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1-1화 : 흑주의 눈물.(1)
2-3. 흑주의 눈물.(1)
화홍월과 흑태양, 이 한 쌍의 황금 팔지에 무쌍일월(無雙日月)이란 별칭이 붙은 것은 그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전설에 나오는 남녀가 살던 시대는 불명이나 보통 1000년 이상 전이라고들 한다. 두 남녀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남녀가 다 황족이나 그에 준하는 귀족 계급 집안 출신이라는 정도가 프로필의 전부였다.
사실 두 사람의 집안이나 이름, 그리고 주변 상황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두 집안이 오랫동안 서로를 죽고 죽이는 원수 사이여서 본래는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점만 동일하고 다른 사항은 기록마다 다 틀렸다. 그러니 뭐, 일단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해두자.
그 중국 로미오와 줄리엣은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된 후 사랑에 빠져 양쪽 집안 사람들 몰래 밀회를 거듭하다가 로미오가 유명한 장인에게 주문해서 만든 황금 팔지를 하나씩 지니는 것으로 장래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된 부모들에 의해 각자의 집안에 감금되는 처지가 되는데…
이 중국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달리 자살을 위장한 생쇼를 벌이다가 사인이 안 맞아 정말 둘 다 죽어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중국판은 그보다 더 황당하고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게 되지만, 이들은 성공했다. 뭐, 내가 보기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무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큼 둘의 사랑이 진실하고 절실해 보였기 때문에 그런 사기극도 먹혔을 것이다. 그 사기극이라는 거… 그들이 저지른 초강력 범죄행위(?)는 다름 아닌 하늘에 뜬 ‘해와 달을 망가트리는 것(?)’이었다. 팔지에 붙은 별칭대로 달은 지가 무슨 태양이라고 붉은 빛을 내며 타올랐고, 해는 해대로 파업에 들어가 빛을 잃어버렸다던가?
물론~! 태양이 빛을 읽고 흑태양이 된 건 보나마나 일식(日蝕)이었을 거고 달이 화홍월, 타오르듯 붉게 보인 것도 무슨 기상현상의 하나였겠지만… 하여간 그때 이 로미오와 줄리엣은 약속이나 한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들을 핍박해 해와 달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나, 그래도 자신들은 언제까지고 가까워지기를 원하며 하늘의 해와 달도 우리들의 뜻을 알아주고 있다.’
참으로 터무니없고 지들 멋대로의 해석이지만, 괴이한 자연 현상에 놀라 맛이 간 집안 사람들은 혹시나 하여 로미오와 줄리엣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는데… 놀랍게도 그 순간 태양이 다시 빛을 찾고 달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왔다나? 결국 엄청난 우연의 일치겠지만 두 남녀의 황당한 발상과 해님 달님의 협조(?)로 전설이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해, 여자는 달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황당한 커플은 무수한 일월 중 무쌍(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특출하다는 의미)의 커플로 공인받게 되었고 그들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예물로 썼던 황금 팔지 한 쌍은 각각 흑태양과 화홍월라는 이름을 얻어 그들 커플을 상징하는 보물이 되었다.
뭐… 세월이 흐르면서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패턴을 따라 로미오가 실은 굉장한 고수여서 두 황금 팔지를 모두 얻으면 그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는 옵션 사항이 붙기도 했다는데, 그 얘기는 그리 공인된 건 아니고 그냥 소문 수준이다. 물론 현재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는 삼태자, 하나는 극악녀 진하연의 손에 들어왔으니 누가 욕심을 내도 소용이 없겠지만 말이다.
암튼, 화홍월이 그런 내력이 있는 보물이라 받지 않겠다고 했던 진하연… 류혼에게 보인 태도와는 달리 녀석은 아무래도 절대 나에게 맡기지 않고 지가 날로 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내가 혹시나 하여 몽몽에게 조사시키려고 잠시 좀 보자고 했더니 넘겨주긴 줬는데, 조사를 끝내고 다 봤다고 하자마자 잽싸게 도로 지가 챙긴다.
기집애… 설마 정말 삼태자 꼬셔서 흑태양까지 입수하여 지 정혼자(?)에게 주려는 건 아니겠지? 음… 만약 그렇게 되면 나로서는 별로 나쁠 건 없나? 본래의 육체로 돌아간 후 그런 보물 하나 챙겨서 서울로 돌아가면 나도 남부럽지 않은 재산가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지도…
커험, 음… 안 되지 안돼. 그렇게 공짜를 밝히면 안 돼, 진유준. 안 그래도 아버지 닮아서 나이 먹으면 머리 벗겨질지 모르는 판국에……
몇 시간 후… 잠자리에 든 나는 화홍월과 흑태양에 관한 걸 생각해보느라 꽤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몽몽에게 스캔시킨 결과… 흑태양은 아직 어떤지 몰라도 화홍월에는 확실히 뭔가 비밀이 있었다.
화홍월은 순도가 거의 100프로에 가까운 황금이다. 근데 뜻밖에도 내부가 빈 구조였고 거기엔 뭔가 글자와 그림이 새겨진 매우 얇은 금속판이 둘둘 말린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현재로서는 절대 파악이 안 되니 흑태양에도 같은 식으로 글이 숨겨져 있어서 그걸 조합하여 진짜 내용을 이루는 암호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한데…
물론 화홍월이나 흑태양이나 별로 굵지도 않은 팔지이고 그 안에 있는 기록의 분량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자체가 무공서 일리는 없고, 무공서가 어디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도나 안내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지를 그렇게 만든 동기는 모르겠지만 만든 사람은 상당한 솜씨의 장인이었던 모양이다. 몽몽의 계산으로는 그 공간과 이물질이 없이 모두 황금으로 이루어졌을 경우의 무게와 현재 팔지의 무게 차이는 고작 0.0005그램. 그냥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이상한 소문이 난 걸 보면 유레카라는 말로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부력의 법칙’으로 (과학시간에 배운 건데 솔직히 몽몽이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까먹고 있었다.) 측정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어쩌면 중국인들 중에도 머리 좋은 사람이 그런 방법으로 화홍월이 순수한 황금만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어찌 되었든, 나야 무공서 같은 거에 특별히 욕심은 안 생기고 그냥 호기심에 스캔 시킨 것뿐이지만… 만약의 경우 흑태양도 스캔할 기회가 생기면 틈을 내 한 번 찾아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말 쓸만한 무공서가 존재하면… 후후~ 물론 우리 대교 줘야지~!
다음 날 아침.
나는 묘한 꿈을 꾸다가 깨어난 뒤 한동안 혼자 피식거리며 웃었다. 꿈속에서 나는 화홍월과 흑태양 속에 숨겨진 지도를 통해 비밀 장소를 찾아냈는데, 그 장소는 황당하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박물관’이었다. 무공서 같은 건 고사하고, 둘이 만나고 사랑한 사연을 적은 일기장, 동상, 커플룩 같은 것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자연 현상마저 자기들 위주로 해석하는 황당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미지 때문인지 그런 꿈을 꾼 것 같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한가한 상황이 아니면 찾아볼 마음도 없지만… 어라? 아직 이른 시간인데 진하연이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네?
진하연의 침소는 내 잠자리와 반대편 벽 앞에 커튼을 쳐서 임시로 만든 작은 방이었는데, 입구 커튼이 젖혀져 있었다. 진하연은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것 같았다. 편지… 혹시 삼태자에게 보내는 답장을 쓰고 있는 건가?
궁금해진 내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진하연은 살짝 당황한 듯 편지를 옷소매로 덮어 가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라버니?”
“응, 그래. 어쩐 일이니? 미녀는 잠이 많은 법이라며 이 시간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던 네가?”
“후후~ 류혼이 좀 일찍 떠난다고 해서요.”
“흠… 역시 삼태자에게 답장을 쓰는 거였구나? 뭐, 알아서 잘하겠지만… 잘 다독거려 주는 게 좋을 거야.”
“물론이죠, 오라버니. 한동안 우리 남매를 찾지 않도록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진하연의 표정에서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설마… 하며 고개를 젓고 밖으로 나왔다. 답장을 준비하는 진하연의 표정은 전에 거울을 보며 목격한 원판의 표정 중 하나와 비슷했다. 뭔가 음모를 꾸미며 진행할 때의 표정이라고 할까? 뭐, 저 녀석이라면 편지 한 장으로도 충분히 남자를 조정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설마 벌써 ‘흑태양 내놔!’라고 쓰는 건 아니겠지?
진하연이 류혼을 통해 알아낸 정보는 삼태자를 비롯한 태자들의 권력 다툼이 극에 달한 황실의 상황만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류혼이 우리를 추적해 올 수 있었던 과정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추종술이라 해도 비화곡 내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내 행적이 간단히(?) 추적되었다는 건 불안 요소였다. 기특하게도 진하연은 그것도 상세히 물어봤는데… 다행히 류혼이 우릴 찾아낸 건 상당히 ‘운이 좋았던 것’뿐이었다.
삼태자로부터 선물 배달 명령을 받은 류혼은 처음에 날 찾아왔었다. 진하연의 행방을 물어볼 생각에 비화곡으로 갔는데, 내가 부재중이라는 얘기에 며칠 머물다 기약 없이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발로 찾는 것이 성격에 맞았는지 비화곡을 떠났다고 한다. 약산성으로 향했던 건 그저 막연한 선택… ‘가짜’라는 소문이 있지만 나와 관련된 소문이 들리는 곳이라 한 번 가본 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서 진짜 목표인 진하연의 정보까지 입수하게 된 것이다. 주민들이 두 남매가 만나는 장면을 꽤 많이 목격했던 것이다. 약산성 주민들이 태자가 보낸 인물에게 모든 걸 숨길 수는 없었을 테니…
그 다음부터는 순전히 류혼의 놀라운 추종술 덕분이었다. 전에 사영과 나를 추적하던 걸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지만 역시 중간에 마을을 지나온 것이 실수였다. 계속 목격자가 없는 길로 왔다면 류혼도 추적이 더 어려웠을 텐데… 정파 개방의 개차반 같은 인물을 생각하면 이번 여정, 특히 약산성 이후에는 문제가 좀 많았다. 사갈서생만 염두에 두고 다른 자들의 추적에 대한 대비가 약했던 것이다. 삼태자의 동생 프린세스 조예린이 계속 강호에 있어 비교적 안전하지만 조심할수록 좋겠지?
결국 류혼은 진하연의 답장을 가지고 삼태자에게 돌아갔고, 우리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 원칙을 새삼 고수하기 시작했다. 진하연이 아무리 중간에 쇼핑하고 싶다고 졸라도 사람 많은 곳에 들르지 않게 하다 보니 녀석이 투덜대는 건 둘째 치고, 길이 돌아서 목적지인 주직촌에 도착한 건 류혼과 헤어진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묘한 꿈을 꾸고는 한참을 피식거리며 웃었다.
꿈에서 나는 화홍월과 흑태양 속에 숨겨져 있던 지도를 따라 어떤 비밀 장소를 찾아냈는데, 그곳은 황당하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박물관’이었다. 무공서나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들의 연애를 기록한 일기장과 동상, 커플 룩 같은 것들만 가득했다. 자연현상까지 자신들 위주로 해석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미지 때문에 그런 꿈을 꾼 듯싶지만,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심심하지 않으면 굳이 찾아볼 일은 없겠지만… 응? 아직 이른 시간인데 진하연이 벌써 일어났네?
진하연의 침소는 내 잠자리와 반대편 벽 앞에 커튼으로 만든 작은 방이었는데, 이미 입구 격인 커튼이 젖혀져 있었다. 진하연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편지… 혹시 삼태자에게 보내는 답장을 쓰고 있는 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진하연이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편지를 옷소매로 덮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라버니?”
“응, 그래. 어쩐 일이니? 미녀는 잠이 많은 법이라며 이 시간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던 네가?”
“후후~ 류혼이 일찍 떠난다고 해서요.”
“흠… 삼태자에게 답장을 쓰는 거였구나? 뭐, 잘 다독거려 주는 게 좋을 거야.”
“물론이죠, 오라버니. 한동안 우리 남매를 찾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진하연의 표정에서 뭔가 불길한 느낌이 스쳤지만, 설마 하며 고개를 저었다. 답장을 준비하는 진하연의 표정은 음모를 꾸미는 듯했지만, 저 녀석이라면 편지 한 장으로도 남자를 조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진하연이 류혼을 통해 알아낸 정보는 삼태자를 비롯한 태자들의 권력 다툼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류혼이 어떻게 우리를 추적했는지였다. 비화곡 내에서도 극비인 내 행적을 간단히 따라잡았다는 건 꽤 불안한 요소였다.
기특하게도 진하연은 이것도 류혼에게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류혼이 우리를 찾아낸 것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삼태자에게서 선물 택배 명령을 받은 류혼은 비화곡에서 나를 기다리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무작정 약산성으로 떠났는데, 거기서 나와 닮은 남매의 만남을 목격한 주민들 덕에 진하연의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는 순전히 류혼의 놀라운 추종술 덕분이었다. 사영과 나를 추적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약산성 이후 여정에서 실수한 것이 아쉽다. 계속 목격자가 없는 길로만 갔으면 추적이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프린세스 조예린이 강호에 있어 비교적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조심은 할수록 좋겠지?
결국 류혼은 진하연의 답장을 가지고 삼태자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을에는 들르지 않기로 했다. 진하연이 투덜거렸지만, 빙 돌아가는 길 덕분에 주직촌에 도착한 것은 류혼과 헤어진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주직촌 외곽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감상에 잠겼다. 정작 흑주는 어떤 심정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웬지 가슴이 두근대며 흥분이 느껴졌다.
주직촌은 우리나라의 ‘촌’이라기엔 도시와 같은 규모였고, 전원 도시의 한적함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외진 곳이지만 비단 생산의 품질이 높아 대대로 황실에 납품하는 집들이 많다는, 그래서 ‘진주로 천을 짜는 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이 흑주의 외가가 있을지도 모를 곳이었다.
진하연은 암혼자에게 이인경의 처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해동선생 이인경과 그의 부인이 만나던 당시를 상상해 보았다. 중원을 횡단하던 청년과 이 주직촌에서 나고 자란 처녀의 만남은 어떤 형태였을까…?
그 주직촌 처녀의 이름은 ‘현초주’, 해동선생과 결혼한 후 동주부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산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바다와 강을 동경한 그녀를 위해, 해동선생은 자주 배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동주부인…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와 원판, 그리고 미래 여자가 모두 ‘진’이라는 글자로 연결되었듯 흑주와 동주부인은 ‘주’자로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전에 들었던 흑주의 본명이 진주 주(珠)나 배 주(舟)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직촌에 도착한 건 점심 무렵이었지만, 나는 몇 시간을 기다리며 적들의 매복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보고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움직였다.
대부분의 병력을 마을 주변에 대기시키고, 진하연과 함께 마차를 타고 현초주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큰 집이었고, 입구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미리 우리의 방문을 알렸기에 마차에서 내리자 노인 부부와 그들의 아들,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마중을 나왔다.
“제가 이 집의 가장인 ‘현헌재’입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현헌재라 소개한 노인은 약간 깐깐해 보였지만, 공손하고 친절했다. 어머니일 것 같은 인자한 할머니는 우리를 훑어보며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현 부인이 아들과 며느리의 위로를 받는 동안 현 노인도 슬픔이 스쳐가는 듯했지만, 우리를 안내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 사람이 주책 맞아 손님께 실례가 된 것 같습니다.”
현 노인은 우리 남매가 자리에 앉자 그렇게 말했다.
“천만의 말씀… 오히려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못한 저희가 더 죄송합니다.”
진하연의 말에 현 노인은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초주와 사위가 돌아오지 못한 이후 안 사람은 배로 빨리 늙어간다오. 이제야 그때 딸아이와 사위에게 잘해 주지 못한 것이 사무치는구려.”
현노인에게 이인경 부부가 사라질 당시의 상황을 듣는 동안 현부인과 아들 부부도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인경 부부는 주직촌에 머물면서 명의 덕에 둘째 아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넘게 이곳에 머물던 부부가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나섰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린 그날 이후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실은… 저희가 이번에 방문한 것은 두 분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말을 꺼내자 노부부는 의아한 듯 내 품에 손을 넣는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나는 ‘답파화미인’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천 조각을 꺼내 노부부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천이 바로 동주부인이 남편의 망토에 새긴 글귀가 틀림없다고 했다.
여기가 맞구나 싶어 기뻤지만, 회한에 가득 찬 노부부의 눈물을 보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흑주를 불러 이산가족 상봉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그가 극악병에 걸려 얼굴까지 망가진 상태라 고민스러웠다. 그래도 언젠가는 만나야 할 사이니 피할 수 없겠지.
“음, 흑……”
“오오~ 대인, 대인께서는 이 망토 조각을 어디서 찾아내신 겁니까!”
“아, 그건……”
“딸아이는요! 대인! 우리 초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그건 저도… 그보다……”
“대인! 내 동생의 행방을 아십니까?”
“아니, 저… 일단 제 말을……”
“어흐윽~ 아가씨~ 흐윽~ 흑~!”
노부부와 아들 부부까지 모두 동시에 흥분해버렸다. 흑주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데, 그 외가 가족들은 말로 나를 조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수화로 흑주에게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도 귀신처럼 천장에서 내려오는 흑주를 보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잠깐, 놀라지 마시고, 저 친구가 두 분의 ‘손자’일지도 모르니 확인해 보시지요!”
말을 하고 나니 썰렁했다. 멋진 재회를 연출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슨 감정단이 물건 소개하는 듯한 어색한 멘트를 하고 만 것이다. 흑주야, 미안하다!
“예…?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노부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고, 아들 부부도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저희 외손자는 계속 여기 살다가 2년 전에 해동으로 떠났습니다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헉! 현노인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지금까지 헛다리를 짚고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