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4-6화 : 낙룡파(落龍坡)(6)
2-6. 낙룡파(落龍坡)(6)
사무라이들과 닌자들 뒤에 짱 박혀 있다가 뒤늦게 부하들을 좌우로 갈라서게 하고 그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최종 보스의 등장을 연출하고 있는 놈이 있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디자인의 자의(紫衣)를 펄럭이며 한 손에 불교의 사천왕(四天王) 같은 분위기의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는 등, 아무래도 원판을 흉내 낸 복장인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온 판국에 ‘내가 누구~게?’라고 썰렁한 소리를 할 것도 아닐 텐데 애써 부채를 펼쳐 두 눈 아래의 얼굴을 가리고 나타났다는 건, 저런 폼도 원판 코스프레의 일환인가 보다.
[ …사갈서생이란 명호를 쓰는, 적대 인물의 신체 데이터와 일치합니다. ]
몽몽이 굳이 확인해 줄 것도 없이 그 동안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던 저 작고 검게 번들대는 두 눈은 틀림없는 사갈새끼였다. 당장에 날려 버리고 싶은 면상이 긴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표정 관리를 잘 해야겠지……?
“후후후~ 곡주님. 그간 안녕하셨……”
나는 사갈새끼가 특유의 재수없는 목소리로 건네는 인사를 받아 드리는 부드러운 표정과 분위기 그대로… 잽싸게 총을 들어 녀석을 겨냥했다. 조준선 너머로 녀석의 벙찐 표정이 들어섰다. 최종 보스들 간의 분위기 있는 만남이고, 대화고 나발이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버린 나는, 허무하게 사살된 사갈새끼의 죽음에 당황하는 왜나라 용병 부대에게 다시 위협 사격을 가하여 섣부른 도발을 막아내고, 그 후 고용인을 잃은 용병들을 설득하여 해산시켜 산뜻하게 상황 종료하는… 대충 그런 것이 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쳇~! 한 발, 아니 한 까닥(?) 늦고 말았다.
내가 총을 들어올리고 겨냥을 마치는 그 짧은 틈을 녀석의 용병들이 떼거지로 끼어 들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정도 순간의 차이였다. 으음… 제기, 다소(?) 치사하달 수 있는 이 초반 기습 공격 시도가 꼭 성공하리라 믿었던 건 아니지만… 역시 내가 너무 날로 먹으려 했나 보다.
결국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마저 힘을 주지 못한 채, 사갈새끼의 모습이 순식간에 닌자들의 검은 형체 뒤로 묻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내게 몽몽이 충고해왔다.
[ 최적 사격 포인트를 알려 드릴 수는 있지만, 관통해야 할 인체의 수가 너무 많아서 목표 인물에게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이 낮습니다. ]
빌어먹을! 내 본래 몸이었다면 내가 조금 빠를 수도 있었는데…! 치이~ 이 원판 몸으로도 대(對)테러 사격 훈련을 좀 해 둘 걸 그랬다. 어쨌건, 가뜩이나 살벌했던 분위기가 이젠 아주 불꽃이 팍팍 튀는 군. 자신들의 고용인을 호위함과 동시에 우리 쪽을 향해 맹렬한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한 왜나라 용병 부대와 보스인 내가 선빵 날리는 순간 함께 일제히 깽판치려는 기세의 우리 비화곡 특수부대원들…… 재들 보기 좀 미안하지만, 적 부대의 보스를 처치하지 못한 마당에 달랑 세 발 남은 총알로 전투를 강행하기는 좀 그렇지……?
“어이~ 놀랐나? 그렇게 겁 많은 놈이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날 생각을 할 수 있었나 그래.”
천천히 사격 자세를 풀며 그렇게 너스레를 떨어 보았더니, 곧 닌자들의 뒤쪽에서 사갈새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핫핫~! 이거야… 정말 못 말릴 분이로군요. 방금 그게 장난…이었다, 이건 가요?”
“그러엄~! 아무렴 내가 오랜만에 만난 옛·수·하·를 다짜고짜 죽이려 들었겠어?”
내 말에 사갈새끼는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는데, 비웃는다거나 하는 기색보다 정말 즐거워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종류가 뭐든 녀석의 웃음소리는 다 재수 없다는 느낌이 우선이지만 말이다.
“사갈… 아니, 두균! 앞으로 나와. 실은 네게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
내가 ‘두균’이란 이름… 녀석의 본명을 부르고 나자, 사갈새끼의 웃음소리는 그 두 글자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듯 멈추어졌다.
“두균…! 당신이… 날, 그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사갈새끼의 음성에 섞인 ‘감동’ 비슷한 울림… 확실히 이 놈의 원판에 대한 감정은 좀 복잡한 것 같다.
“후훗~! 오늘 당신께서 과거 즐기던 복장을 택한 보람이 있군요. 당신과의 기억 한 점을 다시 맛본 것만으로도 말이에요.”
“…아무래도 좋은데, 계속 그렇게 숨어서 지껄일 건가?”
“저도 당장 당신 앞에 나서고 싶긴 합니다만… 자신의 일점혈육이 도륙되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당신의 손에 여전히 그 무서운 마병기가 들려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서 발을 뗄 수가 없군요.”
“…덕분에 화홍월은 고맙게 챙겼다. 하연이가 그걸 돌려주지 않으려 했거든. 그러니… 답례의 의미로 한 식경 동안은 절대로 너에게 독각포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내 말에 섞인 진심을 헤아려 보느라 그런지 녀석은 조금 길게 간격을 둔 후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 사부의 이름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래, 사천대령신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정말 사부를 그만큼 존경했던 건지, 아니면 하도 말과 행동에 일정법칙이 없어서 그걸 기준점 삼은 건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원판은 지 사부의 이름을 건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켰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한 가지를 추가해야지요. 아까 당신께서 사용했던 마천구(魔天球) 말입니다.”
마천구라면 수류탄에 대해 떠도는 명칭 중의 하나다. 독각포와 달리 수류탄의 명칭은 내가 공식적으로 지정을 안 해 주었더니 꽤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이 것도 쓰지 않겠어.”
내가 또 선선히 대답하자 녀석은 또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당신의 그 팔지… 설마 아직도 요괴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니시겠죠?”
이 자식, 설마… 몽몽의 정체를 눈치 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전에 나와 대교가 녀석에게 패도광협 커플의 동굴로 납치되었을 때, 나는 몽몽을 이용한 반격에 성공해 녀석을 사로잡았었다. 하필 저런 놈에게 몽몽의 형태 변화를 목격당한 것이 찜찜해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놈이 본 장면은 내가 몰래 사용한 특제 미혼향에 의한 ‘환각현상’이었다…고 사기를 쳤었는데…
“후후~ 왜. 지금도 내 팔지가 요괴로 보이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좋아요. 그 정도는 인정해 드리지요.”
다행이다. 그 당시… 이미 사로잡은 놈에게 굳이 생쇼를 하느니, 함께 있던 대교에게는 보이지 않고 녀석에게만 보이는 각도의 홀로그램 화면도 보여주는 등의 수고를 했던 보람이 있군.
“오늘은 어차피……”
사갈새끼를 가로막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좌우로 갈라졌고 사갈새끼는 비로소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을테니까요.”
음…? 그러고 보니 풍향이 우리 쪽이네? 아니, 야외에서는 이 정도의 약한 바람기가 있어도 미혼향 같은 걸 쓰기는 어려우려나? 뭐, 애초에 환각과 마비현상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무색무취의 미혼향 같은 건 있지도 않지만… 암튼, 녀석은 그때 일을 잊지 않고 꽤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상대가 천하의 비화곡주라는 사실을 꿈에서도 잊지 않고 경계해 왔더니… 후우~ 이제 좀 피곤하군요.”
사갈새끼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더니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치며 한숨을 몰아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한 쪽 뺨에 아직도 남아있는 자해(自害)의 흉터를 슬며시 쓰다듬고 있었다.
“흐음~ 모처럼 당신과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으니… 일단, 현재의 상황을 정리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해봐. 정리.”
녀석의 예상보다 여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웬지 조금 불안해지는 기분을 숨기느라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사갈새끼는 뱀처럼 얇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가 알게 된 것 몇 가지를 먼저 말해 보지요. 우선, 당신의 그 독각포… 비록 희대의 마병기라고는 하나… 역시 기·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더군요. 닌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사용 중에 탄이 든 그걸 갈아 끼웠다지요.”
사갈은 부채로 내 총의 탄창 부위를 가리키며 비릿하게 웃었다.
“더구나, 조금 전의 상황에서 날 죽이지 못한 걸 보면… 앞으로 몇 번 정도만 쓸 수 있는 양밖에 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실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이 편 고수들에게는 내가 없어도 일을 완수했을 때 충분한 보수가 주어지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요.”
이쒸~! 내가 이 새끼를 너무 얕봤나?
“마천구는… 저의 굉천포(轟天砲)를 능가하는 그 가공할 파괴력이 때로는 약점이 되겠지요. 예를 들어 지금처럼 우리가 언제라도 당신의 귀여운 부하들 사이로 뛰어들 수 있는 거리에 있을 경우가 말입니다.”
이게 점점……?
“아, 물론 당신께서 부하들의 안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 전, 저는 확신했습니다. 역시 당신은 과거의 그 극악서생이 아닙니다.”
헉쓰~! 설마 이게 내 정체까지…? 으… 그야말로 설마…겠지?
“내가 아는 당신은… 세상의 모든 인간이 몰살되어도 좋다. 단, 나와 내 여동생만은 제외하고…라고 생각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히 진하연의 생사를 도외시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역시, 이미 알아챈 거죠…? 내가 현재 진하연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할까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말없이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사갈새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전 공연히 애꿎은 양가집 처녀 한 명을 외팔이로 만든 셈이군요. 그러나… 지금까지처럼 진하연의 발목을 붙들어 놓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녀가 당신을 도우러 달려오길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지요.”
개새끼, 이젠 무림인이 아닌 여자도 해쳤단 말이지?
“진하연의 역할은 당신을 이 곳 낙룡파로 유인하는 미끼로서가 첫 번째,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당신 눈앞에서 살해당함으로써 당신의 절망을 더욱 깊게 하는 것! 후후~ 두 번째는 조금 힘들게 된 것도 같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저 여자와 그 동생들의 시체 정도로도 충분히 즐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사갈새끼는 그렇게 지껄이며 새삼 작고 징그러운 눈동자를 번들대며 대교와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대충… 그럴 것 같더라. 근데, 왜 하필 여기지? 단지 내 명호에 용(龍)이란 자가 있어서인가?”
대교는 그렇다 치고, 정작 내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슬쩍 말을 돌리자 오히려 사갈새끼의 표정이 눈에 굳어졌다.
“후후후~! 당신은 모르겠지요. 이 곳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절망의 끝자락에서 죽음의 향기에 취해 쓰러졌던 내가 어떻게 부활했는지… 어떤 것도 당신에게는 의미가 없겠지요. 마의 황궁, 비화곡에서 군림하며… 그런 당신을 신으로 추앙했던 한 사내를… 간단한 고개 짓 한 번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당신이라면……”
그거 나 아니라니까…가 아니라.
“글세에~? 너 같은 경우는 보통 네 글자로 표현하지. 자(自)·업(業)·자(自)·득(得)!”
아… 지금 들린 빠드득…하는 소리…! 희미한 소리였지만, 아무래도 이가는 소리였던 것 같다. 다른 때라면 저런 녀석이 헛소리할 때는 더 악착같이 고춧가루를 뿌렸겠지만… 지금은 기왕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거, 난장판 벌어지기 전에 한 가지라도 녀석의 헛점을 찾는 일이 중요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여하튼!”
사갈새끼가 당장이라도 날뛰기 시작할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몰라, 브레이크도 걸 겸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의 전황이 네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굳이 지금 네 스스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지? 조금 전과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이야.”
“그야 물론, 상황은 절대적으로 유리하지요. 지금 함께 나온 고수들만 해도 충분하겠지만… 설마 내가 준비해 놓은 것이 이게 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나는 간신히 참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우리 병력들에게 비웃음을 던진 사갈새끼는 여유롭게 부채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오늘 당신은 결코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어요. 하지만… 난 단순히 당신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까요. 당신이 얼마만큼, 어떻게 변했는지를 다시 확인해 보고, 당신에게 맛 보여 줄 고통의 종류를 선택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이젠 선택했나?”
“뭐, 대충은… 아직 한 가지 확인할 것이 남긴 했지만요.”
사갈새끼의 징그러운 시선이 내게서 살짝 벗어나 나의 바로 뒤쪽을 향해 있었다.
“흑주……?”
“그렇습니다. 당신의 그림자이며 칼, 그 자체였던 자… 그런 자를 당신은 스스로 인·간·으로 되돌려 놓은 모양이더군요. 난 주직촌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고도 한 동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더군요.”
빌~어, 먹을!
여기서 내 심리적 약점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이성의 판단을… 나는 따를 수가 없었다. 주직촌에서 보았던 흑주의 외가 사람들, 현 노부부의 인자한 모습과 순박하고 다정한 성품의 식구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을 스쳤다.
“너, 그들을… 어떻게 한 거지?”
“당신답지 않은 그 표정…! 후후~ 이 것으로 확인은 모두 끝난 셈이네요.”
“닥쳐! 그들을 어떻게 했냐 말이야?”
어쩔 수 없이 드러낸 내 격한 감정을 사갈새끼는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며 여유 있게 대꾸했다.
“특별히 어떻게 하고 말고도 없었지요. 그 때는……”
“뭐?”
“인질로서의 효용가치도 불분명한데 위험을 무릅쓰고 끌고 오기는 좀… 훗~! 실은 우리 쪽에 그들과 흑주의 관계를 알게 되면 곤란한 사람도 한 명 있어서 말이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가만, 그렇다면 혹시……?
“…처음에 활로 내게 서신을 전해 주었던 그자… 설마 그자가……”
“그렇습니다. 그 자가 바로 오래 전부터 주직촌을 찾아왔던… 흑주의 부모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고려인이죠. 저도 이 기막힌 우연을 알고 놀라긴 했습니다만……”
으~ 환장하겠네. 오늘은 왜 아니길 바라는 일들이 전부 현실이 되는 거야……?
“겪어 보셨듯이, 이번 일에 배제해 놓기는 너무 아까운 고수이며 내가 세외를 떠돌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자이지요. 게다가 현재의 상황으로는 그 자신이 바로 인질의 역할도 겸한 셈이지요.”
자기 외가 식구들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흑주는 아직 별다른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몽몽이 슬며시 알려 온 심장 박동 변화 같은 걸로 보면 녀석도 지금 오가는 얘기들에 아주 무심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내 사격에 부상을 당한 이후로는 지금까지도 보이지 않고 있는 고려무사 2… 아니, 고려무사 1은 지금 어디 짱 박혀 있는 걸까…? 사갈새끼 말 대로라면 그는 사갈새끼가 주직촌에 갔을 때 함께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자신과 흑주의 관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우릴 공격했던 모양이고… 결국 부상당한 후에는 인질로 전락해 버렸다는 건가?
“뭐, 설사 그가 사정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결국 내 편에 서서 당신과 싸웠겠지요. 강호상에 저 드높은 명성~! 누구라도 치를 떨며 부르는 이름, 극·악·서·생·에게서 흑주를 되찾기 위해서… 흣, 후하하 핫~!”
사갈새끼의 지독히도 불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히려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녀석의 알 수 없었던 여유… 그 이유를 이제는 대충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네가 말했듯, 나는 확실히 예전과 달라. 나 외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안전과 심지어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줄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 하지만…….”
나는 새삼 정색하는 사갈새끼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내게 여유가 있을 때의 얘기… 내 본성은 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안 그래?”
“…….”
“설마 흑주가 과거에 연연하여 날 배신한다거나 하는 걸 기대한 건 아닐테지…? 지금까지의 상황… 모두 자신 있나? 정말 이 독각포의 사용이 이제 끝났다고 확신해…? 그리고 네 부하들이 내 동생을 네가 생각하는 시간만큼 붙들어 둘 수 있다고 확신해……?”
갈수록 익숙해져서 한층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된 원판 눈빛 공격에 사갈새끼도 처음으로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훗~! 그렇다면 그걸 걸고 비무를 한 번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런 젠장! 무지 빨리 회복하네? 진짜 원판에 익숙했던 놈이라 그런가 어째 약발이 잘 안 듣는구먼. 연습 더 해야겠… 아니 지금은 그보다…….
“비…무?”
“그렇습니다. 양쪽에서 두 명을 선발해 한 가지씩 조건을 걸고 비무를 하는 겁니다. 당신은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 기회가 되겠지요. 후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녀석의 진의를 따지기 이전에 반사적으로 대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지만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이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이 뜬금없는 비무 제의가 웬지 찜찜해서 잠시 망설였다.
대교는 저쪽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문제가 되는 건 두 번째 타자이다. 그 밑의 동생들과 혈랑대까지도 저쪽의 짱 두 명(사무라이 부대와 닌자 부대)에게는 좀 무리일 듯싶었다. 물론 대교 다음의 고수…라고 하면 섭해할 우리 흑주가 있긴 하지만 녀석이 과연 내 곁을 떠나 비무 같은 걸 하려 들까……?
아니, 아니… 그런 모든 걸 접어 두고라도, 일단 이 비무 자체가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자처하는 놈이 스스로 일 대 일 대결을 원한다는 게 말이 되나? 물론 내가 본 무수한 무협과 액션 영화 속에서야 뻑하면 나오는 장면이긴 하고, 저 무시무시했던 혈의 승조차도 그 법칙(?)에 따르긴 했었다. 하지만… 저 사갈새끼도 그런 걸까…?
결정적으로, 이번엔 내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 놈이 먼저 했다.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으… 이 중요할 때 또 머리 속이 얽히다니!
“…하자. 재밌겠다.”
이쐉~!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으음… 어찌되었든 시간을 끌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 나쁠 것이 없겠지만 서도…….
“먼저, 우리 쪽 첫 번째 비무자는 ‘다카쿠마 오와이 마루’님. 그리고 우리 쪽 승리의 조건은… 당신이 그 독각포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쪽 고수가 승리했을 경우는 우리들이 앞으로 한 시진(時辰, 약 2시간) 동안 뒤로 물러나서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는 조건, 어떻습니까.”
“좋아. 우리 쪽은 대교가 나간다. 단, 시간은 두 시진.”
“…알겠어요. 훗~!”
“그나저나… 훗~! 역시 이건 무서운 모양이군.”
내가 시간을 늘인 것을 비웃듯 재수없게 웃는 것이 기분 나빠서 나도 비슷한 톤으로 웃으며 슬쩍 K2를 들어 보이자 사갈새끼는 고개를 저었다.
“난 역시 당신의 독각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다만 당신 덕분에 중원땅을 떠나 고통스러운 방랑 생활을 할 때 신세를 졌던… 명가(名家)의 핵심 고수들을 더 이상 한 명이라도 허무하게 잃는 것도 곤란하니 까요.”
그동안 수많은 왜인들을 총알받이로 썼던 놈이 갑자기 웬 생색…? 아니, 지금 남아 있는 저 녀석들이 그만큼 자신들의 유파에서 엘리트라는 얘긴가? 뭐, 어찌 되었든 명색이 대륙의 마중제일녀 대교가 섬나라 칼잡이 두목따위에게 지거나 하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