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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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콜 비율 75.3%. 소량으로도 신체 대사를 저하시킬 수 있는 ‘준 독극물’입니다. ]
묻지도 않았는데 몽몽이 친절하게 알려왔다.
아니, 이 경우 ‘경고’라고 해야겠지?
그 ‘준 독극물’을 내온 소령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다른 미주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대교, 소교는 대체로 표정관리가 되고 톡톡 튀는 성격의 막내 미령이도 뭔 생각하는지 눈에 보일 경우가 많지만 나름대로 표정에 연막(?) 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이 아이 소령인 그게 안 된다.
지금.. 내가 이 ‘준 독극물’에 버벅대는 걸 보고서도 ‘대체 왜 그러지?’ 하는 표정이 여실하다.
“너… 이 술 마셔 본 적 있니?”
과연, 예상대로 소령이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진다.
“…마실 만 하디?”
“예.. 비취각에 뽑힌 소녀들은 모두 음주 훈련 시기가 있습니다. 그때 조금.. 강렬한 향기와 뒷맛이 독특하여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향기와 뒷맛을 음미할 여유가 있었다고?
방금 내가 맛보느라 조금 삼켰다가 콜록댔던 75.3도 짜리 술 마시면서..?
으.. 이거.. 존심 상하는데..?
“…잔 하나 더 가져와. 같이 마시자.”
“그, 그건.. 저, 그 것만은 제발 용서를…”
“왜..? 너 이 술, 독해서 못 마시는 것도 아니잖아?”
“…언니들이 전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응? 대교하구, 소교가? 왜?”
“그게.. 저.. 저… 소녀가 자제를 잘 못하는…”
고개를 잔득 숙이고 더듬거리는데, 목뒤까지 붉어져 있었다.
흐… 짐작이 간다. 기집애, 아마 주사가 좀 있나부지?
그렇다면.. 흐흐.. 더 더욱 맥이고 싶어진다.
“술잔 하나 더 챙겨와서 앉는다. …실시!”
“조, 존명!”
울상을 하고 나가는 소령이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음… 소령이의 용모는 뭐랄까, 미소년 스타일..?
헤어스타일도 양 귀만을 살짝 덮은, 자매들 중 가장 짧은 단발에 이목구비도 어딘가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구석이 있다.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어떤 미녀를 묘사한 구절을 응용하면,
‘여자라고 보기엔 남자 같았고, 남자라 하기엔 너무나 여자다웠다’.. 맞나?
하여간 대충 그런 이미지의 아인데, 성격은 좀 고지식하며 요령이 없는 편이지만
그만큼(?) 솔직하고 거침이 없는 타입이었다.
그런 아이가 당황하여 모처럼(?) 수줍은 소녀의 모습을 보이니 웬지 더 귀엽게 느껴진다.
“자… 건배!”
주저하고 있는 소령이의 잔에 내 잔을 챙!하고 경쾌하게 부딪힌 다음, 내가 먼저 훌쩍 잔을 비웠다.
으-우우-크큭-!!
즉시 입으로 불길을 푸악-! 뿜어낸 다음 벽에 머리 박고 손으로 벅벅 긁으며 괴로워…하는 상황이 본래 이어졌어야 했겠지만,
나는 미리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버티며..
이를 악물고(?) 소령이에게 씨익-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으으.. 그놈의 ‘존심’이 뭔지…
속으로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겨우 작은 간장 종지 크기의 담겨 있던 양인데도, 그 것이 용암(?)으로 화하여 입안과 목, 그리고 배속을 타고 흘러간 기분이랄까..?
으후- 웃는 표정이나 제대로 지어졌는가 모르겠다.
소령이는 머뭇거리며 주저했지만 나의 무언의 압력
(난 너 땜에 마셨는데, 안 마시면 주욱어..라는 뜻을 내포한 살기 어린 시선)에 끝내 두 눈을 질끈 감더니..
원샷!
그리고는 감긴 두 눈을 뜨지 못한 채 하아- 하아- 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괘, 괜..찮니..?”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지만, 쓸데없는 질문이란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지금 소령이의 표정은 마치 뜨거운 국물을 후룩거리며 먹다가
‘아- 뜨거- 하지만 넘 맛있쪄…’ 하는 라면 광고 모델 같은 표정이랄까..?
…우쒸,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냐?
소령이는 벌써 양 볼이 벌겋게 달아 오른, 그러나 너무나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 잔 더 주리..?”
“아, 아닙니다. 곡주님.”
반사적으로 소령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술잔을 만지작만지작 하는 폼이 아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75.3 도… 으.. 그러나 천하의 진유준이 간단히 항복할 수는 없지..
좋아, 먹고 죽자..!!
나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내 잔과 소령이의 잔을 채웠다.
우쒸- 원샤-앗! 으쿠-푸우-!!
으으….
[ 주인님의 혈중 알콜 농도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라면… ]
닥쳐, 몽몽!!
으익-! 또 원샤-앗! 으크-으으..
으.. 이, 이제.. 일곱 잔..? 아니, 여덟 잔..인가..?
후… 속에서 일어난 불길은 이미 전신에 번져 대형 화재가 난 것 같다.
사방이 조금씩 흐릿해지면서.. 나는 마치 불길에 쌓인 채 불꽃 너머로 일렁이는 풍경을 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눈앞의 소령이를 보았다.
“헤-에.. 헤헤.. 곡주우니임- 소령인.. 곡주님이 넘, 넘.. 조아-요오- 헤헷..”
장난꾸러기 사내 아이 같은 웃음소리…
다행히(?) 얘도 취했나 보다.
“어- 그려.. 난도.. 글-타…”
“헤에… 언닛들.. 미령이이.. 보담두… 소령이가.. 더.. 흣헤헷..! 곡주니임..! 고옥주니임-!!”
“왜에..?”
“후헤헤헤-?!!”
독한 것.. 또.. 잔을 내밀어..?
그래.. 까짓 거 마셔라, 마셔…
에..? 에구구.. 잔이 넘쳤다.
…어-어랏-? 쨍-그랑!!
이런, 이런… 나 안주 그릇 하나.. 깨먹었다.
제기..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우째 이런 일이, 소주 서너 병은 마셔야 발생하는 일이 벌써…
소령이가 발그래한 낯빛을 하고 두 손을 모아 장난스럽게 날 가리켰다.
“후헤헤-!! 곡주니임! 수울- 약해에.. 헤헤헤..”
이 것이..? 우쒸.. 나도 한 잔 더..
커어어-!!
독하긴 독하다.
벌써 몇 잔 째인데.. 아직까지 입안에 화끈한 자극이 계속 느껴지다니..
으… 이 술,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다.
“곡주니임.. 그거.. 아라요오-?”
“또, 뭐…”
“전요… 곡주니임이이– 헤에.. 팔 네게… 이픈, 이러케….”
입은 이렇게 양쪽으로 찢어지고..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입을 손으로 옆으로 찍 잡아 당겨 보인다.
팔 네게, 입은 양쪽으로 쫙 찢어지고 송곳니 번득이며 눈은 뱀눈…
머리엔 뿔 달리고.. 날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 극악서생이라면 대충 그런 괴물의 이미지였다는 얘기였다.
차츰… 얘한테 왜 술을 못 먹게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주량 자체는 엄청나서.. 그 독한 술을 나와 똑같은 속도로 마셔대고도
버티는 힘(?)은 나를 앞선다.
뭐… 우헤헤-!하고 사내아이처럼 웃는 것도.. 속에 있던 말..
심지어 내 흉보는 것까지도 봐 줄만하다.
그런 정도는 애교로.. 음.. 실없이 헤헤거리며 꼬인 혀로 수다 떠는 모습도 그런 대로 귀엽긴 하다.
하지만… 그치만…
이 아이.. 차츰 내가 술을 잘 안 따라 주니까, 이젠 지가 혼자 막 따라 마시고 있다.
항복.. 백기 들고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늘어져 있는 나에게 소령이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평소 이렇게 많은 할말을 어떻게 참고 지냈는지..
처음 네 자매가 함께 비취각에 선발되었을 때 얘기하다가..
나 처음 보았을 때 얘기.. 처음 술 배울 때 얘기.. 언니들과, 막내와 계곡에 놀러갔던 얘기…
헤헤- 거리다가 때때로 지 말에 지가 웃긴지 깨륵 깨륵 웃는 소리도 내면서…
어느 순간에.. 필름이 끊겼는지 모르겠다.
설핏 눈을 떴을 때 방안이 빙글거리고 도는 와중에
누군가의 손.. 한 명이 아닌 것 같은 손들이 날 부축하여 어디로 이동하는 것도 같고…
또 어느 순간에는 소령이의 얼굴이 눈앞 가득 다가왔던 것도 같다.
약간 달뜬 표정의.. 귀여운.. 귀엽고..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