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71화
미령이는 짐짓 생각을 해보는 듯 딴청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외모는 심지어 여인들이 질투할 만큼 아름다우며, 성격도 세심하여 저 미령일 너무나 잘 챙겨 주고… 천하인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학식과 재능으로 미령이를 위해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 줄 수 있으며… 일신의 무공은, 그건 중요치 않지요. 무공을 쓰지 않아도 모두의 존경을 받는 분일 것이고, 게다가 미령이가 한 가지는 앞서는 것이 있어야 하니까, 후후- 그런 분이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원판’ 얘기하는 거 같지?
앙큼한 것. 그렇게 말하며 먹이 달라는 고양이 눈빛으로 쳐다보면 어쩌겠다는 거냐.
“…다 좋은데. 미령아, 그런 남자가 성질이 거지같으면 어쩌지? 예를 들어 다른 사람 목숨을 파리만도 여기지 않는 성격 파탄자라면..?”
“어머-? 미령이만 아껴 주면 되지, 그게 무에 중요하겠어요?”
“……….”
싱겁게 웃어는 주었지만, 너 ‘고양이’ 띠지..? 라고 묻고 싶어진다. 예로부터 예쁘고 사랑스럽기는 하나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고양이..!
“…소령인, 어때?”
언니 소교에게 도움을 청하는 표정을 짓다 동생 미령이의 발언을 들으며 자신도 뭔가 생각해 보는 눈치이던 소령이가 흠칫 놀란다.
“소령인 남자… 잘 모르겠.. 생각을 못해 봤습니다.”
“전혀? 한 번도..? 소령이에게는 멋지다고 생각되는 남자가 없단 말야?”
그래도 명색이(?) 사춘기 나이일 텐데, 생각도 안 해 봤으려나 싶어 좀 더 추궁해 보았더니 곤란한 듯 약간 몸을 꼬며 얼굴을 붉힌다.
“후후- 있구나.”
부담 가지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그래도 망설이며 이젠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얘가 또 정말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구만.
“부끄러워할 거 없어. 누구나-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생각하는 것이 정상인 건데 뭐.”
그건 정상이지만 그런 거 캐묻는 건 별로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만 험,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그게 그러니까..
“저, 전에… 예전에 들었던 비취각주님 말씀이 생각나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땐…”
음..? 무슨 소리야?
“비취각주? 그녀가 전에 뭐라고 했었는데?”
“소령인 잘 몰라도 그냥 있으면… 남자들이 다 알아서 할 거라고… 처음엔 무섭고 아플지 몰라도… 곧 기쁨을 알게 될 거라고…”
“………..”
얘가 이거, ‘이상형’에 대해 얘기해 보랬더니 무슨 소리야..?
“그 날 아침.. 곡주님 침상에서 순간적으로… 그대로 안겨도… 괜찮다는… 생각을…”
‘몽몽’까지 안 가도 나 진유준 자체 데이터 검색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기다. 띠리리- 철컥, 철컥~!
소령이가 내 침상에 오른 날- 백일취 사건- 공포의 소령이- 끔직한 숙취-
“너, 설마.. 지난번에 나하고 백일취 마신 날. 그 날 의식이 있었다는 얘기냐..?”
“아, 아뇨. 그 다음날 새벽… 곡주께서 소령이 잠 깨우지 않으려 애쓰시며 일어나실 때 그 때 저도 잠깐 잠이 깨어서…”
..이론 제기, 그 날 내가 창틀에 머리 박는 거 본 건 소교만이 아니었군 그래.
“그 날 처음.. 곁에 있어 좋은 남자…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있으면 거의 동화 속의 ‘요정’ 같은 아인데, 말시켜보면 ‘돌발 소녀’에 ‘사오정 걸’로 변신해 버리는 소령이. 그래도 오늘은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은 셈인가?
“알겠다..! 더 이상 말 안 해도 돼, 소령아.”
나름대로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더듬거린 건 그렇다 치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얼굴이 달아올라 있다. 문득, 물어 본 내가 미안해지는 것이 ‘다 내가 죽일 놈이지.’ 하는 생각이 든다.
“허, 커험-!! 험, 험-! 에- 그게 말이야. 너희들이 아직 너무 어려서 그래. 세상에 괜찮은 남자가 아주 많단다. 그러니까… 앞으로 살다 보면 생각에 변화가 있을 때가 있을 거야. 굳이 어린 시절 생각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암-”
세 자매, 그리고 나 자신에게까지 겸해서 짐짓 ‘설교’를 한 번 해봤다. 오늘 얘들한테 공연한 질문을 해서 내 안의 ‘왕자 AIDS’가 재발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분위기가 다소 민망해졌지만 하지만-! 내친걸음이다. 실은 가장 궁금했던 ‘소교’가 아직 남아있다. 표정을 수습(?)하고 자신을 돌아보자 소교는 비교적 침착한 표정으로 잔잔한 미소를 떠올린다.
“저도 곡주님 같은 분이라면….”
어떤 남자라도 그런 말 들으면 아주 싫은 기분은 아닐 거다만, 그래도 오늘 너까지 그러면 실망인데..?
“하지만.. 소녀는 꿈이 작아, 보다 평범한 사람을 생각한 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이라도 그저 절 아껴주고 제가 차려주는 작은 밥상에 행복해하는 사람이라면…”
너 정도가 차려주면 웬만한 남자는 다 행복해할 거다, 라는 말을 참았다. 그런 애매한 농담으로 분위기 깨기 싫어서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침에 눈뜨면 옆에 있어주고, 겨울에 언 손을 잡아 따뜻하게 해주는 넓은 손… 나이를 먹고 세월에 채여 변해버린 몸을 손수 씻겨 주는 다정함으로.. 몸이 아플 때나.. 언제까지나.. 죽는 그 순간까지 곁에서 지켜 주는…”
………그리 특징 있는 남자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지금 소교의 표정은 누군가를 콕 찝어 그리워하는 것 같이 보인다. 이번엔 정말 현재 주인인 나(원판 포함)는 아닌 것 같은데 누굴까..?
“아- 제가 그만….”
문득 ‘자기만의 세계’에서 깨어나는 소교.
“후후- 이제 보니 소교가 가장 평범한 듯한, 그러나 찾기 어려운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찾기 어려운.. 역시 그럴까요..?”
“음, 내가 남자라서 아는데. 살다 보면 소교가 말한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어. 한참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그럴지 몰라도, 그 뜨거운 사랑을 과연 죽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가져가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런지….”
실제로는 소교와 나이차이 10년도 안 나는 인간이 세상 다 살아본 것처럼 얘기했는데도, 소교 이하 자매들이 ‘존경’의 눈으로 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잠시 뒷머리를 긁으며 민망함을 삭였다.
헌데 그보다, 소교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실은 저 아이가 바로 위 대교와 가장 닮은 외모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외모 상으론, 대교에서 빵빵한 몸매를 빼면 바로 소교다. 그렇다고 소교 몸매가 영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뭐랄까.. 두 동생들은 물론이고 언니인 대교조차 어쩐지 그 상태에서 더 자라고 변할 것 같이 느껴지는데, 소교는 이미 완성된 느낌이랄까? 앞으로 더 나이를 먹어도 저 가냘프고 보호해 주고 싶은 몸매와 분위기를 유지할 것 같은… 만년 소녀라고 할까?
암튼 용모는 그렇다 치고, 성격 측면에서도 대교에서 대교가 가끔 보이는 카리스마적으로 대담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빼면 또 소교다.
그래서, 나름대로 개성이 강한 소령이와 미령이보다는 소교의 생각이 가장 대교에 가까울 것 같았다.
음, 어쩐지 대교에게 직접 ‘이상형’을 물어본다거나 하기 뭐해서 그랬는데, 대교도 소교처럼 ‘평범해도 같이 있어주는 남자’가 이상형이라면… 그럼 지금의 나는 대교에게 ‘빵점 남자’인 셈이다.
벌써 몇 달째 지하 동굴 속에 갇혀있게 해 놓고, 약만 드립다 먹이며 혼자 외로이 무공을 익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소교 말처럼 아침에 눈뜨면 항상 곁에 있어 주는 남자..는커녕 가끔(?)씩 와서 등짝 때려 놀라게 하는 유치한 장난이나 치고.. 이거 곡주만 아니면 그냥 확-!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너희들도 ‘패도광협 유운일’이란 인물 알고 있니?”
“예, 300년이 넘는 전대의 고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사금마도결..이라는 희대의 절기를 지닌 절정고수.”
미령이었다. 갑자기 묻는 말인데도 대답이 빠르군.
“바람 같고, 구름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분. 역사상 그 분처럼 정사마(正邪魔) 모두에 많은 적을 가진 분도, 또 정사마 모든 파에 가장 많은 친구를 만든 분도 없었다고 합니다만….”
소교의 대답이다.
“당시의 선대 곡주님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엔 소령이다. 자매들이 스스로 앞다투어 입을 열 때는 보통 큰언니 ‘대교’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대교가 평소에 자주 얘기하디..?”
“패도광협 유대협과 청명신니의 이야기는 본래 저희 어머니가 대교 언니에게, 그리고 저흰 대교 언니에게 항상 듣고 자랐습니다.”
소교가 먼저 그렇게 말하자, 소령이와 미령이도 고개를 끄덕였고 미령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교 언니는 제가 잠이 안 온다고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항상.. 전 사실 이야기보다 대교 언니와 있고 싶어서 그랬는데.”
연년생인데도 이 아이들에게 대교는 ‘언니’보다 ‘엄마’ 같은 모양이다.
그보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새삼 얘들에게서도 대교가 패도광협의 ‘팬’이라는 말을 들으니 웬지 기분이 좀….
“무공은 천하제일에 자유로운 사상.. 그리고 한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열정의 남자. 용모는 잘 모르겠지만.. 음, 너희들이 보기에도 대교의 이상형은 패도광협, 인 거 같지..?”
내 태도와 음성에서 뭔가 느꼈는지 소교는 입을 다물었지만, 소령이와 미령이는 내게 말하는 건지 둘이서 수다를 떠는 건지 애매한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그러고 보니 대교 언니가 언급한 남자는 패도광협뿐인 걸..? 그치 미령아.”
“응. 이곳에 오기 전에도, 그리고 여기 와서도.. 아, 나중에는 곡주님 이야기도 했어.”
“패도광협에 관한 이야기는 대교 언니에게 하도 들어서 남 이야기 같지 않아. 큰언니가 전설 속의 청명신니만큼 아름다운 것은 틀림없지만 패도광협은 이 세상에 없는 걸..?”
“언니도 참- 진짜는 큰언니도 청명신니가 아니잖아. 대교 언니가 만약 패도광협과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웬지 화가 나려고 하는 느낌.
“곡주님, 오늘 저희들에게 패도광협에 대해 물으신 이유는 무엇인지…”
응-? 갑자기 소교가 끼어 들어서 조금 놀랐다.
“어.. 그냥 좀- 아, 그보다 말이야. 내가 아직 말 안 해줬지?”
난 공연히 속으로 (겉으로는 모르겠다.) 당황한 것을 감추느라 본래 며칠 있다가 봐서 해 주려 하던 말을 미리 꺼내 놓았다.
“음, 있잖아. 얼마 후 너희들에게 직접 대교를 만나게 해주려고…. 아, 쉿! 쉿~!”
자매들이 기쁨에 넘친 환호성이라도 지르려는 표정이어서 나는 황급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너희들, 내 얘기 좀더 들어봐. 대교는 이번에 밖에 나와서도 곧 강호에 나가야 해. 다른 사람들 알기 전에 대교를 완전히 안전한 몸으로 만들려면 아직은 너희들과 접촉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난 목소리를 좀더 깔며, 그러나 비로소 조금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치만, 대교가 강호에 나가기 전에 잠깐 만날 수 있도록 해 볼게. 대교가 강호에서 다시 돌아오면.. 그러면 그때부터는 옛날처럼 모두 함께 있을 수 있겠지만 말야.”
감격스러워 하는 자매들.. 그래, 이산가족, 아니 이산 남매 상봉을 내가 너무 오래 이루어 주지 못했다.
지하 성지로 들어가는 내 기분은 평소보다 복잡한 편이었다. 아니, 언제든 그리 평범한 기분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처럼 대교 만나기 껄끄러워 이런 기분인 건 처음인 것 같다.
“곡주님. 요즘 웬지.. 심기가 편치 않으신 듯..”
“응..? 내가 뭘..?”
내려와서도 인사도 대충, 그리고 삐친 것처럼 별다른 말도 없이 바위에 누워 뒹굴대는 나에게 대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가서 무공 수련이나 해. 난 생각할 것이 많아.”
속으론 에구- 미안-. 그런 심정이지만 쓸쓸한 태도로 돌아서는 대교를 다시 부르기도 그렇고 해서 난 계속 천장만 보고 시간을 보냈다.
[ 돌아갈 시간입니다. ]
“됐네, 몽몽..!”
평소 돌아가는 시간이 지나도 그냥 게기고 누워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되었을 때, 문득 고개를 돌려 대교를 찾아보았다.
대교는 중앙 연못을 기준으로 나와 반대편 장소에서 검을 들고 어떤 동작인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슨 초식인지 몰라도 웬지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느낌…
저렇게 아름다운 무공과 사람이 상대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한 생각이 든다.
“대교, 너…”
“넵! 곡주님.”
최소한 거리 40미터, 근데 들었어..? 나 혼자 중얼거린 말을..? 그리고 무공 연습을 멈추고 날아온다..?
“..하명하시길!”
야아, 난 그냥..! 후- 이 아이도 오늘의 비정상적인(?) 내가 꽤나 신경이 쓰였나 보다.
“…..나, 오늘 자고 가면 안 될까..?”
“에, ..예?”
“여긴 이제 니가 지내고.. 니가 주인이잖아. 그래서 허락 받으려고 묻는 거야. 나- 자고 가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