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2-3화 : 평화로운 한 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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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2-3화 : 평화로운 한 때(3)


2-4. 평화로운 한 때 (3)

흑주에게 현재 내공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의 내공을 주입하여 세포의 급격한 활성화를 유도하라…는 건, 결국 엄청난 내공으로 환골탈태시키라는 말이다.

근데, 현재 그 정도 내공을 가진 고수가 어디 있어? 물론 천마 대장로를 비롯한 비화곡 장로들쯤 되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 노인네들이 흑주 얼굴 고쳐 주려고 피 같은 진원진기를 퍼줄 리 만무했다.

진원진기라… 음, 나야 그런 계통을 체계적으로 배운 바가 없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자학자습으로 내공(=진기?) 같은 용어들에 대해 나 나름의 개념을 잡아 놓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몇 번 맛이 갔을 때 대교 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공으로 환자의 응급처치를 하는 정도는 나도 많이 봤었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서 진원진기가 아니다. 고수들이 내공을 써서 뭔가 하는 걸 보통 그 방식의 구분 없이 그냥 ‘진기를 소모했다’라고 표현하곤 하지만 실제로 진기를 소모하는 경우는 몇 가지… 아니, 흑주의 환골탈태를 위해 필요한 요소를 설명하려면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우선 무공을 펼쳐 공격을 한다거나 환자의 응급처치를 한다거나 할 때 쓰이는 진기는… 음, 일단 그걸 ‘충전된 내공’이라고 해두자. 충전 배터리로 전기를 쓰듯 소모하고 또 충전할 수 있는 에너지라고 할까?

그에 비하자면 ‘내공을 전수’한다고 하는 경우의 진원진기는 ‘내공을 충전하는 배터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와 에너지원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흑주의 얼굴 성형(?)에 필요한 요소는 에너지원… 즉, ‘충전 배터리’ 쪽이라고 생각하면 맞겠다.

충전된 전기야 얼마든지 제공할 사람을 구할 수 있겠지만, 자기 에너지원인 배터리 자체를 뚝 떼어줄 사람은 없다. 평생을 무공 연마에 바치는 무림인들에게 무공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라고 하면 “됐네, 이 사람아. 그냥 죽을란다!” 그럴 것이다.

게다가 고용량 배터리 장착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어디서 쬐그만 거 모아서 주는 건 안 되고 그 전의 배터리보다 더 용량 큰 놈을 통째로 갈아 끼워줘야 한다는 점이다. 흑주를 능가하는 고용량 배터리를 장착한 초고수들은 앞서 말했듯 비화곡에서도 장로급들… 내 말이라고 들어먹을 리가 없다.

흑주의 사부들…? 그들은 협조해 줄런가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장로들에 비해 내공이 좀 딸린다. 그럼 남은 건 흑주의 배터리를 자체 업그레이드… 즉, 대교의 경우처럼 영약을 먹이는 건데, 자연발생 전기를 품고 있는 셈인 영약의 효과를 이용하는 것도 역시 지금은 어렵다.

대교는 애초에 별로 내공이 높지 않은 상태여서 영약의 효과도 좋았지만, 흑주는 이미 지 사부들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는 상태… 흑주의 내공을 높이려면 그만큼 더 초강력 울트라 짱 화끈한(오랜만에 쓴다) 영약이어야만 ‘약발’이 선다. 가뜩이나 수많은 영약을 대교에게 써버려서 보통 수준의 영약 재고도 얼마 없는 데, 그만한 초강력 영약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비화곡에도 없는 귀한 물건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줄 리도 없고… 결국, 두 가지 방법이 다 지금은 어렵다는 결론이다.

뭐… 그래도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 일단 ‘희망’을 가져도 좋으려나?

“야, 몽몽… 등급 상승 기념 선물은 고맙다만, 내가 흑주를 위해 장로들을 협박한다거나 영약을 구하기 위해 소림사를 쳐들어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위험을 자처’하게 되면… 너, 이 정보 제공이 ‘사용자 보호 원칙’에 어긋나게 되는 거 아냐?”

내가 비죽이 웃으며 묻자, 요정 몽몽… 아니, 녀석은 이미 어느 틈에 사라져버렸고 전처럼 목소리만 들려왔다.

[ 주인님은 확실히 그런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주인님과의 신뢰 회복이 전제되지 않는 한 모든 보호 프로그램의 효과적인 실행이 어려울 것이란 판단을 우선 적용했습니다. ]

“그려…? 흣~! 그야 당근이지. 너, 잘 생각한 거야, 암!”

나는 아까 들어올 때와는 180도 달라진 기분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방을 나서서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의 한쪽에 있는 뒷문으로 마침 대교가 동생들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는데, 자매들 네 명 모두가 한 아름씩 꽃다발을 안고 있는 걸 보고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아까 대교를 방에서 내보낼 때 달리 핑계가 생각 안 나서 무심코 “화병의 꽃이나 갈아달라”고 했었지만 이건 좀……

“야, 너희들…! 주직촌의 꽃을 모두 거덜 내려 작정했냐?”

내 말투나 행동에서 컨디션이 좋아졌다는 걸 느꼈는지 자매들이 모두 꽃 속에서 기쁘게 웃음 지었다.

그동안… 너무 흔한 표현이라 안 하려고 했었는데, 이건 정말 너무 노골적인 상황이로군. 나, 진유준… 남은 생애 동안 과연 또 이런 ‘꽃밭’에 둘러싸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주직촌의 흑주 외가에 빌붙어 지내는 나날은 한 동안 더 지속되었다.

현노인 일가의 소원인 흑주 반납(?)은 당사자인 흑주가 거부하고 나도 당장 아쉬워서 들어줄 수는 없었지만, 기왕 온 거 가능한 한 오래 머물며 가족들의 회포를 풀어주기라도 한 것이다.

물론, 나는 수라혈불(修羅血佛)이 강호를 완전히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게긴다는 목적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기다리다 지쳤는지 비화곡에서는 며칠 전 나왔다고 한다.)

흑주와의 약속 때문에 녀석이 가까이 없을 때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답답했지만, 난 본래 짱 박혀 있는 거 잘하고, 진하연과 소교, 소령, 미령이들과 노닥거리느라 그리 심심한 건 못 느꼈다.

진하연과 대교자매들도 이미 현노인 일가와 친해졌는데, 난 이상하게 내 또래인 흑주의 사촌들보다 현노인과 그 큰아들, 그 노땅 부자와 더 마음이 맞아서 그들은 뻑 하면 저녁때 술 한잔하자고 날 불러대곤 한다.

근데, 아무래도 현노인 부자의 태도로 보면 ‘며칠이고 더 놀다 가시오.’ 정도가 아닌 듯했다.

뭐… 이 시대(20세기에도?) 중국인들은 마음에 든 손님을 대접할 경우 ‘며칠’이 아니라 ‘몇 년’도 개의치 않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현노인 부자, 아니 그 일가 전체의 환대는 어딘지 좀 수상했다.(?)

날자 헤아리기도 귀찮아서 잊었지만 대충 보름쯤 지났을 때, 난 대교와 함께 해동선생 부부의 별채와 연못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위치한 조그만 정자에서 오후의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호호~ 여기 분들은 곡주님을 흑주님의 배필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대교가 짐짓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정자 난간에 위태하게 걸터앉아 연못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대교의 얼굴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대교 정도의 지위를 가진 자들 중에서 흑주에게 ‘님’자를 붙인 건 대교가 처음이었다.

“흐훗-! 왜, 내가 정말 흑주와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니?”

“흑주님은… 오랜 세월을 곡주님의 그림자로만 살다 가 이제야 저렇게 밝은 태양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지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흑주님께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의 저 화상도 치유될 수 있다고 하셨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정말 ‘무지하게 외람된 말’을 한 대교는 살짝 고개를 숙여 연못 위의 자신과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걸 화를 내 보일까, 아니면 정말 그런다고 하며 놀려 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그냥 대꾸 없이 몸을 숙여 대교 바로 옆의 난간에 두 팔과 상체를 기댔다.

이 시간에 날씨가 좋으면 항상 흑주가 어린 조카들과 함께 산책을 나오는데 지금은 정원에서 가장 큰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복면은 벗었어도 아직은 본래의 검은 상하의 복장을 고수하고 있는 흑주… 헌데 지금은 그 위에 그야말로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어린 조카들이 그 작고 가는 발로 부지런히 뛰어 다니며 꽃을 꺾어다가 흑주의 머리에 꽂아 주고 꽃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 준다거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멀어서 흑주의 표정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스스로 민망해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후후~ 아직까지는 나도 실감이 안 나지만, 그래도 지금 저런 모습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군.

“대교야. 나… 정말 그럴까? 여자로서의 흑주도 가질까?”

“그건, 곡주님의 마음… 소녀는 곡주님의 뜻이라면……”

“정말, 그래?”

“…예.”

“…정말?”

대교는 더 대답을 반복하지 못하고 대신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을 연못 위로 던졌다.

대교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던 잔잔한 수면이 둥글게 퍼져 가는 물결로 흐려졌다.

“흑주는 흑주… 대교는 대교… 난 그냥 지금 그대로 가 좋아.”

“곡주님, 소녀는 다만……”

“알아, 나도 흑주가 좋아. 그렇게 마음을 닫아 걸고 사는데도 이상하게 정이 가더라구. 그래서… 녀석이 행복해지기를 바래. 하지만 그 행복은 지금부터 녀석이 선택하는 거야. 나도 너도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소녀가 보기에는 흑주님도 곡주님을……”

“흑주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건 강요된 감정이었을 뿐, 녀석의 진짜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해.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대교도 선택권을 가지지 못했었는가?”

“예…? 아, 그건… 소녀는……”

대교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무언가 작은 것을 연못 위 자신의 얼굴에 던졌다.

그 전에 너무 작아서 들릴 듯 말 듯 했던 몇 마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소녀는… 이미… 선택권을 사용했습니다.”

대교가 아직 비취각에 있을 때, 우연히 비화곡주를 목격하고 그 때부터 곡주를 마음속에 품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비취각주에게 들은 일이 있었다.

지금 대교로부터 ‘난 스스로 당신을 선택했다’는 뭉클한 고백을 들은 거였으면 좋겠지만, 시기상으로 봤을 때, 첫눈에 대교의 마음을 빼앗은 녀석은 내가 아니다.

…제기! 좋았던 분위기가 한 방에 망가지는군.

“너 방금까지 연못에 뭐 던진 거냐?”

“예? 그냥… 아까 정원에서 예쁘고 작은 돌이 있기 에 몇 개 주워놓은…..”

“하나, 아니 다 줘봐!”

대교는 애써 고백한 뒤끝을 숨기지 못해 붉은 기가 도는 얼굴로 머뭇거리며 내 손바닥에 몇 개의 작은 돌을 떨어트렸다. 나는 에잇~! 소리를 내며 마구 돌을 던져 연못에 물방울이 튀기게 했다. 우쒸~! 돌, 돌 더 없나? 더 큰 거, 왕창 큰 거~!

“곡주님……?”

“응? 아, 아니… 그냥 너 던지는 거 보니까 재밌어 보여서… 하핫~!”

“소녀가… 곡주님을 불쾌하게 했습니까?”

“어… 그럴 리가 있나. 난 다만… 음, 그러니까……”

나는 공연히 머쓱해져서 옆머리를 극적이며 잔물결이 번지는 연못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불쑥 고개를 들었다.

“대교야!”

“옛!”

“음…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지금 내 모습이 변한다면, 내 이 얼굴과 몸 전체가 모두 바뀌어 버린다면 넌 어떻게 할래?”

“무슨 말씀이신 지… 소녀는 잘 이해가……”

“말 그대로야! 내가 만약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린다면 어떨 거 같으냐구. 난 분명히 난데… 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바뀐다면, 그래도 넌 지금까지처럼 날… 좋·아·할·수·있·겠·니……?”

내 뜬금 없는 말에 대교는 잠시 멍하니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어머, 댁이 비화곡주가 아니면 내가 뭣 때 문에 관심을 가져? 웃겨~!’라는 극단적인 대답이 나올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대답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순간보다 떨고 있었다.

“설마… 곡주님, 설마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자신의 육체를 다른 사람의 육체와 맞바꾸는 주술’을 실행 하실 생각이십니까?”

대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됩니다. 그런, 그런 위험한 사술을… 저는 결코 수긍할 수 없습니다.”

“아니… 꼭 그거 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만약의 경우에 말야.”

대교야, 미안하지만 원판 놈이 버얼~써 해 버렸단다. 그 결과가 이거야. 잘못 합체된 변신 곡주… 나 어리버리 극악!

“곡주님! 소녀가 온 천하를 뒤져서라도 곡주님의 몸을 회복시킬 방도를 찾을 것이니, 부디 그런 위험한 일을 하시겠다는 말씀만은 마세요!”

아얏~! 대교가 갑자기 내 팔을 잡고 흔드는데 이 녀석, 흥분하여 힘 조절이 안되고 있었다.

“어, 야아~!”

“어머…! 죄, 죄송… 하지만, 방금 말씀만은 부디 거두어 주세요.”

으… 제기, 대답한 번 듣기 어렵네. 할 수 없지, 일단 달래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웃으며……

“후훗~! 오해하지마, 대교야. 전에 내가 그런 일을 시도하려고 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가 이번 에 그… 수라혈불을 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안 그래?”

“수라혈불… 그 사람이 지금까지 곡주님께 이상한 사술을 많이 전하여 그때마다 곡주님의 건강이 많이 상하셨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습니다. 만약 또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소녀는 결코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곡주님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랄지라도!”

“대교야… 무서워.”

“예, 예? 아, 소녀가 그만……”

정말로 살벌한 표정이었던 대교가 내 농담 아닌 농담에 민망한 태도로 조금 물러나자 나는 길게 한숨을 몰아 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금 서글픈 심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래, 미안타. 내가 잘못된 질문을 했나보다. 그래, 말도 안돼는 얘기지.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일 같은 건……”

“그야… 하지만, 말씀대로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이 변하겠습니까. 유한한 육 체가 바뀌어도 무한한 영혼은 여전히 곡주님인 것을……”

응…? 뭐야? 포기하니까 오히려 대답이 나오네?

“…그럼, 대교 너는 그런 일이 생겨도 나에 대한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니?”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눈앞의 현실로 흔들리거나… 심지어 자신의 의지로도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으~ 이… 악마 같은 계집애… 어떻게… 이렇게 항상…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줄 수가 있는 거지?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그냥 웃었더니 대교는 그게 오히려 다른 어떤 말보다 원망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동안 내 마음을 묶고 있던 굵은 사슬 하나가 끊어져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대교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잡아당겼다. 그저 살짝 끌어당겼을 뿐인데 어느 사이 대교의 따듯한 숨결이 느껴졌고 나는 그대로 대교에게 키스했다. 처음으로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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