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3-2화 : 두 남자의 위기감지능력(2)
2-5. 두 남자의 위기감지능력(2)
그렇다. 내가 깨달은 위험의 핵심은 바로 비화곡의 ‘반역자’였다.
아직 확증이 없어서 주직촌을 떠난 후에도 대교나 진하연에게 알리는 것조차 계속 망설였던 거지만, 현실화되었을 경우의 위험도가 너무 높아서 결국 진하연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무심코 해왔는지 몰라도 새삼 절대적인 행동기준으로 삼기에는 역시 너무 막연한… ‘직관력에 의한 위기 감지’… 그러나 일단 일을 벌인 이상 대비하는 쪽으로 진행해야겠지? 나중 ‘모두 미안해. 장난이었어~ 놀랐지~?’라는 식의 헛소리로 얼버무려야 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나는 현재 휴경지 위치의 지리, 사방이 적어도 몇 킬로 정도 넓게 트인 평야라 적의 기습을 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다음, 올 때처럼 돌아가는 루트를 상의하려는 것처럼 지도를 들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며 대교와 소교만을 불러 들였다.
“이 근처 지리를 잘 안다는 백인장이 있습니다. 그 도 부르는 것이……”
나는 소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 지금부터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너희들도 너희 자매들 말고는 누구도 믿지마.”
그동안 주직촌에서 잘 놀고 온 놈이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대교와 소교는 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삼 마차 창문까지 내 손으로 닫으며 바깥의 동정을 살피는 내 태도와 표정에서 비로소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대교와 소교도 이내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건 모두 근거가 희박한… 단지 내 ‘예감’일 뿐이야. 하지만 일단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이해하고 대처해 주기 바래. 어쨌든, 잘 들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자매들을 보며 잠시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본 나는 우선 요점부터 밝히기로 했다.
“현재, 사갈서생이란 놈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 거야.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녀석의 배후에는 우리 비화곡의 인물이 있는 것 같아.”
내 몇 마디 말이 그녀들의 상상을 넘어버렸는지, 대교와 소교는 잠시 숨조차 못 내쉬는 것 같았다. 경악의 사슬에서 간신히 먼저 벗어난 것은 대교였다.
“설마… 사갈서생은 곡주님께서 근래 드물게 추적 및 척살 명령을 내린 사마외도의 공적… 헌데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우선 사갈서생 놈의 행적이 이토록 은밀할 수는 없어. 나도 사실 그 동안은 녀석이 그만큼 약삭빠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으로 무심히 넘어갔지만… 그 전에는 몰라도 목야평에서 그런 일을 벌이고 난 후 비화곡이 본격적으로 나섰는데도 전혀 꼬리를 잡히지 않는다는 건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워.”
침을 꼴깍 삼킨 대교가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 추적을 담당한… 특히 정보 부서…를 의심하십니까?”
나는 월영당주와 그녀의 아버지 야후장로가 최근 보인 알 수 없는 행동을 떠올리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그건… 아직 모르지. 월영당주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특정 부서가 아니라 비화곡 전반에 걸쳐 불순 세력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근거가 희박하다고 했던 내가 자꾸 단정적으로 말하는 데다 일의 예상 규모도 장난이 아니자 자매들은 차츰 더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대교가 마른침을 삼키는 기색 후에야 신중하게 반문했다.
“그 말씀은… 사갈서생에 한정한 문제가 아닌… 모반(謀叛)의 징후가 있다는 말씀……?”
“그래. 현재 내가 의심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곡 내의 어디까지 손을 뻗쳤을지 생각하기도 싫을 지경이지.”
물론 내 말에 놀라고 긴장하는 건 당연했지만, 둘의 반응… 특히 소교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 그렇다면… 설마… 설마……”
소교가 내 말을 듣다가 무언가 나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떠올렸는지 가늘게 떨며 더듬거렸기 때문에는 나도 새삼 긴장하여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곡주님께선… 소령이와 미령이까지… 의심하시 는……”
소교는 물론이고 대교까지 입술을 깨물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난 맥이 좀 풀려 버렸다. 제기, 난 또 뭐라고……
“저기, 지금 걔들 빼고 너희들만 부른 건 마차가 좁아서 그런 거야. 야~ 내가 항상 너희 자매들은 다 믿는다고 했잖아.”
괜히 잔득 긴장했던 나는 피식 웃으며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소교는 눈을 감은 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고 대교도 비로소 한숨을 돌리는 기색이었다. 하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비화곡에서 ‘반역자’를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매우, 엽기발랄, 끔찍 찬란하다고 했다. 그동안 애써 내색은 안 했지만 지들 아버지 사영의 경우도 있어서 그간 ‘반역’, ‘배신’ 이런 단어들에 노이로제 비슷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에… 그리고 처음에 말했듯 아직 아무런 확증이 없는 일들이야. 조금 진정하도록 해.”
내가 애써 표정을 풀며 말한 건, 애매무쌍한 직관력…인지 아닌지도 모를 느낌만 믿고 일을 진행하다 저 어리고 여린 아이 하나 잡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소교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곡주님의 판단에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소녀가 모자라, 이 중요한 시기에 곡주님의 심기를 흐렸으니 부디 용서해 주시길…”
“아니, 뭐… 음… 어쨌든, 밖의 호위대 중에도 반드시 변절자가 있다는 건 아니야. 적의 세력이 아직 불투명하니 그만큼 조심하자는 의미이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대교와 소교는 잠시 지들 나름대로 뭔가 생각해 보더니 먼저 소교가 입을 열었다.
“만약 호위대 안에 간자(間者, 간첩)가 섞여있다면, 주직촌에서 머무는 동안 일을 벌이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흑주님도 본래의 임무에서 멀어져 있었으니 송구하지만, 곡주님을 음해하기에 가장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아니, 간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그 임무는 내 암살이 아닐 거야. 사갈서생처럼 ‘확실한 개인 동기’가 있다면 몰라도, 내가 비화곡 안에서든 밖에서든,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라도 했을 경우. 그 범인의 배후가 밝혀질 때까지 누구도 쉽게 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테니 말이야.”
소교는 그제야 깨닫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가 지금 긴장해서 그렇지, 사실 비화곡 누구나 비화곡주의 자리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다. 무림의 유서 깊은 초거대전국구조조직폭력단체 비화곡에 대한 세간의 오해 중 하나… 그건 비화곡 같은, 그러니까 ‘무협지 속의 마교’처럼 조폭스러운 조직은 후진국 정치권처럼 수시로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뀔 거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비화곡 역사상 쿠데타로 곡주 자리가 바뀐 일은 거의 없다. 비화곡의 전통 중 하나… ‘그것은, 쿠데타로 등극하려는 자는 인정 안 한다’이다. 곡주 후보가 한 명 이상일 경우의 머리 터지는 싸움은 인정해도 일단 정식으로 등극한 자는 그 전통에 의해 보호받는다. 곡주가 비화곡 전체를 위험하게 할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말이다.
나는 비화곡의 그런 ‘의외의 선진국형 정치 구조’를 파악하게 된 후로는 쿠데타에 대한 건 신경을 끄고 지내왔던 건데… 그게 실수였던 것 같다. 아무리 오랜 전통이라고 해도 인간의 원초적 본능… ‘그래도 짱 먹고 싶어’를 완전히 막지는 못할 거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무공은 못해도 잘난 두뇌 하나는 확실했던 원판이 본체 업그레이드 실패로 인해 그 두뇌의 CPU가 저가형(?)으로 바뀐 것을 눈치챈 자가 있다면…
“곡주님 말씀대로라면, 그 배후의 흉수는 과거 야심을 드러냈던 전력이 있는 자겠군요.”
과연 대교…! 사실 이 정도 얘기가 진행되면 비화곡의 아홉 장로들이 전부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지만… 대교는 벌써 그 중 한 명을 찍은 눈치였다.
“그래, 나도 어느 정도 짐작 가는 인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확증이 생길 때까지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음… 어쩌면… 그,라면 이런 일까지 대책을 세워 놓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무심히 중얼거린, 대책 운운하는 말에 대교와 소교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내가 말한, 대책을 세워 놓았을지 모를 ‘그’란 원판을 뜻했다. 이런 심각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원판이라면 그 일을 어떻게 해결했을까를 떠올리게 되니까, 지금까지처럼 원판을 ‘놈’, ‘녀석’ 같은 말로 칭하기 미안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대교와 소교가 대충 사태를 이해했다고 생각되자 바로 대책 회의로 들어갔다. 회의라고는 했지만 사건 개요 전달을 끝낸 나는 일단 얼마간은 두 자매… 비연대의 대장과 부대장의 대화를 들어보았다.
배후의 인물이 굳이 사갈서생이라는 과거의 추방자를 이용하는 것은 자신과 관련이 없으면서도 곡주를 해칠 의지가 있으며 나름대로 능력도 있는 자를 고른 것일 테고… 배후인물의 협조가 있었다고는 해도 왜구의 소굴과 묘강을 오가며 굉천포(轟天砲) 같은 무기나 병력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갈서생이 있는 한… 앞으로도 배후인물이나 그 세력은 직접 표면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사갈서생만 주의하면 될 것이다…라는 1차 정리 및 결론을 내리는 두 자매…
“일단, 지원 병력을 좀 더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소교의 일반론에 대교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사갈서생의 위협은 줄겠지만, 배후인물도 계속 밝히지 못해. 현재의 상황은 오히려 사갈서생을 사로잡아 흉수의 정체를 확실히 알아낼 절호의 기회야.”
“과연… 그렇다면 역시 호위대 안의 간자 유무를 알아내는 일이 선행되어야겠네요. 사갈서생이 앞으로 우리의 행적을 낱낱이 꿰게 된다면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니…”
“맞아. 그 것이 가장 급한 문제인데, 이 것이 너무 막연하구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자매들… 막히는 부분도 나와 비슷하군. 이제껏 암약한 스파이가 있다면 새삼 티를 낼 리가 없고, 심지어 사갈서생의 습격 때도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지 모른다. 나중… 비화곡으로 돌아가 ‘곡주를 피습한 자는 틀림없이 사갈서생’이라는 증언을 하려면 목표인 나 외에는 몇 명 살아남아야 하니 말이다.
얼마 후… 결국, 대교와 소교에게서도 특별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서 나는 일단 주위에 대기 중인 자들에게는 적당한 핑계로 이곳에 잠시 더 머무른다는 명령을 내리도록 하고 이번에는 소령이와 미령이를 마차로 불러들였다. 그 후 과정은 단축해서 표현하자.
“사갈서생 및 반역자 발생!”
“어머나, 세상에~!”
“대책 마련 시급!”
“이를 어째~!”
“티내지 말 것!”
“존명!”
뭐… 하여간 그렇게 소령이와 미령이에게도 일단 상황을 주지시켰다. 사실 내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하자면 대교 자매들조차 믿지 않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반역자의 준비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몰라도 애초에 대교가 내게 온 것부터 분명히 내가 택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애들에 대한 믿음은 내 정신적 마지노 선이랄까…? 난 여기서 대교와 동생들까지 의심하려면 차라리 그냥 게임 포기, 니들 맘대로 해라, 궈 먹든 볶아 먹든…!이라고 할 각오인 것이다.
솔직히… 이 녀석들에게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상황을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이고 별 기대는 안 했다. 그래도 소령이와 미령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싸매고 짜내더니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고 미안하게 난 계속 두 가지 대꾸만을 해줘야 했다.
“곡주님, 이러저러해서 이런저런 식으로 하면……”
“그 방법, 대교가 말했던 건데, 힘들어.”
“곡주님, 만약 이렇게 한 다음 저렇게 하면……”
“그 방법, 소교가 말했던 건데, 힘들어.”
“곡주님, 이건 조렇게 된 거니까 요런 식으로 하면……”
“그, 대, 힘.”
“곡주님, 혹시 이러쿵저러쿵 하면……”
“그, 소, 힘.”
“곡주님… …하면……”
“그, 대, 힘.”
“하아~ 큰일이네요. 저들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훗~! 그래도 우리 소령이가 오늘은 꽤 많은 의견을… 응? 너 방금 뭐랬지?”
“예? 전 그냥 한숨을 쉬었을 뿐인……”
“아니, 그거 말고… 음, 그래… 그런 방법도 괜찮겠군.”
위기상황에서 의외의 적시타를 친 소령이가 영문을 모르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가운데, 나는 잠시 소령이가 말한 ‘대놓고 물어보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완전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뭐…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우리 중의 스파이 탐색에 조심스러웠던 건 당연히 내가 배후인물이 짱 박아 놓은 스파이의 존재를 눈치 챘다는 사실을 배후인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 상황에서는 내가 먼저 그 스파이를 배후인물의 스파이가 아니라 사갈서생의 스파이라 고 몰아붙이면 될 것 같았다.
“…좋아! 까짓 거, 소령이 말대로 대놓고 물어보지 뭐.”
방법을 결정지은 나는 얼마 후 마차 앞의 공터에 호위대 대부분을 집합시켰다. 총 40명의 인원 중 최소 주변 보초 인원 8명을 뺀 32명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정확히 말해서 그들의 시선은 나보다 내 손에 들린… 저들에게는 공포의 마병기(魔兵器) 독각포(毒角砲)로 알려진 K2로 향해있었다. 비화곡에서의 위력 시범도 그렇고 지난번 약산성에서 늑대를 사살할 때의 광경도 이들에게는 상당히 인상 깊었을 것이다.
“제군들도 내가 현재 사갈서생이라는 놈에게 노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헌데 말이야.”
나는 조금 높은 바위에 올라앉아 호위대 일동을 내려다보며 예의 ‘급속단발변신마공’으로 원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씨익~ 웃었다. 물론 시위하듯 독각포를 매만지면서……
“내 동생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사갈서생이 오래 전부터 자신의 간자를 내 주위에 심어놓았을 거라는 군. 나참~ 어이가 없어서……”
40명 전원의 순간적인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당혹하여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뭐, 나는 물론 너희들을 믿고 있다. 허나 너희들도 이미 묘강 무사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테니 역시 일말의 의혹이라도 남긴 채 적을 맞이하는 것은 전체적인 사기에도 좋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 한 명 한 명을 ‘진실금침(아아~ 이름 한 번 유치해라.)’으로 시험해 볼 생각이야. 이걸 몸에 꽂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금침은 그의 마음에 어울리는 색으로 변하게 되지.”
나는 몽몽의 촉수 하나를 바늘처럼 가늘고 뾰족하게 변화시켜 엄지와 검지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오게 한 다음 치켜들어 보였다.
물론, 그걸 쥔 손바닥은 감추고 손등을 일동에게 향한 자세로 금침(?)이 손목의 팔찌에 연결되어 있다는 걸 숨기고 말이다. 애당초 진하연은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너희들도 묘강 무사들에게 들었지?’라는 식의 말도 그냥 멋대로 명분을 만든 거지만, 다들 내 말의 진위보다는 진실금침이라는 내 아이템에 긴장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좀 썰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단순하고 노골적인 명칭이 더 잘 통할 것 같았다.
암튼… 나는 일단 마차 뒤로 돌아가 한 명씩 불러서 개별 면담을 시작했다. 침을 놓는 척을 하며 몽몽의 ‘거짓말 탐지기’를 작동시켰다. 모두에게는 금침 색깔 운운했지만 사실 상대의 표정을 살피면서 침의 색깔도 확인하는 건 좀 번거로울 것 같아서 몽몽에게는 거짓말 판정 때 내 머리 속으로 삐익~ 부저음을 울리라고 해 놓았다.
그 후… 절반 정도의 인원을 ‘무혐의’로 판정 내렸을 때는 이미 두 시간이 넘고 있었다. 이렇게 침 놓는 척이든 뭐든 해서 몽몽을 신체에 직접 접촉시킬 수 있으면 거짓말 탐지기의 정확도가 훨씬 높아지는 데다, 나도 몽몽에게 전해들은 ‘거짓말 탐지기 사용 시의 질문 요령’에 차츰 가락이 붙어서 판정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32명째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호위대 중 나와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혈랑대 백인장 백상의 차례가 되었다.
“여어~ 백상, 자네야 물론 그럴 리가 없으니 아예 빼주고 싶군.”
“이런 일에 어찌 예외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들은……”
“다만, 뭐?”
“아, 아닙니다. 시행하십시오.”
백상은 지금까지의 다른 이들처럼 ‘대답은 예와 아니오, 두 가지로만 하라는 내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앉았고 나는 그의 뒷덜미에 진실금침, 몽몽의 촉수를 꽂았다.
“우선 처음 질문 네 가지에는 무조건 ‘예’라고만 대답해. 알겠지?”
그렇게 못박아 놓고 기본적인 질문, 소속이 혈랑대 맞지? 라는 식의 ‘예’가 진실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두 개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예’라는 대답에 삐익~ 부저가 울릴 만한 질문을 시작했다.
“백상, 너는 자신의 몸이 날씬하다고 생각하지?”
“예.”
…응? 뭐야? 부저가 안 울려…? 이 자식 이거 양심이 있는 놈이야 뭐야? 그 홍금보 몸매를 스스로는 진심으로 날씬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판정이 끝난 이들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는 일을 하느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미령이도 소리 죽여 키득댔다. 친한 녀석이라 고 장난 섞인 질문을 했더니 엄한 결과가 나왔군.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음… 사적인 질문 하나 더. 백상, 너 실은 미령이를 짝사랑하고 있지?”
“…예.”
“음, 좋아. 다음 질… 에~?”
이게 뭔 일이래~? 이번에도 부저가 안 울렸다. 나는 조금 당황하여 녀석의 옆얼굴을 살폈다. 평소에는 혈랑대 중 가장 표정이 풍부한 백상이었으나 지금은 긴장으로 인해 조금 굳어진 얼굴에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이럴 경우의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백상 이 녀석, 언감생심 진짜로 미령이를 맘에 두고 있다…? 혹은 거짓말 탐지기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훈련이 되어있다…? 물론, 내가 확인해야 할 부분은 후자일 경우이다.
아무리 자기 통제력이 좋은 고수들이라도 이 정도 정밀 탐지를 속이는 건 힘들다. 이 시대에 이런 첨단 거짓말 탐지기는 나밖에 없어도 만약 어떤 첩자가 적에 잡히게 되면 당연히 기계적 탐지 못지 않은 날카로운 이목의 전문가가 심문을 맡기 마련이다. 그래서 첩자들은 그에 대비한 훈련도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혈랑대에는 그런 ‘첩보 과목’이 없다. 나는 설마… 하면서도 긴장하여 중간 과정의 잡다한 질문들을 생략했다.
“백상, 너는 어떤 형태로든 나를 속인 일이 있는가?”
“…아니오.”
삐익~! 제, 제기… 이 자식이었다고? 자, 잠깐! 아직 아니야!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었어.
“백상…! 너는 나를 배신했는가?”
“…곡주님, 저는……”
“닥쳐!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고 했지?”
“……”
백상은 대답을 망설였고 내 옆에 대기 중이던 흑주의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 주인님! ]
우왓! 깜짝이야! 우쒸~ 뭐야, 몽몽?
[ 현 위치로부터 동북방 35도 방향으로 850미터까지 접근 중인 자가 있습니다. 시각적인 탐색으로는 아직 무장 상태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
“설마, 벌써……?”
나는 당황하여 몽몽이 말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내 육안으로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몽몽이 헛것을 봤을 리도 없고… 제기, 만약 사갈서생이면 이건 너무 빠르다. 나와 진하연의 거리가 더 멀어 진 후에야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당신이 감히-!”
미령이었다. 어느 측면의 ‘감히’인지는 몰라도 미령이는 이미 검을 뽑아 백상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미령님… 저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가 아는 혈랑대 모두가 그렇습니다.”
“흥~ 가소롭군요. 그런 말로 곡주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으… 미령아. 이런 때는 그렇게 눈빛으로 재촉 좀 하지 마라. 거짓말 탐지기가 만능은 아니란 말야. 구체적인 질문으로 ‘예, 아니오’ 대답을 들어야 정확한 결과가…
“곡주님… 금침의 색이 변했습니까? 이 백상의 마음이 어떤 색입니까?”
내가 망설이는 사이 오히려 질문을 던져 오는 백상… 나는 내 최종 질문의 되풀이도, 백상의 말에 대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뻔뻔한……”
미령이의 한혈검이 움찔, 백상의 목을 파고들었고 백상은 눈을 감았다.
“멈춰! 검을… 거둬라, 미령!”
“곡주님……?”
나는 백상으로부터 손을 떼고 일어났고, 미령이도 주춤거리며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천천히 눈을 뜬 백상은 자신의 목에서 흐르고 있는 피는 아랑곳없이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그런 백상에게 낮게 한마디 던지고는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미안하다.”
그게 내가 한 말이었다. 제기… 미령아,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붙지 말라구, 나도 설명하기 곤란하니까 말야. 방금 저 녀석이 자기 마음의 색을 물어오는데… 녀석에게 느껴지는 건 공포도, 분노도, 초조도… 다른 어떤 감정도 아닌 슬픔…이었어. 이런 비상시국에 너무 감정적이면 곤란하다는 자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모두… 특히 혈랑대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어렸을 때부터 오직 곡주 하나만을 위해 키워진 혈랑대 입장에서는 내가 달랑 1년 남짓 곁에 둔 대교 자매들만 신뢰하는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미령아, 우리 중에 사갈서생의… 누구의 간자도 없다. 모두에게 전달하고 비상 경계 시작해. 진짜 우리 적이 나타난 것 같다.”
미령이가 내 명령을 대교에게 전달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몽몽이 말했던 방향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빨라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오히려 잘 된 셈이었다. 사갈서생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이제부터는 놈에게만 집중하면 되니까 말이다.
“자아~ 와라!”
새삼 투지를 불태우며 낮게 중얼거린 내게 몽몽이 말했다.
[ 주인님! 적으로 추정되는 1인이 320미터 가량의 지점에서 멈추었습니다. ]
“…저기, 몽몽. 달랑… 한 명이야?”
[ 예. 그리고 이 편으로 활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대비하십시오. ]
난 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적은 적인 것 같아서 다시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눈에도 들판에 한 놈 정도 서 있는 것이 간신히 보이긴 했지만 아직 까마득한 거 같은데 벌써 활을 겨눈다고? 저기서 활을 쏴 봤자… 봤자…가… 아닌가? 어, 어~?
“곡주님! 어서 피하세요!”
그렇게 외친 대교가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나는 날 잡아 끌려는 소교의 손을 뿌리쳤다.
“모두 침착해! 지금 날 노린 거 아냐.”
나도 솔직히 좀 놀랐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대범한 왕땅의 면모는 유지한 것 같았다. 화살은 이미 내 머리 위를 넘어 등 뒤의 마차에 박힌 상태였고 그 화살에 매인 편지 같은 것으로 보아… 음… 역시 내 예상대로 적의 궁수는 더 이상의 사격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싸우기 전에 웬 편지질인가 싶기도 하고, 애들 앞에서 계속 여유를 보이고 싶어 피식거리며 편지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몇 분 지나기도 전에 난 웃음기를 지우며 이를 악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사갈서생의 서명이 들어있는 편지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존경하는 독각와룡 곡주님. 과거 저의 인생을 멋대로 주무르던 당신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저의 소망을 부디 거절 마시고 재회를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곡주님의 사랑스러운 여동생도 저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장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오시는 길 하나 가득 붉은 모란 만발하여 심심치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