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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60화


대교는 자신이 빠져 나온 곳의 정경을 다시 떠올리는지 잠시 황홀한 표정이 되어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소리내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호호- 그 곳은 바로 본 곡의 3 대 금역(禁域)인 한룡소(恨龍沼)였던 것입니다. 비화곡 영토이기는 해도 무서운 영물이 살고 있다는 전설과 함께 접근이 금지되어 있던 한룡소… 후후- 어렸을 때 어른들이 장난으로 어린 저희를 겁주기 위해 종종 한룡소에 얽힌 무서운 전설을 들려주곤 했었지요. 그 전설 속의 괴물을 소녀의 손으로 해치우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도 따라 웃었다. 대교는 꽤나 기분이 묘하면서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TV의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여 어린 시절의 날 겁주던 구미호나 처녀귀신 같은 것들을 내 손으로 때려잡는다거나 하면 이런 기분이 되지 않을까? 웬지 성장한 자신이 대견스럽고 흐뭇한 그런 기분…

그나저나, 한룡소라면 이곳 본단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설마 정말 이무기가 살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주변 지형도 험악하고 독사나 독충도 많은 지역이라고 들어서 놀러갈 생각도 않았던 곳인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연못의 배수로가 비밀 통로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비밀 통로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몽몽처럼 첨단 장비를 동원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무지 꼭꼭 숨겨 놓았다는 건데… 음, 그걸 찾으면 더 좋을지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대교가 빠져나갈 루트는 찾았으니 다행이다. 진짜 비밀 통로는 시간 날 때 여유 있게 찾아보기로 하자. 대교가 어느 정도 목표 수준이 되면 일단 배수로를 통해 내보내기로 하고… 음, 강호에 내보낼 때는 혹시 모르니까 변장을 시키던가 얼굴을 뭔가로 가리던가 하고… 그리고 아무래도 불안하니 혈랑대 무사들이든 몇 명의 고수를 호위로 붙여주는 것이 좋을 듯하고.. 아니, 아예 새로운 신분을 줘서 비화곡의 모든 분타나 사마외도 세력이 대교를 뒷받침하게 해줄까..? 후후- 그런 것 두 괜찮겠군.

암튼, 암튼… 오늘 정말 다행이다. 대교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그 후 다시 일주일…

처음엔 잘 몰랐는데, 가만히 따져보니 다른 귀중한 보물이나 신기한 물건들 보유량에 비하면 성지에 있는 소위 ‘영약’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고 한 방에 엄청난 효능을 보이는 최고의 영약도 없었다. 짐작되는 범인(?)은 아무래도 원판이다. 그 동안 그 놈이 현재 이 몸의 체질 개선한답시고 좋은 건 다 주워먹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암튼, 그래서 영약을 좀 더 구해 오라고 총관에게 시킬까 어쩔까 생각도 했었는데.. 마침 쓸만한 것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대교가 때려잡은(?) 이무기! 예상대로 이무기 몸속에서는 ‘내단(內丹)’ 발견되었고 그걸 먹은 대교는 단숨에 엄청난 내공 업그레이드를 이루었다.

게다가 어제는 웬 마도인 하나가 여기 비화곡에 투신하면서 공청석유(空淸石乳)를 선물로 바쳐왔다. 마경신투(魔炅神偸) 취운성이라는 자였는데, 말이 좋아 신투지 그래봐야 도둑놈. 이 자가 최근 하필 독(毒)으로 이름 높은 사천당가(四川唐家)와 원한을 맺게 되어 여기로 튄 거라나?

약의 양은 기껏해야 두어 방울 정도였지만 예전에 그 해독제 공청석유(空靑石乳)가 아닌 최고 영약이라 하는 진짜 공청석유(空淸石乳)였다. 하핫-!

너무 기분이 좋아, 그 자가 비화곡에 정착할 수 있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했다. 후후.. 대교가 이무기의 내단을 충분히 소화해 내면 이 공청석유까지 먹여야겠다.

오늘은 또 구월화 가족 및 연인의 구출이 완료되어 비밀리에 이곳으로 후송 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대교를 성지에서 빼낼 루트를 찾은 이후에는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려 나가는 것 같아 요 며칠은 기분이 아주 좋다.

음.. 당분간은 급하게 처리할 것도 없을 것 같고 오늘은 지난번처럼 마을에 놀러 나 갔다 올까..?

“황성, 백상..!”

“하명하십시오.”

“뭐, 무엇보다.. 오늘은 지난번처럼 크게 일을 벌이지 않도록 해. 둘 다 성질 좀 죽이고…”

“명심하겠습니다, 곡주님!”

“그럼.. 가볼까?”

나는 지난번처럼 인피면구를 쓰고, 황성과 백상 두 혈랑대원을 대동한 채 본단을 나섰다. 미령이가 또 따라오겠다고 떼를 썼지만, 지난번 일을 들어 오히려 약간 야단을 쳐서 떨구어 놓고 가는 것이다.

가경촌의 소호루에 먼저 가보고 싶었기는 한데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 처음에는 가경촌 옆의 상월촌(相月村)이라는 마을로 가기로 했다.

근데 음.. 지난번엔 가경촌이 장날이라 그랬었나? 여기 상월촌은 어째 조용한 것이 별로 재미가 없어 보인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거리에 한가로운 행인들 몇 명이 오가고 있을 뿐 구경거리도 없는 것 같다.

“흠- 상월촌은 주로 농사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고 했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로군.”

나는 짐짓 민간 시찰 나온 곡주의 자세로 말하며 천천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짜증이 났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미령이를 데려올 걸 그랬나? 멋대가리 없는 사내놈들만 데리고 다니려니 무슨 분대 외출 나온 것처럼 썰렁하다.

아니, 아니지 혹시나 오늘 소호루의 이화와 만나서 잘만 하면.. 그래, 지난 번 그 여자 눈치 봐서는 모종의 섬씽까지 기대해 보는 것도.. 암, 미령이 안 데리고 온 것이 잘한 거야.

그런 음흉무쌍한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는데… 불쑥 눈앞에 이화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 안녕?”
“어멋-? 지, 진대가..?”
“그래 나.. 응..?”

뭐야 이거, 얼결에 인사를 건네긴 했는데 이 여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아- 이런 우연이… 이 곳에 친한 동생이 있어 놀러 왔었는데 여기서 진대가를 뵐 줄이야!”

뛸 듯이 엄청 반가워하는 이화.
그 뒤에 선 하녀인 듯한 행색의 여자 두 명과 함께 마악 길가의 한 집에서 나온 모양이다.
아무래도 마을에만 나왔다 하면 무조건 ‘어떤 각본’ 대로 일이 생기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진다.

“후우~ 그날 이후 진대가께서 다시 와주시기만을 학수고대했는데 어찌.. 너무 무심하십니다.”
“아, 저기.. 그랬어? 그게 좀 바빠서…”
“비록 저 이화가 미욱한 재주와 못난 얼굴의 계집이라 하나 한 번도 절 다시 떠올리지 않으셨단 말입니다?”
“그게.. 좀 바빴다니까..?”

어째, 길 가다가 단골 술집 마담 만난 중년의 자칭 ‘사장’이 된 듯한 기분이… 제기, 난 소호루에 외상 지고 피해 다녔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리 주눅이 드는 거지? 저쪽에서 예상 이상으로 적극적이어서 그런가..?

“본단에 계시는 귀한 분인 듯한데.. 오늘도 너무 바쁘셔서 소호루에 들를 짬이 없으신가요..?”
“…갈게, 이따가 저녁 때 들르지 뭐…”
“정말이십니까?”

어, 어…? 이화는 시녀들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은지 내 팔을 붙들고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고서야 날 풀어(?) 주었다.
이거야 원-!
저 정도 킹카가 먼저 나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려 올 줄이야. 윤동주 님, 서태지, 양희은 등의 인물들에게 다시 감사해야겠군. ‘표절’이고 뭐고 담엔 더 멋진 노래가사로 감동을 선사… 음, 나 이거 너무 뻔뻔해지는 거 아냐?

“허, 험..! 에.. 이번엔 그 뭐냐, 고룡촌(孤龍村)이란 곳에 가보자.”

내가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떼자 황성은 별 다른 눈치 없이 그냥 따라나섰지만, 백상 녀석은 공연히 피식거리며 웃는다.

“이화 아씨의 신색이 지난번보다 좋지 못한 것을 보니 그 동안 곡주님을 잊지 못해 상사의 병을 앓았던 모양입니다.”
“흠, 흠-! 고룡촌 가자니까! 백상 니가 안내해!”
“알겠습니다. 후후…”

짜식, 그냥 모른 척 할 것이지 따지기는..!

…고룡촌.
실은 다른 어느 마을보다 호기심이 생기는 곳이었지만 그 동안은 다소 꺼려졌던 마을이다. 주로 은퇴한 마도의 고수들이 은거해 있는 마을이라 본단의 고수들도 이 곳을 방문할 경우에는 행동을 조심한다고 들었는데… 근데 이거 뭐 이래?
말이 마을이지 좀 전의 산길 입구에 놓여진 3미터 정도 높이의 커다란 비석이 아니었으면 마을에 들어선 것도 몰랐을 것이다.
산길을 따라 가끔 초라한 오두막이 눈에 뜨일 뿐이었고 그 오두막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상월촌은 너무 재미없어서 소호루에 가기 전까지 여기서 시간이나 때울까 했더니 여긴 더 썰렁하구만. 더구나 모두 산길이라 다니기 힘들기만 하고…
제기, 그만 내려가야겠다. 대 낯부터 소호루 가서 술 마시기도 그런데 어디서 시간을 때운다지..?
응..? 뭐야, 왜들 그래?
갑자기 황성과 백상이 긴장하여 날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나도 함께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두 혈랑들의 시선이 머문 곳.. 약 10장(24M 가량)정도 떨어진 고목 나무 아래… 이 것 봐라? 언제부터 저 곳에 사람이 서 있었던 거지? 매우 작은 몸집의 기괴한 용모의 노인이었는데, 이 정도 거리까지 다가오도록 혈랑들이 몰랐다니 상당한 고수일 듯하다.
근데.. 사람이 뭐 저렇게 생겼냐? 키는 무지 작고 체격도 작은데 얼굴만 무지 크고 길다. 한 마디로 ‘말상’에 ‘대두’. 하긴 뭐.. 고룡촌 오면 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인물상이긴 하다.

“어느 고인께서 이 고룡촌을 찾으셨나 했더니..”

말상의 노인은 좌우로 가늘게 찢어진 두 눈으로 우리 주변의 수풀을 세심하게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노부의 이목으로도 쉽게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신법과 은신술을 지닌 자를 호위를 둔 사람이라면 이 비화곡 안에 독각와룡 곡주밖에 없을 듯 합니다만…”

주변 어딘가 짱 박혀있는 킬러 ‘흑주’를 말하는 모양이다. 아직까지 흑주를 알아보는 자는 없었다. 저 말상노인, 겉모습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수인 모양이다. 몽몽이 제공하는 내공 수치 그래프 수치만 봐도 거의 본단의 장로급 수준..!

“흠! 그러는 노선배는 누구 신지..?”
“응? 지금 노부에게 노선배라고..? 이상하군. 아닌가..? 이봐 할멈! 그 녀석은 아직 인가?”

말상의 노인이 누구에게 말하는 건가 의아했더니만, 갑자기 우리 바로 옆 수풀이 작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라고 경악하는 혈랑들의 바로 앞에서 말상 노인 못지않게 특이한 용모의 할머니 한 명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작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두 눈, 동그란 입술 모양.. 상당히 코믹한 인상의 그 할머니는 코앞의 혈랑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보인 채 말상의 노인에게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에구구.. 흑주 고것이 그 사이 더 공력이 늘었는지
이제 난 도저히 잡을 수가 없네요.”

“그래..? 할멈이 못 당해낸다면 흑주가 확실한 것 같은데?
근데 이 젊은이는…”

“나도 들었수, 음성은 곡주가 맞는 것 같은데.. 혹시 최근에 또 한바탕 난리를 치고 우리 부부를 잊은 건 아닌지..?”

혈랑들은 이 작은 노부부가 자신들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대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긁고만 있었고, 나도 이 노부부에 대해 파악해야 해서 일단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본래 원판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괜히 이 동네에 왔나…?

“그럼, 이렇게 한 번 해볼까..?”

그렇게 말한 말상의 노인은 갑자기 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웃-! 혈랑들에게서 나도 느껴질 정도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먼저 백상이 앞으로 나섰는데, 그의 바로 뒤에 황성이 바싹 붙어 서서 함께 걸음을 옮긴다.
최근 시범 보이는 걸 본 적이 있는 혈재진(血才陣, 2명에서 100명까지 다양한 구성 인원이 펼치는 혈랑대 특유의 연합 공격)을 펼치려는 것인가?

과연 백상이 먼저 말상의 노인에게 일장을 뻗었고, 다음 순간 번쩍! 번쩍!
내 눈으로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빠른 격돌!
그렇게 순식간에 진행된 대결의 결과…
조그만 말상의 노인은 멀쩡하게 서 있는데 저 건장한 혈랑 두 명은 노인의 앞과 뒤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악으로 버티고 있어 그렇지 아무래도 부상이 큰 것 같은데 말릴걸 그랬다.
아참, 그 할머니는…?

“에구구- 이 못된 것,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에 만난 사부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에…? 이 할머니 대체 언제 내 뒤로 온 거지?
급히 뒤를 돌아보니, 그 동그란 얼굴의 할머니가 허리를 두드리며 투덜대고 있었고 그 옆에 흑주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반 토막 나있는 건 흑주가 한 일인 모양이다.
그리고 방금 할머니의 대사로 보아 이들이 바로 흑주의 사부들인 모양이다.

“허허~! 늙은 것들이 곡주께 그만 무례했구려, 비화곡 내에서 인피면구를 쓰고 다니실 줄은 몰랐소이다.”

“호호호-! 오랜만이라고 장난 좀 쳤는데 불쾌 하셨습니까?”

장난..? 나도 어째 그런 것 같아서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불쌍한 혈랑들만 공연히 망가진 것 같다.

“후후.. 이 정도로 불쾌하긴 뭐, 근데 어쩌지? 나 정말 두 사람 생각이 않나.”

“쯧쯧..! 듣자니 최근에 곡에 수라혈불(修羅血佛)이 왔었다고 들었는데, 그 늙은 중놈이 끝내 곡주께 쓸데없는 말을 흘린 모양이군요.”

“우리 거두마군(巨頭魔君)과 소살파파(笑殺婆婆) 부부를 몰라보실 정도라니.. 그러시다가는 천형을 벗어 나기 전에 건강만 해치시겠소.”

지금은 곡주인 나를 걱정해주는 표정과 태도이지 만.. 이 동네는 하여간 너무 거칠다.
나는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아직도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서 있는 혈랑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정체를 진작에 알아챘으면서 ‘장난’이라는 명목으로 혈랑들을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클클~! 애초에 곡주와 혈랑대주의 얼굴을 보아 손속에 사정을 두긴 했다만.. 두 놈 다 제법 쓸만하구나. 노부로 하여금 오늘 양손을 다 쓰게 만들다니..!”

거두마군이라는 노인은 음침하게 웃으며 혈랑들에게 다가가더니 번개같이 둘의 등을 내리쳤다.
순간 울컥 피를 토하는 혈랑들.. 조금이 지나자 둘 다 혈색이 돌고 있었다.
역시 치료하는 것도 거칠군.

“노선배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셔서 감사합니다.”

“뭘~! 혈랑대주는 과거 백상, 황성, 초상현, 동광수 네 명의 이름을 가장 많이 언급했었다. 혹시 너희 둘의 거기 있느냐?”

“소인이 천인장 황성이며 이쪽이 백인장 백상입니다.”

“후후.. 과연 혈랑대주의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좀 더 정진하여 곡주의 손발이 되도록 해라!”

크게 당해서, 아무리 대 선배라도 별로 곱지 않은 표정으로 대하던 혈랑들이었는데, 뜻밖에 자신들을 알아주는 자가 조금은 얼굴이 풀어지는 것 같다.

“곡주, 아무래도 이 늙은이들 만나러 오신 건 아닌 듯한데.. 후후-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을 꾸미시는 건 아닙니까..?”

“아.. 뭐 별건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 근데 두 사람은 아직 그렇게 정정한데 어째서 벌써 은퇴한 거지..?”

“호호~! 정정하긴요. 이제 찬바람 불면 손발이 저려 잠을 못 이루는 퇴물들이랍니다.”

“뭐, 더 잘된 거 아닌가? 노부부가 긴긴 겨울 밤 서로 등 긁어주며 노부부의 은근한 정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니…”

“껄껄- 기억은 일부 잃었다고 해도 입담은 여전하시구려.”

기왕에 만난 거 그냥 바로 가기도 뭐해서 시골 노인 네들 대화하시는 방식을 흉내내 노마두 부부와 얼마간 쓸데없는 잡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자신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지 거두마군이라는 노인은 은근히 자신들이 흑주를 키울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흑주가 얼마나 완벽한 살수인지 자랑했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것만 생각해봐도 대단한 킬러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경호대상인 나에게조차 단 한마디도 말을 한 적이 없고, 오늘 보니 자신의 사부들조차 은근히 경계만 하고 있을 뿐 전혀 반긴다거나 하는 기색이 없다.
완전히 기계와 같은 무감정의 킬러.. 나름대로 멋은 있지만 정은 안 간다.

“흑주! 너 아까 정말 내 팔을 자를 생각이었느냐?”

동그랑땡 소살파파 할머니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으나 흑주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대답도 어떤 반응도 없이 사모의 말을 씹었다.

“클클클~! 그래도 할멈이라고 봐줘서 팔만을 노렸을 걸? 흑주를 그렇게 키운 것이 바로 우리 부부이거늘!”

“호호호-! 이 아이는 우리 부부의 최고 자랑거리, 그런 네가 진짜 손을 쓴다면 이 소살파파는 기뻐 웃으며 죽을 것이다.”

어이- 동그랑 땡 할머니와 말 할아버지. 그렇게 인자하게 웃는 표정으로 무슨 대화가 그래?
그리고 이런 무감정 킬러를 키운 사람들답지 않게 말이 많은 편이군, 그래.
음- 입만 열면 과거에 누굴 어떻게 해치웠네 일색의 수다를 듣고 있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리가 없었지만 이곳 인간들 그런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달리 갈 때도 마땅치 않고 해서 나는 처음 예정대로 이 마을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 거처라는 곳을 따라 가보니 아까 본 매우 초라한 오두막 중의 하나였는데, 거기서 약간의 술 대접을 받으며 오후를 보냈다.
갈수록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진 것이.. 아까는 어디에 짱 박혀 있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던 괴이한 행색의 인간들이 하나 둘 나타나 술자리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내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말투부터 본단의 간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장로들보다도 편하게 날 대한다.
기괴한 모습들에 차츰 익숙해지니까 오히려 여기서 가장 정상적인(?) 사람 사는 분위기 같기도 하고…
조금 있다가 소호루 가려면 여기서 너무 퍼마시면 안되겠다 싶어 술은 자제했지만 예상보다는 즐거운 자리였다.

음… 슬슬 자리 끝내고 소호루에나 가볼까?
에.. 그냥 어쨌든 약속을 했으니까 가는 거지, 딴 뜻은 진짜 없고..
난 술이나 조금.. 음.. 그래 술..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사이에 뭐 딴일 있겠어..?
그래.. 순전히 술만 마시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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