서 며칠 전 슬며시 편법을 대교에게 말해보았었다. 싸운다가 영 불리할 것 같으면 청명신니의 공공보법으로 슬슬 피하며 도움말을 들을 여유를 가지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대교는 반드시 정정당당하게 자기 실력으로 승리해 보이겠다며 자신을 믿어 달라고 엎드려 부탁을 해왔다.

음… 이런 청소년이 있는 한 비화곡의 미래는 밝다…? 하여간 덕분에 현재 나는 정말로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흑주에게 술 받아 오라고 하기도 그렇고… 에효~ 결국 또 몽몽하고 노는 수밖에 없나?

“몽몽, 너 지금까지 입력된 패도광협과 청명신니에 대한 데이터를 모두 분석해서 정리해봐. 무공 말고… 그들이 살아 온 인생에 대해서 말이야. 영화나 한 편 때려야겠다.”

나는 한참을 지난번에 총관의 일대기를 그린 ‘혈마검호’를 만들 때처럼 이런 저런 설정을 맞추어 나갔다.

근데… 막상 영화를 플레이시키는 순간이 오자 기분이 좀 그랬다.

“몽몽… 지금까지의 작업 모두 취소다.”

생각해 보니 몽몽 녀석, 지금까지 내가 본 가상 현실의 화면에서 특별히 현존하는 누굴 지정하지 않으면 여주인공의 외모는 항상 대교의 모습으로 해왔다. 녀석 나름대로의 나에 대한 배려였겠지만, 이번엔 패도광협의 상대역인 청명신니에 대교가 캐스팅된다고 생각하니 웬지 불쾌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보면 되겠지만 먼저 그런 생각을 해버리고 나니까 그것도 좀 그렇다.

제기, 그럼 뭐 하고 놀지? 여기 있는 회고록은 벌써 다 읽었고, 이 시대에 책 대여점이나 만화 가게가 있을 리도 없고… …가만있자, 이번엔 그럼 책을 아예 만들어 봐?

“몽몽, 너… 글 좀 쓰냐?”

「질문의 요지가 명확하지 않……」

“미안해. 실언이었어. 음… 그럼 거 뭐냐, 내가 살던 시대의 책에 대한 데이터… 혹시 있니?”

「정식 사용자 ‘진’이 최초 입력한 자료는 1586건입니다. 그러나 7급 데이터로 등록되었으므로 34일 전 사용자 결제 후 실시된 데이터 정리 작업에서 상위 1000건이 3패턴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참고로, 3패턴 삭제 자료 복구 요구는 2패턴 삭제 실시 전까지 허용됩니다.」

…간만에 전문 용어로 점철된 보고를 받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짜식이, 새삼스럽긴… 하여간 있다는 거지?”

별로 발전이 없는 남자, 진유준.

“에… 혹시 무협지도 있니?”

「무협지, 무협소설, 판타지, SF 자료는 총 142건입니다.」

생각보다 많군. 좋아, 좋아.

“기본 데이터는 다시 패도광협과 청명신니…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조건으로 소설을 구성하는 거다.

작성될 소설 장르는 무협소설, 문체나 문장력은 임의로 선택한 작가의 것으로 해.

소설 상에 등장하는 각종 인명이나 무공명, 사건 내용 등은 되도록 입력된 데이터를 기준으로 하되, 앞서 선택된 작가의 작법 패턴으로 임의 변경해도 좋아. 이번엔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말야. 그리고……”

그러고 보니 통신하면서 재밌는 소설을 찾아 게시판을 뒤지던 생각이 나는군.

“완성된 소설을 볼 때는 파란 바탕에 흰색 문자를 이용하고… 음, 만약 우리 시대의 통신사들의 자료가 있으면 학땔, 아니 학, 텔 통신을 ‘델타 맨’이란 프로그램으로 접속했을 때의 기본 화면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그밖에도 자잘한 설정을 더 한 후 작업 실시를 명령했다.

음… 소설 한 편 쓰는 것도 그리 쉬운 건 아닌 모양이다. 몽몽이 작업하는데 5분 정도씩이나 걸리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