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4-2화 : 낙룡파(落龍坡)(2)

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2부 – 14-2화 : 낙룡파(落龍坡)(2)


2-6. 낙룡파(落龍坡)(2)

“곡주님-!”

대교가 지휘권을 놓고 달려오려는 기색이라 나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모두 자리를 지켜! 대형 유지하면서 적을 막아!”

내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버벅대는 사이 코 앞까지 쳐들어 온 사무라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칼을 빼들며 저마다 괴이한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혐오스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새삼 이를 악물며 다시 K2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내 시야는 우리 병력들의 등에 가려져 있었다. 제기… 그러나 이대로 손놓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흑주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가 상황을 살폈다.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다 해도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서라면 위태로운 상황의 우리 병력을 원거리에서 지원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헌데… 막상 확인된 전황은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적의 공격이 전방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초 대형을 유지하라는 내 명령을 성실무쌍하게 지키려는 듯, 우리 병력들은 본래 선두에 섰던 인원만이 앞에 나서서 자신들보다 두 배가 넘는 수의 사무라이들을 대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적은 단 1명도 우리 병력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전방 방어에 배치된 병력은 혈랑대로만 18명… 그 인원이 반으로 나뉘어 두 겹으로 길을 막고선 단순한 대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소박한(?) 형태의 대형이 연이어 달려드는 사무라이들의 거센 공격을 손쉽게 격퇴하고 있는 것이다.

스캔된 사무라이들의 평균적인 내공이 혈랑대보다 조금 낮다고는 해도 그건 100퍼센트 정확한 데이타가 아니다. 각자의 능력에 아주 현격한 격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반도 안 되는 인원만으로 저렇게 일방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겉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구성의 저 음양밀천(陰陽密天)이라는 이름의 방어진은 최초 대형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학적이며 치밀한 전원의 연계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건 나도 이론상으로 알고 있었고 혈랑대의 시범도 몇 번이나 보았었다. 그러나 변수가 많은 실전에서도 저 정도로 완벽한 위력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역시… 평소의 빡센 훈련이 이런 데서 드러나는 건가? 쳇~! 그 동안 빠질 대로 빠져서 지낸 건 나뿐이었던 것 같군.

암튼, 대교도 아직 손놓고 여유 있게 구경만 하고 있을 정도면 내 지원사격도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신경을 고려무사2(1은 주직촌 출몰 고려무사)에게 돌렸다. 문제의 내 동포께서는 아직 몽몽의 스캔 범위 안에 있기는 한데, 처음으로 겪었을 20세기 화력에 질린 건지 몸을 숨긴 장소에서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고려의 무사씩이나 되는 인물이 적의 무기에 쫄아서 짱 박혔다고 생각하는 건 웬지 내키지 않아서 ‘저 아자씨, 지금 냉정하게 뭔가 다른 작전 구상 중인 거야’라는 식으로 해석해 보았다. 으~ 아니지, 그런 거면 나하고 또 서로 죽내 사내해야 하잖아? 차라리 진짜 쫄아서 이대로 도망쳐 버리는 편이… 그러면… 으이쒸~! 그런 약한 모습의 동포는 역시 불쾌해!

“에이 씨앙~! 이 X같고, ##하며 +++해서 ##하거나 @@@할 상황 같으니라구……!”

혼란스러워진 내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섞어 중얼거리고 있자니까, 몽몽이 경고해 왔다.

[ 주인님! 조금 전 주인님을 공격했던 화살의 흔적을 확인해 보십시오. ]

뭔 소린가 싶어 새삼 마차 옆 땅바닥에 꽂혀 있는 화살에 시선을 돌려본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살이 박혀 있는 땅바닥 주위 몇 십 센티 정도가 원형으로 부서져 있었던 것이다. 마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굳은 길바닥이 가는 화살 하나 박히는 정도로 저런 꼴이 되었다는 건…

[ 이 시대의 소위 ‘초고수’라고 해도 신체 접촉을 벗어난 물체에 일정 시간 파괴적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는 많지 않습니다. ]

으… 몽몽이 전하려는 뜻은 알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여전히 복잡했다. 역시 우리 조상님은 잘나셨다는 기쁜 마음도 들고, 안 그래도 맞으면 졸라 아플 화살에 내공까지 담긴 공격을 또 당할지 모르니 X됐다는 생각도 들고…

[ 주인님, 전황에 변화가 생길 것 같습니다. ]

몽몽 녀석의 계속되는 참견에 다시 혈랑대와 사무라이들의 대결 쪽으로 시선을 옮겨보니… 과연, 저쪽 근황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나름대로 폼 나게 쳐들어 왔다가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기세가 꺽인 사무라이들은 역부족을 실감했는지, 지금은 애매한 태도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반 이상이 부상을 입고 사망 상태로 보이는 자도 꽤 많았지만, 그래도 아직 전체적으로는 살기가 죽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 악받친 상태의 사무라이들 앞에 단신으로 나선 것은 바로 대교였다. 대교가 약한 여자라 그 동안 혈랑대 뒤에 짱 박혀 있는 거라고 여겼던지 사무라이들은 조금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비화곡주 직속, 비연대(飛燕隊)의 대장, 대교이다. 너희들의 수장은 누구냐!”

그렇게 외치는 대교의 태도는 지극히 당당하고 그 자체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ㅁㅇㅈㄱ? ㅁㄹㄴㄱ~?”

상대의 대꾸에 대교는 잠시 가만히 조용히 서있더니 슬며시 고개를 돌며 후방의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결국… 청각 터보 모드를 작동시킨 내가 몽몽의 해석을 거쳐 통역해 주는 과정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대화가 전개될 수 있었다. 아니, 길게 말이 오가기도 전에 대교의 처음 몇 마디만으로도 사무라이들의 동요는 내 눈에도 확연할 정도였다. 그 중 가장 덩치가 크고 눈매가 가늘게 찢어진… 간단히 ‘아주 더러운 인상’을 가진 놈이 불쑥 앞으로 나서며 거칠게 입을 열었다.

“천한 계집이 감히……!”

여자가 지휘하는 부대에 씹히는 상황에서도 습관적으로 저따위 여성경시 대사를 지껄이는 자체가 한심한 노릇이지만, 아무리 몰라도 최소한 자기가 습격하는 대상의 실체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장청란과의 비무 이후로 주가가 치솟아 본래의 마봉낭자라는 별호 말고도 일부에서는 마중제일녀라고까지 불리는 것이 지금의 대교이다. 비화곡주를 호위하는 비연대의 대장에 대해서 전혀 감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사갈새끼가 저 놈들에게 우리의 인적 구성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안 해줬다는 거다. 결국… 저 놈들은 그냥 소모성 ‘졸’이라는 얘긴가? 어쨌든… 계속 그대로 통역을 해주었더니 대교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역시, 이제 처음으로 땅밖에 얼굴을 내밀어 본 버러지들이었군.”

오호~ 대교가 누구에게든 저런 식의 독설을 하는 건 처음이네?

“뭐, 뭣이~? 이런 찢어 죽일 계집이 감히……”

“닥쳣~! 물러서라, 사사키!”

계속 주제넘게 ‘감히’라는 말을 되풀이하던 인상파 등빨을 얌전히 뒤로 물러나게 한 건, 그 등빨 뒤에서 나온 매우 젊고 낭낭한 음성이었다. 정면에서 봤을 때, 양쪽 중간 머리를 아예 면도 해 버리고 중앙의 꽁지머리만 세워서 강조한… 전형적인 옛 일본식 헤어스타일의 청년이었다.

“사사키… 넌, 눈앞의 여자가 얼마나 강한 지도 모르느냐.”

말이 청년이지, 가만 보면 아직 어린 소년 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본래 노골적인 일본식 문화를 싫어해서 놈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재수 없다’는 느낌이 우선했지만, 웬지 신경이 쓰여서 시력 터보모드까지 동원해서 찬찬히 살펴보니 소위 ‘미소년’… 그 것도 아주 빼어난 미소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긴박한 상황이라 놈들의 면모를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었는데… 저런 놈도 있었나? 음… 강자의 여유를 보이는 분위기로 천천히 등장한 미소년이라…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드디어 천재 미야시가 나섰군.’ 따위의 말이 오갔고… 제기… 내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상당히 불길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중원에 이토록 강하고도 향기로운 여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진작에 숙부님의 뜻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대… 대교라고 했나?”

느닷없이 등장하여 우리의 대교에게 수작을 걸기 시작한 일식 미소년… 나는 이 것도 그대로 통역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현재 나로부터 등을 보이고 있는 대교는 어쩐지 내 통역을 재촉하지 않았다. 으으… 설마 대교가 저 일식 미소년의 느끼한 버터 미소에 넘어간 것 은 아니겠지……?

“후훗~! 그대는 아마도 현재의 주인을… 음… 저… 저 사람을… 그게…….”

대교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집중하여 나를 바라보며 말을 잇던 일식 미소년… 정확히 말하면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해야하나? 하여간 일식 미소년은 마차 지붕 위에서 ‘저 아새끼, 뭐야? 아쭈? 뭘 꼬나봐~?’라는 식의 불량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나를 계속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포옥 내쉰다. 흐흐- 짜쉭~! 현재 내 모습은 원판… 중원 제일의 꽃미남이다. 아무래도 니가 좀 딸린다 싶지?

“여, 역시… 천하절색에 어울리는 짝이… 허나, 당신 정도의 여인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우선은 그대가 영원히 날 잊지 못하게 해주지!”

일식 미소년은 미소와 함께 허리의 칼을 빼들더니 하단 자세를 취한 채 빙긋이 웃었다.

“그대에게 우리 다카쿠마 류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

일식 미소년의 얼굴에서 일순, 느끼함이 사라지고 지극히 차가운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고 그 다음 순간, 대교의 청명검이 짧고 섬뜩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일식 미소년은 내쳐 달려들려던 자세 그대로 스르르 고꾸라졌다. 맥없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일식 버터 소년의 목 주위로 서서히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그 불쌍한 소년의 주검 위로 대교의 냉냉한 음성이 흘렀다.

“무슨 말을 지껄인 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기분 나빠!”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