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0-2화 :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2)
2-2.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2)
암 생각 없이 이런 모습을 봤으면 벙졌겠지만, 이미 예상했기에 나는 동생을 걱정하는 표정을 유지한 채 ‘웃·고·있·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진정하고 눈물을 거두거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구나.”
내 말에 진하연은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치며 ‘그럼 그럴까요?’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진하연의 등 쪽 방향에 서 있어서 이 불여우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류혼이 어색하고 불편한 태도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진하연을 살짝 품에서 떼어냈고, 그 짧은 순간 녀석의 표정은 100기가 급(?) CPU를 탑재한 컴퓨터의 그래픽 화면 처리의 속도로 사삭-! 다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바뀐다.
…무서운 녀석.
“흑~! 저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울음 뒤끝을 표현하는 마무리를 잊지 않고 남기며 진하연은 빠른 걸음으로 나와 류혼의 곁을 떠났다.
그 뒤를 우리의 소령이가 지가 더 찔찔 짜며 따라가고 있었다.
동생인 미령이는 벌써 눈치 챘다는 눈치인데 비해… 순진한 것 같으니.
그나저나… 녀석이 아까 대교가 숙영지로 삼았다는 폐사찰 방향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아니 그러는 척하며 나는 잠시 또 갈등에 쌓여 있어야 했다.
진하연이 가기 전에 슬며시 내 손안에 삼태자의 선물 화홍월을 쥐어 주고 갔기 때문이었다.
우씨, 이 괘씸한 녀석, 분위기는 지가 다 잡아 놓고 결국 골치 아픈 일은 내가 알아서 하라 이건가?
어쩐다…? 그냥 받은 거로 하고 보낸 다음 삼태자가 알아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걸 기다려?
하지만… 그 시기를 정확하게 모르니 괜히 OK했다가 나중에 ‘약 올리냐~?’ 하며 애꿎은(?) 나와 비화곡까지 정부 군에 씹히는 상황이… 음… 그럼 일단 돌려주면서 잘 달래어 보내…?
근데, 당사자가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멀리까지 사람을 시켜 보낸 선물을 매정하게 돌려 보내면 아무리 편지로 사연을 적고 류혼이 설명을 잘 해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으… 제기, 어떤 길로 가든 삐끗하면 X되는 구나.
태자 분노! 황실의 비화곡 침략, 내지는 그에 준하는 탄압! 장로들의 거센 곡주 탄핵! 비화곡 대통령(?) 진유준의 불명예스런 하야(너무 거창한가?)! 결국 난 졸지에 비화곡의 죄인으로 전락하여……
으으… 나쁘게만 생각하니까 끝이 없군. 일단 부딪쳐 가며 생각하자.
“커험…! 자네 앞에서 공연히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군, 그래.”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보통 ‘뭘요, 전 괜찮습니다.’ 정도로 반응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그러나 류혼은 대뜸 차가운 음성을 흘려냈다.
“그 사람 이름이 진·유·준이라 하셨지요?”
“응? 그건, 왜,에?”
“아, 그저… 기억해 두려 할 뿐입니다.”
으… 이 자식 이거, 자기 주인님의 라이벌을 지가 없애 버리겠다는 거 아냐? 물론 몰라서 그렇다지만 당사자 겸, 의형제인 내 앞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흥-! 나중 일은 나중이고 지금은 은근히 도네?
“뭐… 기억해 두는 건 자네 맘이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걸세.”
“…그렇게 상세가 좋지 못합니까?”
너도 조명환처럼 내가 죽으라고 고사지내는 놈이군. 더 빡 돈다.
“훗-! 자넨 차라리 그걸 바래야겠지. 그 분이 다시 완전히 회복되면 자네 같은 사람 몇 명이 있어도 상대가 안 되니까 말야. 어쨌든, 섣부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설마… 실례지만, 설사 현재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림의 성승이 다시 나타난다 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끄음~! 빡 돈다고 내가 나를 너무 과장했나? 하지만, 이제 와서 철회할 수는 없지.
“글세에~? 천외천(天外天)이란 말이 공연히 나왔겠는가. 아직 자네가 모르는 하늘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에고…! 무지 찔리는군. 하지만 지금은 나도 믿는 구석이 있다.
날 죽이겠다고 거의 공언하다시피 하는 초고수 앞에서 스스로 전에 없이 이렇게 뻔뻔+대담한 심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스스로 재다짐해 보았다.
류혼 이 자식이 나중 진유준으로 돌아간 나를, 혹은 내가 돌아가지 못한 식물인간 상태의 본체라도, 순전히 지 주인 조명환과 사랑의 라이벌(사실은 사랑의 대상이었지만.)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들면 난 내가 먼저 K2 연발로 갈기는 건 기본이고, 수류탄 있는 대로 다 까서 던지고… 음… 그런 짓은 물론 좀… 에이, 썅! 지가 먼저 죽이겠다고 오면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도 살고 봐야지. 암!
류혼에게서 풍기는 직접적인 살기 때문인지 상당히 오버해서 각오를 다지고 있는 나, 진유준.
그런 내게서도 뭔가가 발산되었을까…? 류혼이 갑자기 꼬리를 내리는 표정이 되어 새삼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진곡주님. 제가 미욱하여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을 보인 모양입니다. 혹여 진곡주님의 의형제께 무례한 점이 보였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살기를 슬며시 집어넣은 건 물론이고 말투나 태도도 다시 정중해 졌다만…
눈 가리고 까꿍도 유분수지, 오해는 무슨 오해이며 그게 무례한 정도냐?
으… 생각은 그렇다만 분위기가 더 악화되는 것도 곤란하니까 이쯤에서……
“후후. 내 어찌 자네의 뜻을 모르겠는가. 이토록 진정을 다하는 충신이 있는 것도 삼태자님의 홍복이로 세. 하하하~!”
오~ 된다, 돼! 진하연 못지않은 속도로 감정과 표정을 추수리며 마음에도 없는 대사를 그럴듯하게 내뱉는 데 성공했다.
그래…! 내 연기력도 아직 녹슬지 않았어. 흐흐흐~!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류혼이 그 답지 않게 조금 과장된 태도로 상체를 숙였다. 녀석이 그 건장한 상체를 다시 세웠을 때, 나는 팔지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선물 반납’으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건. 어느새……?”
류혼은 당황하여 조금 전 진하연이 사라진 쪽을 돌아보았다. 류혼은 순간적으로 뭔가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갑자기 날 향해 한 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깊이 숙이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매우 비장한 음성으로 외쳤다.
“진곡주님! 제가 어리석어 두 분의 심기를 흐리고 그 분의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 한 목숨이라도 바치어 사죄드릴 테니, 부디 진소저의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오호~! 혹시 삐딱하게 나오면 어떻게 달래나 약간 걱정도 했는데… 역시 이런 반응이로군. 내가 조금 전 에야 문득 떠올린 생각은 사실 아주 단순한 깨달음이었다.
극악녀 진하연… 함께 지내보면 볼수록 원판 놈과 쌍둥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성격에 현재 묘강에서 누리는 지위를 일군 능력을 생각했을 때, 내게 팔지를 준 것은 ‘오라버니가 알아서 하세요.’가 아니라 ‘전달 후에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였던 것이다.
음… 괜히 내가 지래 복잡하게 생각하고 고민한 것이 조금 억울하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역할과 위치를 제대로 찾아야겠다.
“그러지 말고, 그만 일어서게.”
나는 류혼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직접 일으켜 세워주려 했지만 녀석은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진곡주님! 소인은 진소저께서 그 분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언제까지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하면 안되겠기에, 나는 계속 부드럽게 달래기 시작했다.
“내 동생이 지금은 감정이 격해있어 이런 걸세. 내가 잘 말해 현실을 바로 보게 할 터이니 자네는 이번에 삼태자께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걸세.”
“아, 진곡주께서 그리 도와주신다면 그 분께서도 평생 은혜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음… 말투나 눈빛에서 ‘진심’이 팍팍 느껴지는군. 삼태자 조명환 본인도 아니고 그 보디가드에 불과하며 꽤 무뚝뚝한 축에 속하는 류혼이 이 정도 반응을 보인다는 건, 그간 조명환이 류혼이 보는 앞에서도 어지간히 노골적으로 ‘상사병’ 증세를 보였나보다.
“어쨌든 일단 일어나게. 이 팔지는… 음, 일단 내가 가지고 있다가 곧 동생의 팔목에 채워주겠네.”
“…그렇다면 저는 그 때까지 이 자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 참. 고집도… 허허~”
‘후후’도 아니고 ‘하하’도 아니고 ‘허허~?’ 청혼이 들어온 처자의 보호자 역할이라는 의식 때문인가? 나도 모르게 내가 노땅 모드로 들어 간 모양이다.
“음…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리 쉽게 움직이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 더 삼태자께 유리한 사실이 있지.”
나는 꽤나 큰 선심이라도 쓰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 동생 설아… 아, 이건 아명이라네. 우리 설아가 본래 정이 깊은 성품이라 비록 어린 시절의 인연을 저리 잊지 못하나. 실은 정작 정혼자 진유준 형님…께서는 설아를 이성으로 여기고 있지를 않다네. 나와 설아를 모두 그저 ‘동생’으로만 여기시지.”
“오, 그랬었군요.”
“뭐… 우리 삼남매의 고달픈 사연은 너무 긴 세월에 걸친 것이라 이 자리에서 간단히 말해 줄 수는 없고… 일단 그 정도만이라도 알아두게.”
내가 세 명(?)을 묶어 ‘삼남매’라는 말을 강조하여 못을 박자 비로소 류혼의 얼굴이 숨김없이 밝아진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허나… 저는 역시 진소저께서 화월홍을 받아주시는 걸 직접 보아야만……”
거 자식, 끈질기네. 이제 별로 해 줄 말도 없는데…
진하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소식이 없는 거야?
이쯤에서 다시 나타나 뭔가 결말을 지어줘야 할 거 아냐?
어이~ 하연아! 설아야~! …야! 이 기집애야! 빨리 안 나올래?
“곡주님! 동생 분의 전언입니다.”
음, 마치 내가 속으로 부른 걸 알고 대답하듯 타이밍 맞추어 나타나는군. 비록 나타난 건 하연이가 아니라 미령이였지만 말이다.
“손님을 숙영지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먼길을 오셨으니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으시다고……”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고 류혼도 고집과 자세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흐흠~ 지금까지는 나까지 공연히 어느 정도 말려들었지만… 지금부터 저 불여우가 류혼과, 그리고 저 먼 곳의 삼태자 조명환까지 어떻게 구워 삼을지 궁금해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