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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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천연덕스럽게 대교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다.
영약 먹는 순서, 해당 영약을 체내에 받아들이는데 적합한 내공구결,
영약마다의 기타 주의해야 할 부작용과 대처법 등등…
흐…
내용은 미래 특급 로봇 몽몽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거지만
말하다보면 가락이 붙어서 어떨 때는 나도 내가 정말 알고 지껄이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후… 이제 대충 다 얘기한 것 같은데… 음, 부선단(孚仙丹)에 대해서 한 번 말해볼래?”
“..부선단은 극음(極陰)의 기운이 강해 1갑자 이상 의 내공이 갖추어지지 못한 자가 복용하면
한기(寒氣)를 이기지 못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반대의 성질을 가진 소환단과 함께 복용하고 두 영약의 기운을 차츰 조화시켜야 합니다.”
“…만약 두 영약의 기운이 예상보다 차이가 나면..?”
“수라진경 초경(礎經) 2장의 이호공(異互功)을 운용해 부선단의 음기는 하단전,
소환단의 양기는 상단전으로 모아 상이한 기운은 전신 근육에 흐트러트린 후…”
호오…
내가 거의 20여 분에 걸쳐 말한 꽤 많은 내용이었는데,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다시 다른 부분을 물어보아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기특한 것 같으니라구…
대교는 공청석유 먹고 좀 쉬라고 한 다음 나는 어제처럼 한 쪽 구석에서
‘망막 스크린’ 기능으로 ‘성격 자료’가 추가된 가상의 ‘장청란’과 ‘대교’의 대결을
몇 번이고 되풀이 보았다.
어제처럼 허무한(?) 결말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꽤 오래 대결을 펼치며 ‘무협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 것도 현실보다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재생해서 봐야 했지만…
헌데, 뜻밖에도 내가 본 총 12번의 대결 중 가상의 대교가 승리하는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쒸- 이거 뭐 이래. 야, 어떻게 된 거야?
마봉후의 무공이 화천루의 월형신공 못지 않다고 그랬잖아?”
[ 장청란의 자료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이상적인 무인 데이터’로, 내공수위는 역대 화천루주의 최고 수위로 설정했습니다. ]
흠… 그래?
불확실한 수치를 무조건 최고로 설정했다면..
그럼 이 가상의 장청란을 이길 수 있으면 현실의 장청란을 이기기는 좀 더 수월하다는.. 그런 얘긴가?
[ 장청란의 데이터가 보강되고, 가상의 대교에 경험적 데이터가 쌓이면 승률의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
뭐… 그 정도는 나도 대충 감 잡고 있었다.
사실, 오늘 ‘망막 스크린’ 기능을 장시간 사용한 것은 그 기능에 내가 적응하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
음….
가상 모드 종료시키고 일어나 보니 제기..
아직은 적응이 안 된 것 같군.
여전히 어지럽고.. 음.. 기분 탓인가? 그래도 증상이 좀 덜해진 것 같기는 하다.
난 잠시 앉아 쉬고 나서 다시 일어났는데, 흐음..
역시 회복 속도도 약간 빨라진 느낌이 든다.
[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
어.. 그래? 벌써 반나절이 지났나?
“대교야, 난 갔다가 내일 또 올께.
음… 뭐 필요한 거 있어? 뭐든 구해 다 줄께.”
대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어쩐지 뭔가 말할 것이 있는데
망설이는 듯도 하다. 좀 더 캐물을까 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비밀 서고’ 아니 ‘비밀 창고’를 나서는 내 발걸음은 지극히 무거웠고
정말이지 나가기 싫었다.
저 애를 저렇게 혼자 놔둬도 되는 것인지..
또 주화입마에 빠진다거나 어떤 나쁜 상황이 닥치면..
몽몽 녀석은 이론상 위험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적다고 했지만..
으으.. 제기, 대교와 언제나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띠리리~! 띠리리~! 딸칵!
네, 여보세요? 어, 대교냐? 음.. 간짜장 하나 보내 달라고?
그래 알았다. 극악 반점 철가방으로 보내 줄께. 단무지 꽉꽉 눌러서…
이렇게 안 되나..?
난 별의별 걱정과 쓰잘대기 없는 생각을 하며 1층으로 나왔다.
응..? 뭐야.. 총관 아냐?
첫 번째 입구에 소교, 소령이와 함께 지총관이 서 있었다.
“곡주님, 이제쯤 돌아오신다고 하여 기다렸습니다.
삼홍랑 구월화를 하명하신 대로 처리하였습니다.
그녀의 심문은 언제쯤 하시려는지…”
흠… 그거 재촉하려고 기다렸군.
그 사이 장명 부부의 조사는 많이 해 놓은 모양이지?
“…먼저 장명 부부에 대한 보고서부터 보고..
그리고 시작하지.”
“존명!”
한시간 후….
나는 대청각의 상좌에 앉아 바닥에 길게 누워있는 구월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꽤 높아서 나는 앉고 아래에 누가 서 있어도 내 시선이 한참 더 위다.
지옥전의 무사들은 어제 내 지시대로 정말 그녀의 사지 힘줄을 잘라 버릴 것처럼
잔득 겁을 주며 분위기를 잡다가 어느 순간 의식을 잃게 했다고 한다.
흐…
최후의 순간(?)에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후회..? 자책..? 혹은 원망과 원한..?
“…깨워!”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총관이 손을 들어 예의 탄지공을 쏘아
구월화의 혈도를 풀었다.
자아…
깨어나라 구월화.. 그래, 어리둥절할 꺼야.. 후후..
화들짝 놀라면서 상체를 일으키는 군.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당황해서일까?
날 발견하지도 못한다. 이런.. 이제야 자신의 사지가 멀쩡한 것이 뜻밖인 모양…
그래.. 지금의 그 표정…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쳤다.
“삼홍랑 구월화!”
구월화는 그제서야 내가 있는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내 뒤쪽의 대교 자매와 내 오른쪽의 총관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이내 내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구월화는 굳은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극악서생께서 엉뚱한 장난을 좋아하신다고 하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장난이라.. 흐.. 지금이라도 널 죽는 것보다도 못한 처지로 만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그전에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비스듬히 앉아 한쪽 손에 머리를 괸 여유로운 자세로 입을 열었다.
“구월화… 애초 태생은 불명.. 나이 십 세에 항주(杭州)의 거상(巨商)
오근명, 세미랑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랐으며 나이 이십 세가 되는
6년 전 서호(西湖)에서 만난 해남파의 장명과 결혼…
자녀는 1남 1녀… 장명과의 결혼 전 사촌오빠인 ‘오상’과의 염문설이 있었고..
결혼 후에도 몇몇 인사들과의 관계가 의심받고있고..
과연.. 전형적인 요부라는 건가..?”
“도대체! 저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가요?
이 음탕한 년의 남자 관계..? 그들과의 음사를 낱낱이 듣고 싶으신 건가요?”
꿈에 볼까 걱정될 정도로 표독스런 음성과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동요를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당신이 여기 왜 왔는가야.”
구월화는 물론이고 내 주변인들까지 조금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말해봐, 구월화.. 당신이 여기 비화곡을 찾아온 이유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