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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95화


“제 무례함에 화가 나신 것이라면…! 이렇게 사죄드리겠습니다.”

오호-! 류혼 이 친구, 갑자기 무릎을 꿇고 난리네?

“제 목숨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부디, 부디 대인을 구해 주십시오.”

어어- 이봐 그렇게까지 할 건… 에구, 내 장난 및 심술이 좀 지나쳤나?

“흠…! 당신, 그 분 모시고 날 따라와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절을 하며 사죄할 정도로 절실한 태도를 보이는 류혼의 충성심에 쬐금 감동 받은 나는 내 방으로 가서 침상 위에 이명환을 눕히도록 했다.

“류혼… 당신의 검을 좀 빌려줘요.”

류혼은 내 요청에 다소 망설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검을 빼 내게 건네주었다. 해독을 위해서는 내가 별로 내키지 않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거였다. 몽몽이 해독에 필요하다고 한 필수 요소… 그건 최대한 많은 종류의 독과 영약이었다. 특별히 필요한 독과 영약은 없었고 종류만 많으면 된다는 데… 그 요건에 딱 맞는 건 바로 현재 원판의 피.

…제기, 막상 스스로 손가락을 베려고 하니까 무지 아플 거 같고 망설여진다. 그냥 약방 같은 곳에서 재료를 구해 오라고 할 걸 그랬나? 음… 내가 망설이는 사이 이명환이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은 걸? 그냥 눈 딱 감고……!

“대, 대인!”

오옷-! 이론… 제기랄! 류혼이 갑자기 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얼결에 진짜 베고 말았다. 망할~! 하나만 베도 되는데 검지와 중지 두 군데나…? 게다가 평소 검을 어찌나 날카롭게 갈아 놨는지 슬쩍 베인 것 같은데 피가 철철 난다. 에구구-!

“비, 비켜봐요.”

나는 아까운 피 낭비하기 싫어서 서둘러 손가락 끝에서 흐르는 피를 이명환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나저나… 양은 얼마나 먹여야 하는 거야?

[주인님 혈액에 포함된 독성과 영약의 종류로 보아 200ml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우이쒸! 지 피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구만. 음… 내 기억으론 소주 한 병이 360ml니까, 대충 소주 반병 조금 넘는 양이로군. 손가락 끝 베어서 그 정도가 나와주려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조금 지나니까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아무래도 예상보다 훨씬 깊게 베인 모양인지 오히려 지혈할 일이 걱정이다.

“아, 아가씨…!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꽤 시간이 지나도록 내가 계속 이명환에게 피를 먹여대자 이젠 류혼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짜식이 이제야 태도가 공손해지는군.

“거기 침상 밑에서 약상자나 꺼내 줘요.”

뭐… 별로 쓸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챙겨주는 대로 가져온 것들 중에 침통이 포함되어 있었다. 몽몽이 됐다고 할 때까지 피를 먹인 다음 내가 치료하는 폼을 보일까 해서 침통을 받아드는 순간, 그만 내 몸은 옆으로 스르르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역시 이 몸은 안돼… 하루 권장 헌혈 양에 훨씬 못 미치는 양의 피를 흘렸을 뿐인데 웬 빈혈현상?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에서 난리였다. 날 안듯이 하여 부축하고 있는 것은 류혼이었고 사영도 어느 사이 달려와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입가에 피를 묻힌 섬뜩한 모습의 이명환도 안타까운 음성으로 연신 아가씨를 외치고 있었다. 제기랄, 이건 뭐 내가 위독한 환자가 된 분위기잖아?

“…됐어요. 놔줘요.”

내가 밀어내자 류혼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뒤로 물러선다. 후후…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는 녀석인 것 같다. 어쨌든 여자 행세를 하는 중이어서 약한 모습 보인 것이 좀 덜 쪽팔리군. 몽몽이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한 10분 정도를 침상에 기대 쉬었더니 어지러운 것은 괜찮아졌지만 앞으로는 더욱 몸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험난한 강호에서 자칫 작은 부상이라도 입으면 이 몸은 부상 자체보다도 스스로 놀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여간 이 원판의 몸… 그간 조금씩 들던 정이 다시 떨어질 정도로 지독히도 허약체질이다.

뭐, 일단 시작한 일 마무리는 지어야겠지? 난 류혼을 시켜 이명환의 상의를 벗긴 후 반듯이 눕히도록 했다. 그리고… 침통에서 꺼낸 침을 아무데나 막 꽂았다. 대충은 몽몽이 알려주는 혈도를 참고 삼긴 했으나 거기다 정확히 찌를 능력이 내게 어디 있겠는가.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되어 지켜보는 사영과 류혼… 그러나 두 사람 다 암 소리 못한다. 좀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아가씨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우흐흐… 내친김에 드라마 허준을 떠올리며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몇 군데 더 침을 꽂았다.

[주인님. 조금 전은 위험했습니다. 치명적인 사혈을 찌르실 뻔했습니다.]

엥~? 장난치다 사람 잡을 뻔했군 그래. 에구, 내 손으로 뭔가 치료하는 것 같은 쇼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 이젠 몽몽에게 진짜 해독하라고 해야겠다.

나는 이명환의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후 양손으로 이명환의 턱 밑에다 침을 놓는 시늉을 하고는 그대로 손을 떼지 않았다. 음… 이명환은 물론이고 류혼이나 사영의 시선으로는 옷소매에 덮인 내 팔목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몽몽이 그 안에서 촉수를 내어 이명환의 신체로 파고 들어간 것도 실내의 누구도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몽몽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독을 해독했는지는 몰라도 이명환의 몸에서 차츰 검은 반점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간간이 흘러나오던 신음 소리도 작아지고… 흠, 역시 대단한 몽몽이라니까.

[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시술로 해당 남성은 주인님 수준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140여 종의 독성에 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

난 몽몽의 촉수가 회수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는 이명환으로부터 손을 떼었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도록 하세요. 아, 그리고 해독 과정에서 공자께선 많은 독에 내성을 갖게 되었어요. 만독불침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으로 웬만한 독에는 당하지 않을 거예요.”

연신 포권하며 감사를 표하는 류혼과 이명환. 두 사람 다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여실했다. 난 피곤하여 쉬고 싶다고 모두를 내보내고 난 다음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킬킬대며 한참을 웃었다.

그래, 몽몽… 가끔 맘에 안 들 때도 있지만 내가 너 땜에 산다니까. 음왁핫핫~!!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손가락의 붕대를 갈고 있는데 사영이 들어왔다.

“지난밤에는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독에 정통한 분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칠절지독까지… 독수사갈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근방에서 눈에 띄이지 않는군요. 그리고 흠, 두 젊은이는 완전히 아가씨의 추종자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말은 그래도 어째 사영의 얼굴에는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없었다.

“어… 그럼 더 문제네요. 원래는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만난 거였는데… 아참. 그 사람 신분은 뭐래요? 왜 독수사갈 같은 자에게 노림을 당한 거래요?”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아무래도 저 공자는 평범한 신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말투나 행동으로 보아 황실과 관계가 있을지도……”

분위기가 어째, 무협지에서 가끔 나오는 패턴… 신분을 감추고 여행 나온 왕족쯤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말 그 패턴인가?

흠, 그럼 좀 있음 꽃가마 수십 대 끌고 와 ‘오오- 내 생명을 구해 준 아름다운 아가씨. 나와 함께 황실로 들어갑시다’… 이런 식으로 진행될 지도 모르겠군. 내가 정말 여자라면 강호에 나오자마자 큰 건수를 문 셈이겠지만… 이거 골치 아프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황실의 인간들이란 애당초 생각하는 것이 일반인들과 다릅니다. 만약 아가씨의 정체를 알게 되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우롱당한 것을 더 분해할지도 모릅니다.”

사영은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황실 사람을 만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사영이 이렇게 먼저 저자세로 사과하고 나오니까 할 말이 없군. 어느 시대나 왕족들 이기적인 거야 흔한 일이겠지만, 사영이 저렇게 심각한 걸 보니 이 시대 황실 사람들… 일반인들에게 꽤나 신용을 잃고 있나보다.

“흠,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죠, 뭐. 그보다… 앞으로는 어쩌지요?”

“일단은 저쪽도 신분을 숨기고 있으니까 아가씨께서도 모르는 척 하십시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계획을 조금 수정하여 아가씨의 정체는 계속 숨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수성녀의 배에 올라서도 계속 숨기자고요? 그럼 거기 머물 명분이 없잖아요.”

“신수성녀는 본래의 모습으로 만나셔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아가씨의 다른 행적을 만드는 겁니다. 만약의 경우라도 어딘가에 진하연 아가씨가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흠… 그럼. 나중에도 아예 비화곡주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동생이 있었다고 해야겠군요.”

이거야 원. 갈수록 내 신분이 복잡해진다. 팔자에 없는 강호 조폭의 짱 노릇을 하고 있는 거도 모자라 이젠 1인 2역까지?

조금 심란한 기분이 되어 나가보니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이명환이 정중하게 인사를 해 온다.

“아가씨께서도 이번에 처음으로 나들이를 나오신 거라 들었습니다. 제가 몇 군데 아는 곳이 있으니 안내해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얌마, 꿈께. 나 남자야 남자… 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 처음 봤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날 보는 시선이 엄청 정열적이라 무서울 정도이다.

“아뇨, 전 어제와 같은 일을 다시 만나기 싫어요. 공자와 동행을 했다가는 저도 결국 큰일을 당할지 모르잖아요?”

난 일부로 쌀쌀맞게 대꾸했지만 이명환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하핫-!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이미 이 지역 관원들을 총동원했으니 곧 흉수를 잡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분을 숨기네 어쩌네 그러더니 결국 ‘나 권력자야’ 라는 티를 팍팍 내는구먼.

“안됐지만, 어떤 이유로든 우리 식구가 아닌 남자와 동행을 하는 것은 원치 않아요. 사람들이 내 행실에 대해 뭐라고 하겠어요?”

행실이라… 제기, 이젠 별 대사 다해보는 군.

이명환이 대꾸를 못하고 서있는 동안 우리는 객점을 나서 서둘러 출발했다. 그러나 마을을 벗어나 30분 정도나 갔을까? 사영은 마차를 세우고는 뒤쪽으로 소리쳤다.

“이공자! 우리 아가씨께서 싫다지 않으시오. 어째서 계속 마차를 쫓아오는 거요?”

사영의 말에 류혼이 큰 소리로 대답해왔다.

“공자께서는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뒤를 따르시겠답니다. 결코 아가씨의 청정함에 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이런 제기. 이 인간, 첫인상과 달리 무지 집요하네? 권력층 자제가 자존심도 없나? 싫다는 여자(?) 뒤를 졸졸 따라붙다니…

아니, 그러고 보니 어제 내 앞에서는 예의 바르고 점잖았지만, 나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으로 내가 객점에 도착하기 전에 객점을 싹 비워 놓았던 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이다.

우쒸-! 이거 아무래도 스토커에게 잘 못 걸린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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