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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65화


보통 시중에 도는 무협물 속의 악인들은 생긴 것부터 음침 독랄하고 모두 비열한 음모와 간악한 수법의 무공만 쓰는 인종들로 표현된다.

특히 무협 만화에서는 이 비화곡처럼 정파 최대의 위협 조직은 십중팔구 어둡고 음침한 동굴 같은 본거지 깊숙한 곳에 복면 뒤집어쓰고 모여 앉아 무조건 ‘중원 정복!’을 외치는 광신도 무리들로 묘사되어 왔다.

그런 점은 이 시대의 강호도 만만치 않다. ‘성지’에도 몇 권, 내(원판) 처소의 옆방에도 정파 발행(?)의 서적이 몇 권 비치되어 있다.

그걸 보면, 비화곡과 여타 사마 외도 단체들은 ‘나쁜 악당’들의 무리라기보다, 아예 사람이 아닌 ‘살인 괴물 도깨비’ 집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는 짓이야 내가 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람도 아니라는 건 좀 그렇다. 무슨 60, 70년대 ‘반공 교육’도 아니고…

게다가 그런 말을 하는 정파라고 해서 모두 정직하고 협의(俠義)에 입각해 사는 사람들도 아닐 것이다.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나 같은 경우 이제껏 20세기에서 이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종로의 쌍칼, 무교동 도끼, 사시미.. 이런 식의 별명을 가진 깡패나 그 외 어떤 ‘조폭’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날 이용해 먹고 속이고 뒤통수를 친 몇몇 인간들은 모두 멀쩡한 얼굴로 나름대로의 사회적인 위치를 차지한 채 어둠이 아닌 양지에서 활동하고 살아가는.. 말하자면 같은 ‘정파’인들이었다.

그런 자들과 비교하자면 지금 이 자리의 총관이나 야후 장로가 비록 한 살인하고 성질머리 더럽기는 해도 싸가지 없지는 않고 어떤 면에서는 훨씬 사내답고 당당한 면모가 있다. 음, 어느 사이 이곳에 물들었나? 나도 모르게 편을 들게 되다니…

“허허~! 곡주, 이번엔 내 양녀 연이와 총관의 사연을 한 번 들어보시겠소?”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지루해 한다고 생각했는지 야후 장로가 그렇게 말을 걸어왔고 총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만류한다.

“소장로님 새삼스럽게 그 일은 왜…”

“껄껄껄-! 곡주, 저기 세 자매들도 간수를 잘 하셔야 할 거외다. 여제자를 안방에 들여앉힌 전력을 가진 사부를 두고 있느니..!”

“마, 말씀이 과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부인인 소운연 당주는 본래 총관의 제자라고 했다. ‘혈마검호’라는 강호 상에서 한참 잘 나가던 명호를 버리고 비화곡에 들어오기 직전에 거둔 유일한 제자.

첨부터 그녀를 잘 키워(?) 어찌어찌 하려는 생각에 제자로 삼은 건지, 아니면 오래 함께 지내다 보니까 눈이 맞아 그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정파는 물론이고 사마 외도 역시 사제간의 예의가 엄격한 이 시대에서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라고 한다.

그 사연도 재미있을 것 같긴 했지만 순서상으로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후후- 연애 얘기보다는 난 총관이 처음 마(魔)의 길로 접어들게 된 사연을 듣고 싶은 데..?”

총관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망설였지만 옆에서 ‘장인 어른’인 야후 장로가 자꾸 ‘그럼 제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하라’고 놀리자 하는 수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세월의 흐름이란 뜬구름 같아. 어느 결에 20년이나 지났군요. 열여덟의 나이로 부친의 가업을 잇게 된 그 때로부터….”

총관은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감상적인 기분이 드는지, 새삼 술을 청해 한잔 들이켰다. 총관의 굵직한 과거 경력 정도는 들어 알고 있으나 자세한 사연은 모르고 있었던 듯 소교 이하 세 자매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다.

총관은 자신의 이야기라 처음엔 다소 어색해하는 모습이었으나 사이사이 내가 따라 준 몇 잔에 술의 도움을 받아 술술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창(武昌)이란 지방에서 태어나 거기서 18년을 살아온 ‘지천공’이란 이름의 소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부친의 뒤를 이어 가업인 ‘표국( 局)’을 이어받아 나이에 비해 뛰어난 수완으로 가업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지천공 소년.. 그러던 어느 날 비극이 찾아오니.. 원수들에 의해 표국을 빼앗기고 모친과 누이들은 노예로 팔려 가고.. 간신히 자신만 탈출… 복수의 맹세… 무예를 익히기 위한 고행의 길… 드디어 은거한 어느 마인의 무공을 얻고…

음, 나도 전부터 여기저기서 조금씩은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고 또 여타 무협지에 비해 특이점이 없었으나 본인의 입으로 자세히 들으니 새로운 맛이 났다.

총관이 드디어 무공을 모두 마스터하고 강호에 돌아와 잔인한 복수를 행하는 이야기까지 마쳤을 때는 이미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내친김에 소운연과의 러브스토리도 듣고 싶기는 했으나 싫어하는 거 억지로 시키기도 그렇고, 마침 처소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기 때문에 나는 자리를 끝내기로 했다.

아쉬워하는 야후 장로를 뒤로하고 나는 일행을 이끌고 돌아왔다.

헌데 한참 산길을 내려오던 중 어디선가 희미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그 것이 전책의 음성 같다는 느낌이 든 건 기분 탓일까..?

나는 약간 마음에 걸리던 야후 장로와 관계를 회복시켜 놓아 기분 좋게 처소로 돌아와 침상에 누웠다.

사실은 나중에 대교 처리 문제가 대두될 때 한 사람이라도 더 내 편이어야 하는 필요성을 느껴서 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일이니…

침상에서 나는 벽을 향해 옆으로 기대 누운 채, 아까 생각난 재미있는 작업을 시작했다.

눈을 감고 ‘가상 현실’ 기능을 켠 후, 데이터를 불러다 편집하기 시작했다.

후후- 오늘 총관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강호비망록(江湖備忘錄)’, ‘기인열전(奇人列傳)’ 같은 책(최근 100년 사이에 벌어진 큰 사건들을 소개한 이 시대의 대중 잡지들)에 수록된 총관의 행적 등으로 살을 붙이자. 그리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싶은 건 내 임의로 조금 편집 수정하고… 그래서 무협 영화 시나리오를 짜보는 거다.

제목은 뭐가 좋을까?

‘혈마검호 광야에서 울부짖다.’..는 어째 운동권 영화제목 같고,

‘복수혈전’..은 너무 흔하고,

‘동방불패’..는 말도 안 되고,

‘마도영웅전’..도 좀 약하고…

에이-! 귀찮다. 제목은 나중에 정하자.

대충 스토리 라인을 정리한 후, 전체 스토리를 다시 몇 번 편집하고.. 난 꽤 공을 들여 작업을 했다.

음… 일단 어느 정도는 된 것 같은데 한 번 보기로 할까?

내가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먼저 지금까지의 데이터 편집창이 모두 사라지고 눈앞이 온통 검은 배경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럴 듯한 자막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정통 하이테크 SF 무협!(효과음 두둥~!)

은원의 강호를 종횡하는 복수의 검객!

(효과음 만빵으로 콰쾅~~!!!)

血魔劍豪!!!(가제)

주연 – 지천공(지천공 역), 어린 지천공(어린 지천공 역).

원작 – 지천공.

각본.감독 – 진유준.

제작 – 몽몽(정식 명칭 NSBG3274001)

음악 – 몽몽.

촬영 – 몽몽.

편집 – 몽몽. 진유준.

공급 판매원 – 그 딴 게 어딨겠나. >

자막이 끝나자 서서히 화면이 밝아 오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

이 자막은 나중에 뺄까? 어째 촌스럽군.

하여간 웬 커다란 저택을 내려다보는 구도로 시작한 화면에서 서서히 카메라(?)가 저택의 한 부분을 확대해 들어가고 있다. 매우 크고 화려한 저택.. 그러나 어쩐지 침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람들.. 이윽고 화면은 저택의 한 방안을 비춘다.

비단 금침을 덮고 누워있으나 병색이 완연한 한 초로의 노인이 있고, 그 옆에 한 소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병구완을 하고 있다. 지금의 얼굴을 어느 정도 연상할 수 있는 단정하고 성실해 보이는 인상의 소년.. 20년 전의 총관 지천공이다.

“공아..!”

어느 순간, 노인이 소년을 불렀다.

“예, 소자 여기에 있습니다.”

“공아.. 이제, 이제 이 아비는 틀렸다.”

소년의 두 눈에 핑- 하고 도는 눈물.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흑!”

“내.. 비록 이렇게 가나.. 네가 있어 안심을.. 부디 우리 금마표국(金馬 局)을… 네가.. 네가… 헉!(꼴 깍!)”

“아,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이~~!!하는 부르짖음이 울려 퍼지며 화면은 서서히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바뀐다. 슬픔을 딛고 꿋꿋하게 장례식을 진두 지휘하는 소년 지천공.

조금씩 클로즈업되는 그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굳건한 의지로 뭉쳐져 있는 듯 보인다.

표국을 물려받아 운영하는 장면이 짧게 짧게 이어진다. 아직 앳된 소년이나 당당한 태도로 명령을 내리는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표국의 구성원들, 간간이 별채로 여겨지는 곳의 기둥 옆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서서 그런 광경을 보고 있는 화면이 나오기도 한다.

척 보기에도 부유해 보이는 손님들이 줄을 잇고.. 강건해 보이는 금마표국의 표사(士)들.. 곳간에 쌓이는 재물들…(한 마디로 잘 나가고 있다는 거다.)

그러던 어느 봄날.(창가에 어른대는 꽃잎을 비추는 화면이 그런 느낌을 준다.)

“얘야, 공아..!”

“어머니 오셨습니까?”

탁자에서 엄청 큰 주판을 놓고 뭔가 열심히 계산 중이던 그가 지체 없이 계산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를 반긴다. 완전히 소년티를 벗은 그의 외모로 보아 벌써 2-3년은 후딱 지난 것 같다.

“오늘은 내가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단다. 들어주겠니?”

“무슨 말씀이든 하세요. 어머니.”

서로를 부르는 음성에서 사랑과 정이 흘러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모자다.

“성천표국의 성안동 국주님께서 글쎄 우리에게 혼사를 제의하셨지 뭐냐.”

“오, 그런 기쁜 일이. 민이 누님이 드디어 시집을 가는군요.”

“얘는, 성국주께는 아들이 없지 않니. 혼사는 네가 하는 거야.”

“예? 아, 아니 전…”

웬지 떫은 감 씹은 표정이 되어 머뭇거리는 청년 지천공,

그러나 어머니에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윽고 화면은 웬 여자를 비춘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는데도 그리 건방져 보이지 않는 미모에 매우 날씬한 몸매를 가진 미녀는 시녀를 대동하고 금마표국 건물 사이를 걷고 있다.

아름다운 호숫가에 세워진 정자에 우수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청년 지천공. 주변에 이유 없이 버들잎 같은 것이 날리고 있다. 그 분위기 속으로 좀 전의 미녀가 나타난다.

“상공..! 절 찾으셨다고요.”

“아, 성소저. 이리 오시오. 어려운 걸음 하게 하여 미안하오.”

“별 말씀을, 지상공께서 찾으시는 데 천리길인들 다하리까.”

사랑에 빠진 여인의 시선을 지천공은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이다.

“소저.. 실은 오늘 내가 매우 꺼내기 힘든 말을 하려 하고 있소. 부디, 오해 없이 들어주기 바라오.”

그의 표정과 음성에서 뭔가 느낀 듯 불안한 표정이던 여자의 표정이 이내 경악으로 굳어진다. 조금씩 화면이 멀어지며 대사는 들리지 않지만 서럽게 우는 여자에게 뭔가 이런 저런 변명을 하는 지천공, 끝내 뛰쳐나가는 여자, 안쓰러워하는 표정의 지천공.

여기서 화면은 실내에서 지천공과 그의 어머니 둘이 있는 장면으로 바뀌어.

“공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성소저가 갑자기 몸이 아파 혼사를 미뤄야겠다는 연락이 왔구나.”

“하는 수 없지요, 어머니. 혼사야 언제고 치르면 되는 것이고 저도 마침 오랫동안 표국을 비워야 하니 차라리 잘 되었어요.”

“후우- 공아야. 꼭 그 서역 상인들과 거래를 해야겠니?”

“그럼요, 어머니.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우리 금마표국은 성천표국을 능가하는 중원 제일의 표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을 믿으라는 듯,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의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고 미소짓는 청년 지천공. 표정에 자신감과 야망이 충만한 모습이다.

“뭣이-? 그 놈이 끝내..?”

악역 전문 배우 티가 팍팍 나는 초로의 사내가 부하의 보고를 듣다가 화를 참느라 씩씩대고 있다. 얼마간을 분을 삭이며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부하의 귀에 다 대고 은밀한 명령을 내린다.

깊은 심해처럼 어두운 밤.

자신의 침상에 앉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지천공 청년은 인기척을 느끼고 문가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엔 그가 호숫가 정자에서 결별을 선언했던 미녀 성소저가 서 있다. 당황한 표정의 지천공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몸에서 스륵 옷가지가 떨어져 내린다.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진한 청년 지천공.

흠.. 총관도 이럴 때가 있었군 그래.

그 후의 장면은 마치 ‘동방불패’의 후반부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연걸이 오밤중에 ‘동방불패(임청하)’를 찾아갔다가 그녀(그의 애첩)와 쿵따리 샤바라~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이연걸의 사제들은 동방불패에게 아작 나고.. 그 상반된 두 가지 사건이 번갈아 보여지는 장면 말이다.

지천공이 야밤에 쳐들어 온 여자의 육탄 공세에 무너져 그녀와 황홀한 밤을 보내는 장면과 그녀의 아버지가 몇몇 인물들을 모아 놓고, 한껏 사악한 표정으로 음모를 꾸미는 모습이 순간순간 엇갈리고 있다.

흠.. 몽몽 녀석, 여기까지는 진행이 제법 깔끔한 걸? 질질 끌지 않고 간결하게 상황을 묘사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20세기 영화 방식’이라는 전제조건을 걸어서 그런지 화면 구성 자체가 나에게 매우 친근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영상 자료 요청하면 항상 있는 그 대로 사실적으로(?) 보여 주더니, 이번 영화에서의 배신은 조명과 카메라 각도로 ‘은근한 예술미’를 살리는 데 주력하는 것 같다.

응-? 근데 화면이 갑자기 왜 이래? 오래된 3류 극장의 필름처럼 갑자기 치직 거리고 비가 오네?

야 임마 몽몽. 그런 것까지 20세기 따라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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