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23화
구월화는 짐짓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똑바로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세 번째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묻고 있잖아! 여기 왜 왔느냐고..!”
“다, 당연하지 않소. 당신들이.. 남편을 납치했으니 까…”
“사랑해?”
“……”
“니 남편 장명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거야.
그것도 대답하기 어려워?”
흠… 역시 예상대로 내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군.
하지만.. 이거 예상보다 심각한 수준일 걸?
만약 지금 저 구월화의 표정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면
나는 잽싸게 세상 끝으로 잠적해 버리고 싶어질 것 이다.
그만큼 구월화는 아주 기묘한.. 아니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입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전 남편을 제 몸처럼.. 사랑해요.
어째서 그런 당연한 걸 묻는 거죠..?”
“제기-! 아주 웃기는 ‘부부’로군?”
공연히 짜증이 나서 내뱉은 나의 말에 구월화가 흠칫 안색을 굳혔다.
“지 마누라가 다른 사내와 음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옆에 앉아서 몰래 웃고 있는 남편이나, 씹어 삼킬 듯
증오하는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자나..
당신들 도대체 뭐야..?”
놀란 구월화는 억지로, 그야말로 강제로 웃으려고
애쓰는 것이 역력한.. 조금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 되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아무도 그 표정을 못 볼 줄 알았는지
슬며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장명…
내가 몽몽이 녹화한 장면을 다시 보면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바로 그 것이었다.
“거, 거짓말.. 거기서 어떻게.. 그의 표정을 볼 수가…”
“내가 너의 혀와 팔다리의 힘줄을 자르라고 했을 때도
장명은 또 웃었어. 그 때는 너도 그의 표정을 보았을 텐데..?”
장명이 그녀가 옷 벗는 것을 말리려는 시늉을 하며
쇼를 하다가 총관에게 혈도를 제압당하고 쓰러졌을 때,
함께 얽혀 쓰러진 구월화의 얼굴과 장명의 얼굴은
매우 가까웠었다.
특별히 눈동자를 돌리지 않아도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음…
어떻게 내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려진 사람의 표정을 알 수 있는지
자꾸 캐물으면, 은근슬쩍 팔을 그럴 만한 위치에 놓이도록 해서
미래 로봇 몽몽으로 하여금 촬영하도록 했다고…
밝힐 수는 없겠지?
뭐.. 그럴 때는 전설적인 도가(道家)의 수법 같은 걸
대충 대거나 할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더 묻지는 않았다.
원판 극악서생이 워낙에 인간 같지 않은 자로 알려져서 그런가..?
어쨌든,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지금 구월화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내가 그들 부부를
많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 당혹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겨우 이 정도로 내게 승복할 리가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장명과 그녀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내가 밝혀 주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다년 간, 아니 수십 년을 세상을 속이고
살아온 장명이다.
그 가면을 내가 단번에 알아보고 깨버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증오하는 상대에게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이 불행한 여자의 믿음을
얻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월화가 멍하니 앉아 있는 단상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 가슴속에서 다듬이 방망이질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애매하게 얼버무릴 수는 없었다.
오오… 드디어 때가 왔다.
숨겨왔던 나의 비기(秘技)를 드러낼 때가…
‘고등학교(高等虐敎)’에 몸담고 있으며
‘연극부(煙極部)’에 속해 있을 무렵 익혔던
급속단발변신마공(急速單發變身魔功), 일명
‘순간적으로 딴 사람 되기’…
유사 마공인 ‘딴 사람인 척하기’, ‘딴 사람 흉내내기’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 전율의 마공….
하..핫.. 썰렁했나?
흐… 하지만 속으로 이런 웃기지도 않는 생각하는 것이
때로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사이.. 나는 구월화 바로 앞에까지 도착했고,
나는 잠시 구월화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난 생각했다.
여자도 지금 날 올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날 보는 여자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내가
나는 아니다. 나는 현재로 고정된 누구도 아니다.
…………..
소위 ‘고딩’ 시절의 연극부 활동 때처럼..
나는 약간의 흥분과 평소 이상의 차분함이 교차하는 상태로
준비된 ‘대사’를 하기 시작했다.
“너희 부부는 이 비화곡의 무서움을 알면서도
이 곳에 칼을 들이댔다.
그 이유가 화천루의 후인인 장청란의 비호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남편은 아내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아내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각자 사지에 뛰어들었다는 건가?”
구월화의 표정 변화가 심하게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대사’를 기다리지 않고 계속했다.
“그.. 어느 것도 아니야. 화천루가 비록 소림사와 비견될 정도의 문파라고 해도
우리 비화곡을 어쩌지는 못해.
물론.. 당신들이 아름다운 부부애를 주장한다는 것도 웃기지, 안 그래?”
나도 모르게… 음성에 조금씩 열기가 더해갔다.
“장명은… 저 인간은 어쨌든 목숨을 건 목적이 있어.
최소한 해남파와 화천루까지는 끌어 들여 우리와 전쟁을 일으키려는,
그럼으로써.. 그렇게 해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
하지만.. 당신은 왜 여길 온 걸까?
왜 자처해서 그렇게 나에게 범해지거나 죽임을 당하기 위해 애를 쓰는 걸까?
당신의 남편이 정파 인사의 아내로써 감동적이고 명예로운 죽음을 보여달라고 등을 떠민 것은 아닌가?”
음… 오늘 대사 좀 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장명에게 억매어 있지?
그를 사랑해서? 그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해서?
아니면.. 진짜 소중한 존재가 장명의 손아귀에 안에 서는 아닌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말이야…”
후우…
열변(?)을 토한 나는 가볍게 한숨을 몰아냈다.
헌데 제기.. 지금 구월화의 이 질린 듯한 표정은 뭐지?
내 ‘추리’가 맞다는 건지, 택도 없다는 건지..
감이 잘 안 잡힌다.
본래는 이 여자의 반응을 살펴가며 말을 조종하려고 했었는데,
말하다가 조금 흥분해 버려서 그냥 내 대사에만 몰두해 버린 것 같다.
으이쒸– 좋아,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끝까지 가보자.
“그대의 남편, 장명이란 자는 겉과 속이 다른 전형적인 위선자다.
주제넘게 해남파와 화천루를 말아먹고 싶은 모양인데..
안됐지만, 내 쪽에서 사양하겠다.
난 입에 넣어주는 떡은 안 먹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으… 이건 좀 ‘오버’ 같은데.. 암튼 마무리는 지어야 하니까…
“…구월화, 조금 전 여기서 깨어났을 때 기분이 어땠지..?
팔다리도 성하고 뭇 사내들에게 난행을 당하지 않았으며..
어쩌면 죽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질린 듯한 얼굴로도 계속 날 올려다 보고 있던 구월화였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잘 보면 바닥을 짚고 있는 손끝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살아있다’는 느낌을 간직해라.
아무리 죽음으로 지켜야 할 대상이 있다 하더라도..
죽어서는 언제까지고 지킬 수가 없는 법.
너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 충고는 여기까지다.”
준비된 대사도 끝, 연극 1막 1장 막 내려야겠다.
나는 빙글 몸을 돌려 다시 내가 단상 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으… 좀 더 조사를 시키고 더 신중하게 상황을 분석한 다음에 할 걸 그랬나?
그냥 아무 핑계나 대고 구월화 심문하는 것은 좀 더 천천히 할 것을…
으으.. 난 왜 꼭 막 내린 다음에 후회를 하는 거지?
내가 마악 의자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하핫핫–!!”
갑자기 뾰족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며 내 뒤통수와 심장을 두들겼다.
모, 모야…
나는 가슴이 뜨금 해져서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하하하!! 아핫핫-!!”
구월화가 상체를 뒤로 젖히고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이, 이봐!
지금까지의 내 추리가 말도 안 돼서 그래?
응? 이봐.. 내가 그럼 혼자 코메디 한 거야?
정말 그래?
“이 요망한 것이 어디서 감히-!”
나와 함께 움직이던 소교와 소령이가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미친 *처럼 멈추지 못하고 웃고 있는 구월화 를 겨누었다.
어.. 그래, 죽여서 입을 막으면 내가 헛소리 한 걸 감출 수가..
에-?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으으.. 나 미쳤나봐, 갑자기 그런 ‘극악서생’ 같은 생각을 떠올리다니…
“곡주님! 저 요망한 것을 소녀들이 징계하도록 허락..”
“관둬!”
“고, 곡주님…”
얘들아.. 지금 저 여자 입을 가장 막고 싶은 건 바로 나란다.
온갖 폼을 다 잡고 얘기했는데,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이 무슨 개망신인가 말이다.
으이쒸-! 일났다 일났어…
당장에 내 정체를 의심받지는 않을지 몰라도 실추된 내 명예(?)를 되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고…
이제 나의 이곳 생활은 아주 피곤해 질지도 모른다.
갑자기 대청각 바깥 풍경이 무지하게 아름다울 것 같고, 여기를 나가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에구구… 이렇게 ‘현실 도피’ 상태가 되면 안 되는데..
“까르르~ 깔깔깔–!!”
빌어먹을 여자.. 갈수록 가지가지 소리로 웃는군.
정말 죽여 버리라고 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