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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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뭘 어떻게 한다는 대책도 없이 다시 구월화에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으으.. 한 번 자신감을 잃으니까 이제까지 내가 확실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구월화와 음담패설을 주고받고 있을 때, 장명이 웃었던 건 혹시 자포자기, 자학적인 웃음은 아니었을까?
장명과 구월화에 대해 조사해 온 보고서들은 과연 제대로 된 조사 보고서였을까..?
으으… 이제 와서 이러면 안 되는데…
거의 정신 나간 여자처럼 웃어 제키던 구월화는 문득, 그 웃음을 멈추었다.
내가 더 가까워지자 구월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눈가를 소매로 찍어댔다.
어찌나 웃었던지 눈물이 찔끔 나온 모양이다. 빌어먹을…
구월화가 뭐라고 하면 둘러댈 말을 생각해 내기 위해 그그극, 그그극! 힘겹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호호호! 천하의 극악서생이 자신이 천재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환자일 줄이야.
내 남편이 화천루를 뭐 어째요?
내가 남편을 증오하는 여자라구요..?
당신 바보 아냐..?”
당장에라도 구월화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음..? 근데 이 여자 표정이 또 왜 이래?
방금까지 광적으로 웃어댔던 여자의 얼굴이 지금은 마치..
맘껏 울어서 스트레스를 푼 여자의 표정이랄까..?
난 남의 고민을 대책 없이 들어주는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의 ‘상담역’을 많이 한 편인데, 그때 특히 많이 본 표정이다.
그럼, 이 여자 방금 웃은 거야, 운 거야?
“그동안 수없이 강호를 준동시켰던 극악, 아니, 독각와룡(毒角臥龍) 곡주의 신기를 귀 아프게 들어오면서도 반신반의했거늘….”
“..으-응?”
모, 모야.. 어.. 그래. 그러고 보니 독각와룡이 원판의 본래 명호다.
워낙에 극악한 짓거리를 많이 한 탓에 강호에서는 일찌감치 ‘극악서생’이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사실 곡내에서 ‘극악서생’은 금지된 호칭이다.
그래서 어제 이 여자가 나에게 ‘극악서생’이라고 불렀을 때 소교가 발끈했었던 거였고…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 구월화가 날 본래(?)의 명호로 부른다는 것은..?
“장명.. 그 위선자의 더러운 가면을 이렇듯 쉽게.. 단 한 번의 대면으로 꿰뚫는 분일 줄이야.. 과연, 명불허전….”
혹시.. 날 비웃는 건 아닌가 했지만, 지금 구월화의 표정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부디 그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이 여자..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차분하고 교양 있는 요조숙녀 같은 표정을 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내게 큰절을 올린다.
어, 어쨌거나.. 이거.. 상황 반전 맞지..?
난 좀 당황해서 옆 사람들을 흘끔 보았더니 총관이 나 소교, 소령이 모두 상당히 놀라는 눈치다.
구월화는 절을 하고 나서도 일어서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을 이었다.
“위선자 장명은 다 년간.. 아니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천하를 속이고 우롱한 자입니다.
그 얕은 머리를 자만하여 이번에 곡주께 수작을 걸었으니 그야말로 제 무덤을 판 꼴이지요.”
흐… 그래.. 내 ‘판단’, 내 ‘추리’가 다행히 적중한 모양이다.
솔직히 입이 찢어져라 웃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고 속으로만 웃었다.
으흐흐… 우히, 우키키…
짜샤! 몽몽.. 봤냐? 내가 항상 너한테 의지만 하는 줄 알았지? 나도 한 번 하면 하는 놈이라니까…
후흐흐…
속마음을 감추는 것, 특히 웃음을 참는 것은 더 어려워서 나는 크험, 험! 험! 가벼운 헛기침을 하여 웃음기를 얼버무리며 단상의 내 의자로 돌아왔다.
처음처럼 무지하게 편안하고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당신 입으로 자세한 전말을 말해봐.
나…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그리 나쁜 놈만은 아니야.
당신의 소중한 존재.. 내가 살려 줄 수도 있어.”
뭐 물론 내가 직접 할 건 아니지만, 지금 기분 같아서는 비화곡내의 고수들을 떼거지로 파견시켜서라도 뭐든 해결해 주고 싶었다.
내 말을 구월화는 잠시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순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예 다 털어놓자고 결심을 굳혔는지, 그녀의 얘기는 생각보다 시시콜콜 길었다.
부모를 잃고 고아로 서럽게 살아온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구월화의 이야기는 자그마치 세 시간 가까이나 계속되어서 나는 중간에 커피를 내오게 하여 휴식시간까지 가져가며 들어야 했다.
장명과의 만남과 살아온 이야기는 뭐.. 내가 대충 예상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숨겨진 사연도 참 많았다.
뭐, 하도 긴 이야기라 이번에도 몽몽 시켜서 녹화 떠놓은 거 다시 보면서 검토해 봐야 할 것 같긴 하지 만…
구월화의 말을 모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장명은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자꾸만,
그 Dog얼라.. 아주 확실하게 재기 불능의 폐인을 만들어 버릴 테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진짜 나, 진유준)도 뭐 그렇게 정의파는 못되지만, 화끈한(?) 악인도 아니고 이렇게 열라 음흉치사빤스(너무 낡은 표현인가..?) 같은 놈은 정말이지 밥맛이 다.
“…그렇게 장명이란 인간은 저의 청춘과 고혈을 빨아먹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제 생명마저 스스로 내던지기를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간악함이 곡주님께 단번에 간파 된 것이 너무나 통쾌하여 아까는 그만 고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못난 것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가슴에 담아 두고 썩이던 길고 긴 이야기를 다 꺼내 놓은 구월화는 매우 후련한 표정이 되어 내게 감사의 시선을 던져왔다.
음… 어랏-? 갑자기 웬 대포(?) 충전..?
난 실내에 있는 사람들이 눈치 못 채도록 슬며시 다리를 꼬아 앉아야 했다.
으… 빌어먹을 놈(?)! 정작 구월화가 ‘음공’을 구입했을 때는 가만있더니,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이젠 가식이 없는 얼굴로 약간의 애잔함마저 보이고 있는 구월화..
뭐 물론 풍만한 가슴이 저 넉넉한 상의를 밀어붙여 도드라질 정도로 특급 글래머의 미인이지만..
으.. 지금이 그런 생각할 때냐?
이 눈치 없는 쨔샤! 힘 빼! 죽어! 죽으란 말야!!!
간신히 눈치 없는 원판의 육체를 진정(?)시킨 후, 소교를 시켜 구월화는 곡 내의 적당한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라고 해서 내 보냈다.
“음… 총관, 앞으로 저 여자는 불편함이 없도록 잘 대해 줘.
하지만 감시도 철저히 하도록 하고.. 아직은 곡 내에서도 그녀가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소문나지 않게 해.”
“존명!”
“그리고.. 지옥전에서 말 잘하는 놈 몇 명 뽑아서 가끔씩 뇌옥에 갇혀 있는 장명을 약올리라고 해.
뭐.. 니 마누라 아주 끝내 주더라.. 그런 식으로 말야.”
“존명!”
지시를 마치고 일어서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참..! 이번에 장명 부부 보고서는 아주 맘에 들었어.
하루 만에 그 정도로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다니… 후후.. 총관도 수고했고..
그리고 적당한 선물 하나 준비해서 월영당 당주에게 보내 줘.”
“아.. 저, 그게…”
“왜? 뭐 문제 있어?”
“실은.. 이번 장명 부부에 관한 정보는 월영당에서 수집한 것이 아닙니다.”
“응..? 그럼 강호에 월영당 말고 파견된 ‘정보조직’이 또 있었어?”
“그건 아닙니다. 이번에 곡주께서 원하시는 시일이 월영당의 능력에 좀 벅찬 듯하여..
제가 외부 정보 조직에게 의뢰하였습니다.
의뢰가 있으면 황제와 비(妃)의 침실 속 대화까지 알아내 준다는 바로 그…”
얼씨구.. 나한테 안 깨지려고, 급한 김에 외부 용역 줬다는 거야?
뭐, 결과가 좋으니까 뭐라고 하고 싶진 않고..
그보다 이 시대에 무슨 ‘도청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정도의 정보 수집이 가능한 조직이 있다고..?
톡,톡,톡
[ 총관의 예에 해당하는 단체는 ‘천이단'(天耳團)입니다.
최초 구성 시기 미상의 단체 중 하나이며 역대 단주, 구성원들의 무공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강호상의 분쟁에 관여한 기록도 없습니다. ]
호오…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있는 첩보 조직이라는 건가?
조직명도 뭐, 하늘의 귀…?
하늘 아래 어디서 일어나는 일도 다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인가보다.
군대에서 지겹게 강조되고 또 강조되는 것이 바로 ‘보안’이다.
정보가 누출된다는 것은 곧 적에게 나 잡아잡수..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CIA나 구 소련의 KGB, 이스라엘의 모사드 등 각국에서 첩보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흠… ‘천이단’이라.. 탐나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