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92화
바깥의 동정이 궁금해진 나는 방문을 빼꼼이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 아닌가? 정작 사영은 방문 바로 옆에 서 있고, 저 아래 1층 객잔에서 처음 보는 젊은 청년이 싸우고 있다. 오호- 대충 봐도 10여명을 상대로 혼자서 무지하게 잘 싸우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지만 그건 아예 뺄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얼핏 초식이 없는 막 싸움 솜씨 같아 보이지만,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 대단한 젊은이로군요.”
사영 눈에는 간결하고 효과적인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엄청 터프해 보인다.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에 한 명씩 몇 미터는 날아가는데… 무협지에서 흔히 보듯이 디지게 맞고도 팔팔하게 다시 일어나 덤비는 일은 결코 없었다.
“…벌써 끝났군요. 아가씨가 직접 사의를 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하고 올까요.”
“에…? 뭘요?”
“지금 저 친구가 쓸어버린 놈들 모두 아까 그 못난이 공자의 부하들입니다. 흠, 정작 그 자는 이미 달아난 모양입니다만.”
“아, 그래요?”
다시 새삼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가볍게 옷의 먼지를 털던 터프 청년도 힐끔 내 쪽을 올려다본다. 우리 비화곡의 터프가이 상관마가 임꺽정식 터프가이라면 저 친구는 최민수식 터프가이라고 할까…? 상관마 정도의 등빨은 아니지만 상당히 강인해 보이는 인상의 친구로군.
“저 친구의 주인 역시 아까부터 아가씨를 눈여겨보는 듯했는데… 역시 제가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주인…? 저 터프 청년이 돌아가는 방향의 탁자에 앉아 있는 청년을 말하는 건가? 멀리 떨어진 여기서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복장을 한… 상당한 미남형의 청년이로군. 축구선수 안정환 닮은 잘 생긴 청년과 그 부하로 여겨지는 터프 청년 둘 다 남자들 시각으로 봐도 밉상이 아니라 그런지 웬지 좀 불쌍한 생각이 든다. 쯧쯧…! 여자들이 줄줄이 따를 만한 용모의 청년이 어쩌자고 나 같은 가짜 여자를 올려다보며 웃는 겐가 그래……
“누군지 몰라도, 공연히 가까워지면 더 좋지 않을 것 같네요. 그냥 무시하기로 해요.”
나는 계속해서 날 바라보고 있는 미남 청년에게 싱겁게 한 번 히죽- 웃어 주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이제까지 다른 놈팽이들 시선은 닭살이었는데, 저 친구들은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흠, 음심을 품은 징그러운 시선이 아니어서 그런가?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남자인 나도 이렇게 시선에 민감한데 진짜 여자들은 더하겠지? 나도 앞으로는 여자들 볼 때 시선처리(?)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군.
다음 날 아침.
술 마시지 않은 날은 군대에서처럼 아침 6시에 정확히 기상하는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서 세수하고… 그리고 여자들처럼 화장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가만있자- 오늘은 분칠을 조금 연하게 해 볼까? 그게 더 청순해 보일 것 같고… 그리고 요 색깔의 연지를 쓸까 아니면 저 색깔…? 흠, 옷 장신구가 좀 꾸린 것 같지? 가다 몇 개 더 사야겠… 응? …뭐야 이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에구구- 내가 미쳤나? 여장 시작 불과 나흘째에 이 무슨 심리상의 변괴란 말인가! 내가 본래 환경에 한 적응하긴 하지 만… 제기, 원판 녀석. 재수없게스리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예쁘게 생긴 거야? 나까지 헷갈리잖아?
공연히 민망해진 나는 대충 화장을 마무리짓고 떠날 채비를 했다. 사영의 안내를 받으며 방을 나섰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무리 아침나절이라고는 해도 어젯밤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고 객점 안이 온통 쥐 죽은 듯 고요했던 것이다.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싶어 그냥 나왔는데… 실은 그 것이 다음 ‘사건’의 전주곡일 줄이야!
강호에 나온 지 며칠 지나니까 바깥 풍경에도 별로 호기심이 생기지 않아서 마차 안에서 몽몽을 통해 장청란 데이터 다시 들여다보며 오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 무렵 들른 객점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식사를 해야 했다. 그 때만 해도 외진 장소의 허름한 객점이라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저녁 때 도착한 제법 큰 마을의 객점에서 방을 얻어 들어가서야 나는 사영에게 의문을 표했다.
“저기… 어째 오늘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이 통 보이질 않네요?”
…뭐야. 이 양반 또 왜 피식거리고 쪼개는 거야?
“후후~! 설마 정말 모르고 묻는 것은 아니실 테고… 그렇게 쑥스러워하시니, 더욱 귀여워 보이는군요.”
“…흑주~!”
열 받은 내가 중얼거리자마자 문가에 서 있던 사영은 순간적으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천장 틈에서 날아 온 암기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며 사영은 낮게 한숨을 몰아냈다.
“너무 하시는구려. 농을 좀 했기로서니……”
사영 정도 되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제 미리 흑주에게 내 명령이 있으면 가벼운(?) 공격을 하라고 지시해 놓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제의 이공자가 아가씨께서 조용히 쉴 수 있도록 오늘 하루 종일 꽤나 애를 쓴 모양입니다.”
이공자가 뭐 어째? 가만… 아까 아침에 묻지도 않았는데 사영은 어젯밤 터프 청년의 이름은 ‘류혼(流魂)’이고 그 주인인 미남 청년의 이름은 ‘이명환’이라고 가르쳐 줬었다. 그렇다면……?
“예정대로라면 이 노릇은 오늘이 마지막이고 아가씨께 목을 맨 청년 공자가 안됐기도 한데 웬만하면 오늘 저녁 아가씨께서 조금 인심을 쓰시는 것이……”
인심…? 뭔 인심? 나는 아직도 장난기가 배어있는 태도의 사영에게 곱게(?) 웃어 보이며 다시 흑주를 불렀다.
쉬익! 챙! 살벌한 검의 마찰음이 한차례 실내를 울리고 나자 비로소 사영의 음성이 진지해졌다.
“…흠, 실은 내일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저 청년 공자를 따돌릴 일이 걱정이라 드린 말씀이오. 오늘 우리 마차보다 앞서 일을 진행한 솜씨로 보아 류혼이란 무사의 무공이나 추종술(追踪術)이 범상치 않은 듯 합니다.”
나는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는 표정으로 흑주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지만 생각해보니 사영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별거 아닌 자가 졸졸 따라붙는 거라면 신수성녀의 배에 타기 전에 사영이든 흑주든 시켜서 어디 인적 드문 곳에서 살짝 밟아 주면 되겠지만… 내가 봐도 저 류혼이란 터프 청년은 그렇게 간단히 밟힐 만큼 만만치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나한테 뭔 해꼬지 한 것도 아니고 음흉한 시선으로 닭살 돋게 하지도 않은 자를 그렇게 처리하는 건 내키지 않기도 했다.
…까짓 거, 사영말대로 여자 흉내 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데 여자로써(?) 상황을 해결해 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뭐라는 공자에게 식사나 같이 하자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