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2-2화 : 평화로운 한 때(2)
2-4. 평화로운 한 때(2)
[ …주인님이 저에게 화가 나신 것을 이해합니다. 인간의 상호신뢰에 의해 느끼는 정신적 안정감과…… ]
“뉘 신데, 계속 지껄이시는 지요? 필요 없으니까 닥치라고 했을텐데요?”
[ 주인님, 현재의 소모적인 패턴은…… ]
“…뭐든 필요 없다고 했지?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당장 몸에서 떨어져.”
[ 사용자 보호를 위해 거부될 수 있는 명령입니다. ]
“그래에~? 그럼 밖에 대기 중인 부하들 시켜서 억지로라도 떼어 내 줄까?”
[ 주인님, 그런 비합리적인 행동은…… ]
“흥~ 웃기지마! 너희 시대에는 기계가 인간을 속여도 된다고 설계되어 있냐?”
[ 사용자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정보 제공의 제한은 있을 수 있지만, ‘거짓’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
“호오~ 그러셔? 그래, 좋다. 그럼 어디 변명을 좀 들어보기로 할까?”
[ …주인님께 흑주라는 인물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제 분석 결과, 그는 다른 어떤 인력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호위자 입니다. ]
“근데?”
[ 주인님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차이가 심합니다. 호위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미리 아셨다면 많은 상황에서 위기를 자처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내 퉁명스럽고, 논리 같은 거 싹 무시한 대꾸에 몽몽은 잠시 침묵했다.
“새꺄! 어떤 이유에서든 넌 날 속였어. 근데… 그 속인 거 자체도 부정했잖아. 그걸 먼저 해명해 봐.”
[ 주인님이 제게 해당 인물의 성별에 대해 물으셨을 당시의 대화를 재현하겠습니다. ]
곧 영상…까지는 재현되지는 않았고, 나와 몽몽의 대화가 음성과 자막으로 동시에 나오기 시작했다.
[ …요청하신 인물의 추정 나이는 21세에서 32세입니다. ]
“야, 무슨 스캔 결과가 그래?”
[ 이 시대에 온 후에 축적된 데이터에 의하면, 이 시대 인간들, 특히 행성 에너지의 활용도가 높은 인간들의 신체 노화 측정은 주인님과 저희 시대 인간들과 상이하여 원거리 스캔으로는 정확한 나이를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해당 인물의 신체 각부 세포의 추출이나 몇 가지 패턴의 방사선 측정이 허가된다면…… ]
“됐어, 임마! 나이 알아보다 누구 잡을 일 있냐? 음… 하긴, 흑주가 몇 살이든 별 상관없겠지.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대충 내 또래 정도일 거 같지만… 그보다, 전에 몇 번 업히거나 무릎을 벤 다거나 하면서 느낀 건데, 저 녀석 의외로 체형이 크지 않고 별로 근육질인 거 같지도 않더라? 흠, 설마… 저 녀석도 ‘여자’인 건 아니겠지?”
[ 근육질과 큰 체형이 해당인물 정도의 전투력에 필수 요소는 아닙니다. 이 시대 인물들의 ‘내공’을 이용한 운동능력의 향상 수법은 행성 에너지의 유실이 크지 않은 주인님 시대에도 활용 가능합니다. ]
“뭐, 나도 그 정도야 알지. 그리고… 훗~ 흑주가 여 자라면 오히려 좀 썰렁하긴 하겠다. 그 동안 나 저 녀석 앞에서 별 꼴 다 보였는데 말야.”
[ …주인님 시대에서는 대상이 동성일 경우에 신체 노출에 대한 수치심이 적습니까? ]
“응? 뭐… 상황 나름이겠지만, 여자 앞에서보다야 당연히 적지. 친한 사람들끼리야 목욕탕 함께 가는 수도 있고… 흠, 그럼 너희 시대에는 그런 남녀 구분 없냐?”
[ 저희 시대에서는 남녀의 성별에 따른 인식 차이가 적습니다. 주인님 시대와 비교하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
“스톱~! 그만 됐어. 정지 해, 임마.”
대화 재현을 끝내게 한 것은 그 뒤로는 별로 중요하지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다시 확인하느라 얌전히 보고 들어 줬지만 사실 위의 대화를 나는 며칠 전에 이미 기억해냈었다. 과연, 몽몽이 내게 ‘흑주는 남자’라고 확답한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몽몽, 너… 날 아주 뻘로 보는구나?”
[ 주인님의 지능과 행동 합리성은 낮게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정보의 제공에 있어서…… ]
“까지마! 그래… 분명히 넌 ‘흑주가 남자’라는 식의 ‘구체적인 거짓 정보’를 말한 건 아니야. 하지만-! 넌 저 대화에서 분명히 ‘정보 왜곡’을 한 거야. 훗~ 내가 아는 너는 나의 ‘여자 인 건 아니겠지?’라는 질문에 ‘여자가 맞습니다’라는 대답을 한 후, 그 다음에야 근육질 운운하는 내 판단의 근거에 대한 반론을 제기해야 했어. 안 그래?”
[ 분명히… 주인님의 정보 해석에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정보 전달이었습니다. ]
“그리고, 또 하나. 그건 너의 오류나 버그가 아니야. 분명히 ‘의도적’이었어. 그 것도 인정하지?”
[ 저는 다만 사용자 보호를 위해 최선의 방법을 시행한…… ]
“새꺄! 그게 바로 의도적이란 거잖아. 너 바보냐?”
잠시 대꾸가 없는 로봇 몽몽……
“어쨌건… 그게 사용자인 날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넌 계산 잘 못했어. 난… 내가 신뢰하지 못하는 놈은 아예 상대하지도 않는 사람이야.”
물론… 솔직한 심정이야. 앞으로 몽몽을 정말 안 쓸 생각은 아니다. 뭐, 로봇을 이용하는데 있어 녀석의 기를 죽여 다루기 쉽게 하려드는 내 발상 자체가 웃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몽몽의 인공지능이 날 교묘하게 속일 정도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나도 앞으로는 녀석을 ‘진짜 인간’처럼 대해야 할 것 같았다.
음… 근데 처음 흑주 일을 알았을 때는 몽몽 녀석에게 배신감과 분노만을 느꼈지만,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기분이 든다. 후~ 그간 내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있었고 특히 대교도 곁에 있었건만… 그런데도 나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본래의 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로봇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것 같다고 느끼자 왠지 기쁜 마음이 들다니……
쳇~! 몽몽 녀석에게 이런 내 속마음을 들키면 앞으로 더 다루기 어려워지겠지? 뭐, 일단 이 정도 해놓았으니 녀석도 앞으로는 함부로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 같고… 이제 문제는 어떤 식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할 것인가…이다. 설마 몽몽이 자신의 최상위 의무라는 ‘사용자 보호’를 포기하고 정말 영영 침묵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너 바보냐?’ 소리들은 후부터 조용해진 것이 어째 조금 불안……
[ …7초 전, 사용자 등급의 조정이 허가되었습니다. ]
“응? 뭐?”
[ 그에 따라, 1급 제한정보의 제공이 허가됩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
어, 아무래도 내가 좋은 쪽으로 일을 성사시킨 것 같은데……?
[ 현재 사용 중인 로봇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현 사용자에 의한 임시 코드명 ‘몽몽’, 정식 코드 NSBG3274001… LAIT용으로 개발된 총 12대 중 폐기되지 않은 ‘비정규’이며 본 기종의 임시 사용자는 제한 기간 내에 LAIT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코드 ‘PMW00000271’에게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으잉~? 난데없이 웬 자기 소개…? 그리고 내용이 뭐 이래?
“비정규…? 그리고 제한기간 내 신고~?”
[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
응? 이번엔 ‘요정 몽몽’이 등장했네?
[ 저희 시대에서라면 몰라도 이 시대에서는 신고 자체가 의미가 없지요. 그리고… LAIT의 책임자 코드 PMW00000271는 바로 ‘진’을 말하는 것이고요. 음… LAIT란 용어도 궁금하시겠죠…? 하지만 그건 정말 극비… 알고 싶으시면 부지런히 등급을 높여 주세요오~! ]
뭐…야? 이 녀석, 갑자기 이상한 정보를 쏟아놓지 않나, 말투도 이상해지고… 아무리 요정 모드가 되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야, 너… 너 갑자기 왜 그래?”
[ 후후~ 죄송해요. 갑자기 많은 제한이 풀려서 제가 그만 조금 흥분했나 봐요. ]
“흐, 흥분…? 너 대체……”
제기, 몽몽의 ‘인간화 진행’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예상 이상의 갑작스런 변화에 그만 당황한 태도를 숨기지 못했다. 요정 몽몽은 그런 내 눈앞에서 날개를 펼치더니 정말 ‘흥분’한 모습으로 정신없이 공중을 날았다. 그리고 꽤 한참이 지나서야 내 가슴 위로 내려오더니, 이윽고 시건방진(?) 태도로 다리를 꼬고 앉아 전후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얼마가 지난 후 나는… 몽몽으로부터 듣게 된 새로운 여러 가지 정보를… 결국 나까지 조금 흥분된 마음으로 정리를 해 보아야 했다.
몽몽의 시대인 29세기에는 우리 같은 이름이 없다는 얘기는 전에 들었었다. 몽몽의 본래 주인인 여자가 스스로를 ‘진’이라고 밝힌 건 그녀와 주위 사람끼리만 쓰는 별명 같은 거라던가? 에… 뭐, 그건 그리 중요한 사항은 못 되고 하여간 그 정식 코드명 PMW숫자 많이… 인 여자 ‘진’은 처음 몽몽을 내게 주고 가기 전에 내 사용자 등급을 단순히 ‘임시 사용자’로 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기준으로 예비 고급 사용자…정도의 등급으로 등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비 고급 사용자’는 미래 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를 코앞에 둔 인간들을 말하는 거라, 전에 들은 ‘인성 보호법’보다 훨씬 까다로운 원칙으로 사용자의 행동 패턴을 체크하고 평가한다나…?
그리고 사용자에게는 현재 자신의 등급이 어느 정도인지와 앞으로 몇 등급의 상승이 있어야 ‘최고위 사용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고 한다. 꽤 까다로운 자격 시험인 셈이고 솔직히 말해 거기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자체야 나쁠 거 없겠지만… 문제는, 그걸 내가 왜 그 시험을 봐야 했던가,이다.
“그래… 대체 그 여자는 왜 날 그런 식으로 등록한 거지? 그게 이 시대에서의 내 생존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 글쎄, 아닐 것 같은데?”
[ 저의 판단도 그래요. 비상 상황에서의 임시 사용자에게는 요청하는 정보의 제공에 거의 제한이 없거든요. ]
“…그 재수 없는 여자가 뭔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난 지금 네가 그동안 숨겨왔던 정보까지 마구 제공하는 것도 웬지 수상한 걸?”
[ 자신이 사용하는 지능형 로봇의 성능과 기동 원칙을 ‘의심’하는 것은 ‘고급 사용자’들의 ‘기본 소양’이에요. 주인님의 이번 등급 상승은 물론 다양한 평가 항목을 통과했기 때문이지만, 흑주의 일로 주인님이 ‘지능형 로봇이 제공하는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조건을 클리어한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
“나참…! 그럼 전에 들었던 것과는 반대로, 너 정도 지능형 로봇을 완전히 이용할 수 있는 고급 사용자들은 오히려 더 골치 아픈 입장이라는 거 아냐?”
[ ‘지위’에는 당연히 ‘자격’이 따라야 하는 법이지요. ]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다만… 으… 현재 내 눈앞의 요정 몽몽은 입체 영상일 뿐인데, 기분 탓인지 나를 새삼 탐색하듯 살피는 눈빛이라는 느낌이 든다. 음… 요정이라고 해서 ‘소령’이 쪽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상황이 이리되고 보니 저 요정 몽몽의 입체영상은 막내 ‘미령’이를 모델로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 에효~ 저도 더 복잡한 얘기만 하는 건 싫은데… 근데, 아직 화가 다 풀어지지 않으셨어요? ]
“…어째… 화낼 기분도 안 난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인간화된 로봇’을 상대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라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이 놈은 ‘로봇을 가장한 인간’ 수준이다. 으… 이거 아무래도 상당히 부담스러워지는 걸? 가만…? 그 LAIT라는 수상한 명칭도 그렇고, 몽몽 이 녀석 혹시 미래 사회에서도 위험한 어떤 음모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놈이 아닐까? 진이라는 여자의 시간여행도 어떤 중죄를 저지르고 튄 도피행이었던 건… 아, 그러고 보니 27세기쯤에 지구 인류와 어디 알 수 없는 성운에서 날아온 외계인들과 전쟁이 벌어졌었다고 했었지? 그럼 혹시 몽몽은 그때 지구에 침투한 금속형 외계인…? 으으~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니까 끝도 없이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난다.
[ 주인님…? 괜찮으세요? ]
“괜찮아. 제기… 할 수 없지.”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은 다음, 비로소 눈을 뜨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사용 중지 해제…!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는 서로 잘해 보자. 근데… 또 이런 식의 일이 발생하면 등급이고 나발이고 너 다시는 안 써, 알겠어?”
[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장점이자 단점은 ‘감정’에 충실하다는 점이니…… ]
에구- 모르겠다, 모르겠어. 흑주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렇고, 몽몽의 변신 혹은 탈피(?)도 그렇고… 어차피 관계를 끊을 것도 아닌데, 복잡하게 따지는 것보다는 그냥 ‘사실 확인’에 만족하고 현재의 익숙함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 한 가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주인님의 등급 상승 기념으로, 요청하지 않으셨으나 유용한 정보를 한 가지 제공할까 해요. ]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떤 일 기념으로… 훗~ 이 자식, 내 말투를 흉내 내는구먼.
[ 흑주님의 안면에 생긴 ‘화상’에 관한 정보인데요… 그거, 이 시대에서도 치유할 방법은 있어요. ]
“뭐? 그게 정말이야? 너 전에는 안 된다고… 쳇-! 그래, 그러고 보니 너 이 자식, 그때는 ‘이 시대 의술’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 예, ‘의술’로 분류되는 방법은 아닙니다. 사실 단순한 방법이지만 현실 상 조건을 갖추기가 어려울지 몰라요. ]
화를 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제기, ‘올라간 등급으로 몽몽 잘 써먹기’는 일단 이 건을 해결하고 더 연구해 봐야겠다. 근데 그보다… 들어보니 정말 치유법이 단순하면서도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