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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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첩보 기관’이란 명칭 자체에서 풍기는 영화틱한(?) 분위기와 웬지 모를 매력….
게다가 정말로 이 시대 황제의 침실까지 엿볼 수 있을 정도면 온갖 재미있는 것들도 다 염탐할 수 있겠지?
황제야 본래 후궁들이며 주위에 여자들로 넘칠 테니 그건 오히려 별로 쓸만한 정보가 못될 것이고..
어디 소림사의 고승이나 무림맹의 점잖은 인사들의 뒷조사를 시켜서 그들의 구린 비밀을 알아내서, 확실한 약점을 쥐게 되면 그걸 미끼로 협박하여 돈도 좀 뜯고,
기찬 무공 기서나 대환단, 공청석유.. 가리지 않고 다 뺏고, 아참 이쁜 딸내미 있으면 끌고 오고…
음뿌왓핫핫핫-!!!
때때로.. 이렇게 오버하여 무한 괘도망상에 빠지고 나면… 내가 나한테 짜증이 난다.
어렸을 때는 내가 멋지고 완벽한 영웅이라는 상상하는 것에도 지쳐(?) 오만가지 망상을 다 해봤지만,
지금 나이 먹고 군대까지 같다 온 놈이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후… 반성하자, 진유준.
“저.. 곡주님, 천이단과의 부득이한 거래는 과거에도 종종 있어 왔던 것으로,
그게 그러니까.. 곡주께서 진정 원하시는 바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월영당이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역사의 천이단을 당대에 따라 잡는다는 것은 좀…”
응..?
음… 잠시 쓰잘대기 없는 망상에 빠져 있는 동안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에휴.. 총관이 저렇게 곤란한 기색으로 변명조의 말을 늘어놓는 걸 보면 별로 선량한 표정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본 곡의 월영당도 사실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는….
어, 어쨌든 불쾌하셨다면 다시는 천이단의 힘을 빌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왜?”
“예..?”
“내가 뭐라 그랬어? 그런 편리한 조직이 있으면 애용해야지, 왜 안 쓴다는 거야?
음.. 아예 이번 일 전부, 그러니까 냉화절소 장청란에 관한 것까지 모두 천이단에 맡겨버려.”
“에..? ..아, 예에..!”
당황했나 보다, 습관적인 ‘존명!’이라는 말도 잊고 버벅대는 거 보니…
총관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지만,
‘하여간 이 놈은 종잡을 수가 없어’라는 표정도 역력했다.
아무래도 원판은 자기 산하 정보 조직에 대한 자부심, 내지는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외부 조직 이용하는 걸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거기에 다 맡겨버려..’ 하니까 당황한 건가?
그럼 뭐.. 다른 이유, 핑계거리 뭐 없나..?
“그리고.. 음… 월영당에게는 다른 임무를 주지.
바로 그들 천이단.. 천이단이 어떻게 장청란의 정보를 수집하는지 그 과정 자체를 관찰하고 보고하라고 해.
후후.. 이 기회에 연구 좀 해보라고 해. 뭐 하나라도 건지는 것이 있으면 좋고, 아님 말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실은 나에게 이런 깊은 뜻(?)이 있어서 그렇게 시킨 거야.. 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고, 곡주님, 천이단을 역으로 추적하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로써, 자칫 오해가 생기면 다시는 그들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천이단이 비록 지금까지 강호 상에서 무력을 행사한 예가 드물지만, 그들의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깊이를 생각하면 어쩌면 화천루보다도 유의해야할 ‘세외세(世外世)’로써,
공연히 도발할 상대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에구구.. 그러고 보니 그렇다.
세상에 어느 첩보 조직이 자신들 노하우를 엿보는 걸 좋아할 것인가.
그리고 첩보 조직의 정보 수집이란 것이 항상 위험을 내포하기 마련이고,
당연히 그런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춘… 말하자면 한 칼하는 자들일 것이다.
총관 말대로 공연히 큰 적을 하나 더 만들게 되는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기! 괜한 말 꺼냈나?
안 그래도 ‘화천루’ 하나 만도 골치 아픈 상황인데…
그러나 난처해하는 태도의 총관을 나는 지긋이 바라보면서 한껏 목소리를 깔았다.
“그래서..? 못 하시겠다..?”
“제, 제가 어찌 감히 불복을…”
총관은 반사적으로 절도 있게 포권하며 상체를 숙였다.
쓰불… 그 놈의 존심 때문에 그냥 우기게 되어 버렸지만, 속으로는 후회막급이다.
대체 어느 순간 어긋나기 시작한 거지?
으으.. 누가 나 좀 말려 줬으면 좋겠다.
“..저기, 어려울 거라는 거 알아.
그 대신 말이야. 이번 일 끝나면 월영당주 하고 수하들.. 그 야영(夜影)들..까지 크게 포상해 준다고 해…”
으.. 아무래도 나 슬글슬금(?) 버벅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하다니…
아니나 다를까, 총관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무지하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떠올리고 있다.
으으.. 침착하자, 침착하자 진유준..
이미 꺼내 놓은 말이요, 방아쇠 당긴 총이며, 마셔버린 술이다.
공연히 변명하거나 얼버무리려고 해 봤자 더욱 복잡해질 뿐이다.
인정하자, 인정하고 정면돌파하자.
자자- 침착하게.. 진유준..
“곡주님.. 더 이상 하명하실 것이 없으시면 총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총관이 약간 무거운 낯빛으로 포권했고, 나는 잠깐 기다리라는 의미의 손짓을 했다.
“…좀 전에 총관이 그랬지, 천이단과 ‘오해’가 생기는 것이 걱정이라고…”
“그러합니다, 곡주님. 우선 야영들이 천이단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그래… 이럴 땐 정면돌파, 돌격(?)이다.
“그럼, 오해가 생기지 않게 우리의 의도를 확실히 하도록 하지.”
“..예? 그게 무슨..”
“천이단에게 미리 밝혀. 이번 일 맡으면 우리측은 오히려 너희를 정탐하겠다고 말야. 정중하게 ‘한 수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조건을 더 걸어. 만약 우리 월영당에서 천이단의 비법, ‘정보 수집법’을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계약한 금액의 두 배.. 아니 열 배 더 준다고 해.”
총관은 내 말에 입을 따악 벌리고 눈만 껌벅이고 있다가 조금 지나서야 간신히 말을 했다.
“그.. 그런.. 허.. 이, 일단.. 천이단에 곡주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헌데.. 천이단이 곡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어쩌실 것인지..?”
“그럼 관두지 뭐. 그냥 장청란 일이나 잘 처리해 달라고 해. 지금 급한 건 그거니까..”
나의 태연한 말투에 총관은 약간 질린 듯한 얼굴로 포권하고는, 더 이상 있다가는 또 무슨 얘기 나올지 몰라 두렵다는 태도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천이단…
그 정도 수준의 조직이라면 당근 그만큼의 ‘자부심’, ‘자존심’이 있을 것이고,
‘오호.. 그러셔?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셔!’라는 반응을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 ‘매우 불쾌하오. 그렇다면 우린 의뢰를 받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뭐, 어느 쪽이든 그런 제안을 미리 하는 것이 몰래 염탐하다 들키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뒤통수치는 것보다야 대놓고 ‘우리 맞짱 뜨자’라고 하는 것이 훨씬 당당하고 정당한(?) 느낌이…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애당초 지금 이런 걸 걱정할 필요도 없었는데,
암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지껄이다가 이런 골치 아픈 사태를 자처했다는 점이다.
애써 총관 앞에서는 초연한 척, 태연한 척을 했지만 사실 총관 못지 않게 혼란스럽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빌어먹을, 구월화 심문이 잘 끝났다고 너무 방심하고 들떠있었던 것인가?
으.. 지금으로서는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옆에 서 따라 오는 소령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주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술상 좀 봐줄래? 오늘은 좀 독한 술로…”
내 처소에 돌아오고 잠깐 창 밖의 수려한 경치를 보는 사이 술상이 차려졌다.
내 처소에서 보여지는 경치는 정말 좋아서 좀체 실증이 나지 않는다.
낯에는 선명하고 시원스러운 계곡의 전경을 볼 수 있어서 좋고, 지금처럼 해가 떨어진 시간에는 그 풍경의 한 복판에 파리한 빛깔의 달이 떠올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낯에 보이는 계곡 사이의 시원한 물줄기가 밤에는 은근히 들려오는 청량한 물소리로 대체되고…
내가 여기에 온 후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시는 건 어쩌면 이런 운치 있고 아름다운 정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흐… 나 같은 술꾼이 이런 환경에서 어찌 참을 수 있으리오….
어찌 되었든 오늘 일정은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으니 까, 골치 아픈 일은 내일 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마시자.
근데 흠.. 평소보다 잔이 작다..?
어디… 홀짝!
허컥!, 우푸- 커, 커어-억!
“고, 곡주님-!”
당황한 소령이가 어쩔 줄 모르고 내 옆에서 발을 굴렀다.
나는 몇 번 더 헛기침 비슷한 심호흡(?)을 한 후에야 간신히 진정하여 소령이를 보았다.
“너.. 너어-”
“하, 하명하십시오, 곡주님..”
“으.. 이거.. 정말 술이냐..?”
“..서주(徐州) 특산, 백일취(百日醉)라고.. 고, 곡주님께서 독한 술을 원하시는 줄..”
그래, 독한 술 달라고 한 건 나다.
하지만 웬간해야지 이건 뭐 도수 100도 원액인 것 같은..
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