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5-1화 : 이별 예행 연습.(1)
2-7. 이별 예행 연습.(1)
난 나 자신을 천재 비슷한 존재로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래도 원판의 대타 생활을 시작한 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 흐르는 동안 나름대로의 잔머리로 그 누구에게도, 저 무시무시한 혈의문주를 상대할 때조차 잔머리 싸움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근데 하필 저런 놈에게… 하필 저따위 미친 새끼에게 이런 꼴을 당하게 되다니…….
“…이럴 수가…! 놓쳐 버리는 줄 알았던 사냥감이… 설마 스스로 그물 속으로 뛰어 들 줄이야…! 이건… 이건 도무지…….”
이젠 거의 틀렸다,라고 생각했었는지 사갈새끼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을 진정하지 못하는… 일종의 감격(?)에 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배신자 한 명이 대기한 가운데 흑주가 내 곁을 잠시라도 떠나는 것! 사갈새끼는 결정적인 이 한 수를 노리고 지금까지 그 많은 짓거리를 연막으로 깔았던 건데… 뭐… 머리싸움은 둘째치고, 결국 나는 원판의 패턴 중 단지 흑주를 항상 곁에 두는 것을 지키지 않은 것만으로 자멸한 셈이다. 웬지 허무한 기분…….
“호초-! 당장 곡주님을 놓아라!”
소령이가 다시 고함을 질렀지만, 호초는 모두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맞고함을 칠 뿐이었다. 제기… 이럴 때 몽몽이 사갈새끼에게 그랬듯 호초의 혈도를 제압하거나 하면 바로 상황 재역전이겠지만, 불행히도 몽몽은 지금의 호초처럼 호신강기를 운용하고 있는 상대의 몸에는 침투하지 못한다고 했다. 무식한 폭력에 의외로 약한 두뇌파의 설움이라고 할까……?
[ 주인님의 팔에 장착된 소형 총을 제가 작동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태에서 주인님을 구속 중인 자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동요시킬 경우, 주인님 또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안다, 알어 임마. 안 그래도 벌써 목의 피부에 작은 상처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구.
“대체… 대체 무엇 때문에……”
호초의 직속상관인 소령이의 음성은 차츰 처연해지고 있었다. 등 뒤라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와 밀착된 전신으로 상당한 떨림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호초도 지금 엄청 흥분하여 말짱한 정신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쳇…! 아혈(啞穴)까지 잡히지만 않았어도 설득을 시도해 보기라도 할텐데… 몽몽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 막힌 혈도를 모두 복구하는 데 총 2489초가 요구됩니다. 주인님의 신체는 기본 에너지 보유량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
원판에게는 기본 내공이 적다기 보단… 홀랑 뒤집어 털어 봐도 없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어쨌든 무지하게 오래 걸리는구먼.
[ 의사 소통에 필요한 아혈의 복구를 우선 시하고 있으며 해당 작업에는 628초가 예상됩니다. ]
지껄일 수 있게 되는 것만도 10분 이상이 걸린다는 얘기다. 어쨌건 입가를 조금 실룩거린다거나 눈동자를 돌리는 정도로 사태를 호전시킬 수는 없을테니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음… 근데, 나… 갑자기 왜 이렇게 침착해지는 거지…? 뭐… 전에도 막상 불안해했던 일들이 실제로 터져서 망가져 버리면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껴 본 일이 많긴 했다. 자포자기는 아닌데도 웬지 그 때까지 애써 왔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서 마치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고 할까…? 이런 것도 ‘현실도 피’ 현상의 일종인지도 모르지만… 뭐, ‘폭주’ 보다 야낫겠지.
어쨌든, 나는 비정상적인 침착함을 바탕으로 찬찬히… 좁아진 시야와 들리는 소리만을 참고해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 정면의 사갈 새끼와 그 일파의 득의만땅한 분위기는… 당연한 거니 까 넘어가고, 눈동자만을 굴려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편은 대교 자매들과, 황급히 돌아 온 흑주 정도였다. 배신자 호초의 직속상관이자 이번 외유에 직접 선발한 장본인 소령이는 살짝 넋이 나간 표정이긴 했지만 애써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듯했고, 그 옆에서 지독히도 표독스런 눈빛의 미령이가 호초와 사갈 새끼를 번갈아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소교… 소교야 말로 자매들 누구보다 평소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모든 일에 착실한 모범생 소교이긴 하나 뭔가 한 가지에 치열하게 몰두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었는데… 지금 호초의 숨소리, 아니 맥박 소리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눈빛은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야행성 육식 동물의 분위기라고나 할까…? 낯설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저 분위기는 딱 흑주의 예전 모습인데… 음… 그럼 정작 흑주는…? 이런, 흑주는 어째 소령이보다 더 맛이 가 있는 것 같다. 복면 너머의 전체적인 표정이야 여전히 알 수가 없지만 흔들리는 눈빛이나 어색하게 굳어진 모습만 봐도 녀석이 지금 주직촌에서 처음으로 보였던 그 인간적인 모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혈의 승 때 이상으로 자책의 늪에 빠져드는 심정이야 이해는 하지만… 상당히 곤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녀석이 누구보다 분발해 줘야 할텐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교… 후… 역시 녀석답군. 마치 특별히 상황이 변한 것도 없다는 듯한 저 흔들림 없는 표정… 이 지경이 되어도 나에 대한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가…? 에… 어째 이건 또 나름대로 부담이 되는구먼.
“이 두균, 같은 하늘 아래 태어난 사실조차 뿌듯해 할 정도로… 그렇게 빛나던 비화의 하늘이여… 설마 정말로… 당신을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때가 올 줄 이야……!”
아직도 감격의 뒤끝이 남아 있는 듯한 사갈새끼는 그 것을 털어 내고 싶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은 다음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령이가 발작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걸 소교가 저지하고, 이어 대교의 명령에 따라 혈랑대가 좌우로 길을 텄다. 그 사이를 용병들을 대동한 사갈새끼가 여유있게 통과하기 시작했다.
“흑주를 인간으로 되돌려 놓은 것 이상으로… 급조된 여자 호위대로 하여금 당신을 지키게 한 것은 정말이지 당신답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러지 않았던가요…? 사랑에 빠지게 되면 부모라도 배신하는 것이 여·자·라고 말이에요.”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설마, 니가 호초를 꼬셨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후후~ 비화곡에 아직까지 당신보다 날 추종하는 이가 남아 있다는 건 짐작도 하지 못했겠죠?”
에이~ 어디서 도깨비 날콩 까먹는 소리를… 니가 아니라, 이번 일의 배후 인물을 추종하는 녀석이겠지.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약속하던가요……?”
음…? 아, 이번 말은 내 등뒤의 호초에게 한 말인 모양이다. 근데… 호초는 웬일인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군.
“뭐, 아무래도 좋아요. 이제… 그 귀한 선물을 내게 넘겨 주실까요?”
이제는 내 눈앞까지 다가 온 사갈새끼가 손을 내밀자 내 허리와 어깨를 감고 있던 호초의 팔에서 스륵 힘이 빠져나갔다.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쓰러지느라 순간적으로 끈 끊어진 낙하산을 탄 기분을 맛 본 나는 곧바로 사무라이 두 명에게 안기다시피 들려져야 했다.
침착의 도가 지나쳤는지, 이쒸~ 기왕이면 그냥 호초 더러…라는 식의 상황 망각을 잠깐 하는 사이… 나는 이 곳에 올 때 타고 온 마차로 옮겨졌다. 살기 등등한 상태이나 한 편으로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우리 병력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속절없이 유괴되는 추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지난 후…… 싸가지 사갈새끼가 날 끌고 간 장소는 아직 낙룡파에 속한 산중의 한 곳이었다. 본래 낙룡파 자체가 고지대에 속한 곳이어서 그런지 그리 오래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상당히 높은 산의 정상 부근인 것 같았다. 사갈새끼는 그 곳에 미리 준비해 놓은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날 앉혀 놓았는데, 정면의 산세나 경치는 꽤 볼만한 편이었지만 당근 내가 그런 걸 감상할 기분이 날리는 없었다. 이미 몸수색을 당하여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소형 권총 세트… 내 최후의 무기까지 압수당한 건 물론이고 이 곳에 도착한 후로는 몽몽이 애써 풀어 가던 혈도마저 재차 잡혀 버렸기 때문에 아까의 침착함은 다시 거의 초조함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장소가 전망이 좋은 것은 약간 아래 쪽 바위투성이의 산등성이를 무대로 설정한 ‘관람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치명적인 위험에 대한 경고가 늦었으며… 현재 상황에서는 더 이상 도움을 드릴 패턴이 검색되지 않습니다. 저는… 쓸모 없는 로봇입니다.]
몽몽 녀석, 진짜 인간처럼 침울한 말투라니……
“흐음…….”
사갈새끼는 고무 인형처럼 의지를 잃은 상태의 내 팔을 잡은 채 손목의 몽몽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진 팔찌로군요. 설마… 이게 정말 요괴는 아니겠죠?”
“그랬으면… 지금 당장 네 놈을 물어뜯었겠지.”
내 신경적인 대꾸에도 사갈새끼는 얼마간을 더 신중하게 몽몽을 살폈다. 당장 억지로라도 몽몽을 떼어내려 들면 더 X된다 싶었지만, 다행히 녀석은 곧 몽몽에게서 흥미를 잃고 내 팔을 내려놓았다.
“뭐… 무엇이든, 설마 그게 갑자기 마병기로 변화한다거나 할 리는 없겠고…….”
사갈은 ‘그러니 이런 무기를 따로 준비해야만 했겠지’라는 투로 자기 발 밑에 놓여져 있는 상자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압수당한 내 소형 권총과 그걸 소매 안쪽의 팔뚝에 장착하기 위한 장비… 그리고 무늬만 수류탄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소형 권총을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빼앗겼다는 사실이 가장 기분 더러웠다.
“소(小) 독각포…정도일 테죠? 후… 당신이 아무리 놀라운 천재라고 하지만 이런 상식 밖의 병기를 개발했다는 건 믿기지가… 역시 당신만의 금역에 예외적으로 기거하고 있다는 그 기인에게 도움을 받은 거 아닙니까?”
“…아무려면 어때. 너 따위는 결코 다룰 수 없는 거니까 구경이나 잘 해 둬.”
“후훗…! 하긴, 그 딴 건 아무래도 좋지요.”
사갈새끼는 아무래도 찜찜한지 제 손으로는 쉽게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짐짓 무심한 척 상자를 발로 툭 차 보이고는 돌아섰다. 그 후, 마치 진수성찬을 차려 놓은 식당에 날 초대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의자에 가 앉으며 내 뒤의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목 뒤의 어떤 점에선가부터 뭔가 뜨거운 기운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그 점을 시작으로 일시에 전신으로 치닫는 열기… 뜻밖이다. 먼저 풀어 준 아혈은 몰라도 전신 혈도까지 전부 풀어 줄지는 몰랐는데…. 아참, 사무라이들이 중원 무공의 점혈법에 빠삭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내 뒤에 서 있는 건… 쳇…! 역시 저 계집애로군.
“정말 수고했어요. 호소저.”
사갈새끼의 비교적 정중한 인사와 그걸 받는 호초의 희미한 미소…. 빌어먹을 계집애, 역시 청초한 계열의 겉보기와는 다른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물론 꼬드긴 놈이 꽤 거물이며 저 계집앨 일회용으로 취급하는 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할 테고….
“후후…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요?”
징그럽다 못해 끔직한 사갈새끼의 말에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뭐라 이죽거려 줄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끝까지 자포자기할 생각은 없지만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온 것은 분명했다. 이제부터 나는 사갈새끼가 지정한 배틀 존에서 펼쳐질… 흑주와 신정안의 싸움을 이 웃기지도 않은 관람석에 앉아서 지켜보아야 했다. 여기서는 모든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예의 배틀 존은 왼쪽 끝에 위치한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절벽을 기준으로 시작되어 반대편 약 200미터 정도 범위까지 펼쳐진 잡목과 바위 투성이 공간이었다.
처음부터 신정안은 절벽 쪽에 위치한 채 대기 중이었는데, 화살이 가득 담긴 통을 두 개나 등에 메고 있었다. 처음 우리 전체 병력을 상대할 때보다도 준비가 더 철저한 모습이었다. 투지에 불타는 저 모습이 더 야속한 동포 아저씨였다.
그에 비해 조금 전에야 반대편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우리 흑주… 못난 주인 만나서 본래의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할 상황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한 흑주는 평소보다 더 작아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까 같은 흔들림이 씻은 듯 사라져 있는 느낌이라도 있다는 정도……?
선공은 신정안으로부터였다. 그는 마치 서부시대 총잡이처럼 눈부신 속도로 활을 듬과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흑주가 소리도 없이 자신이 서 있던 바위를 박차고 옆으로 날았다. 시력 터보 모드를 켠 내 눈으로도 흑주의 움직임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첫 화살을 피한 후에도 순간 순간 허공에 잔상을 남기는 놀라운 속도로 흑주는 바위들 사이로 달렸다. 그러나 신정안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지형을 이용해 자신의 시야를 피하며 달려오는 흑주의 움직임에 맞추어 그 역시 야수 같은 몸놀림으로 바위들 위를 이동하며 연이어 화살을 날렸다. 흑주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에 부딪힌 바위들이 비명을 지르며 파편을 날렸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공방이 일시 멈춘 것은 흑주가 그로부터 불과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커다란 바위 뒤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한 후였다. 옷은 몇 군데 찢어져 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흑주가 거기서 비로소 검을 빼 들고, 품에서 작은 암기를 꺼내드는 등 격돌을 준비했다. 그러나 신정안이 현재 확보한 위치는 흑주가 그 바위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한 모든 포인트에 반응할 수 있는 곳이었고 흑주도 그걸 감 잡고 있는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어쩌면 애초에 신정안이 흑주의 움직임을 읽고 그 곳으로 유인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까지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하면서도 오히려 더 숨막히는 대치 상태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내가 신정안에게 가볍지만(아무래도 그런 듯) 총상을 입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사람이기에 부상을 입은 몸을 저토록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가 있는 걸까……?
“후후~ 생각보다 더 흥미진진한 대결이로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갈새끼가 짐짓 말을 걸어오는 것을 씹으며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모습이 사갈새끼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는 사실 저 두 사람의 싸움 결과보다도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더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이 싸움에서 흑주가 크게 위험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으로 이어질 무대였다. 주인인 나를 인질로 잡힌 탓에 아까의 장소에 꼼짝없이 대기 중인 우리 병력… 대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저 쪽발이 용병들이 사냥한다는 것이다. 사갈새끼는 아까, “도망치는 자는 살고 충성을 다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낄낄댔었다. 결국… 현재 상황에서의 유일한 희망인 진하연이 그 더러운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오지 못한다는 결론이 날 경우… 난 더 이상 살아남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 사갈새끼를 내 손으로 없애지 못한 채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 또한 없었다.
압수당한 무기들이 담긴 상자가 여전히 불과 십 미터 거리에 놓여져 있기는 하지만… 나와 그 상자 사이에 서 있는 저 살벌한 칼잡이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내가 하이퍼 모드로 육체의 능력을 상승시킨다 해도 저걸 쓸 기회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멀리 치우지도 않은 것일 테고… 결국 현재 내가 쓸 수 있는 무기는 몽몽뿐이었다. 이 판국에도 끝까지 몽몽의 정체를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촉수를 이용하는 방법 또한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몽몽… 앞으로 내 명령이 떨어지면 너는 최대한 빨리 구조와 형태를 변경해. 구조는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강도 유지, 형태는 날카로운 단검… 명령 코드는 ‘죽음’.”
[ 주인님, 설마……. ]
“닥치고 대비해. 해제 코드는 ‘부활’이다. …아니, 해제는 니 맘대로 해.”
몽몽이 다급하게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내게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 어떻게든 녀석을 가까이 접근시킨 후 내 손으로 직접……!
“후후~ 과연 흑주가 여기서 어떻게 나올 지…….”
사갈새끼가 약올리듯 또 말을 걸어오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녀석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순간적으로 안색을 굳히며 입을 다문 사갈새끼는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자신의 절대 우위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지 녀석은 애써 웃음으로 태연을 가장한다.
나는 다시 흑주와 신정안의 싸움으로 신경을 돌렸다. 내가 얼마나 내 세계에 빠져 있었는지 몰라도 싸움은 아직도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흑주가 조심스럽게 겉 윗도리를 벗어 그걸로 큰돌을 싸는 준비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저 것으로 신정안의 이목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 같은데… 일반적인(?) 방법이라 고는 해도 잘 만 응용하면… 음…? 어째서 갑자기 신정안이 제풀에 활을 내리는 거지?
“흑주-!”
입을 연 신정안은 그렇게 흑주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이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나의 아혈을 풀어 주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 사갈새끼는 이 싸움 전에 신정안에게 흑주의 정체를 알려 준 모양이다. 그건… 나를 확보한 사갈새끼가 이제 흑주보다 신정안의 목숨을 먼저 노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쓸모는 없고 앞으로 상황에 따라 무서운 적이 될지도 모를 고수… 신정안을 말이다.
“아느냐? 너의 부모님께서는 나 같은 놈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들이셨다. 그런데 너는… 너는 어찌하여 저 한족의 사내… 그 것도 천하의 악명 높은 자를 섬기고 있는 것이냐!”
신정안은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흑주는 준비한 위장 물체를 집어던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정안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돌에 감긴 흑주의 옷자락으로 향했다. 다음 순간 바위의 반대 방향에서 타닥 소리가 울렸다. 신정안이 재빨리 반대쪽으로 신경을 돌렸을 때, 정작 흑주는 양쪽 모두가 아닌 정면의 허공을 뚫고 날아올랐다. 흑주로부터 던져진 무수한 암기가 우박처럼 신정안을 엄습했다. 그러나 신정안의 방어술은 흑주의 의표를 찌르는 공격 이상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을 허공의 흑주 방향으로 기울이며 일직선을 이루어 공격점을 최소화시켰고, 그와 동시에 그 작은 공격점을 통과하는 암기들을 자신의 활 몸체를 돌리며 막아냈다.
물론 암기 공격만으로 흑주의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이어지는 흑주의 섬광과도 같은 일검에는 그 역시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흑주는 신정안이 서 있던 자리에 착지함과 동시에 다시 튀어 올라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쉴 사이 없이 검광을 뿌렸다. 거대한 바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흑주의 검 끝을 피하고 막아내던 신정안이 스스로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렸다. 곧 바로 쫓아 내려가려던 흑주가 아래쪽으로부터 날아드는 화살 때문에 멈칫한 사이 신정안은 재빨리 바위 주위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높지도 않은 바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그 짧은 틈에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괴물 같은 고수 신정안은 다시 활을 매긴 채 바위 위로 올라섰다.
폭풍 같은 연속 공격으로 신정안이 화살을 매길 틈을 주지 않으려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흑주에게는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성큼 성큼 다가서며 거리를 좁혀오는 흑주를 바라보는 신정안의 표정이 괴로움에 일그러져 있었다. 결국 그가 겨냥을 약간 내려 흑주의 다리를 쏘는 순간, 흑주는 종이장 같은 차이로 그것을 피하며 암기를 날렸다. 신정안이 흑주의 암기를 피하면서 화살을 매기는 것 역시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왜인 용병들 사이에서도 감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랄까… 둘 다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지금 불과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상태에서 화살을 쏘고 암기를 날리는 공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