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3-1화 : 두 남자의 위기감지능력(1)
2-5. 두 남자의 위기감지능력(1)
지금까지와 달리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없이 대교의 입술과 숨결을 느꼈던 전날의 기분이 남아 있어서일까……?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내 입가에 웃음기가 맴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행복한 꿈을 꾼 기억이 나지도 않은데 웃으면서 잠에서 깰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아서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괜히 또 히죽대며 웃어 보았다.
그런 내 기분에 동화된 듯 아침이면 창가에서 지저귀며 내 잠을 깨워주던 새들도 웃고 있었다. 아니, 가만… 새가 웃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비로소 완전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보니, 과연… 내가 들은 것은 진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늬만 새…? 아니 날개의 형태로 보았을 때, 곤충과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요정 모드의 몽몽이 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침상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다가 내 머리맡의 침상 위로 내려앉았다.
[ 안녕히 주무셨어요, 주인님? ]
“대충 안녕한 거 같다. 근데, 너… 대체 요즘 뭘 기 준으로 변신, 아니 모드 변환하는 거냐?”
[ 그냥 랜덤… 내키는 대로요. 후후… 그 동안 저도 많은 데이터가 쌓였는걸요. 의미가 없는, 저답지 않은 행동을 ‘흉내’내 보는 것도 ‘학습’이랍니다. ]
“글세… 어째 흉내라고 느껴지지가 않는다만… 그보다 엄청난 등급 상승이라는 게 뭐 이러냐?”
[ 예…?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난 하나도 좋은 점이 없고, 너만 신난 거 같아서 그래, 임마.”
[ 와아~ 설마요. ]
어디서 배웠는지(?) 깜직한 표정과 몸짓으로 애교를 떨기까지 하는 저 놀라운 모습… 저 로봇이 정말 로봇이란 말인가……?
“암튼… 아함~! 늦었지만, 굳 모닝이다, 몽몽!”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침상에서 내려와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이 곳에 와서는 거의 그랬듯 평온한 시간의 이어짐에 이런저런 고민도 잊은 채 오전을 보낸 나는 오후가 되어서는 오랜만에 모두를 이끌고 야외로 ‘소풍’을 나갔다.
주직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수색을 목적으로 돌아다니던 미령이가 발견한 곳이라는 데, 주변의 짙은 숲이 일부 여유를 두고 원형의 공터를 이루고 있었고 완만한 경사를 따라 넓게 자연의 잔디밭이 펼쳐진 형세가 내게는 마치 우리 시대의 고궁에라도 놀러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진하연에게는 애완용(?)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지만 자신은 또 자기보다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소녀가 소령이다. 진하연과 소령이, 흑주의 조카들이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같은 형태로…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나는 그들보다 조금 위쪽 언덕에 앉아서 내려다보았다.
“…무척 즐거워 보이지 않아? 너도 함께 어울리지 그래?”
내가 슬쩍 물어보자, 옆에 앉아있던 흑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며칠 만에 극성스러운 조카들로부터 벗어난 흑주는 집 밖으로 나오면 내 곁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긴 했으나 이미 평소의 ‘경호 모드’는 아니었다. 두 무릎을 모아 세우고 두 팔로 그것을 감싸 안은, 어쩐지 녀석답지 않게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처녀아이 같은 모습이랄까? 아니… 실은 이 것이 흑주의 본 모습이려나…?
솔직히 말해, 지금은 얼굴의 화상흉터가 너무 섬뜩해서 전설의 고향에 출연한 ‘원혼’ 분위기인 것이 사실이지만, 화상을 치유하게 되면 얘도 꽤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음… 화상을 치유했을 때의 본 얼굴을 몽몽에게 영상으로 복구시켜 본 건 꽤 오래 전 일이었는데, 그 때는 흑주를 남자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짜식, 좀 생겼네?’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었다.
“흑주… 잠깐 무릎 좀 빌려 주라!”
내 뜬금없는 말을 흑주는 금방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슬쩍 뒤로 눕는 시늉을 해 보이자, 결국 어정쩡한 태도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음… 전에 모용란을 만났던 배 안에서 흑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생각이 나서 추억 되새김을 해 볼까 한 건데… 그 때와는 달리 흑주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듯 그리 편안한 베개 모드가 아니었다.
“미안. 하지만… 흠~ 기억나니? 전에 내가 배에서 쓰러졌을 때, 이렇게 네가 무릎을 베어 주었잖아. 나, 그때 참 편했었거든. 뭐…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줘.”
웃으며 올려다보니 흑주는 살짝 내 시선을 피했고, 잠시가 지나자 무릎과 주변 근육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음… 있잖아. 너 그거 알아? 네 얼굴… 그 화상을 치유했을 때를 미리 생각해 봤거든? 에… 네 얼굴 보았던 건 15년이나 전이긴 하지만… 뭐, 하여간 지금의 넌 굉장한 미인이야. 저 대교 자매들 못지 않은……”
얼굴을 전반적으로 덮고 있는 화상과 본래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흑주라 표정을 읽기는 어려웠지만 내 칭찬에 흑주가 조금 동요한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내 말을 듣는 순간 이완되어 있던 몸이 다시 살짝 굳어졌던 것이다. 흑주의 무릎 위에 누여진 내 머리와 목덜미가 탐지기 역할을 한 셈이다.
“후후~ 흑주 네가 진작에 복면을 벗었더라면, 너를 추종하는 남자들이 줄을 이었을 텐데 말이야.”
장난기 섞인 내 말에 흑주는 잠시 뭔가 생각해보는 것 같더니 수화로 답해왔다.
< 죽이겠습니다. 그런 자는, 방해, 됩니다. >
“…야, 너… 그럼… 안되지이~.”
무슨 일에 방해되느냐는 되물 필요도 없겠지? 어쨌든 하도 딱 부러지게 말해버리니까 잠시 뭐라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으음… 거,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래 남녀가 서로 끌린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 음……”
난 꺼낸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흑주가 사람의 감정에 무지한 상태라 해도 내 주제에 누구에게든 사랑학 강의씩이나 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서둘렀나보다. 그 것도 나중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노릇이고… 훗~ 어쨌든 흑주 너에게는 ‘너보다 강한 남자’가 필요하겠다. 널 얻기도 전에 이승을 떠나지 않으려면……”
< …저는 제가 원해서 얼굴… 버렸는데 왜…… >
“알아, 임마.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 난 말야……”
갑자기 중요한 주제가 나와서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 그런 극단적인 방법… 싫어해. 공과사…를 구분할 수 있어야… 그 것이 진정 강한 거라고 생각해. >
공과사 구분…? 내가 이거 맞는 예를 들은 거야…? 그리고 어째 중요한 얘기다 싶으면 나도 굳이 수화로 바뀌는지 모르겠다. 어디, 이번엔 두 가지 다 섞어서 해볼까?
“음… 그러니까. <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가지에 몰두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자신을 버리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강함이라는 거지. >”
< 죄송하지만… 흑주는 자신…없습니다. >
“한 번 해봐! < 해보지도 않고 미리 선 긋지마. >”
< …잘못되는… 그 때처럼……. >
음, 전의 강호행 때 몇 번 내 경호에 실패했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후후~ <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해보라는 거야. 너에게 목숨을 맡기고 있는 사람이… > 그건 너의 재능을 내가 믿고 있다는 뜻… 알지?”
흐음… 수화를 이런 식으로 섞어서 쓰는 것도 의외로 재밌네? 근데 아차! 엄한 데 신경 쓰다가 지금의 내 말에 대한 반응 탐색을 잊고 말았다. 으… 하여간 나란 놈은.
“곡주…님… 이상… 변했……”
“응? 아, 그거야 뭐…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거지 뭐. 흑주 너도 앞으로 그럴 것이고……”
“곡주님… < 흑주는 변하지… 않습니다. >”
짜식, 따라하긴.
“뭐, 아무래도 좋아. 그냥… < 좀 더 살아보고 다시 얘기하자구, 아직 젊잖아, 우리. >”
다소 ‘DOG덩 철학’스러운 말만 해 준 것 같기는 했지만, 흑주가 아예 ‘부정’하는 눈치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새삼 이 주직촌에 흑주를 데려온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뭔가 더 해줄 말을 찾아보았는데, 내 머리 속의 ‘다른 사람용 훌륭한 이야기 사전(?)’ 검색이 끝나기 전에 우리의 대화는 막을 내려야 했다.
“여어~ 대교! 질투가 나서 훼방 놓으려고 왔니?”
우리 쪽으로 걸어올라오고 있는 대교에게 흑주의 무릎을 베고 누운 자세 그대로 여유 있게 한 손을 흔들어 보이자 대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흑주님을 찾은 건 모두의 뜻이랍니다.”
“응? 나 말고 흑주……?”
“예, 곡주님은 잠시 혼자 명상이라도 하고 계셔야겠네요. 후후~”
고개를 저었지만, 역시 ‘훼방꾼’의 태도가 여실한 대교가 머뭇대는 흑주의 팔을 끌어 약간 아래쪽에서 놀고 있는 다른 사람들 쪽으로 데리고 가자 나는 정말 잠시 혼자 왕따의 서러움을 만끽해야겠다. 그 동안 그렇게 계속 고집을 피웠던 흑주가 비교적 얌전히 대교에게 끌려 내 곁을 떠나는 것을 보니 웬지 시원섭섭하다고 할까…? 그렇게 흑주의 변화를 바라며 부추겨 놓고도 막상 변하는 듯 하니까 그런 기분을 느끼다니 사람 마음이란 역시 참, 간사한 건가 보다.
뭐… 어쨌든, 야외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길게 누워 저 높은 곳까지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 자체가 무척 좋았다. 가을 하늘 아래에서 나무와 흙 냄새를 덮고 누운 팔자좋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현상… 그 것은 졸음… 음……
응…? 뭐지…? 어… 나, 잠깐 졸았군. 어… 근데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나는 부시시 눈을 뜨고 고개만을 살짝 들어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흑주를 포함한 모두가 하나씩 풀피리를 입에 물고 불어 보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음, 뭐지? 계속되는 이런 좋은 분위기에서 왜 난 뜬금 없이 묘한… 굳이 정의하자면, ‘불안감’이랄 수 있는 기분을 느끼는 걸까……?
요즘 들어 가끔 느끼는 이런 불안감은 발생 빈도나 타이밍도 불규칙했고 그만큼 상당히 막연한, 그야말로 괜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마다 잠시가 지나면 잊어버리곤 했다. 언제인가도 생각했듯 현재 상황들에 적응이 너무 잘 되니까 이렇게 익숙해져 버리면 나중 돌아갔을 때 재적응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좀 있고… 음, 이건 확실히 조금 일 뿐이다. 그보다는 익숙해진 만큼 처음 이 시대로 날아왔을 때와 달리 긴장도가 떨어져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지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유력한데, 근데… 구체적으로 뭘 놓치고 있는 건지 그게 뭔지를 통 모르겠다.
잠깐 사이에 공연히 싱숭생숭해진 나는 기분전환으로 여전히 소풍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일행에 끼어들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 근데 내려가는 나와 맞은 편인 언덕 아래에서 이 편으로 올라오고 있는 저 남자는… 그래, 묘강의 고수들 중 한 명인 ‘천응’이로군. 묘강의 야수대대 지회관 중 한 명인 그는 이름처럼 매 같은 새를 전문으로 다루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고수이다.
내가 일행들에게 가까이 내려갔을 때는 이미 진하연이 천응에게서 편지 같은 걸 받아 들어 읽기 시작한 참이었다. 편지 형태로 봐서는 묘강인들이 전서구에 매달아 연락에 이용하는 작은 용지 같은데… 그걸 읽은 진하연이 어째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응, 왜. 뭔가 좋지 않은 소식이니?”
진하연은 길게 한숨을 몰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세히 말씀 드리기는 어렵지만, 본국에 약간의 일이 생겨 우린 서둘러 돌아가 봐야 할 듯해요.”
“그래…? 흠, 아쉽지만 할 수 없구나. 조만간 내 쪽… 아, 그래. 하는 수 없지.”
하마터면 ‘잘 가라, 나중에는 내가 대월로 놀러가마.’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할 뻔했다. 지금 흑주의 외가 식구들에게 진하연과 나는 같이 대월에서 온 일행인 것이다.
우리가 흑주의 사촌들을 의식한 대화를 나누고 나자 소풍 분위기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었다. 본래 모두와 함께 왔던 암혼자와 천응은 당장이라도 출발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진하연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바로 나들이를 마치고 모두 흑주의 외가로 복귀하긴 했지만 갑작스런 이별에 놀라는 현노인 일가와 나름대로 아쉬운 우리 일행은 암혼자의 재촉을 일축하고 하루 밤을 더 지내기로 했다.
그날 밤. 나는 현노인 부자가 교대로 연이어 따라주는 술에 취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마시고도 잠이 오지 않은 경우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이러면 안돼!’라는 내면의 고함소리에 잠들 수가 없었다. 계속 괴롭게 뒤척이던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몽몽… 이런 명령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 술 좀 깨워줄래?”
일단 마음을 굳혀서 그런지 그때부터 오히려 슬며시 잠이 와서 나는 약 두 시간에 걸쳐 숙면을 취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몽몽에 의한 알콜 분해 효소 생산 촉진 효과에 의해 나는 말끔한 정신으로 잠들기 전의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아니, 그 전에 먼저 몽몽이 내게 물었다.
[ 이례적인 요청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
이 녀석이야말로 공과 사를 잘 구분해서, 최근의 변모된 모습을 보일 때는 요정 모드를 쓰고 지금처럼 내가 심각할 때는 처음의 로봇 모드를 유지한다.
“그건… 설명하기가 좀 그래, 그냥 기분 탓인지도 모를 일이야… 우선 몽몽, 네가 판단하기에 현재 우리에게 무언가 ‘불안 요소’가 있니? 적의 기습이라던가 기타 어떤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면이 있는 것 같으냐구.”
[ 현재 가장 위협 요소가 되고 있는 인물, 사갈서생에 대한 대처에 큰 헛점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저로서는 그 외에도 특별한 징후가 없다고 판단됩니다만… 이 경우, 주인님의 기분… 즉, ‘예감’이 중요한 판단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
“내… 예감……?”
[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주인님이 느낀 ‘위기감’은 90% 이상의 정확성을 보였습니다. 구체적인 수치는 상황 해석 기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평균적인 인간들의 ‘나쁜 예감’의 수준을 넘어선 것은 확실합니다. ]
에헤~? 이건 또 뭔 얘기야?
“야, 그거 설마… 내가 무슨 예지능력 같은 거라도 있다는 얘기냐?”
[저에게는 ESP(extrasensory perception, 투시, 정신감응 등의 초감각적 지각.) 능력을 직접 측정하는 기능이 없습니다. 때문에 주인님의 ‘직관력’을 ESP 계열로 분류하는 것은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가끔… 아니 자주인가? 하여간 어렸을 때는 누구나 ‘초 능력자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그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웬지 기쁘다거나 하는 마음이 안 생긴다. 우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럴 리가 있나’라는 결론이 먼저 나오기 때문이었다.
“저기, 몽몽. 나 스스로 내가 그리 둔한 놈은 아니라 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정도로 예감이 발달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솔직히, 시험 볼 때 잘 찍는 타입도 아니었구 말야. 뭐… ‘답 사이로 막가’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인님의 과거 데이터가 적어 비교는 어렵지만, 주인님이 현재의 육체와 결합한 이후 지금까지 드러난 주인님의 ‘직관력’은 매우 뛰어나, 훈련에 따라 C급 에스퍼의 단기 예지력에 준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평가도 가능합니다.]
쳇~! 원판 놈의 육체에 영향을 받아 예지력이 생기기라도 했다는 건가? 확실히… 지난 1년 동안의 내 예감, 특히 ‘나쁜 예감’은 거의 들어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원판은 천재인 것도 모자라 초능력자도 겸했다는 건가? 음… 굳이 무공을 익히려고 발버둥친 걸 보면 물리적인 파괴력을 가진 염력 같은 건 없었는지 몰라도,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라던가… 아니, 아니다. 그 것도 말이 안되잖아…? 그럼 원판이 뭐 하러 지가 망가질 께 뻔히 알면서 ‘영혼 교체 주술’을 행했겠어?
“음…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좀… 오버 아닐까?”
[‘직관력’과 ‘예지력’… 21세기 초까지는 두 단어가 혼용되는 경향이 많았으며 우뇌(右腦)의 적극적인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는 교차점이 많은 용어인 것은 분명하나, 이후의 연구에서는 차츰 분리되는 경향입니다. ESP 계열의 예지력과 구분되는 직관력에 대한 짧은 정의로 ‘뇌에 축적된 기존 데이터의 잠재적 활용’이 있습니다.]
빌어먹을…! ‘등급 상승’으로 좋은 점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자꾸 무리한 머리 쓰기만 강요하는군. 그래도 새삼 몽몽에게 얕보이기는 싫어서 간만에 그그극~ 그륵~ 그륵~ 머리 속 맷돌을 돌려보았다.
“그러니까… 예지력 같은 초능력은 ‘특별한 정보가 없이도 앞일을 알아내는 힘’이고, 직관력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가진 정보를 이용해 앞일을 추리하는 능력’이라는 거지? 음… 그 정보라는 것이 평소에는 잘 기억을 못하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 있기는 한… 그런 정보를 포함하는 거고 말야.”
[그 정도 개념으로만 이해하셔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네 말이 맞다하면… 그 정보는 역시 원판의 두뇌에 저장된 데이터겠지?”
[그런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주인님은 본래의 상태에서 정말 자신의 직관력을 자각한 일이 없습니까?]
“글쎄… 있었던 것도 같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때문에 상황을 내 마음대로 새석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해. 하던 일이 뭔가 잘 안 풀렸을 때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투덜대는 정도의… 그런 거 있잖아.”
[말씀하시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주인님은 현재의 육체에 정착한 후 지금까지 많은 부분에서 육체와 영혼의 괴리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직관력에 의한 위기감지’에 있어서는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본래 약간은 직관력이라는 게 있는 놈이라는 거야?”
[주인님은 본래의 시대에서 이 시대에서 겪은 일들에 준하는 위기상황을 겪은 경험이 있습니까?]
“뭐… 그야… 없지.”
그 흔한(?) 교통사고 한 번 당한 일도 없고… 아니, 군대에서는 위기상황이 좀 있었긴 했나? 공수교육 때 내 바로 앞줄에서 먼저 뛰어 내린 옆 중대 소대장이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서 그대로 썰렁무쌍한 최후를 당한 일도 있었고, 건물 레펠… 밧줄 타고 내려가 창문 깨고 침투하는… 겉으로는 폼나는 거 훈련하다가 떨어져 병원으로 후송 간 옆 소대 고참… 음, 그런 일들은 분명히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인데 아슬아슬하게 비켜 간 거긴 하다. 하지만 그건 그냥 우연히 내 앞에서 일어난 것일 뿐, 그 때 내가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순서를 바꾼다거나 해서 면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몽몽이 말한 직관력이 동원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음, 그래서 였을까? 능력을 깨닫지 못한… 아니 깨달을 필요도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나도 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자각하지 못했었다는 건가? 으음… 가만 생각해보면 확실히 나는 무슨 일이든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감’에 의지하는 패턴이 많았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웬지’, ‘뭔가’라는 말을 버릇처럼 많이 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몽몽… 이 얘기, 잠시 나 혼자 생각 좀 해 봐야겠다.”
아무리 그래도… 내 주제에 ‘초능력자’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원판 역시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몽몽이 정의한 직관력이라면… 그건 확실히 원판이 뛰어났을 테고, 나도 아주 먹통은 아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리 두 사람… 이라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하여간 내 영혼과 원판의 육체가 다른 때는 몰라도, 위험한 일을 앞두고는 서로 동조해 왔다는 건가? 그렇다면 당근, 지금도 그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 거고……
으으… 이게 내 생존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이런 골치 아픈 생각하는 거 자체를 벌써 때려 치고 말았을 텐데 이건 그럴 수도 없고… 또, 내가 위험해지면 달랑 나만 그런가? 대교 자매와 흑주를 포함한 모두가 줄줄이 위험한 거다. 으~ 진유준 이 놈아. 무의식 중에서만 뭔가 이상하다 그러면 뭐하냐. 제대로 구체적인 걸 깨달아야 할 거 아냐! 으아아~ 제기! 제기! 제기랄~!
몽몽에게는 ‘잠시’라고 했었지만, 결국 나는 뜬눈으로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처음에는 답답한 심정에 거의 ‘자학’하는 분위기였지만 곧 정신을 수습한 나는 밤새 차분히 기억을 더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아무도 깨우러 오지 않아서 햇살이 창틀을 넘어 내 침상 옆까지 기어왔을 쯤에는 꽤 많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분명히 겪으며 보고들은 일들인데도 무심히 넘어가 버렸던 ‘숨은 기억’들… 그 중에는 확실히 내가 ‘위험하다’라는 인식을 할 만한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과거 내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사영의 배신과 함께 혈의승의 함정에 빠졌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닥쳤는지도 모를 위험은… 이게 현실화된다면 그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그 모든 생각이 그냥 내 착각이며 오버여서 결국 지금까지처럼 별다른 일 없이 딩가딩가 세월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대책 연구와 현실 도피를 오락가락 하고 있던 나는 오후가 거의 다 되어 대교가 출발 준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고 곧 우리 일행은 현노인 일가의 집을 나섰다.
현노인 일가는 우리, 아니… 흑주와의 이별을 아쉬워해서 다들 눈물을 흘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정작 흑주는 덤덤한 태도로 다시 복면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신 내가 나서서 조만간 꼭 흑주를 돌려주겠다고 약속을 거듭한 후에야 우리는 흑주의 외가를, 주직촌을 뒤로 하고 떠날 수가 있었다. 기껏 찾아온 다음 이제껏 잘 있었던 주직촌에서 쫓기듯 빠져 나온 것이 영 찝찝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닥쳐올지도 모를 사태에 흑주의 외가 가족들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주직촌을 떠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이번에는 두 번째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하연과 그 오빠인 진하운을 가장한… 그러나 어쨌든 나름대로 진하연을 사랑스러운 여동생으로 여기게 된 나 진유준이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오라버니, 여기가 비록 대월과 비화곡으로 방향이 나뉘는 곳이지만 조금 더 함께 가주시면 안되나요?”
“설아야, 나도 아쉽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곧 내 쪽에서 먼저 널 찾아가겠다고 했지 않니.”
짐짓 다정하게 달래 보았지만, 진하연은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침울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제껏 그 오랜 세월을 혼자 잘 지내온 네가 아니냐. 네가 이러면 내 마음도 편치 않아.”
“흥~ 그러시라고 이러는 거예요. 그때는… 그때는 애써 웃으며 보냈더니… 그랬더니……”
으~ 결국 운다. 원판과 어렸을 때 헤어질 당시 진하연은 그 어린 나이에도 웃으며 오빠를 보냈다는 건데… 여기서 제 3자인 내가 눈시울이 붉어진다는 건 처음 만날 때처럼 원판 육체의 영향…? 제기,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원판의 육체야 너도 그건 알지……?
나는 곧 다음엔 내가 묘강으로 만나러 가겠다고 무책임한(?) 말을 반복하며 한참을 다독거리고 달랬다. 그러나 진하연의 눈물을 멈추게 한 것은 나의 그런 입에 발린 말들이 아니었다. 어쨌든, 겸사겸사 자연스럽게 진하연의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이는 자세가 된 나는 그동안 준비하고 있었지만 망설이던… 작게 접은 편지를 그녀의 손아귀에 살짝 쥐어 주었고 그 순간 진하연은 아주 잠깐, 몸을 굳혔다. 슬며시 올려다보는 진하연의 눈동자가 반짝, 묘한 빛을 발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살며시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꼭 약속대로 오셔야 해요? 흑~”
끝까지 국내의 대종상, 청룡영화제, 미국의 아카데미, 오스카 등등을 휩쓸고도 모자랄 연기력을 발휘하며 떠나가는 진하연을 배웅하고 있자니까 그동안 걱정했던 기분이 상당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누군가와 싸울 일을 앞둔 참에 전국을 주름잡는 조폭으로 재직 중인 동생이 나서서 ‘행님~! 제가 다 해결해 불랑께, 걱정 마시더라구요~!’라고 장담해 준 기분이랄까? 근데, 사투리가 좀… 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하여간 묘랑 진하연이라면 확실하게 내 부탁대로 움직여 줄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내가 진하연에게 몰래 전달한 편지의 요점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누군가 날 노리고 있음.
1차 사갈서생.
그 배후 인물은 비화곡 유력 인사로 추정.
대월의 일은 사실로 여겨지나 잠시 대기 요망.
일정 거리에서 대기 중 특정 신호 발견 시 빠른 지원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