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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27화 [1부 완결]


“시주… 지금 백팔나한진이라 했소?”

“그렇습니다. 소림 무예의 정화 백팔나한진, 그것이 오늘 내가 소림에 온 목적이오.”

이번엔 몽인대사가 잠시 말을 잃은 가운데 몽호대사 뒤에 서 있던 몇몇 승려들이 일갈했다.

“광오한 자. 소림을 그렇게 얕잡아 보았단 말이냐?”

그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백팔나한진… 말 그대로 백 팔 명의 나한이 펼치는, 무림 역사상 가장 완벽한 진법이 아닌가. 가뜩이나 소림이 쇠락했다는 수근거림이 만연한데 이자는 아예 혼자 백팔나한진을 상대하겠다니……

“본인을 건방지다 여기시는 분이 있다면 당장 교훈을 내려주셔도 좋겠습니다만…….”

운일은 조용하나 지극히 냉냉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일갈했던 승려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고 그 외에도 그에게 교훈을 내려준다고 섣불리 나서는 이는 없었다. 사마지존을 제압한 마두를 상대할 자신을 가진 이는 없었던 것이다.

“시주 마음을 돌리시오. 지금까지 백팔나한진이 단 한 사람에게 펼쳐진 예는 없었소. 폐사가 다수로써 시주를 핍박했다는 원망을 하게 될 것이오.”

“본인이 스스로 원한 일이니 어찌 뒤말이 있겠습니까.”

유운일이 계속 뜻을 굽히지 않자 몽인대사의 뒤에 서 있던 승려 현원이 조용히 앞으로 나선다. 그는 몽인대사에게 합장하며 허락을 구한다.

“빈승이 잠시 저 시주와 어울려 보겠습니다.”

“현원 그대가……?”

현운대사가 나서자 승려들의 웅성거림이 커진다.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 소리들이었다.

“빈승은 현원이라 하오. 시주의 광오함에 맞출 수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해 충고할까 하오.”

충고… 108인은커녕 단신인 자신을 상대해 봄으로써 어려움을 느끼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겸허하신 말씀… 소림 무공을 한 수 배우겠습니다.”

운일은 정중히 마주 합장하며 한편으로 내력을 갈무리하며 일전을 대비한다.

‘현자 항렬… 사마지존 현무와 같은 항렬의 인물이라는 얘기……’

“조심하시오, 시주.”

일견 아직 싸울 채비도 갖추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운일에게 현원이 일갈하며 신형을 날린다. 현원의 신형이 미처 운일의 가까이 가기도 전에 운일의 옷자락이 회오리라도 만난 듯 펄럭이며 수많은 권형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백보신권. 소림 무공의 대표적인 수법으로 듣긴 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위력적이로군.’

운일은 두 손을 엇갈려 돌리며 무수한 권형으로부터 급소를 보호했으나 그의 신형은 그 기세에 밀려 주르르 밀려나고 있었다. 현원은 기실 사마지존 현무 이후 소림의 최고 고수로 꼽히는 고수였다. 그의 공격을 받으며 운일은 현원의 공력이 결코 사마지존의 아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과연 소림…… 이런 자가 있었단 말이지?’

순식간에 백보신권 총 24수와 그 응용 10여 수를 펼친 현원대사는 연이어 항마수, 불법보리무변 등 소림 무공의 진수를 펼치기 시작했고 운일은 교묘한 신법으로 결정적인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일견 운일이 공격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는 듯 보였다. 주위의 관전자들은 현원이 한시도 우세를 빼앗기지 않고 있자 현원대사의 공력을 칭찬하며 기쁜 기색을 띠고 있었으나 몇몇 사람, 몽인대사와 청명신니, 전노파 등의 얼굴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 밝지 못했다.

‘얼핏 현원대사가 우세해 보이나 저자의 신법은 아직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현원대사의 공세가 점점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고수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자세히 보면 유운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여유 있는 동작으로 방어하고 있는데 반해 현원대사는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 시주… 현무를 제압했다더니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무슨 다른 의도가 있어 일부로 그러는 기색이 역력한 상대에게 현원의 평상심이 깨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상대의 공세를 파악하고 있던 운일은 상대의 그런 보이지 않는 헛점을 놓치지 않았고 별안간 역성의 수법으로 신법을 밟았다. 그의 움직임과 리듬이 일치하던 현원의 신법이 그 순간 흐트러진다. 운일의 두 발이 크게 원을 그리며 상체가 지면과 거의 비슷한 각도로 누여지더니 공중에 떠 있던 현원의 신형 밑으로 흐르듯 미끄러진다. 상대의 가장 위험한 공격 권으로 스스로 뛰어든 것이다. 반사적으로 현원의 두 발이 천근추의 수법으로 내려꽂힌다. 지켜보던 승려들의 입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짧은 순간에 12 방위를 모두 점한 채 내려 꽂히는 현원의 천근추에 운일은 어떤 방향으로도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이다. 운일의 한 발이 꺽어지며 지면을 찼다. 눈부신 속도로 그의 다른 발이 솟구치더니 허공에 각인을 새기고 있었다. 현원의 천근추와 운일의 각인은 정확히 중간에서 만난다.

쾅! 하는 벼락과도 같은 괴음과 함께 현원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분명 발과 발이, 그것도 현원은 허공에서 내려 밟는 유리한 자세였음에도 그 순간 마치 거대한 바위에 대책 없이 뛰어내린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보통의 고수였다면 그 순간 바위 위에 떨어진 계란처럼 마주친 발이 부서져 나갔겠지만 그는 역시 소림을 대표하는 고수였다. 상대가 터무니없는 잠재력을 지녔음을 느낌과 동시에 즉시 내력을 방어적으로 돌리며 운일의 기세에 편승하여 신형을 허공으로 날린 것이다. 두 사람의 내력이 합쳐진 위력을 시사하듯 현원은 대불상을 내려다볼 정도로 솟구쳐 있었고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올린 주위 관전자들은 목이 아플 정도였다. 한 순간 허공의 현원에게 집중되었던 눈들이 다음 순간 더 큰 놀라움으로 커진다.

도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한 인형이 현원보다 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신형을 가누기에 급급했던 현원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한 줄기 내력이 뻗어옴을 느끼고 대경하였으나 이미 그의 등 뒤로 강렬한 충격이 파고들고 있었다. 퍼벅 소리와 함께 현원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넋을 잃고 있던 관전자들은 미처 그를 받아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현원의 몸이 거의 땅바닥에 쳐박히려 할 때, 한 아름다운 신형이 달려와 소매바람으로 살짝 그 몸을 띄운다. 도움을 받아 간신히 신형을 가눈 현원에게 그제서야 승려들이 몰려가 부축하려 한다. 현원은 그 손들을 가볍게 뿌리치더니 두 손을 모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 있는 운일에게 합장한다.

“빈승이 졌소이다.”

“훌륭한 무공을 견식 시켜 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마주 예를 표하는 운일은 그러나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저 중을 받아낸 여승… 도대체 누구지?’

현원은 그녀에게 구해준 감사의 뜻을 표한다.

“신니의 도움에 감사 드립니다.”

청명신니는 가벼운 고개 짓으로 인사를 받으며 입을 연다.

“대사님. 이번엔 제가 한번 저 사람을 상대해 보겠어요.”

“신녀님이? 하지만 이건……”

“분명 소림에 시비를 걸어온 사람이지만… 제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몽인대사님도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현원은 당혹한 표정이 되었으나 몽인대사가 허락했다 고 하자 한번 그쪽을 바라본 후 조용히 물러난다.

“유운일이라 했나요? …내가 소림을 대신해 당신에게 교훈을 내려주겠어요.”

면포 속에서 흘러나온 음악 같은 미성을 들으며 운일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이봐. 난 여자와는 싸우기 싫어. 더구나 비구니라니……”

퉁명스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쐐액-하는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운일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틀며 한 손으로 그것을 흘려보냈다. 새하얀 백의 자락의 일부가 곡선을 그리며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주위에서 가벼운 탄성이 일었다.

옷자락에 공력을 실어 공격하는 수법은 보통 철포삼이라 통칭되며 상당한 외가기공을 연마한 고수만이 시전할 수 있는 수법이었다. 더구나 청명신니의 옷자락이 운일에게 뻗어 날아간 속도는 웬만한 고수의 암기보다도 빨랐던 것이다.

“여자라고 가볍게 봤다간 오늘 낭패를 면치 못할 거예요.”

운일은 그녀의 면포를 받아냈던 손바닥의 가볍지 않은 감각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얕보지는 않아.”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여자와 싸웠다간 집안에게 ?겨 나기 딱 좋지. 게다가 지금은 나와 소림의 문제. 이상한 여자는 좀 빠져 줬으면 좋겠군.”

“이상한 여자……?”

청명신니는 그의 무례한 말에 눈꼬리를 올린다.

“얼굴 가리고 다니는 여자가 오죽 하겠어. 남부끄럽게 생겼거나 아니면 남부끄러운 짓을 했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운일의 말에 청명신니는 격동하여 안색이 바래지며 그 곱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쩍인다. 그러나 그녀가 나서는 순간부터 모닥불에 물이 끼얹어지듯 불타는 투심을 잃은 그는 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여하간 좀 빠져 줘. 나도 바쁘다고. 빨리 백팔나한진을 견식하고 나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는데 그 기세가 극히 위맹하였다.

“당신은 백팔나한진을 영원히 보지 못할 거예요.”

그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황급히 신형을 후퇴시키며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들어 방어했다. 청명신니의 애병기로 유명한 청명검은 눈부신 광채를 발하며 그의 급소를 공격해 들어왔다.

‘제기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오히려 여자를 자극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조금 전 현원과의 대결 때와는 달리 진짜로 수세에 몰려 신법이 어지러운 운일은 그 심리상태 또한 복잡했다. 청명신니의 공세는 갈수록 치열해져 가고 있었지만 좀처럼 우세를 점하지 못하자 그녀는 더욱 모질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100여 수가 순식간에 지나가며 두 남녀의 얼굴에는 몇 방울의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계속 제기! 하는 소리를 내뱉는 유운일이나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손속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청명신니나 둘 다 사실 정상은 아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이상함(?) 알아챈 것은 청명신니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전노파 정도였다.

‘이상하다…. 신니의 동작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본래 청명신니는 유운일을 상대함으로써 알아내고자 했던 바가 있었다. 그녀가 나선 것은 그런 내용으로 전노파와 전음으로 상의를 끝마친 후였던 것이다.

‘신니의 무공이 아니면 저 패도광협이란 사내가 지닌 진짜 실력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내력을 알아내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 계획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 헌데… 저 자나 신니의 몸놀림이 어찌 저리도 부자연스러운가. 마치 억지로 싸움을 붙인 형국……’

과거 사령파파라는 이름으로 강호에 악명을 떨친 전적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아미파의 속가 제자이기도 한 이 전노파만이 그것을 눈치 챘을 뿐 주위의 관전 승려들은 두 남녀의 현란한 몸놀림에 감탄하여 넋을 잃고 있었다.

한 순간 운일이 소리친다.

“아미파! 당신 아미파 사람이지? 그렇지?”

마치 그 소리에 맞고 퉁겨지기라도 하듯 청명신니의 신형이 몇 장 밖으로 물러선다. 면포로 얼굴이 가려졌음에도 동요의 빛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제기! 난 당신과 싸우지 않겠어!”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하여간 안싸운다고. 여자와도 싸우기 싫고 아미파의 여승과는 더더욱 싫어.”

어리애가 투정하듯 씩씩거리던 운일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한다. 청명신니는 어이가 없는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전노파에게 시선을 돌린다. 전노파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청명신니는 잠시 망설인다. 대체 저 패도광협이란 사내의 태도는 무엇인가. 광오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소림승들을 압도하던 그가 갑자기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단순하고 조리 없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아미파와는 싸우기 싫다니……

“…어째서 싸우지 않겠다는 거죠? 이유가 뭐죠?”

“하, 하여간 싫다구. 어째서 당신이 끼어 드는 거야.”

“말해요. 패도광협이라 불리는 당신이 본파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내가 두려워한다고….?”

운일의 입술이 깨물어진다.

“아닌가요? 그럼 어째서 그렇게 주눅이 들어있지요?”

“착각하지 마라. 내가 계집에게 주눅이 들 것 같은가?”

이번에는 청명신니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흥! 각오해요. 이제 사정을 두지 않겠어요.”

갑자기 청명신니의 옷자락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그 주위의 지면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마치 그 한자리에만 회오리바람이 부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녀가 내력을 끌어모으는 것임을 안 주위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추린다. 그녀가 발산한 내력의 여파가 마치 한겨울 바람처럼 사방의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노파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황급히 청명신니에게 전음을 보낸다.

-신니, 안되오.

-……?

-지금 그것까지 쓰시려는 것입니까? 안됩니다.

-할 수 없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저렇게 피하는 이상……

-하지만… 신니님 너무 위험합니다.

청명신니는 지금 아미파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신공을 펼치려 하는 것이다. 천품순음지체 만이 익힐 수 있다고 알려진……!

갑자기 사람들은 쩌정! 하는, 마치 두꺼운 호수의 얼음이 울리는 듯한 음향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녀로부터 수십 장씩 떨어져 있음에도 내력이 약한 자들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추리고 있었다. 가까이 대치하고 있는 유운일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도 그녀가 지금 시전하려는 수법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 느낀 것이다.

“…이봐 여자. 무슨 짓이야.”

“흥!”

청명신니가 서릿발 같은 냉소를 흘리더니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았다.

“이번엔 당신이 어떻게 피하는지 보겠어요.”

청명신니의 신형이 한치 정도 가볍게 떠오른다. 그리고 모았던 두 손을 떼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자세로 두 팔을 양쪽으로 크게 벌린다. 그녀의 옷자락이 하늘을 향해 고드름처럼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운일의 옷자락이 그 여파에 펄럭이며 뒤로 날린다.

“제기랄-! 하지마!”

그러나 호신강기에 쌓인 운일의 몸에까지 그 차가움이 새겨지고 있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등뒤로 간다. 그녀의 한 손이 내밀어지고 냉기의 정화가 그에게 쏘아졌다. 그의 도가 몸 중앙에 세워진다 싶더니 그 냉기를 쳐낸다. 그 순간 운일은 마치 차가운 얼음 속에 손을 담근 듯한 섬찟함을 느껴야 했다. 도신에 순식간에 하얀 서리 같은 것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의 손목을 향해 덮여오기 시작한다. 아차 하는 사이에 그의 도와 그의 손목 위 팔꿈치 부근까지 하얗고 투명한 얼음이 감싸버린다. 운일의 창백해진 입술 사이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월음빙나기…….”

말하는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린다.

“여자… 천품순음지체인가?”

그가 얼어붙은 팔을 아랑곳없이 그녀를 응시하며 말하자 청명신니의 눈가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킨다. 아미파의 비전 무공을 아는 이가 강호에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가 월음빙나기를 한 눈에 알아보고 그녀의 내력까지 꿰뚫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좋아!”

운일이 늑아내듯 한마디 흘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오른팔에 덮여 있던 얼음이 쩌적 갈라지며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 오른손에 태양마공을 집중시킨 것이다. 녹인 얼음이 물이 되어 흐르는 오른팔을 들어 그녀를 도 끝으로 가리킨다.

“상대해 주지. 여자.”

“당신의 그 오만함을 깨주겠어요.”

청명신니의 주위에 다시금 한바탕 서릿발의 폭풍이 인다. 그것을 응시하며 운일의 손이, 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도형이 순식간에 그의 주위를 뒤덮더니 그녀의 냉기가 그 도막에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다. 주위 관전자들의 대부분이 본래의 위치보다 더 멀찍이 물러나 있었고 개중에는 견디지 못하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운기조식을 하는 이까지 있었다. 그들로써는 청명신니의 청명검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와 운일의 양강력이 동시에 엄습하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청명신니가 한 걸음을 앞으로 디디자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 파동이 일어나 마치 파도처럼 운일의 전신을 엄습했다. 그의 호신강기와 그 기세가 만나는 순간 허공에는 비명 같은 파열음이 일었고 운일의 신형이 주르르 뒤로 밀려나며 의복자락이 일부 찢겨져 나간다.

‘무슨 여자가……’

“여자…. 그렇게도 내게 이기고 싶나?”

청명신니의 검세에 밀려 뒷걸음치며 일갈하는 운일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청명신니의 무서운 기세에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노기에 휩싸여 있었다. 운일의 신형은 더 이상 밀리지 않고 두 다리를 기마 자세로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를 세워 자신의 눈앞까지 올려 들고는 왼손을 펴 그 손바닥으로 오른손과 도신을 함께 받치고 있다. 그런 자세의 운일에게서 갑자기 기묘한 기운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까지 올려진 도신에서, 아니 그의 전신에서 발산하는 기세는 확실히 기묘했다. 악의도, 투심도 느껴지지 않으나 모든 것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서려 있는 기운인 것이다.

관전하던 승려들의 입에서 하나둘 아미타불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늘의 무장들이 싸우는 모습이 이러할까? 인간인 것이 분명한 두 젊은 남녀의 대결이 이미 일반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몽인, 현원 두 고승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두 남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양편으로 벌려 있던 청명신니의 두 팔이 서서히 하나로 모아지고 그와 동시에 운일의 입이 둥글게 열리며 한 가닥 휘파람 같은 소리가 길게 뻗친다.

“모두 물러서시오.”

전노파의 고함과 함께 몰려드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승려들이 반사적으로 앞다투어 신형을 날리기 시작한다. 마치 해변가 모래톱 위의 바닷물이 물러가는 듯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청명신니의 두 손이 한데 모아지는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무형의 괴음이 거기서 일어난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으나 사람들은 그 순간 고막이 터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무수한 승려들이 두 귀를 싸안고 있었다. 이때 운일의 두 손바닥은 박수를 칠 준비를 하듯 마주 펼쳐져 있었고 그의 도가 그 사이의 작은 허공에 서 있었다. 이때 이미 운일의 주위 지면은 마치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듯 균열을 일으켜 있었다. 그 균열은 마치 잔잔한 수면 위에 한 방울의 선혈이 떨구어진 듯 둥근 파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파장의 가장자리는 청명신니의 파장과 만나 그 모양대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격돌!

두 남녀의 주위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장관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두 남녀의 검과 도가 부딪치는 격렬한 파열음만을 들을 수가 있었다. 얼마나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이들의 시선이 마치 화산이 폭발한 직후처럼 분진이 안개처럼 뭉클거리는 한곳으로 집중된다. 아직도 두 남녀의 충돌에 의한 여운과 분진으로 시야가 불분명한 바로 그곳이다. 차츰 가라앉아 가는 흙먼지를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물로 씻듯 걷어내갔다.

“안 돼-!”

갈라지고 메마른 전노파의 외마디 소리가 비명처럼 울린다. 신형과 정신이 온전한 몽인대사와 현원 등 고승들의 입에서도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비록 걸친 망토며 의복이 일부 찢겨 나가 있기는 했으나 아직 굳건히 두 발을 딛고 선 유운일과 그 정면 십여 장 밖에 쓰러져 있는 청명신니를 발견한 것이다. 전노파가 발악적으로 신형을 날려 청명신니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유운일은 납빛으로 굳어진 얼굴로 손을 들어 입가에 흘러나온 한 줄기 청명신니의 정갈한 승복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포 역시 사라져 있어 운일은 그제야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전노파의 다급한 손길이 상체를 일으키자 입과 두 콧구멍으로 붉은 선열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새하얀 눈밭 위로 피어난 붉은 수선화처럼 비감 어린 모습이었다. 운일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떼고 있었다.

“물러서시오, 시주. 이미 승부는 났소.”

현원대사가 일갈하며 운일과 청명신니 사이로 끼어 든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유운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그가 청명신니에게 더 공격을 하려는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이 악적! 신니의 혈채를 받아야겠다.”

현원대사의 뒤쪽에서 솟구친 인영은 백발이었으며 눈물에 범벅이 된 악귀 같은 형상이다. 원한이 머리끝까지 사무친 과거의 사령파파는 그렇게 일갈하며 운일의 머리 위에서 크게 손을 휘두른다. 날카롭게 꺾여진 두 손의 손가락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길었으며 그 손톱은 마치 잘 갈린 낫과도 같다. 그 열 개의 독기 어린 손톱이 유운일에게 휘둘러진 것이다. 한 걸음, 정확히 한 걸음만을 뒤로 옮기며 상체를 약간 젖히는 동작으로 운일은 그 공세를 허공으로 흘려낸다. 이어지는 전노파의 원한에 찬 공격도 계속해서 허공만을 그을 뿐이었다.

지난날 강호의 공포였던 사령파파의 독문절기인 귀혈수를 기묘한 신법으로 피해내는 운일을 보며 현원대사는 새삼스럽게 감탄한다.

“뭐 하자는 거야! 무슨 여자들이 적당히 끝낼 줄을 몰라!”

운일이 소리쳤으나 전노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광분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전노파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운일은 전노파 역시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그 역시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고 눈치 없는 현원마저 끼어 들 기세를 보고는 하는 수없이 도를 든다. 아래로 내려트려져 있던 그의 도가 들어올려지며 생사금마도결 중 제 2결 삼시전결이 펼쳐진다.

셋으로 나누어진 도기가 각기 전노파의 투로와 요혈로 번뜩였고 다음 순간 전노파의 오른손 손톱 몇 개가 잘라져 나갔으며 허무하게 뒤로 튕겨져 나가는 전노파의 어깨로 한 가닥 도흔이 새겨져 있었다.

“이 마두! 살생을 멈춰라.”

현원대사가 기어코 끼어 든다. 위력적인 항마장이 후욱! 하는 더운 공기와 함께 운일에게 덮쳐든다. 운일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어 도막을 펼쳐 방어한다. 항마장의 총 12수 중 펼쳐진 7수가 무력하게 운일의 도막에 막혀 그의 주위로 흐른다. 이어 운일의 도가 다시 움직이며 역시 생사금마도결 제 3결 폭풍진운결을 펼치자 그 흉맹한 기세에 당황한 현원대사가 황황히 신형을 날려 뒤로 물러선다.

“물러나! 여자가 죽길 바라는 건가. 당신들!”

베인 상처 주위의 혈도를 억지로 틀어막고 다시 덤벼들려 하던 전노파와 현원대사가 운일의 외침에 멈칫한다.

“뭐 하자는 거야? 진짜 이 여자가 죽어도 좋아?”

운일이 노기 띤 목소리로 외치며 성큼성큼 청명신니에게 다가가자 전노파와 현원대사의 얼굴에 설마 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운일이 쓰러져 있는 청명신니의 앞에 서더니 입술을 깨문다.

“무슨 여자가…….”

그저 잠들어 있는 듯 두 눈을 감은 채인 청명신니의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하였으며 그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이 세상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운일의 얼굴에 노기와 그리고 한없는 안쓰러움이 떠오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운일이 몸을 굽히더니 갑자기 청명신니의 신체 여기저기를 짚어나가자 일갈하며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던 전노파가 순간 동작을 멈추고 만다. 전노파의 두 눈동자가 커진다.

‘설마… 신니가 아직? 하, 하지만 아까 틀림없이 숨을 거둔 것을 확인했는데.’

그렇다. 전노파는 조금 전 청명신니의 심맥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그런데 운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혈도를 재차 짚고는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그 동작에는 치료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역시 달려들려 하던 현원대사를 막은 것은 몽인대사였다.

“장문인….?”

“…잠깐 멈추시게. 아무래도 저 시주가 신니를 더 어찌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네. 오히려 도우려 하는지도…….”

“설마 저 마두가?”

현원은 믿기 어렵다는 시선을 운일에게 보낸다.

그런 주위의 반응은 무시한 채 운일은 이미 청명신니의 상체를 일으키고 그 뒤로 돌아가 다시 몇 군데의 혈도를 점한다. 전노파가 확인한 것처럼 이미 그녀의 심맥은 가닥가닥 끊겨져 있어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지력쇄공으로 심장과 그 주위의 혈도를 봉쇄하고 그녀의 단전에 남아 있는 겨자씨 같은 내력에 자신의 내력을 보태 임시적인 응급조치를 한 그는, 그러나 난감했다. 설마 이 정도로 망가져 있을 줄이야.

‘이미 삼대 요혈이 모두 파괴되었고 내부적으로 성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독한 여자… 이 지경이 되도록 왜 그렇게……’

이쯤 되면 전설의 화타가 되살아 난다 해도 과연 되살릴 수 있을까? 반 이상, 아니 전부가 저 세상으로 들어선 상태인 것이다.

‘…그래도 살린다.’

터무니없는 오기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그는 삼 년쯤 전의 어느 날 형 유운호가 얘기해주던 한 치유법의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 나는 이 수법에 역혈사진대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역혈사진대법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신체에 내가중수법으로 시전하는 것. 또 하나는 다른 이에게 시전하는 방법이다. 먼저 명심할 것은 이 수법은 최후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타 어떤 수단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 비로소 시전해야 한다. 그만큼 위험하고 극단적인 수법이지. 너는 지금도 강하고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나 유비무환이라 했으니 이런 최후수를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운일의 이마 위로 물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청명신니의 단전에 댄 손바닥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생명의 불씨가 애처롭게 사그러드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시전하는 것이나 다른 이에게 시전하는 것도 방법은 같다. 다만 다른 이에게 하는 것은 보다 어렵고 위험하지. 그 이유는 이 대법의 시전 수순과 주입하는 내력의 조종이 대단한 정교함을 요구하기 때문. 게다가 사실 이건 자가치유법으로만 연구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시전하는 것은 그 순간이 일종의 첫 실험이 되는 셈이지. 선열을 쓰윽 문질러 닦는다.

두 눈을 감은 채 고심하던 운일은 별안간 청명신니의 머리 쪽으로 가더니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결국 마음을 굳힌 것이다. 운일은 두 손바닥을 청명신니의 등뒤에 대고 서서히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 이 대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내력을 신체 내 단 한 곳, 단전과 가까울수록 좋으나 위치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치명적인 부상이 전제된 상태이기도 하지만 이때의 내력 또한 어느 정도 인가는 크게 상관이 없다. 다만 모든 내력이 한푼의 예외 없이 모두 한 곳에 모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운일은 청명신니의 체내로 자신의 내력을 보내며 현천기공을 운용하기 시작한다. 얼마가 지나자 운일은 현천기공을 이용해 청명신니의 혈도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제어하기 시작한다.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이 적지에 있다는 것조차 잊고 두 눈마저 감은 채인 운일이 하고 있는 이 대법을 주위의 인물들이 알아보았다면 과연 반응이 어땠을까.

아마도 운일이 청명신니를 철저히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하여 일시에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가 택한 혈도는 그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사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일의 그런 행동은 모두 내가중수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전노파와 수많은 승려들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그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혈도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라도 있었다면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되고 만다. 허나 다행히 모든 과정을 끝냈다면 차츰 가사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후로는 맥박이나 모든 것이 멈추어 마치 사망한 듯 보일 것이나 실제로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치유가 진행되는 것이다.

극도의 정신집중과 적지 않은 내력을 소모한 운일은 후욱-하고 호흡을 들이킴과 동시에 청명신니에게서 손을 뗀다. 그러자 스르르 청명신니의 몸이 기울어졌고 놀란 전노파가 황급히 다가가 부축한다.

“신니……?”

어눌한 음성으로 그녀를 부르던 전노파의 얼굴이 그대에로 크게 일그러진다. 청명신니를 땅바닥에 내려놓은 전노파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한 유운일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이 악마야! 신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전노파의 일갈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 차있던 주위 인들에게 일제히 의혹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더러운… 극악한 놈… 감히 이런 수작을……!”

전노파는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으며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현원대사가 뒤이어 청명신니의 맥을 짚어보더니 흠칫 놀란다. 그리고는 그 역시 노기를 띠고 유운일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놈! 찟어 죽이리라.”

운기조식하고 있던 운일은 전노파가 소리치며 달려들자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을 살짝 들어 엄지손가락을 튕긴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쏘아진 지력은 무서운 기세로 전노파에게 뻗쳐나갔다. 전노파가 몸을 왼쪽으로 날리자 지력은 형편없이 비켜나간다. 전노파가 냉소하며 운일에게 공세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전노파의 얼굴이 의혹으로 일그러지며 굳어진다. 그리고는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지력이 놀랍게도 크게 곡선을 그려 전노파의 등뒤 혈도를 친 것이다.

“이놈… 무슨 사술을…….”

전노파의 힘없는 한마디에 이어 현원대사의 분노에 찬 일갈이 경내를 울린다.

“이 사악한 자! 시신을 이용하여 시간을 벌려 하다니…….”

가히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운일이 청명신니를 치유하는 행동을 가장하여 스스로의 내공 회복을 도모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불자라는 것을 잊을 만큼 분노해 있었다. 아직 사태를 다 이해하지 못했던 자들도 그 말에 일제히 봉을 치켜들었다. 현원은 손을 들어 다른 승려들을 저지하고는 하늘에 대고 외친다.

“이 현원이 오늘 살계를 여는 것을 용서하소서.”

주위의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운일은 급히 현천기공의 운용을 중지한다.

‘곤란하게 되는군. 아직 그녀가 깨어나려면 멀었는데, 어떻게 든 설명을…….’

그러나 이때 이미 현원은 내력을 극도로 끌어 올려 그에게 일장을 날리고 있었다. 유상보법으로 그 일장을 슬쩍 피하며 운일이 소리친다.

“진정하시오. 이건 오해요.”

“이미 사태가 명백하거늘 무슨 헛소리냐?”

냉냉하게 대꾸한 현원은 어느새 나한승들이 들고 있던 봉을 건네받아 천간폭이라는 봉법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설명을 해주겠소. 그녀는 지금 죽은 것이 아니니 곧 깨어나게 될 거요.”

“끝까지 변명이냐. 이 간교한 자.”

어쩐지 낮이 익은 투로로 현원의 봉이 파고든다. 순식간에 36방위를 모두 점하는 고도의 공세였다. 그렇게 유연한 말솜씨를 가진 운일도 아니었지만 변명이든 설명이든 할 틈이 주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격렬하게 파고드는 봉끝을 피하고 막아내던 운일의 신법이 문득 어지러워진다.

‘빌어먹을… 기혈이 들끓기 시작한다.’

청명신니와의 격전으로 입은 내상이 생각보다 심했던 것이다. 게다가 역혈사진대법을 시전하느라 적지 않은 내력을 더 소모했고 운기조식마저 방해받은 상태에서 현원 같은 고수의 공세를 받게된 것이다. 그가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안 현원의 봉이 더욱 날카롭게 파고든다. 아차하는 순간에 운일은 오른쪽 어깨를 가격당했고 이어지는 공세에 가슴에까지 타격을 받는다. 일반인 같으면 뼈가 산산이 부서지고도 남을 공격이었고 운일의 몸도 그 힘에 몇 장 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런 운일의 입에서 한 모금 선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주위 승려들이 가벼운 환호성을 울린다.

현원은 그에게 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급히 신형을 날려 따라붙으며 제마불장을 펼친다. 말 그대로 불장으로 마귀를 없앤다는 의미를 가진 무서운 수법이 최악의 상태인 운일에게 퍼부어진 것이다.

“크윽-!”

운일이 둔탁한 비명과 함께 다시 저 멀리 나뒹군다. 연옥도를 나선 이후 그의 입에서 나온 최초의 비명이었다. 호흡을 고르는 현원대사의 10여 장정도 앞에 운일의 몸이 비참하게 널부러져 있었다. 혈도가 풀리자마자 싸움에 끼어들려던 전노파는 현원대사가 압도적으로 유운일을 쓰러트리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고 섰다가 운일이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서야 청명신니의 곁에 무릎을 꿇고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장문인의 부탁을 받고 청명신니를 어릴 때부터 키워온 그녀였기에 서로의 정은 친 모녀와 같았다.

잔뜩 긴장하고 굳어있던 수많은 승려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아직도 쓰러져있는 유운일에게 감히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검붉은 선열을 뿌리고 쓰러져있으나 그전에 그가 보여준 가공할 무공에 공포를 느끼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원대사가 봉을 내려들고 천천히 운일에게 걸음을 뗀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자신이 격노하여 가혹한 수를 쓴 것에 불자로서의 가책을 느끼며 나직이 불호를 외던 현원이 문득 걸음을 멈춘다.

고개를 땅에 박은 채 쓰러져 있는 운일을 보는 그의 눈이 조금씩 커지며 경악과 불신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서, 설마……?’

사냥 당한 짐승처럼 쓰러져 있던 운일에게서 갑자기 놀라운 기가 폭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꿈틀대던 움직임은 이미 멈추어져 있었고 몇 호흡의 순간이 더 지나자 그 기공의 영향으로 운일의 주위에 자그마한 파편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현원은 황망히 몇 걸음을 물러선다.

“이, 이건…? 믿을 수가 없…….”

현원대사가 그렇게 떨리는 음성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하자 사람들은 다시 쓰러진 운일에게 눈을 돌린다. 그리고 하얗게 탈색되는 그들의 얼굴에 그려진 것은 숨김없는 원색의 공포, 그것이었다.

“나 유운일… 어리석었다.”

엎드린 자세의 운일에게서 흘러나온 음성은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으며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배어있다.

“…어리석고… 한심한…….”

운일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그때까지 쥐고 있던 도를 땅바닥에 거꾸로 세운다. 그리고는 그것을 지팡이 삼아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싸움을 걸러온 놈이…….”

이제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된 운일의 고개는 아직 숙여져 있었고 산발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내려트려져 있어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한심한… 짓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으켜지는 그의 몸 전신에서 점점 더 거세게 폭사되고 있는 불길하고 소름끼치는 기운에 어느덧 경내는 얼어붙은 듯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숙여진 그의 고개 밑에서 토막토막 단절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지옥을 뛰쳐나온 악귀의 그것처럼 음산한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다. 제마불장에 이미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상했을 것이니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거늘 어찌 저런 기도를 뿜어낼 수 있단 말인가’

위인 됨이 깊이가 있던 현원대사도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각오하는 게 좋아.”

말과 동시에 그는 오른팔을 들어 도가 땅을 향해 비스듬히 내려트려지게 하며 가슴 위까지 올린다.

그 작은 몸놀림에 수많은 소림승들이 거의 동시에 흠칫하며 숨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길한 예감을 현실로 바꾸어주는 도광이 번득였다.

그리고 다음순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도광이 몇 장 밖 현원대사의 어깨를 관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흐윽-!”

번개가 번쩍인 이후에야 천둥소리가 따르는 것처럼 현원대사의 비명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선혈은 그 다음이었다.

현원대사가 바람에 날리듯 힘없이 비틀거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뭍 소림승들은 전율과 함께 정신을 차린다. 그때 한 신형이 날며 일갈한다.

“마두! 손을 멈춰라!”

몽호라는 법호의 노승이었다.

말보다 먼저 그의 손끝에서 쏘아지는 것이 있었다. 화살보다도 날카롭고 빠르게 유운일에게 날아드는 것이 족히 수십 개는 되었고, 운일은 흥! 하는 비웃음을 흘리며 도를 들어 한 번 허공을 훑었다.

일견 빠르지도, 정교해 보이지도 않는 그 휘두름에 날아들던 수십 개의 조그만 물체들이 힘을 잃고 투두둑! 땅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만다.

콩알 크기의 새까맣고 둥근 쇠 구슬이었다.

몽호대사는 자신이 여의탄수법으로 10성 공력을 실어 날린 염주알들이 운일의 도막에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는 대경하여 같은 수를 다시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급히 다른 손을 들어 일장을 날린다. 그러자 운일은 오히려 갑자기 그 일장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몽호대사는 현 소림장문인 몽인대사의 동문으로 그 무공의 절륜함이 손꼽히는 이였다.

그런 몽호대사의 일장이었으나 이미 운일은 신형을 허공에서 한 번 비틀어 그 장력을 피했고 그로서 그의 왼쪽 어깨 옷자락만이 한 번 펄럭였을 뿐이었다.

어느 사이 그의 신형은 몽호대사의 바로 코앞이었다.

신형을 어쩐다든가 내력을 다시 모을 여유가 없어진 몽호대사는 순간 적으로 좀 전처럼 다시 염주알을 날렸다.

뛰어난 임기응변이었으나 운일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몽호대사의 여의탄 수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폭포수같이 강렬한 한 줄기 장력이 옆구리 쪽에서 느껴졌기 때문인 것이다.

한 호흡을 삼킨 운일의 상체가 뒤로 크게 젖혀지는가 싶더니 전신이 둥글게 휘어지며 돌았다.

그런 모양으로 마차바퀴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뒤쪽으로 신형을 날리자 조금 전까지 그가 있었던 허공을 강맹한 장력과 몽호대사의 염주알들이 어지럽게 할퀴고 지나간다.

몇 바퀴 더 회전한 운일이 몸을 가누고 섰을 때는 이미 몽호대사와 10여 장 정도는 떨어진 곳이었다.

운일의 차가운 시선이 그 강맹한 장력의 주인에게 돌려진다. 장문인 몽인대사였다.

“호오-? 대 소림의 장문인께서 암습이라?”

운일이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하자 몽인대사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아미타불…! 빈승은 더 이상의 살생을 막으려 했을 뿐이오.”

그 말을 들은 운일이 갑자기 킥! 하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조금 전 그와 격돌했던 몽호대사가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몽호대사의 가슴을 움켜쥔 두 손과 그 손가락들 사이에서 붉은 선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몽호대사 본인은 물론이고 그를 구하기 위해 일장을 날린 몽인대사 조차 그 찰라의 순간에 이미 몽호대사의 가슴을 그은 쾌도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몽인대사가 아연하여 한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갑자기 다수의 인형이 운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수습한 소림승들이 일시에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아, 안돼! 물러들 나라!”

몽인대사의 다급한 외침에 달려들던 소림승들이 순간 움찔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소림승들을 똑바로 보지도 않은 채 유운일은 도를 지면 위로 거세게 휘둘렀다.

그 주위의 지면이 날카로운 비명을 울리며 작은 파편들을 토해낸다.

퉁겨진 작은 돌 부스러기며 흙덩어리들이 폭약이 터지는 형상으로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사방의 허공에 크아아악-! 하는 처절한 비명과 선혈들……!

수십의 승려들이 바

람에 날리는 잎사귀처럼 흐느적거리며 널 부러지자 순간적으로 다른 뭍 승려들의 신색도 굳어진다.

“모두 장문인을 보호하라!”

누군가의 고함이 있자 일단의 승려들이 장문인 몽인대사의 주위에 우르르 몰려들었고 순식간에 인의 장벽을 쌓는다.

“18나한은 저 대악마두를 제압하라!”

장문인을 보호하라던 그 음성이었으며 바로 쓰러졌던 현원대사였다.

그가 명령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서는 한 무리의 승려들이 있었다. 소림의 18나한… 7개의 나한관을 통과한 절정고수들 중에서 다시 고르고 고른 18인의 고수들이 바로 이 18나한이었으며 이들이 펼치는 18나한진은 무림 역사상 가장 완벽한 진법이라는 소림 108나한진의 축소판이었다.

“18나한진을 펼쳐라!”

18인의 나한승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진법에 따라 포진하자 여타 승려들은 재빨리 그로부터 몇 십장씩 물러난다.

“역시 이 방법이 빠르군 그래.”

운일은 입으로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했지만 그 눈은 나한승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18나한진… 108나한진의 축소판이라 했겠다?’

나한승들이 마악 그 진세를 발동하려는 순간이었다.

“나한승들은 진을 풀고 뒤로 물러나라.”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운일이 고개를 돌려 몽인대사를 보았다.

“장문인!”

현원이 당혹한 18나한승들을 대신해 의아한 목소리로 장문인을 외쳤다.

납빛으로 굳어진 몽인대사는 이번엔 오른손의 녹옥불장을 들어 한번 지면을 세차게 치며 일갈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물러나라!”

소림의 절대권위의 상징인 녹옥불장을 강조하자 18나한승들은 명령에 따라 뒤로 재빨리 물러난다. 운일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 모양을 보았지만 뭔가 결심한 듯한 몽인대사의 표정을 보는 순간 약간의 긴장과 기대의 빛을 띤다.

“소림 제자들은 108나한진을 준비해라!”

놀라움과 의구심은 극히 한 순간이었다. 녹옥불장을 치켜든 몽인대사의 추상같은 명령은 순식간에 효과를 나타낸다. 부상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추려진 108의 무승들이 운일의 주위를 에워싸는 움직임들이 마치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조금 전까지의 우왕좌왕했던 모습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과연… 이것이 소림의 저력인가? 구심점이 발동하니 순식간에 잘 훈련된 군대의 형태를 띄는구나’

운일은 내심 약간 감탄하며 자신도 내력을 추스려 대비하기 시작했다. 기실 이제까지의 타격으로 여기저기 망가지고 어긋나있는 운일의 몸은 극히 불안한 상태였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태로 무림 역사상 가장 완벽한 진법이라는 108나한진을 깰 수 있을까?’

그도 인간이었다. 이미 포진만으로도 압도적인 기세를 보이고 있는 이 거대하고 완벽한 진세의 한가운데에서 자기도 모르게 회의가 생겼던 것이다. 작지 않은 부상 위에 억지로 격발 시킨 내력으로는 몇 명의 소림 승들을 제압한 것이 한계일 수도 있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오늘 여기서 죽는다 해도 천하의 108나한진은 내 손으로 깨트린다’

“진세를 발동하라!”

몽인대사의 일갈과 함께 108인이 거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시… 그리고 하나의 군더더기가 없는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108명이나 되는 인원이 마치 한 사람으로 합쳐지기라도 한듯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장엄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소름끼치도록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훗~! 몽몽 녀석, 별 사소한 부분까지 학텔의 화면을 인용했군. 근데… 그런 건 좋은데 말이야.

“몽몽, 이거 재미없다.”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보는 습관이 있어서 지루한 걸 참고 꽤 많이 읽었건만, 이 건 신 무협도 아니고 구 무협도 아니고 너무 애매하지 않은가. 게다가 인용 자료의 변경도 너무 심한 것 같다. 여기서 ‘밀궁(密宮)’이란 조직은 그 당시 꽤 잘나갔던 세외의 조직 연합의 명칭이 맞지만 이 작품에서는 너무 무지하게 과장했단 말이야. 그들이 소림사에까지 쳐들어 온 건 사실이지만 모두 불태우긴커녕 엄청 깨지고 갔다는데 무슨… 아무래도 이 작가는 악역 쪽 조직을 무조건 천하제패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비인간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인가? 울트라 과장법에 근접하는 오버 장면도 꽤 많고… 에이, 맘에 안 드는 거 따지다간 끝도 없겠다.

몽몽! 네가 선택한 이 ‘유기산’이란 작가는 대체 누구야? 내가 군대 있을 때 나온 사람인가? 잘 모르는 이름인데 이 사람 대표작이 뭐가 있지? 음… 무림정화재단? 국악선생? 우쒸~ 몽몽, 사람 좀 잘 골라주지 뭐야, 이게.

“몽몽, 같은 내용으로 다른 작가 모드로 좀 바꿔 줘. 내가 좋아하는 ‘안경배’, ‘이돈형’, ‘전민이’, ‘이양도’, ‘안병두’… 이런 사람들 데이터 없니?”

[ 모두 존재합니다. ]

“OK~! 그 중에서 좀 골라 줘.”

어디 보자… 스타트는 안경배인가? 음… 좋아. 같은 내용인데도 작가가 바뀌니까 훨 낫네. 이걸로 다시 봐야겠다.

몽몽에게 등록된 수십 명의 작가들로 모드를 바꾸어 가며 패도광협의 일대기를 보고 나중엔 총관 얘기도 다시 리바이벌 하는 등 시간을 보내는 사이 다시 보름이 지났고, 대교는 자신에 찬 태도로 장청란과의 재대결을 원했다.

납치범이었던 사갈서생을 오히려 체포하여 금의환향(?)한 내게 사마외의 인물들은 다시금 경외심을 보이기 바빴고, 정파인들은 내가 사갈서생을 무림맹에 넘겨 버리자 의아해 하면서도 쉽게 딴소리를 꺼내지 못했다.

문제는 장청란과의 재대결이 성사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었는데… 알고 보니 포격을 당했을 때, 장청란은 멀쩡했는데 장명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몸이 돼지 같아서 뒤뚱거리다가 못 피한 건지 포탄도 맘에 안 드는 놈을 알아 봤는지 어쨌든 맞고 바로 죽지는 않았는데 대교와 내가 돌아오기 직전까지 고생, 고생 하다가 처참한 몰골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아무리 더러운 악인이라도 그렇게 죽었다니까 웬지 불쌍… 음, 솔직히 말하면 무척 시원했다. 사람의 죽음에 대고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대교와 장청란은 둘 다 재대결 의사가 확실했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었다. 화천루와 해남파를 비롯한 정파나 우리 사마외도 측이나 각자 치러야 할 장례가 무지 많은데다, 사갈서생이 동원한 포병들도 전부 잡아들이지 못한 상태라 합동 수색대를 구성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포병들이 모두 사갈서생이 수입한 왜구들이어서 정사마 모두 민족적인 감정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토의가 오고 가다가… 결국 대교와 장청란의 대결은 조금 미루기로 했는데 대부분 나온 의견의 날짜가 ‘내년 이 맘 때’였다.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교가 지금 대결을 끝내버리는 것보다는 계속 대기하고 있는 것이 비화곡에 돌아가서도 처벌을 피하는 한 방도로써 괜찮을 것 같아서 동의해 버렸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나와 대교… 우리 일행 모두는 이미 무사히 비화곡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이다.
오는 길은 비교적 편안했고 말썽 없이 평화로운 길이었고 그래서 갈 때는 뭐가 그리 힘들었던 건지 허무하기까지 했던 복귀 여정이었다.
복귀가 그렇게 수월했던 건, 바로 삼태자 조명환 때문이었다.
나보고는 자기 신분을 감춰달라고 신신당부하더니만, 나와 대교가 사갈서생에게 납치되었을 당시 조명환은 밀행이고 나발이고, 진소저와 유일한 끈인 진유준 형님을 찾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수색에 대규모 관군을 동원했었던 것이다.
나와 조명환의 끈끈한(?) 인연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극악서생이 알고 보니 황실의 권력도 등에 업고 있었다’라는 소문이 퍼지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거기다가 조명환이 나와 헤어지기 아쉽다는 둥 하면서 계속 동행해 오는 바람에 적의 습격은커녕 오는 동안 곳곳의 관리들이 나와서 아부를 떠는 일이 더 귀찮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관과 무림이 따로 노는 게 전통이라고 해도 역시 정치권력은 어디서도 통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돌아 온 것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차라리 갈 때보다 더 빡센 사고를 겪으며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하더라도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빌어먹을! 진작에 싹 뭉개 버렸어야 했다.
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저 징그러운 무덤 같은 건축물… 절혼무저갱(絶魂無底坑).

“곡주님. 밤이 늦었습니다. 천막 안으로 드시지요.”

“됐다. 너나 들어가서 자.”

걱정하는 소교 및 자매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교가 저 안에 들어가고 불과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밤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비화곡의 장로라는 빌어먹을 늙은이들은 생각할수록 열받는다.
내가 그렇게 설득을 하고, 대교가 이번에 세운 공로를 강조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어떻게 야후 장로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대교를 저기 집어넣는다는 주장을 할 수가 있지?
대장로인 천마 사문학… 그래 당신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건 알아.
이 비화곡처럼 방대한 단체일수록 규칙에 예외를 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라는 거…
그리고 당신들 나름대로는 최대한 나를 존중했기에 대교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거… 알긴 알지만 제기, 그래도 기분 더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사영은 저기서 어떻게 든 살아서 나오기는 했다.
그래서 내력은 이미 자기 아버지를 능가하게 된 대교가 저길 통과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영은 침투와 암살 같은 일에 전문가였고 대교는 그게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살인 진식과 기관을 깨는 것도 가르쳤어야 하는 건데… 으… 제기랄!
왜 지금이라도 시간을 주지 않는 거냔 말이야.
썅- 이 고집불통 비화곡의 장로님들, 당신들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만약의 경우 대교가 저 안에서 못 나올 경우 말이야.
만약에… 만약에 그럴 경우에는 말이야.
그땐 정말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진짜 극악… 아니 진유준 식 깽판이 뭔지 보여 줄 거란 말이다.

“에이- 썅! 쓰팔 X도, 지금 이라도 저기 싹 밀어 버릴까?”

우~ 술맛도 모르겠다. 그냥 병나발 불자.

“그렇게 드시면 몸에 해로워요. 안돼요.”

안 돼? 뭐가 안 돼? 장난하냐? 지금 누구더러… 누구더러……

“다시는 이렇게 드시지 않는다고 하시고는 잊으셨나 봐요.”

“어…? 어, 어어~ 너, 뭐, 나온… 거야? 벌써……?”

나는 감히 내 손안에서 술병을 빼앗고는 살포시 웃고 서 있는 대교 앞에서 한참을 버벅댔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아버지였어요. 아버지는, 제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짐작을 하셨나봐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저 미친 동굴 속을 치워놓으셨던 거예요.”

사영… 그가 지난 번 저기 들어갔을 때, 그는 처음부터 저 안을 파괴할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대교는 내 앞의 자리에 사영이 절혼무저갱 안에 남겨 놓았다는 서신을 내려놓았다.
사영은, 그 잘난 아저씨는 나와 대교에 대한 것을 듣고 나서 줄곧 생각했다.
자신의 딸이 과연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런 길을 택한 딸아이의 손을 붙들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대교가 처한 상황을 고민한 끝에 절혼무저갱을 떠올리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크지 않은 가능성을 위해… 대교가 걸어올지 모를 길을 닦아놓기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진, 늘 그러셨어요.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아무 말도 없이 우릴 위해… 늘 뭔가를……”

고개를 떨구는 대교를 안았다.
꺄아아~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을 그래도 힘들지 않았다.
공연히 웃음이 터져 나와서 웃었다.
한참을 웃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난 계속 대교를 안고 웃었다. 계속……

  • 1 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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