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5-2화 : 이별 예행 연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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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5-2화 : 이별 예행 연습.(2)


2-7. 이별 예행 연습.(2)

그때까지 싸우는 동안에 두 사람 다 왼쪽 방향에 있는 절벽에 가까운 위치로 이동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의 접전은 보는 사람을 더 아슬아슬하게 했고, 순식간에 손에 땀이 배어 날 정도였다.

미리 약속하고 수백 번의 연습을 거듭한다 해도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놀라웠던 접전은 그야말로 불현듯, 한 무술 도장의 동료가 약속한 대련을 끝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멈추어졌다. 흑주는 암기를 꺼내던 품에 더 이상 손을 넣지도 않고 다른 손에 든 검마저 아래로 내려트린 채 서 있었고, 신정안은 그보다 한 박자 늦게 천천히 활시위를 되돌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호각이었지만, 실제로는 망설임 없이 살수를 쓴 흑주에 비해 그녀를 해치지 않겠다는 뜻을 관철한 신정안이 한 수 위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하아- 혈의승 이후 전력을 다하여 살수를 펼치는 흑주를 압도할 수 있는 자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신정안… 이 잘난 동족 아저씨, 하필 이런 식으로 나타날 게 뭐냔 말이요~!

“흑주, 얘야…….”

신정안은 나 못지않게 복잡한 표정으로 그렇게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째서 비화곡주를 섬기고 있는지를 들었다. 허나… 네가 마땅히 가졌어야 했던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잠시 내 쪽으로 돌려졌던 신정안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적대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흑주에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안다. 저자를 향한 너의 충성심… 저자의 적이 된 나에 대한 원망… 너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난… 저런 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심복을 만드는지를 안다. 흑주 너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흑주… 너는 너를 낳아 준 분들, 이 넓은 천하에서 누구보다 널 사랑했던 분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뭐야… ‘사랑했던’이라면, 흑주의 부모는 이미… 빌어먹을……!

“너는 지금까지… 너무도 괴로운 꿈을 꾼 게다. 이제 눈을 뜨고 나와 함께 가자. 너와 피를 나눈 진짜 ‘가족’들에게 말이다.”

신정안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흑주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흑주는 처음 싸움을 멈추었을 때부터 지금까지처럼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흑주를 보니까 시기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신정안이 흑주에게 바라는 것은 내 바람과도 일치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왠지 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흑주에게 가족도 뭣도 아닌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 흑주…….”

아, 드디어 흑주도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꿈… 꾸었다……?”

흑주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픈 듯, 신정안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다, 얘야. 너는 지금까지 암흑 속에 던져져 한 가지 밖에 볼 수 없었던 그런 꿈속에서 살았던 게다. 알겠느냐? 이제 잠에서 깨어나 집으로 돌아가자.”

‘세뇌’라는 말을 ‘꿈속에서 살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건 그렇다 치고, 신정안의 음성과 태도에는 적어도 그가 정말 절실하게 흑주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진심이 흑주에게 얼마나 어떻게 전해질지 몰라도 부디……

“꿈… 속에서… 나는…….”

흑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수화로 내 뜻을 전했다.

< 그래, 흑주야. 그 사람 말이 맞아. 넌 깨어나야 해. >

흑주는 고개를 저었다.

< 제발…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내 명령을 들어! >

흑주는 다시 고개를 젓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손을 들어 얼굴의 복면을 벗기 시작했다. 일그러지고 늘어붙은 흑주의 얼굴이 드러나자 신정안은 탄식과 함께 활을 바위 위로 떨어뜨렸다.

“아아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화상으로 망쳐진 흑주의 얼굴이 신정안에게는 무인이 자신의 무기를 쥐고 있지 못할 정도의 충격인 걸까…?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결국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아~ 이럴 수가… 나… 나 때문에 너마저…….”

뭐지? 어째서 신정안은 흑주의 얼굴이 자신의 탓이라고 하는 거지……?

“대체 왜……”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지만, 내가 여기서 묻는다고 신정안에게 제대로 들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흑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흑주는 고개를 꺾고 오열하는 신정안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쓰윽, 검을 들어올렸다.

“아, 안돼~!”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칼잡이 한 놈이 칼을 빼 들었지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안돼! 야 임마, 흑주! 하지마~!”

내가 고래고래 고함을 치자 신정안도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흑주가 들고 있는 검을 힐끔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그래… 미안하다, 얘야. 네 뜻대로… 하거라.”

뭐냐!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신정안, 저 아저씨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흑주! 그만 두… 윽!”

으으~ 빌어먹을! 칼잡이 새끼가 칼등으로 어깨를 내리치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흑주야 제발, 신정안을 죽이는 건 사갈새끼의 각본대로 되는… 어…? 흑주 너… 내 말대로 신정안을 해치지 않은 건 좋은데… 근데 왜 검을 버리기까지 한 거지…? 응? 뭐라고……?

<지키지… 못하는… 흑주… 의미 없어… 그래도……>

야 임마, 네가 왜 의미가… 어…? 어? 너 왜 뒷걸음질을… 거긴, 그 쪽 방향은 절벽인데……!

<부디… 잊지… 말기…….>

“야, 흑주~! 너 왜 그래?”

<흑주… 당신… 좋아……>

“야, 임마 멈춰! 신정안! 뭐해욧!”

<그건… 꿈… 아니야……>

이미 절벽 가장자리에 선 흑주는 내 쪽을 향해 수화를 하던 모습 그대로 허공에 누웠다. 신정안이 한발 늦게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는 순간, 나는 몇 개의 손인가에 거칠게 잡아 눌렸다. 억지로 다시 앉혀진 의자 위에서 나는 발악했다.

“신정안~! 살려 줘~! 제발 흑주를 살려 줘~! 살려 달란 말야~!”

아아~ 다행히 신정안이 흑주를 잡은 모양이다. 여기서는 절벽 바깥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신정안은 한 손으로 단도 같은 것을 바위틈에 박아 넣어 몸을 유지한 채 절벽 아래로 상체의 거의 전부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내게 보이지 않고 있는 흑주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흑주! 어리석은 생각하지 마라! 난 네 부모님께 맹세했단 말이다. 널 지켜 주기로!”

신정안의 외침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다급하게 사갈새끼를 불렀다.

“야! 너! 기분… 좋냐? 응?”

“훗~! 별 말씀을… 그보다 흑주가 당신에게 이 정도의 존재였을 줄은 정말…….”

사갈새끼가 내 반응을 마약처럼 즐기고 있다는 걸 확인할 마음은 없었다. 난 단지 사갈새끼의 주의를 끌어 녀석이 이틈에 신정안 습격의 명령을 내린다거나 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왜. 부럽나, 두균? 하긴 너야 과거 내게 조금도…….”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절벽 쪽으로부터 비통한 울부짖음 소리가, 무언가 소중한 존재를 잃은 남자의 고통에 찬 절규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흑주는 보이지 않았다. 절벽 옆 바위 위에 보이는 것은 미친 듯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신정안뿐이었다.

“몽, 몽…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신정안 같은 고수가… 한 번 잡은 손을… 놓쳤을 리가…….”

[죄송합니다. 흑주는… 구출되지 못했습니다.]

“말도… 안돼…! 흑주가… 흑주가 미쳤냐? 왜 스스로……”

[오랜 세월 굳어진 자아와 새로운 자아의 충돌… 존재 의미에 대한 회의… 인간의 자살에 대한 욕구는……]

“다, 닥쳐! 네가 인간에 대해 뭘 안다고 헛소리를 하는 거야! 흑주는! 그 녀석은 결코 저렇게… 아, 아니… 아니, 아니 그 전에… 난 봤어. 아까 오다가… 그러니까, 저 절벽 아래에는 물이… 그래, 흔한 패턴이잖아? 안 그래, 몽몽? 그래… 그 계곡 물… 깊어 보였어.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말짱할 만큼… 야, 몽몽! 뭐 해? 빨리 계산해 봐! 아니, 아니… 그래 어차피 뻔한 거야. 하핫~! 그래 흑주는 이제 얼마 안 있어 엄청난 기연을 얻어 가지고 말야. 그래 가지고 더 강하고 더 예쁘고… 그래… 그렇게 되어 돌아올 거야… 그래… 그럴 거야. 그치?

[…맞습니다. 저의 판단도 그렇습니다.]

몽몽의 말에 나는 얼마간 큭큭대고 웃었다. 새끼…! 이젠 그런 대답도 할 줄 알고……. 고개를 돌려보니 사갈새끼는 지금의 내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지, 약간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갈새끼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예? 무슨……?”

“이쪽으로 가까이 오라고 새꺄! 한 방 날려 버리고 싶으니까!”

“아핫~! 세상에, 당신께서 직접 주먹을 휘두르시겠다고요?”

사갈새끼는 그렇다치고… 주위의 다른 새끼들은 왜 따라서 날 손가락질하며 웃고 지랄들이야? 개새끼들… 너희들도 뭔데… 썅~ 지금은… 지금은 일단, 저 사갈새끼 만이라도……

“왜? 겁나냐? 훗~! 관 둬라, 관 둬. 그래, 너 같은 허수아비는 때릴 가치도 없지.”

“허수…아비……?”

“실에 묶여 조종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 그게 너란 놈의 정체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당신이 나에게 진 것을 인정하기 싫다는 심정은 알지만……”

“닥쳐, 새꺄! 내가 네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를 것 같아? 네 놈 따위에게 오늘 같은 일이 가능할 리가 없지. 네 놈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그가 던져주는 걸 개처럼 받아먹는 정도… 안 그래?”

사갈새끼는 갑자기 이를 갈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몽몽… 명령 코드 입력 대기.”

내 쪽으로 걸음을 떼며 사갈새끼는 이를 악물고 웃고 있었다.

“역시… 그것까지 알고 있었군요. 그러나… 당신은 잘못 알고 있어요. 그가 날 이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내가 그를 이용한 겁니다.”

비로소 가까이 다가온 사갈새끼를 향해 일어서며 나는 몽몽에게 최후의 명령 코드를 입력했다.

“죽음.”

손목에서 스륵 풀린 몽몽이 내려트린 내 손바닥 안으로 떨어져 들어왔다.

“흐흐… 당신의 그 황제처럼 고고한 자존심이 나 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오늘의 모든 계책은 분명히 이 두균이… 헛~!”

사갈새끼는 흠칫 놀라며 물러서려 했지만, 내가 한 발 빨랐다. 나는 왼손으로 사갈새끼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동시에 몽몽, 아니 날카로운 단검을 놈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으와악~!”

사갈새끼가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나를 밀쳐냈다. 썅~! 확실하지는 않지만 얕은 것 같았다. 사방에서 칼이 뽑히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재차 사갈새끼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 빠를지, 아니면 내가 사갈새끼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 놓는 것이 빠를지… 응? 뭐지?

나와 사갈새끼 사이로 뛰어들려던 칼잡이 한 명이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나를 둘러싸던 자들이 두세 명씩 거의 동시에 가슴이며 머리를 화살에 꿰뚫려 쓰러졌다. 신정안… 그였다. 어느 틈에 사오십 미터 정도 거리에서 나타난 그가 미친 듯이 달려오며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나를 돕겠다는 건가…? 결국엔 흑주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원흉이랄 수 있는 나를……?

그나저나, 빌어먹을!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닌자 두 명이 비틀거리는 사갈새끼를 부축해 내 쪽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신정안의 공격 쪽에 몰렸던 왜인들의 신경이 일부는 다시 내게로 돌려지고 있었다. 신정안이 아무리 속사의 명수라 해도 화살의 수에는 한계가 있을 것…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싶었다.

“저 자식을 쏴! 난 상관하지 말고 저 자식을 없애 버리란 말야-!”

사갈새끼를 손으로 가리키며 지르는 내 고함소리에 신정안이 순간적으로 멈칫했고, 그 틈에 칼잡이 한 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때, 어디선가로부터 삐익-! 하는 길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달려들던 칼잡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뭐, 뭐지…? 저 새는… 아, 매…? 매 한 마리가 칼잡이의 얼굴에 달라붙어 눈을 찍어 대고 있다?

다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허공에 줄을 이었다. 내게도 귀에 익은 그 신호음은 진하연의 수하 ‘천응’이 쓰는, 매를 조종하는 피리 소리였던 것이다. 왜인 용병들은 갑작스럽게 하늘을 덮으며 몰려온 매 떼의 습격에 질려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사갈새끼는 헐떡이며 외쳤다.

“모, 모두 피해! 그 곳… 그 곳으로 후퇴를……!”

나는 어쩔 수 없는 반가움과 아쉬움이 뒤엉키며 감싸 오자 오히려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연아, 진하연아… 이제야 나타난 거냐? 이제야…? 아아~ 흑주야, 흑주야…….

내가 있던 곳의 뒤쪽 언덕으로부터 천응이 그 자신도 새처럼 날렵한 경공을 펼쳐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땅바닥에서 칼잡이들이 떨군 칼 중에서 하나를 주워 들었다. 사갈새끼를 업은 칼잡이가 삼 사십 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을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황급히 뒤를 쫓으려던 내 발에 상자 하나가 부딪쳤다. 빼앗겼던 내 무기들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안돼! 당신은 가선 안돼!”

신정안이었다. 그 사이 달려온 신정안이 내 팔을 움켜쥐었다.

“흑주의… 그 아이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당신을… 대신 지켜 달라고…….”

“…필요 없으니까. 당신은 당신의 할 일을 하시오.”

“무슨 소릴……”

“안 죽었어! 흑주는 안 죽었어!”

내 단호한 외침에 팔을 쥐고 있던 신정안의 손아귀가 힘을 잃었다.

“이, 이봐… 그 어떤 고수도 살아날 수 없을 높이…였어.”

“알게 뭐야. 안 죽었어. 그러니까 당신은 그녀를 찾아내란 말야. 이 잘난 내 동족… 아저씨야.”

신정안이 말을 잃고 서 있는 사이 이번에는 천응이 다가왔다.

“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묘랑께서도 무사…….”

나는 천응의 말을 씹고 사갈새끼와 그 일파가 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천응이 재빨리 따라붙으며 말을 이었다.

“곡주님 일행도 지금쯤은 모두 구출되었을 것입니다. 그 쪽에는 ‘수왕’이 갔습니다.”

“우쒸~ 잔말 말고, 날 데리고 그 새끼들을 추적해!”

천응은 조금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결국 내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며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갈새끼의 모습을 놓쳤던 언덕을 옆으로 돌아가 몇십 미터인가를 더 가니 그곳에는 작은 동굴의 입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곡주님. 뒷사람들을 기다리시는 것이……”

“자넨 여기 있어.”

“곡주님! 정신 차리십쇼! 묘랑께선 지금 당신만을 걱정하며 오시고 계신데…….”

“알아, 중요한 건 이미 다 알았으니까… 이젠 됐어. 천응… 고마워! 모두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 주어서.”

나는 천응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마치 저승의 입구처럼 음산하게 입을 벌린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은 생각보다 깊은 것 같았고, 미로처럼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다. 입구의 빛이 거의 사라져 갈 때쯤 천응이 불쑥 내 앞으로 나섰다.

“곡주님을 혼자 보냈다간… 다시는 묘랑 앞에 나설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천응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에서 화섭자(火燮子, 말린 기름 종이가 담긴 통)를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묘강 제일의 추종술을 가졌다는 천응은 내가 더 뭐랄 틈도 없이 사갈새끼 일파의 흔적을 찾아내 앞장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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