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2-1화 : 평화로운 한 때(1)
2-4. 평화로운 한 때(1)
뜨거움을 살짝 걷어낸 가을의 오전 햇살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에 흔들리는 연분홍 코스모스…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던 내 앞에 길게 늘어서 하늘거리던 코스모스를 난 이 시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주직촌이라는 이 평화로운 고장에 들어와 흑주의 외가에 머물기 시작한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가끔 이렇게 이 집의 넓은 정원을 산책하곤 했는데, 정원의 한 쪽에 피어있는 한 무리의 코스모스를 발견한 이후 내 산책의 마지막 코스는 항상 녀석들의 앞이었다.
“몇 년 전 지인에게 받아 심었는데, 가을이면 이렇게 운치 있게 피어 주는군요.”
며칠 전 들었던 현노인의 설명이야 뭐, 아무래도 좋았지만… 내 제대 1주년에 맞추기라도 한 듯 내 눈앞에 나타난 코스모스들은 몇 번을 보아도 내게 묘한 감상을 느끼게 했다. 무지 비약하자면, 이 작은 코스모스 꽃들이 1000년의 세월을 넘어 나와 내 시대를 이어주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두고 온 곳에도 이 녀석들은 어김없이 피어나 나처럼 가을에 제대하는 사람들을 배웅해 주고 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수고했어요. 잘 가요~’라고……
“…곡주님.”
옆에 서 있던 대교가 불러 돌아보니, 대교는 꽤나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웃으며 멀찍이 떨어진 별채 쪽을 가리켰다.
흑주였다. 흑주가 현노인의 다른 손녀들… 즉, 외사촌 여동생 두 명과 함께 별채와 연못 사이의 풀밭에 서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가족들에게 서먹한 모습만을 보이던 흑주였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잠시 보고 있자니, 흑주는 사촌들 중 한 명의 아이로 보이는 두어 살 정도의 소녀를 안은 채 그 소녀가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방향으로 걷는다던가 예쁜 꽃을 따 소녀의 머리를 장식해 주는 등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만해도 흑주 의 얼굴이 무섭다고 도망 다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흑주의 품에 안겨 까르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행히 흑주님도 조금씩 가족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 같아요.”
“그래, 아마도……”
“후후~ 흑주님의 저런 모습, 비화곡에 돌아가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나도 대교와 함께 웃었지만 문득 마음에 걸리는 일이 떠올랐다.
“…부럽니?”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을……”
바로 반문하는 것치고는 완전히 부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동안 잠시 잊고 있었지만 대교도 사실 그리 평탄한 과거를 가진 소녀가 아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그 후 아내를 잃은 충격에 맛이 간 아버지 사영 때문에 소녀, 아니 어린이 가장 노릇을 하며 고생만 바가지로 퍼먹었다는 대교는 나중에 동생들까지 어지간히 커서 좀 고생을 면해볼까 하는 참에 졸지에 본단에 차출되어 가게 된다. 비화곡에서 본단 차출이란 곧 ‘군대 입대’와 비슷한 개념이니 참으로 어린 나이에 여군이 된 셈인데, 이게 또 하필 ‘정신 대’ 계열인지라 자부심을 가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나를 만나서 잠시 형편이 풀리는 듯 했으나 곧 주인이랍시고 어리버리 합체 로봇(?)인 나 때문에 다시 고생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내가 별 생각 없이 벌인 일이 화근이 되어 오랫동안 동생들과 헤어져 지내게 된 건 물론이고, 급하게 무공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적도 있었고, 어린 소녀의 몸으로 강호를 종횡하며 쟁쟁한 고수들과 사생결단의 비무를 벌여야 했으며 나중에는 사갈서생 같은 더러운 놈에게 납치당하는 등, 정말 몸 고생 맘 고생 무지하게 했다.
뭐, 결국 현재는 ‘초고속 신분 상승’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낸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직 대교 아니 자매들 모두의 걱정거리가 있으니… 그건 바로 그녀들의 아버지인 ‘사영’이다. 지난번 강호 행의 막바지에 비인사기(非人四奇) 행적 추적이라는 임무를 맡고 떠난 사영… 당시 상황으로서는 그 아저씨의 신변처리가 달리 마땅치 않았고 비인사기들도 가만두기는 싫어서 겸사겸사 맡긴 임무였지만……
“역시 사영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지 말 걸 그랬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곡주께 그토록 엄청난 죄를 지었으니 감히 용서를 바랄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곡주께서 아버지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으니 저희 자매들은 항상 감사를 드릴 따름이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말로 고맙지 뭐. 어쨌든 사영이 나와 비화곡에 배신을 때린 건 사실이고 천인군도의 혈월 같은 목격자가 있으니 언제고 그 사실이 알려질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은 대교의 경우처럼 사영도 큰 임무를 해결하여 공을 쌓게 하는 것이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처벌 주장 여론’에 대항할 수단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대교도 자신들의 처지가 그렇다고 누굴 질투할 소녀가 아니고… 난 다만 연상작용으로 대교 자매와 사영의 일이 새삼 상기되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이 사영 아저씨도 어지간한 것이, 그렇게 떠난 후 지금까지 간간이 임무 수행 진도에 대한 보고를 해 올 뿐 곡에는 아예 돌아올 생각도 않는 것 같았다. 비인사기 중 모용란을 중점으로 추적 중인 모양인데, 한 번은 음혼귀모(淫魂鬼母)와도 다시 맞닥뜨렸으나 아깝게 또 놓쳤다고도 하고… 후~ 문제는 그런 것보다, 이 무심한 아저씨는 아직까지 그런 업무보고 외에는 자기 딸래미들에게 안부 편지 한 장 보낸 일이 없다는 점이다.
“사영… 곧 돌아오도록 조치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후후~ 항상 소녀와 소녀의 가족에게 배려를 잊지 않으시니 어찌 감사드려야 할지……”
“아니, 오히려 내가 그 동안… 너무 무심한 거… 음… 하여간…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본래는 비인사기 중 누구 하나라도 잡아내면 그 핑계로 불러들일 생각이라는 설명도 해주고 싶었지만 대충 생략했다. 그래도 대교의 환한 표정을 보면 알아서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음… 확실히 몽몽을 쓰지 않고 지내는 건 무지 불편하군. 들려오는 건 대충 다 알아듣겠는데, 내 쪽에서 중국어를 할 때는 부담감 때문에 과감하게 긴 대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 동안 가상현실 속에서 그토록 많은 중국인과 회화를 연습했는데도 혹시나 엄한 단어를 엄한 발음으로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다니…
으… 모처럼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대교와의 대화도 마음 놓고 할 수가 없다니… 에이- 어떻게 든 빨리 몽몽 녀석과 단판을 짓던가 해야겠다.
나는 조금 더 흑주가 가족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공연한 기침 몇 번 콜록대는 것으로 대교를 걱정시키며 실내로 들어갔다. 아침 식사도 건너뛰고 늦잠을 즐긴 진하연이 그제야 일어났는지 산책을 나오다 굳 모닝 인사를 하며 내 안색을 살폈다.
“어머…? 아직도 몸이 불편하신 듯 한데 왜 이른 아침부터 바깥바람을 쐬셨어요?”
“…지금이 이른… 아침이냐?”
진하연은 해가 중천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높이로 떠있는 문밖을 힐끔 보고는 새삼 뭐 그런 걸 따지냐는 듯 여유 있는 태도로 웃는다.
“어쨌든… 그 ‘고려무사’를 찾는 일에 대해 오라버니와 상의할 것이 있었는데, 나중 제가 오라버니 방으로 갈께요.”
아무래도 진하연은 갈수록 이번 일에 관심이 깊어지는 모양이었다. 대월 황실의 묵은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 ‘해동선생 실종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면 나의 주가는 더욱 올라갈 꺼야…라는 식의 흑심(?)도 조금 느껴지긴 했지만, 내 입장에서야 녀석의 이런 협조가 고맙기만 했다.
“아, 지금 뭐라고?”
“예?”
“음… 그러니까, 너 방금… 내 방에 온다고… 했니?”
“예, 조금 있다가요.”
“음, 알았다.”
진하연은 내가 열이 올라 잠시 귀까지 멍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새삼 내 이마에 손을 대보고는 내 건강관리를 잘 못했다는 이유로 대교에게 몇 마디 잔소리를 해댔다. 음… 둘 다에게 다소 미안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지. 어쨌건, 이 원판의 육체는 ‘꾀병’ 부리기 하나에는 정말 좋다. 숨을 잠시만 참고 있으면 열이 순간적으로 파악~ 올라주고 맥박도 제멋대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곤 나중에 그냥 침상에 누워 몸을 편하게 한 상태에서 숨고르기만 잘해도 금방 회복…
뭐, 이 것도 다 그동안 쌓인 노하우라고 할까? 의술 전문은 아니지만 사람의 몸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진하연과 대교… 녀석들이 만약 나의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이 될까…? 음… 괜히 이런 일에서 잔재미를 느끼면 곤란한데…
암튼, 원판의 육체를 다시 안정시키고 나서 그에 안심하는 대교를 나는 잠시 자야겠다고 하며 내보냈다. 그리고는 정말 잠이라도 잘 듯 눈 감고 누운 채 몽몽 녀석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는지 점점 정말로 졸음이 오기 시작했을 때 드디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기계 음성이 들려왔다.
[ …주인님, 현재 주인님의 언행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병’을 핑계로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곧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
훗~! 녀석, 결국 미끼를 물었군. 난 지난 일주일 동안 가끔씩 엄한 행동을 하며 밑밥을 뿌려왔는데, 조금 전 내가 진하연의 말을 못 알아들을 척 했을 때 몽몽이 진하연의 말을 자막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그 성과가 나타났었다.
속으로야 드디어 몽몽이 먼저 말을 걸어 보여 온 것이 너무나 반가웠지만, 난 시치미를 딱 떼고 대꾸했다.
“뉘 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