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1-2화 : 흑주의 눈물.(2)
나는 제 기능을 잃고 있던 정신을 겨우 추스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병에 걸렸던 이인경 부부의 아들은 여기서 병을 치료한 후… 부모와 함께 떠난 게 아니라 여기… 남아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당시 병의 뒤끝이 남아 있어 찬바람을 쐬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현노인 가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흑주를 살펴보는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복면… 아니, 얼굴을 확인할 것도 없습니다. 제 외손자는 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좋습니다.”
제기, 확인해 볼 것도 없다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으으… 대체 어찌 된 거지? 그럼 흑주가 가지고 있던 천은 뭐지? 그냥 이인경이 흘린 망토를 어디서 주워서 걸치고 다녔다는 건가?
“어쨌든… 대인의 말씀은 저 사람이 제 사위의 망토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현부인이었다. 인자하고 유약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뭔가 강한 신념을 가지고 날 추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 예……”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운이 빠진 내가 힘없이 대꾸하자, 현부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대며 흑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호, 혹시… 흑주…? 흑주가 아니냐……?”
나 또, 헉~!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이들에게 흑주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미 이름을 알고 있다……?
“부인, 헛된 바람을 갖지 마시오. 그 사람은 남자라는데, 어찌 우리 손녀가 될 수 있겠소.”
현부인과 현노인의 엇갈린 말에 내 머릿속은 아까보다 더한 ‘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 사람들, 흑주라는 이름을 안다고…? 그런데 그게 우리가 모르고 있던 손녀의 이름…? 그리고 흑주는 남자다. 뭐지? 뭐야…? 어떻게 아귀를 맞춰야 하는 거야? 사실 나도 전에 흑주가 혹시 여자가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몽몽의 스캔 결과 흑주는 ‘남자’였다.
“오라버니! 저 사람이 분명 남자…인가요?”
진하연이 내게 묻자, 흑주에게 다가섰던 현부인과 실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아직도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 무관한 듯 담담한 태도로 서 있는 흑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남자야.”
내 확답과 함께 현부인은 비틀거렸고, 아들과 며느리의 부축을 받았다. 그러나 진하연은 내 대답을 듣고도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분명한가요, 오라버니? 직접 확인한 일이 있나요?”
“후~ 그야 전에 분명히 확인을… 응?”
나는 거기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간 침묵하고 있던 몽몽이 띄운 메시지 때문이었다.
[ 죄송합니다, 주인님. ]
뭐시여~? 죄송…하다고? 그럼, 이… 이 웃기지도 않는 로봇이 지금까지……
[ 사용자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일부 정보 제공이 불충분했음을 인정합니다. 해당 인물의 성별은…… ]
몽몽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입은 다물지 못했다. 이 썅~! 뭐 이런 로봇이 다 있어?
“오라버니…? 오라버니!”
“아… 그… 그게… 제기, 이제야 알겠다.”
빌어먹을! 몽몽에 대한 배신감을 음미(?)하는 건 잠시 미뤄야겠다.
“무슨 말씀이시죠? 혹시……”
“그래, 이제 보니 내가 그동안 속고 있었던 것 같아. 정말…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놈의 말이라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말하는 도중,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흑주… 저 빌어먹을 녀석… 처음으로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을 응시하며 최종적으로 선언했다.
“저 친구의 이름은 흑주…이며, 그리고 분명히 여·자·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부인은 대뜸 흑주에게 달려들었다. 현부인뿐만이 아니었다. 일가가 모두 몰려가 흑주를 둘러싸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았다.
기쁨으로 일렁이던 분위기는 흑주가 천천히 자신의 복면을 벗고 얼굴을 보였을 때 잠시 멈췄다. 그러나 현부인은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흉측한 화상으로 망가져 있는 흑주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묻기 이전에
“가엾은 것~ 이 가엾은 것~”
이 말만을 되풀이하며 눈물을 흘리는 현부인과 가족들…… 그러나 나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보다도 흑주의 태도를 보는 것이 더 안쓰러웠다. 그녀는 20년 넘게 헤어져 있던 가족과의 만남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니 흘릴 방법을 모르는 인형처럼 어색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주인 외에는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던 무방비의 모습이라는 것만이 평소와 다를 뿐, 그냥… 그뿐이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든 내가 결국 슬며시 흑주에게서 등을 돌려 창가로 향했을 때였다. 다급하게 흑주를 부르는 현부인의 비명 같은 음성이 들려와 돌아보니, 흑주는 자기 가족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내 곁으로 오고 있었다. 이 바보가 이런 때도 경호 거리를 지키려는 건가 싶어 한 소리 하려 입을 열었지만, 뜻밖에도 흑주가 먼저 손을 들어 수화로 내게 물었다.
<곡주님… 무엇 때문에… 저를 여기… 데려왔습니까?>
아직 익숙하지 않아 본래 말처럼 조금 끊기기는 했으나, 내게 처음으로 제대로 표현한 긴 문장이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흑주는 다시 소리 없이 물었다.
<저를… 버리시겠다는… 뜻……?>
제기, 지금까지 받아 본 그 어떤 질문보다도 서글픈 질문이었다.
<흑주는… 가족… 필요 없……>
나는 거세게 고개를 저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나도 수화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바보야! 그런 일은 없다고 했잖아? 네가 먼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도 널 버리지 않아. 내가… 내가 죽지 않는 한……>
손으로 수화를 하면서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욕설 같은 것이 흘러나온 것 같다. 빌어먹을-! 이 불쌍한 녀석은 과연 내가 우리 시대로 돌아간 후에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난 단지… 네가… 네가 잃을 필요가 없었던 것들을… 그러니까… 본래 너의 것을 찾기를 바랄 뿐이야. 네 이름… 너의 부모님… 그분들이 널 사랑한다는 증거… 너의 형제… 그러니까… 넌 더 이상… 내 그림자 따위가 아니야.>
내 딴에는 평소부터 해주고 싶었던 얘기들이었지만 흑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두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 이상 내 그림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뭔가 오해한 것 같아 뭐라 더 덧붙이려 했지만, 흑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흑주… 아니… 아니… 나, 난… 단지… 당신……”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놀란 기색으로, 흑주는 주춤거리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잠깐, 흑주-!”
다급하게 불렀지만 흑주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창 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버렸다.
“제기! 대교! 쫓아가-!”
나는 한 발 늦게 흑주에 이어 대교까지 그 뒤를 쫓아 뛰쳐나간 창가로 나가 밖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두 녀석 다 내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다. 요청도 안 했건만 몽몽이 친절하게 레이더를 작동시켜 사라진 방향을 알려 주었고,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필요 없어, 새꺄!”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진하연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그보다… 음… 흑주가 이런 행동을 보인 건 처음이야. 결국 잘 된 일인지도……”
그렇게 자기 위안을 겸한 소리를 하며 돌아서 보니, 당연히 실내 분위기는 상당히 썰렁해져 있었다. 흑주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를 못 하고 그저 놀랍고 불안하기만 한 기색이 역력한 이 흑주의 외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우선 비화곡주라는 내 신분을 숨기고 나 역시 진하연처럼 묘강에서 왔다고 했다. 진짜 ‘묘군(苗君)’이란 신분이나 별칭이 있는 건지, 아니면 묘랑과 대치되는 말로 그냥 만든 건지 몰라도 하여간 진하연이 옆에서 날 그렇게 소개하며 묘강의 후계자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대월의 황태자’가 되어버렸다. 나도 참, 돌아가는 날까지 대체 몇 가지의 가짜 신분을 가지게 될는지… 음… 어쨌든, 대월에서 그만한 위치이다 보니 ‘지극히 충성스런 호위자’가 필요해서 인재를 찾다가 결국 어린 흑주를 발견해 그녀가 행방불명된 해동선생과 동주부인의 딸인지도 모르고 무공을 가르쳐 키우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해 주었다.
내 신분과 그에 따라 흑주가 그간 얼마나 살벌한 길을 걸어왔는가는… 물론, 편집 삭제했다.
흑주가 폭주(?)하여 사라져 버리고 약 한 시간 정도 지났을 즈음, 다행히 현노인 일가도 내가 들려준 그간의 사연을 듣고 어지간히 마음을 놓는 기색이었다. 물론, 아직 다들 가끔씩 흑주가 사라진 창밖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흑주가 오늘 뜻밖의 상황을 만나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지만, 호위대의 대장이 따라 갔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겁니다.”
나는 재차 그렇게 말하며 안심시키다가, 이번엔 그쪽의 사연을 다시 물어 들어보았다.
그러니까… 해동선생 이인경 부부가 아들의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 곳에 왔을 때, 동주부인은 이미 세 번째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반 년 정도가 지났을 때 아들의 병은 거의 나아갔고 그들 사이에 다시 귀여운 아기가 태어나고… 그건 큰아들을 잃었던 슬픔이 어느 정도 희석될 정도로 경사의 연속인 셈이었다. 태어난 아기는 딸이었고, 까만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인다고 하여 흑주(黑珠)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여기까지 얘기는 물론, 조금 전까지의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사연이지만 흑주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도 벌 겸해서 굳이 묻고 들은 것이다. 정작 궁금한 사항은 훌륭한 부모와 인자한 조부모에게 보호받으며 귀하고 곱게…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누리며 자랐어야 할 아이… 그 아이와 부모에게 대체 운명은 어떤 잔인한 장난을 쳤던 것인가…하는 점이지만, 당근 현노인 일가도 ‘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섰던 그들의 막내 딸 부부에게 닥친 사건을 모르니……
“저, 한 가지… 수상쩍은 일이 있긴 하지만 확인할 길도 없고 해서 이렇게 답답한 세월을 보내고 있답니다.”
현노인의 말에 나는 조금 풀어지던 신경을 다시 곤두세웠다.
“수상쩍은 일이라고요?”
“예, 초주 부부가 그렇게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후… 그러니까 그 1년 정도가 지난 후부터 가끔씩 저희에게 이상한 사람 한 명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매년… 때로는 몇 년에 한 번씩 불쑥 등장하곤 했는데……”
처음 이 곳에 등장했을 때 20대의 청년이었다니 지금쯤은 40대의 장년일 정체불명의 남자… 옷차림은 남루하나 기골이 장대하고 무림인인 듯 검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의 특징은 등에 활을 메고 있었는데 근방에서 흔히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나중에 우연히 알고 보니 해동에서 많이 쓰이는 활이었다고 한다.
음… 새로운 인물의 등장인가…? 설마 해동, 고려에서부터 이인경을 쫓아 온 원수…? 그래서 그의 손에 이인경 부부가 살해당했다는 얘기…? 아니지. 그랬다면 그 후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계속 이 곳을 찾아왔을 리가 없을 것이다. 혹시 아직도 그가 이인경 부부를 찾아내지 못했고 이인경 부부는 그를 피해 잠적해 있는 상태…? 음… 차라리 그렇다면 오히려 흑주의 부모가 아직 살아 있다는 긍정적인 추리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모든 가정은 이인경이 고려에서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고 도망쳐 떠났다는 전재 조건이 있어야만 가능 한 추리인데, 이인경 선생의 알려진 인격을 생각했을 때 그건 아니지 싶었다. 더구나 그… 음, 일단 그냥 ‘고려 무사’ 정도로 칭하기로 하자. 이 노부부의 눈에 그 고려 무사는 결코 이인경 부부에게 나쁜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하고, 오히려 이인경 부부에게 뭔가 큰 은혜를 입은 일이 있다고 자처하며 올 때마다 귀한 선물을 놓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노부부가 ‘수상쩍다’고 생각한 것은 노부부가 그들 이인경 부부의 행방에 대해 물으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호오… 거 묘하네? 오랜 세월의 경험 때문인지 보통 노인 분들의 ‘눈치’는 보통이 넘는다. 고려 무사가 이미 이인경 부부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어째서 이 노부부에게 그걸 숨기고 있으며 또한, 그러면서도 이 집에는 왜 자꾸 나타나는 걸까?
“음… 혹시 그의 언행에서 더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내 말에 노부부는 잠시 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고 이번엔 옆에서 얌전히 앉아 있던 며느리가 무언가 생각난다는 듯 조심스럽게 나섰다.
“이 것을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인지’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인지… ‘이인지’는 병마에서 벗어나 이 곳에서 무사히 살아왔다는 흑주의 오빠 이름이다. 그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 당시 또 찾아왔던 고려무사는 그에게 ‘동생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가 보고 싶다고 하자 ‘내가 언제인가 꼭 찾아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 얘야! 너는 그러한 일을 어찌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어머니. 당시에는 그가 인지를 위로하느라 그리 말한 정도로 생각했기에… 헌데 오늘 흑주 만이 돌아온 것을 보니……”
시어머니의 추궁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며느리… 그러나 어쨌든 그녀의 얘기는 꽤 의미가 있었다. 며느리… 음, 저 며느리도 결국 현부인이지? 그럼 이제부터는 며느리를 현부인으로 부르고 할머니는 ‘대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편하겠다. 앞으로 당분간 이 집에서 신세를 지며 호칭을 부르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각설하고, 며느리 현부인이 증언한 고려 무사의 발언, ‘동생을 내가 찾아 준다’는 말과 전후 사정을 조합해 보면, 그는 이인경 부부의 사망 내지는 그에 준하는 사고… 즉, 적어도 수십 년간 누구도 구해 낼 수 없는 장소에 갇혀 버렸다던가 하는 상황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딸인 흑주가 어떤 형태로든 그 상황에서만은 벗어나 있다는 것도……
그렇다면 고려 무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모를 대신해 흑주를 찾아다니고 있었던 거고, 이 집을 가끔 찾아온 것도 흑주가 자력으로 집에 복귀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음… 물론, 그래도 그가 이인경 부부의 행방을 밝히지 않은 이유라던가 의문점이 많고, 내 추리의 중요한 근거인 ‘그의 발언’에 관한 현부인의 기억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있다.
“오라버니, 아무래도 이 일은 먼저 그 해동의 활을 지니고 다닌다는 남자를 찾아내야만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 대월과… 음, 중원에도 내가 아는 친구들이 많으니 그가 두 나라 중 어딘가에 있을 경우, 친구들에게 부탁하면 의외로 쉽게 찾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오는 현노인 일가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입밖에 낸 얘기대로 조금 자신은 있었다. 고려 활을 차고 다니는 40대 남자라… 비화곡의 ‘정보망’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가 문제이지 못 찾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비록 ‘뒷북’이기는 했지만 20년 이상 전에 생산된 천 조각 하나의 출처까지 찾아 낸 전적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흑주가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은 채 두 시간이 넘어 조금씩 나도 걱정이 더해지고 있을 때였다. 대교가 돌아와서 좌중 모두가 일어섰지만 대교는 혼자였다.
“뭐야, 흑주는?”
“흑주님은 이미 돌아왔습니다만……”
대교가 미묘한 표정으로 흑주의 행방을 밝히자, 현노인 일가는 우르르 집밖으로 몰려 나갔다. 진하연도 그들과 함께 나갔지만 나는 남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흑주가 단독으로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다는 건 아마도 그 동안의 녀석답지 않게 높은 장소의 바람을 쐬며 뭔가 생각하려는 모양인데… 지금은 복면을 벗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생각에 잠긴 녀석의 모습을 나도 보고 싶긴 했지만… 내게는 틈이 나는 대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톡,톡,톡.
[ 죄송합니다. 주인님. ]
“닥쳐! 네가 날 속인 일은 나중 다시 따지겠지만… 아니, 난 이제 널 쓰고 싶지 않아. 네 기능 전부 꺼 버려! 이 곳 사람들과의 ‘통역’까지!”
[ 사용자 보호를 위한…… ]
“닥치라고 했지? 더 깐죽대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널 강제로 떼어낼 거야!”
결국… 몽몽은 내 명령에 따라 ‘닥치기’ 시작했고 그 얼마 후 방안으로 돌아온 현노인 가족들과 진하연, 대교 등의 말도 ‘중국어’로 들려왔다. 으… 성질대로 하긴 했는데 앞으로 좀 피곤하게 생겼다.
“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세요?”
내가 인상을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진하연이 다가와 물었다. 나는 그녀와 그 옆의 대교에게 힘없이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니, 약간… 갑자기 조금 머리가 아프군.”
“저런, 그러고 보니 안색이 좋지 못하세요.”
대교도 놀라 맥을 짚어 보려 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됐어.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보다… 흑주는 내려왔니?”
“아직… 제가 다시 설득해 볼까요?”
“아냐, 어차피 흑주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야. 잠시 그대로 놔둬.”
나는 그간 엄청 발전한 내 중국어 회화 능력에 스스로 감탄하며 현노인에게 양해를 구해 방 하나를 배정받아 그 곳의 침상에 누워 쉬기 시작했다. 워낙에 병색 완연한 원판의 얼굴인지라 꾀병 부릴 때는 참 편리하다. 내가 만약을 대비해 본격적으로 중국어 회화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약 6개월 정도 전이다. 기간은 짧지만 자주 몽몽의 통역을 끄고 현지인들의 발음을 들어왔기 때문에 일단 히어링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전처럼 자주 하는 내용의 대화 정도는 말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지만 조금 복잡한 대사는 아직 무리다. 그래서 일단 당분간 아픈 척하면서 말수를 줄일 생각이고… 하여간 가능한 한 당분간 몽몽을 쓰지 않을 각오이다. 평소 정보 제공을 제대로 안 하는 건 나도 그에 합당한 논리를 인정했지만, 이젠 날 속여…? 썅~! 네가 로봇이야? 인간이야?
지능형 정도가 아니고, 인간형도 아니고 자그마치 ‘인간화’식이나 된 ‘몽몽 길들이기’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사이 창 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아무도 내게 알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흑주는 아직 지붕에서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지…? 마음을 가라앉히는데는 물론 지붕 위처럼 호젓한 장소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가을로 접어든 요즘 밤 공기는 찰 텐데 감기라도 걸리면… 음… 이 정도 상황에서 흑주가 감기 걸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떠오르다니… 음… 대다수 남자들이 그렇듯, 내게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무조건 ‘보호 대상’이다. 현재 그 보호 대상들로부터 오히려 보호받고 있는 내 처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래도 역시 이것만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흑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나간 나는 새삼 ‘흑주가 여자였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 녀석과 지냈던 일들이 단편적으로 하나 둘… 그리고 차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어서 떠올랐다. 난… 처음에는 흑주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녀석이 있음으로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고, 또 어떤 때는 녀석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지냈다. 나는 지금… 그 모든 일에 대해 고마움을… 그리고 또 미안함을 느낀다. 그런 감정들에 흑주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뭔가 다른 것이 추가될 수 있을까…? 단순한 호기심 이외에 다른 어떤 이유로 녀석의 본 모습을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가…? 흑주는… 흑주는 내게 뭐였던 거지……?
나는 스스로를 향한 자문의 대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조금 전처럼 ‘걱정’이라는 감정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그 것은 대교나 다른 여자들을 걱정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아직 녀석이 여자라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아니, 아니다.
이건 뭐랄까… 흑주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을 정도로 이미 녀석은 내게 너무 익숙해져 있다고 할까…?
지금까지 목욕탕이든 화장실이든 다 따라 왔던 흑주를 새삼스럽게 떠올려봐도 크게 거리낌이 없다는 건… 수십 년 동안 원판 극악을 종교처럼 믿고 있는, 그래서 내가 ‘극악병’에 걸렸다고 표현하곤 하는 녀석과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나도 불과 1년만에 어느 정도는 ‘흑주병’에 걸려 버린 것은 아닐까?
원판 녀석이 처음 흑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표현한 건 그만큼 흑주를 끝까지 신뢰하겠다는 의미… 아무래도 처음으로 원판과 완전한 의견일치를 본 것 같다.
물론… 난 흑주가 앞으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자신의 인생을 찾기 바라지만, 난 적어도 내가 이 시대를 떠나기 전까지 녀석을 믿고 기꺼이 녀석에게 내 목숨을 맡길 것이다.
녀석은 흑주니까. 원판의… 나의 흑주니까.
후~ 만약 이런 감상적인 얘기를 몽몽에게 한다면 녀석이 과연 이해할 수 있으려나?
‘고작 1년만에 특정 대상에게 그렇게 의지하는 걸 보니, 역시 잘난 내가 코치를 해줘야…’ 뭐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건 아닐까?
음… 오늘 빡 돌아서 몽몽을 몰아세우고 ‘더 이상 사용 안 한다’고 선언한 건, 사실… ‘오버’였지만… 그래도 역시 그냥 넘어 갈 수는 없는 문제이다.
썅~! 흑주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 믿고 있는 녀석이 내게 거짓말을 해…? 으… 그렇다고 정말 계속 안 쓸 수는 없고…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몽몽 녀석을 제대로 길들여야겠다.
최소한 며칠은 몽몽을 사용 안 하며 녀석이 먼저 내게 ‘타협’을 걸어오는 걸 기다릴 생각이다. 비록 이번에 ‘거짓말’도 하는 로봇이라는 것이 밝혀졌어도, 최소한 현재 사용자인 날 보호한다는 기본 명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가만있자… 몽몽 녀석이 ‘닥치라’는 내 명령을 깨고 먼저 말을 걸어 올 정도의 위기 상황을 꾸미려면… 음, 당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천천히… 아, 그보다 시간이 꽤 늦은 거 같고 조금 출출한데 왜 대교가 저녁 먹자고 부르지를 않는… 으악~!
으… 다행히 입 밖으로 비명이 새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조금 전까지의 ‘믿음과 신뢰’에 대한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놀라서 어색하게 더듬거려야 했다.
“…흐, 흑주…? 너, 너… 언제부터 거기에……”
실내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아직 불을 밝히지 않아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서있는 흑주를 발견했다.
본래 전신이 시커먼 복장인데다 지금은 화상 입은 얼굴에 긴 흑발이 어우러져 순간적으로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
으… 몽몽의 부재가 당장 실감나니… 알려주는 놈이 없으니 나야 흑주 정도 고수의 출입을 모를 수밖에……
< 죄송… 이제 다시는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
내가 서둘러 밝힌 등잔 불빛 속에서 흑주는 그렇게 수화를 했다.
에효, 괜히 미안하고 민망하다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 괜찮아. 그보다… 나에 대한 호위는 이 곳에 있을 때만큼은 예외로 한다. >
< 무슨 말씀이신 지……? >
< 이 곳 사람들은 무림인들이 아니야. 그리고 너의 가족들이고… 그러니 우리가 이 곳에 머무는 동안 너는 그들과 함께 있도록 해. >
흑주는 명령 거부 모드로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나는 ‘이번 명령도 안 들으면 진짜 널 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녀석을 설득했다.
결국 흑주는 ‘내가 이 집안에 있는 동안만’이라는 조건을 붙이고서야 ‘가족과 함께 지내라’는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물론,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과정치고는 상당히 비정상적이긴 했지만 녀석의 ‘명령 거부’는 전의 ‘명령 무시’보다야 엄청 발전한 거고 비록 수화라고는 해도 이렇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게 된 자체가 반가웠다.
게다가 나도 아직 능숙하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수화 공부는 중국어 회화보다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 편이 더 쉬웠다.
현노인 일가와 우리 일행, 그리고 양쪽에 다 속하는 흑주까지 한 테이블에서 하게 된 저녁 식사…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썰렁했다.
흑주는 우선 자신을 위해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자신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건조 비상식량만 조금씩 우물거리는 흑주에게 가족들… 특히 외할머니 대부인께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았지만, 녀석은 요지부동! 대답은커녕 제대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이래서야 가족과 함께 지내게 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았고 결국 원망의 화살이 흑주가 모시는 두목인 나에게 돌아올 것 같아 나도 자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진하연이 현재 말을 아껴야 하는 나를 대신해 흑주 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을(물론 거의 날조된.) 잘해 주어서 현노인 일가도 조금은 납득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대부인은 흑주의 손을 잡고 어딘가 데리고 가려 했는데, 흑주는 또 야멸차게 그 손을 뿌리쳤다.
나 없이도 자연스럽게 가족의 정을 느끼게 되면 좋으련만 아직 무리인가 싶어, 대부인의 양해를 얻어 나도 함께 나서기로 했다.
대부인이 안내한 곳은 이 집 뒤쪽의 넓은 정원에 작지만 운치 있어 보이는 연못을 낀 별채였다.
대부인이 잠겨진 문을 활짝 열자 별채의 ‘주인 가족’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내 상상에서처럼 젊고 지적이면서도 늠름한 남자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비록… 실물이 아니라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 속의 인물들이었지만, 나는 한 눈에 그들이 흑주의 부모인 해동선생과 동주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옆에 서있는 작은 동자는 아마도 흑주의 오빠일 것이고, 그리고… 동주부인이 안고 있는 아기는…….
나는 우두커니 문 앞에 선 흑주를 슬며시 잡아끌어 부모의 그림 앞으로 이끌었다.
흑주의 뒤에서 대부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인사드리거라… 너를 낳아 준 부모니라……”
아무 상관없는 나는 불연 듯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
하지만 흑주는… 이 가엾은 녀석은 반응이 없었다. 지금까지와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 태도로 자신의 부모님에게 엎드려 절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서 그림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흑주가 그나마 조금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 것은 어머니 동주부인… 아니, 그녀가 안고 있는 작고 귀여운 아기였다. 흑주는 천천히 오른 팔을 들어 그림 속의 아기에게 손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흐흑~! 그게… 그게 흑주 너란다. 흑~! 그 그림은… 네가 태어난지 100일째 되는 날 그려진……”
대부인의 말에 흑주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흑주의 가는 손가락은(빌어먹을! 녀석의 손가락이 저렇게 가는 줄 처음 알았다.) 조심스럽게 그림 속 아기의 얼굴… 자기 자신의 얼굴을 건드렸다. 손가락 끝을 살짝 대어 본 다음 그 손을 이번엔 현재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져간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엔 어머니의 얼굴과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흑주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이번엔 아버지 옆에 서 있는 작은 동자 위에 멈추었다.
“그래, 얘야. 네 오라비다! 아아~ 인지가 2년 만 참았어도… 그녀석이 아비의 고향에 가보는 것을 2년만 미루었어도 오늘 널 만날 수 있었거늘……”
아… 흑주가…! 녀석이 지금 조금… 웃었다…? 아니, 그냥 내 기분 탓인가…? 제기… 이 빌어먹을 녀석아! 슬프면 슬프다고, 기쁘면 기쁘다고 제대로 표현 좀 해 보란 말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쳐보았지만, 흑주는 조금 전의 미소가 내 착각이라고 말하듯 무심히 손을 내리고 그림으로부터 물러났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아랑곳없이 흑주는 낯선 남의 방에 들어온 사람처럼 성의 없이 실내를 한 번 스윽~ 훑어보고는 그 것으로 끝,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주저앉는 자신의 외할머니도 무시한 채 흑주는 냉정하게 문턱을 넘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환상처럼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챙~! 하는, 무언가가 서로 부딪치는 맑은 소리……
흑주의 발걸음이 멈추었고, 그녀의 전신을 어루만지며 불어온 바람이 부드럽게 방안을 맴돌았다. 작고 단단하며 순수한 어떤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제 멋대로 두드리는 실로폰처럼 질서 없는 소리인데도 마치 깊은 산 속 사찰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고요히 퍼져 가고 있었다.
흑주는 천천히 몸을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방 한쪽에는 아기를 위한 작은 나무 요람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요람 위에 매달려 있는 모빌… 실에 매달린 여러 가지 모양의 금속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어느 사이 흑주는 그 요람과 모빌 앞에 서 있었다. 흑주는 작은 금속 조각들의 움직임을 빨려들 듯 보고 있었고 계속해서 초승달 모양의 조각이 둥근 보름달과 부딪치고, 삼각형이 사각형과 만나 쨍그랑~! 칭~! 소리 내어 웃었다. 아기들의 맑고 활기찬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툭, 하고 무언가 투명한 것이 요람 위에 떨어져 내렸다. 흑주는…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흑주는… 그녀는 이제야 겨우…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해 낸 것일까…? 따듯한 부모의 사랑 속에서 웃고 있던 그 때의 자신을……
요람에 깔려 있는 아기 이불 위로 계속해서 흑주의 눈물이 떨어져 부드럽게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