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64화
“자네, 전책이라고 했지? 손님이 술과 음식을 가져왔으면 하다 못해 밥상이라도 내와야 하는 거 아냐?”
“예? 아- 알겠습니다. 존명!”
전책은 뭔가 곤란한 듯 잠시 서서 고민하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가 버린다.
“소교, 저 친구 뭐 하러 가나 한 번 따라가 봐라.”
“예!”
짧게 대답한 소교가 재빨리 싸리문 밖으로 내달렸다. 세 자매가 소위 ‘특훈’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도 소교의 움직임이 상당히 빨라진 느낌이다.
“총관!”
“하명하십시오, 곡주님!”
“총관에게는 뭐 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요새 어때?”
“무슨 말씀이신지..?”
“일년 만에 만난 어여쁜 부인과 지내는 시간이 어떠냐는 말이야.”
“아, 예..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총관은 그답지 않게 조금 쑥쓰러워 하는 표정이 되어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린다.
“아주 깨가 쏟아져서 두 번째의 신혼을 보내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걸..?”
한 번 혼이 나서 그런지 총관은 힐끔 요리사들과의 거리를 재어 본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야, 사정을 모르는 자들의 섣부른 입방아일 뿐이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총관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그래, 아직까지는 좋겠지. 한참 어린 아름다운 부인이 싸움도 걸어오지 않고(못하고) 항상 곁에 있으니..
후후- 어디 그렇게 조금만 더 지내보구려.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거요. 타의에 의해 가벼운 다툼조차 없이 지내야 하는 부부생활이 어떤 것인지 말이야.
가능하면 월영당주를 본단으로 영구히 불러들이면 더 좋을 테지만, 그동안 소운연, 그녀는 활동적이면서도 치밀한 성격으로 월영당을 잘 이끌어 왔으므로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부서를 바꿀 수는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곡주님.”
“그래, 소교야. 전책이 나가서 뭐 하디?”
소교는 어쩐지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보고를 했다.
“장로님의 제자는 여기서 약 80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소교의 보고를 다 듣기도 전에 이미 전책은 싸리문 바깥에 나타났다. 맙소사, 그의 양어깨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두 개 메어져 있었다. 키 160CM나 될까 싶은 단신이지만 떡 벌어진 어깨하며 역삼각형의 체형이라 힘깨나 쓰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헌데, 쿵~! 쾅~! 소리와 함께 내려놓는 것들을 보니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마 긴 쪽은 지름 30CM 정도의 두께였으나 짧은 쪽은 지름이 7, 80CM는 되어 보이는… 기중기를 이용해 들어 올려야 할 것 같은 거대한 나무통이었다.
“허어- 전책의 신력(神力)은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총관의 말처럼 나 역시 감탄하고 말았다. 20세기의 천하장사, 혹은 역도 챔피언이라면 긴 통나무(길이 4-5M, 지름 약 30 CM) 정도는 어찌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책은 그 나무와 그보다 배 이상 무거운 통나무를 동시에 들고 80여 장(192미터 정도?)의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우리 일행, 심지어 요리사까지 잠시 일손을 놓고 지켜보는 가운데 전책은 도끼를 들고 먼저 길이가 짧은 (그래도 2, 3미터는 되는) 나무통 앞에 서더니 상체를 숙여 나무 위를 살폈다.
“나무의 결을 살피는 것입니다.”
총관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전책은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더니 그대로 찍었다.
퍽-!! 쩌쩍!!
그 두꺼운 나무가 일격에 깨끗하게 반쪽이 나버린다.
“거참-! 혹시 전직이 나무꾼 아냐?”
“나무꾼 맞습니다.”
“응..? 맞아?”
“소장로께서 4년 전 황산(黃酸)에 가셨다가 발견한 인재인데… 당시 나이 14세의 소년이었던 전책은 혼자서 나무꾼 서너 명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한 10여 분 지난 것 같은데 이미 전책은 둘로 쪼갠 통나무를 잘 다듬어 마당 안으로 들고 들어와 넓적한 쪽을 하늘로 향해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 늘어놓는 나무의자들은 길었던 통나무를 가로로 토막내어 만든 것들이다. 나무꾼에다가 목수까지 겸해도 되겠다.
반 농담으로 밥상 내오랬더니 아예 식탁 세트를 만들어 오다니… 땀을 닦고 선 전책을 새삼 살펴보니 내공 수치는 별로 높지 않다. 타고난 엄청난 힘에 일솜씨, 혹시 야후 장로는 저 친구를 제자가 아니라 ‘머슴’으로 데려온 거 아닐까?
“밥상 대령했습니다. 곡주님.”
두 개를 이어 붙여서 폭은 2미터 가까이 되고 길이는 3미터 정도인 통나무 탁자를 ‘밥상’이라고 하니, 틀린 말이 아닌데도 어쩐지 우습다.
“수고했어. 자네도 거기 앉아서 우리와 함께 요리를 먹도록 해.”
“예? 제, 제가 어찌 감히 곡주님과 겸상을…”
“앉는다. 실시!”
“존명!”
그 사이 요리도 상당수 준비되었다. 나는 요리사와 보조를 제외한 일행을 모두 자리에 앉게 한 후 상좌에 앉아 여유 있게 술 한 잔을 받았다.
음..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되었는데 꽤 잘 참네..?
어디 집안을 한 번 볼까..?
톡!톡!톡!톡!(몽몽을 네 번 두드리면 내가 마우스로 명령을 입력하겠다는 뜻임.)
일단 ‘마우스 입력 모드’가 되면 보통은 내 왼손이 노트북에 주로 장착되는 ‘터치 패드’가 된다. 나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조작하여 눈앞에 떠 있는 메뉴 중 ‘감마선 투시’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순간, 눈앞으로 회색 빛이 번지며 전체적인 시야는 흐릿해졌지만 대신 이 상태에서는 벽 너머 방안의 인간은 붉은 빛을 띤 그림자로 보이게 된다. 물론 내가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몽몽이 스캔한 정보를 내 망막에 투영하는 거지만…
그나저나 방안에 아무도 없네? 이 노인네 언제 방에서 나와 사라졌지?
“아니, 곡주께서 웬일이시오?”
외출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싸리문 밖에 등장한 야후 노인네가 천연덕스럽게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식탁에 앉아 있던 좌중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하는 것을 가벼운 고갯짓으로 처리한(?) 야후 장로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내게 포권해 왔다.
“거참, 곡주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본 장로를 찾으셨는지 모르겠구려.”
“하하- 무슨 일은, 보시다시피 오랜만에 소장로와 술 한 잔 하러 왔지. 자- 이리 와서 한 잔 받으시오.”
“본 장로의 손발을 묶어 놓으신 분이 이제 와서 술 대접이라니 이거 무서워서 어디…”
“술병 든 사람 팔 떨어지겠소.”
그제야 야후 장로는 못이기는 척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아 술을 받는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외견상의 ‘곱게 늙은 관운장’ 분위기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 그 향기에 흠칫 놀라더니 기대에 찬 표정으로 한 잔을 훌쩍 마신다.
“오- 이, 이런 상품의 검남춘(劍南春)은 처음이로다.”
숨김없는 감탄성을 터트리며 야후 장로는 내가 따라주는 술을 3잔 연속으로 원샷해 버린다.
“좋구려, 정말 좋은 술이오.”
삐쳐서 방안에서 나오지도 않다가 몰래 나와서도 시비조이던 때는 언제고, 이젠 연신 요리와 술잔에 손이 가느라 정신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얼굴은 ‘안돼, 이런 먹을 것 공세에 넘어가서는-!’ 하는 결의(?)와 ‘그래도 너무 맛있군. 역시 곡주 전용 요리사로다’라는 감탄의 표정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한다는 점이다.
야후 장로는 곡 내에서도 소문난 술꾼이고 미식가이다. 일 년의 3분의 1 정도의 기간을 바깥 나들이로 보내는 것도 다 소문난 먹거리를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노인네가 주량도 쎄서, 내가 약한 홍포도주(20도) 한 잔 마실 때 야후 장로는 검남춘(60도), 오량주(65도)를 번갈아 한 잔씩 마시는 것이었다.
총관이 업무 중(?)에는 안 마신다고 하여 결국 가져온 술은 나와 야후 장로 둘이서만 마시게 되었는데… 독한 술만 계속 마신 야후 장로는 차츰 동공이 풀리고 표정에 조심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슬슬 청문회(?) 시간이 돌아 온 것이다.
“근데, 다른 제자 둘이 보이지 않네?”
“에- 그 둘은 아까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마 모레쯤 돌아 올 겁니다.”
“심부름..?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세 번째 제자인 전책은 왜 아까 코피를 흘리고 있었지..?”
“곡주~ 설마 본 장로를 의심하시는 것이오? 이 소진광,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을 주워담는 소인배가 아니오.”
“에이- 누가 그를 소장로가 때렸다고 했소?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도대체 누가 야황살후의 세 번째 제자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말이오.”
“그야 뭐, 나 아니면 녀석의 두 사형들 밖에 더 있겠소. 첫째와 자유 대련을 시켜 봤더니만…”
이 것 봐라..?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나? 술 취한 상태에서도 줄줄이 대답 잘 하네?
타겟을 한 번 바꾸어 볼까?
“이봐 전책, 자네 사부께서는 대련을 자주 시키나?”
“그리 자주 하는 편은 아닙니다. 오늘 만 해도 제가 사부님이 아끼는 술병을 깨지만 않았어도…”
“응..? 아니, 뭔가 실수하면 대련을 시켜..?”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우히~ 드디어 꼬투리 잡았다.
“소~장~로오-?”
야후 장로는 실언을 하고 나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얼굴로 안절부절 못 하는 전책을 ‘너 이따 죽었어!’라는 눈빛으로 갈구고 있다.
“허,험!험! ..거, 곡주의 금제는 본인의 손으로 누굴 때리지 말라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내 손으로는 아무도 때리지 않았소이다.”
역시, 몰리니까 즉시 ‘배째라’ 군.
“훗-! 좋소, 좋아. 그 정도 편법은 인정해 주지.”
“곡주..?”
내 시원스런(?) 반응에 야후 장로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앞으로 있을 화천루 측과의 비무 때는 소장로도 강호에 나가 형주까지 가야 할 텐데, 그 때 장로의 호위를 맡을 자들까지 손발이 묶일 수는 없지.”
“…….”
“곡 내 기본 법규가 있어, 이번에 소장로께도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소. 자- 한 잔 더 받으시오.”
“허허- 내가 그 동안 곡주의 진심을 오해했나 보구려. 이번 외유 후에는 이 소진광과의 옛정마저 잊은 줄 알았소이다.”
“그럴 리가요. 자 우리 건배합시다.”
훗-! 듣던 대로 화내는 것만큼이나 풀어지는 것도 빠른 노친네로군.
남북 화합의 현장을 보는 듯이 흐뭇해하는 다른 일행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야후 장로와 건배를 했다.
엉겁결(?) 화해를 시작으로 우리는 오후 내내 서로 웃고 마시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장로와 총관은 주로 정치 얘기..는 아니지만 비슷한 강호 정세를 논하며 (난 주로 듣고) 때때로 명문을 자처하는 정파에 의해 수많은 사마 외도인이 억울하게(?) 살상당한 ‘비극적인 역사’를 들먹이며 흥분하기도 하고, 비화곡을 주축으로 한 마도의 영웅들이 더러운 정파의 무리들을 무찌른 전설적인 무용담을 얘기하며 흐뭇해하기도 한다.
대화 내용이 좀 그래서 그렇지 겉보기에는 참으로 평화스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분위기에 동화되었는지 이따가 사부에게 죽을 지 살지 모를 전책도 긴장이 많이 풀어진 모습이었고, 소교는 요리사에게 뭔가 열심히 물어보며 배우고 있고, 소교, 소령이는 저희들끼리 뭐라 수다를 떨고 있고…
아, 아- 어쨌든 나쁘지 않군.
소위 정파를 중심으로 한 강호상의 사람들은 이곳 비화곡의 최고 간부들의 술자리, 그러면 무조건 어두침침한 동굴 같은 곳에서 ‘크학학!’, ‘으흐흐흐~!’, ‘켈켈켈~!’ 같은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벌거벗은 여자 몇 명씩 옆에 차고 침 겔겔 흘리며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장면을 연상하겠지? 예전, 싸구려 무협 영화나 저질 무협 만화에서 자주 선보였던 그런 장면들.. 악당들은 다 이래.. 라는 식의 설정.
하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뭐, 원판 같은 놈도 있긴 하지만 아닌 사람도 있고.. 사실 어디나 다 그런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