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5-3화 : 이별 예행 연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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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5-3화 : 이별 예행 연습.(3)


본래 천응과는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조금 특이한 외모를 가진 남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깡마른 인상의 그는 유독 두 눈만이 크고 초롱초롱했는데, 그가 마치 자신이 키우는 매와 친척쯤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큰 눈을 가진 사람치고는 웬지 날카로운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도중에 모드 해제시켜 본래대로 돌아온 몽몽의 추적 기능이 무색할 정도로 천응은 빨랐다. 중원의 추종술 고수들이 하는 방식을 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천응은 짐승… 그 자체랄까? 희미한 화섭자의 불빛만으로도 동굴 바닥의 미세한 흐트러짐을 찾아내는 시력도 놀라웠지만, 가끔씩 코를 킁킁대는 것으로 보아 후각 역시 야생화된 것 같았다.

동굴은 어딘가 원판의 와룡전(臥龍殿)이 연상되는 구석이 있었다. 복잡한 입체 미로처럼 자주 와 본 사람이라도 까딱하면 길을 잃고 헤맬 법한 구조도 그렇고, 나아가다 보면 가끔씩 나타나는 수십 평 넓이 공간의 분위기도 그랬다. 처음 나타난 장소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던 천응은 갑자기 어색한 태도로 걸음을 멈추었었다.

“이곳에 진(陣)이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매우 교묘하여 파해(破解)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듣고 지시대로 해. 보폭의 기준은 한 자(尺, 약 30센티미터) 반. 현재 위치로부터 동북으로 삼보, 거기서 다시 좌로 이보, 다시……”

사갈새끼는 진식(陳式)으로 추적자들을 막아볼 생각이었겠고, 꽤나 오래 전부터 준비했는지 단시간에 설치하기 어려운 고도의 진식이 자그마치 열두 번이나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원판이 개발한 진까지 완벽하게 분석해 낸 바 있는 몽몽에게 놈의 진식 따위는 시간 끌기조차 되지 못했다. 우리가 사갈새끼 패거리의 꼬리를 잡은 것은 동굴로 들어선 후 한 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이었다.

앞쪽에서 흐릿하게 느껴지던 빛이 조금씩 강해져 가자 천응은 차츰 숨소리까지 삼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 귀에까지 매우 희미하지만 사람의 음성이 분명한 소리가 느껴지자 천응은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혼자 정찰을 나갔다. 정찰이라 봐야 불과 이삼십 미터 정도의 거리를 오가는 거니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아 그 사이 나는 동굴 벽에 기대어 선 채 눈을 감았다. 아니… 솔직히 앉기라도 하면 다시 일어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종일 이어진 무리한 상황 때문에 벌써부터 몽몽이 몇 번이나 경고를 했는지도 모른다. 형편없이 지저분해진 옷차림이나 대교가 정성스럽게 손질해 주었던 머리가 제 멋대로 흐트러져 미친 놈 같을 것은 그렇다 치고… 이미 한계를 넘어 감각까지 무뎌진 채 떨고 있는 팔다리가 문제였다. 계속 들고 왔던 칼도 어느 사이 지팡이로 쓰여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부탁해… 원판의 육체야.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줘.”

군대에서 첫 십 킬로미터 구보를, 그것도 완전 군장으로 해냈을 때가 떠올랐다. 숨이 찬 것을 넘어서 콱콱 막혀 왔고, 비오듯 흐르는 땀과 달리 서늘함이 채워져 가던 몸… 평상시에는 잘 의식하지도 못하던 신체 부위로 짜르르 전류가 흐르는 듯한 그 느낌…!

“곡주님…! 사갈서생과 그 일행이 분명합니다.”

돌아온 천응이 낮게 속삭이며 보고했다.

“총 인원은 사갈서생을 포함해 열일곱. 이 중 사갈서생과 다섯 정도가 더 부상을 입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만 운신이 곤란할 정도의 부상은 사갈서생 하나 정도인 듯… 그리고 출구는 저들이 있는 곳 바로 옆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추적 당할 걸 예상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진하연님과 비화곡 일행이 오기만 하면… 곡주님…? 비화곡주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불안해하는 천응을 무시하고 그의 옆을 스쳐 걸었다. 문득, 다시 뒤를 돌아보니 천응은 찔끔한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만 둬, 천응. 물러서……!”

천응은 날 기절시켜서라도 막고 싶었겠지만, 수류탄… 진하연이 자기 수하들에게 하도 자랑을 늘어놓는 바람에 한 번 보여 준 적이 있었던 마천구가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아아~ 크게 숨을 들이킨 나는 곧바로 빛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들이 지나 온 통로에서 불쑥 나타난 나를 본 칼잡이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진짜 귀신을 목격한 사람들의 그것이었다. 내가 천천히 전체를 돌아보며 사갈새끼를 찾고 있는 동안에도, 각각 놀라 뒤로 물러서거나 칼을 뽑다 만 자세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자들 뒤쪽의 벽 한 곳에 사갈새끼가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녀석도 내가 나타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사갈새끼를 향해 걸음을 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몇 명이 다급하게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가 수류탄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 된 그들이 야쿠자 두목을 돌아보았다. 야쿠자 두목은 예의 그 살벌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술만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거 쓰는 건 닌자들도 못 봤다며? 실은… 이렇게, 이 클립이라는 거하고 안전핀이란 걸 빼고 써야 하는 거야. 뭐, 이게 폭발해도… 바깥이라면 아마도 많은 숫자가 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처럼 밀폐된 공간에서는 말야, 이곳의 누구도 살지 못해. 장담하지.”

내 친절한 시범(?)과 설명에 야쿠자 두목은 눈을 질끈 감더니 손을 들어 부하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곡주… 난 당신의 마지막 소지품만은 당신의 무덤에 함께 묻어 줄 생각이었어요. 헌데… 그런 내 호의가 이렇게 돌아오는군요.”

“호의…? 웃기지마라. 이걸 담았던 상자에는 저 사무라이들의 칼에 새겨진 문양과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어. 넌… 이것도 저들에게 선물할 생각이었지? 앞으로는 평생 거기에 얹혀 살아야 할 테니까 말야.”

“…그렇다고 해두죠. 그보다… 왜, 왜 이렇게까지…! 난 당신이란 사람이 이런 무모한 짓을 한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어요.”

“네가, 나 진짜 돌아버린 거 못 봐서 그래. 내가 이런 놈인 거 몰랐지?”

“…흑주는… 대교라는… 운 좋은 아이들은… 진정 얻었군요. 당신을… 진하운이란 사람의 마음을 말입니다. 역시 내게 허락된 것은 증오라는 이름의 피투성이 칼…….”

“아니, 난 네가 아는 그 진하운이 아니야. 하지만 마찬가지… 네가 아는 진하운이나 지금의 나나… 너 같은 놈에게는 증오도 뭣도 생기지 않아. 다만… 눈앞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뿐.”

“큭, 역시… 역시 이 황홀한 잔인함…….!”

고개를 숙인 사갈새끼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큭큭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두균 선생…! 당신은 너무 지나쳤소.”

야쿠자 두목이었다. 그는 사갈에게 냉냉한 목소리를 부었다.

“우리는 재물보다 당신의 두뇌, 우리 다카쿠마 류의 앞날에 꼭 필요하리라 믿었던 힘을 얻고자 이 먼 중원 땅을 밟았던 거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리 봐도 미쳤소. 저 진하운이란 사람에게!”

사갈새끼는 또 우크훗~! 하고 괴이한 웃음소리를 냈지만,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가자! 더 이상 중원 땅에 우리의 피를 뿌릴 가치가 없다!”

“개새끼……!”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야쿠자 두목은 내게 무서운 시선을 던졌지만, 결국 한 번 이를 부득 가는 것으로 ‘두고 보자’를 표현하고는 다시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출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슷한 지위라고 생각되는 닌자 두목도 별다른 말 없이 그 뒤를 따르자 나머지 칼잡이들도 동시에 우르르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저 새끼들이 더 재수 없었다. 야쿠자 두목이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떠났는지 몰라도… 흥! 난 놈들도 결코 곱게 돌려보낼 마음이 없다.

“…자, 두균… 이제 끝내자.”

나는 천천히 사갈새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지만 녀석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큭큭거리기만 했다. 그동안 부리던 자들에게 버림받은 정도를 동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기, 이런 상태인 놈의 목을 치는 건……

“고개 들어, 이 새끼야!”

내 고함소리에 사갈새끼는 비로소 고개를… 아니, 그러던 도중에 놈은 발작적으로 내게 무언가를 던져 왔다. 놈이 들고 있던 부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의 칼을 들었지만 칼이 아니라 팔목에 그게 맞는 바람에 칼을 놓치고 말았다. 빌어먹을! 묵직한 통증으로 보아 부채 살이 쇠로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갈새끼는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기 때문에 아차 하는 사이 나는 놈의 팔에 붙들려 함께 쓰러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동굴 바닥을 구르며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 사갈새끼는 계속해서 내 왼팔을, 거기에 들린 수류탄을 노리며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크으으~! 하다 못해. 하다~ 못해!”

사갈새끼가 원하는 것은 뻔했다. 이대로 자폭하자는 것이다.

“후후… 적어도… 당신을 함께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결국 내가 수류탄 놓친, 아니 놔 버리는 것을 본 사갈새끼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나는 재빨리 수류탄을 손바닥으로 쳤지만 수류탄을 그리 먼 곳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불과 몇 미터 밖의 내 눈앞에서 수류탄은 잘못 돌린 팽이처럼 삐딱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꽃을 튀기며 폭발했다.

사갈새끼는 그 폭음 소리가…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눈을 뜨는 사갈새끼를 보며 말했다.

“너 혼자 가, 새꺄!”

나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작은 탄환이 총구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몇 분 정도가 흘렀을 때, 나는 사갈새끼의 시체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동굴 바닥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는지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의식은 결코 흐려지지 않고 있었다.

“곡주님… 이건 대체…….”

천응이 옆에서 수류탄, 아니 수류탄의 껍데기를 들어 보였다.

“그거, 무늬만 그런 거야. 진짜는… 이미 다 썼어.”

“무, 무늬만…? 그, 그럼… 당신께선 이런 걸로 아까의 무모한 짓을…….”

천응은 기가 막히다는 듯, 연신 헛웃음을 냈다.

“무늬… 무늬만… 이라… 핫핫핫~!”

뭐가 그리 재밌는지 결국 크게 진짜 웃음을 터트린 천응은 한참을 멈추지 못했다.

“…천응!”

“핫! 예, 옛! 말씀하십시오.”

“부탁 하나 들어주려는가?”

“…묘랑의 뜻에 반하지 않는 일이라면 뭐든지 힘써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조금 전 여기서 나간 놈들을 추적해 줬으면 해.”

“예? 그들이야 이제 저 수뇌 되는 자를 잃었으니 천천히 소탕해도 되지 않을까요? 굳이……”

“놓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고 싶어. 자네라면… 결코 실수하지 않겠지?”

“믿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지금은 곡주께서 상태가 너무 좋지 않으니 걱정입니다.”

천응은 그 큰 눈을 껌벅이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천응… 그 녀석들 말이야. 웃더라구.”

“예?”

“저 사갈은… 그렇게 패악을 떨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어. 하지만… 아까 그 놈들은 말이야. 나나 우리 중 누구와도 일면식도 없었어. 그런데… 사갈이 하는 짓을 보며 웃고 즐기더라구. 알겠어…? 난 용서… 하고 싶지 않아.”

천응은 잠시 더 날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저도 저희 대월의 귀인이 납치되어 고초를 겪었던 원한을 잠시 잊고 말았었군요.”

천응은 고통이 심해지면 먹으라며 약을 몇 알 쥐어 주고 일어섰는데, 동굴을 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주인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았다.

“게다가… 묘랑께서도 당신 오라버니의 울화병을 치료하는 일이었다고 하면 이해해 주시겠지요.”

천응이 떠난 후, 비로소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나는 곧바로 깊고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입시가 끝난 후의 무방비한 잠에서 억지로 깨어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이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떠야 했다.

[주인님! 정신차리세요! 주인님! 주인님!]

내 몸의 이상을 회복시키는 과정이 끝난 후에는 늘 그렇듯, 무언가 신경계 자극 같은 것으로 잠을 깨웠을 텐데도, 몽몽은 계속해서 차라리 자명종 소리가 그리워질 정도로 요란하게 날 부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보다가 끄응~ 하는 괴로운 신음을 흘린 나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제기… 몽몽! 조금만 더 수면 치료를…….”

[그럴 때가 아닙니다. 주인님! 수상한 인물이 지금 이 동굴로 접근 중입니다.]

“뭐? 수상한 인물……?”

[예. 에너지의 자연 방출량으로 추정되는 무공 등급은 비화곡 상위 1%입니다.]

에…? 그런 엄청난 초고수가 왜 뜬금없이 이런 곳에 나타난다는 거지? 누군가 이 동굴에 은거하고 있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 아니다. 그랬다면 사갈서생 같은 침범자를 가만 놔뒀을 리가… 아…! 설마… 설마……?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나는 계속 설마, 설마 하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몽몽.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대교는? 하연이는?”

[의식을 잃으신 후 27분 39초가 지났습니다. 아직 일행의 에너지가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나는 이를 악물며 아까 왔던 통로의 입구로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채 몇 미터를 나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출구 쪽에서 이미 검은 그림자가 쓰윽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내 심장은 다시 거칠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나타난 사람은 거기다가 한 손에 다른 누군가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었다.

“어, 어쩐… 일이시오? 이런 곳까지…….”

너무나 어색한 인사를 그래도 건네 보았지만, 비화곡 상위 1%… 아니, 실질적인 무공 서열 1위의 고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천천히 동굴 안의 상황을 돌아보고 있었다.

으~ 사갈을 조정했던 ‘배후인물’은 아직 나타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근데 벌써 내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아아~ 이건, 이건 정말…….

“사갈서생 따위에게 꽤나 고초를 겪은 모습이구려. 곡주……!”

비화곡 구대 장로 중의 수장. 대장로 천마(天魔) 사문학은 그렇게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헌데, 내가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구려. 그렇게 놀라신 표정인 걸 보면 말입니다.”

“아니, 뭐… 타이밍, 아니… 순서상의 문제랄까……”

“헛헛헛~ 본 장로도 실은 조금 뜻밖이었소이다. 곡주께서 이 늙은이를 믿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설마…….”

천마 대장로, 아니 과거에는 대천마(大天魔)라고 불리며 원판의 사부와도 자웅을 겨뤘다는 전설의 인물이 한 손에 들고 있던 것은 그의 두 번째 제자의 잘려진 머리였다.

“십 수년을 공들여 키워 온 녀석이… 설마 곡주의 안배였을 줄은 노부조차 짐작도 못했었지 뭡니까. 허허~!”

대천마 사문학은 마치 술자리에서 오가는 덕담 같은 투로 말하고 웃었지만 나는 그것이 더욱 소름끼쳤다. 제기… 원판 녀석, 대비를 해 두긴 한 모양인데 실패한 건가? 아니… 내가 저 불쌍한 대천마의 둘째 제자에게 더 이상 행동 지침을 내려 주지 않아서……? 제기랄…! 어쨌건 더 이상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걸 갚아 주기 위해 오신 모양이구려. 그것도 직접!”

나는 품에서 슬며시 마지막 남은 수류탄을 꺼내 들었지만, 그걸로 저 무서운 인간을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대천마는 아까 사갈에게 쓰고 미처 회수하는 걸 잊었던 빈 껍데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

대천마는 불현듯 허무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이미 곡주의 사부인 사천대령신군과의 약속을 모두 지켰다고 자부하오. 그러니… 이제 내 손으로 곡주의 추한 몸부림을 끝내 줄까 하오.”

“추한… 몸부림……?”

으… 이 판국에도 발끈하는 기분이 들다니 내 성질머리도 참…….

“그런 몸으로 천하 마인들을 지배하던 용기와 지혜는 가히 대단하다 할 만 했소. 허나, 스스로 천명을 어지럽히면서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니, 추하다고 할 밖에……”

“그런 당신은 그 나이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내게 남은 무기는 양팔에 장착된 소구경 권총 중 총알이 남은 한 쪽… 그것만이 유일한 반격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작은 총은 그만큼 위력도 작아서 멀리서 쏘아서는 맞추거나 치명상을 입히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더구나 저 정도의 초절정 고수라면 아예 총구를 몸에 붙이고 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내 욕심이 어찌 곡주와 같겠소. 노부는 그저 젊은 시절… 단 한 명의 남자를 극복하지 못해 접어 두어야 했었던 즐거움을 노년에 잠시 즐겨 보려는 것뿐…….”

“그게 말이죠, 바로 욕심이며 노인네 주책이라는 거요.”

통할까…? 통하려나…? 빌어먹을… 안 통하면 이제 정말 끝장인데… 이 노인네야, 빨리 화를 내고 접근해 달란 말야-!

“아무려면 어떻겠소. 불행히도 이 노인네는 너무도 정정하여 당분간 하늘도 부를 뜻이 없는 듯하니 말이오.”

말을 마친 대천마는 슬며시 한 발을 내딛는가 싶더니 내가 숨을 한 번 들이키는 순간 이미 내 눈앞에 있었다. 맙소사! 뭘 어쩌고 할 틈도 없이 대천마의 손에 목줄기가 잡힌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안돼! 안 된다고!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수는 없어! 말도 안돼! 썅! 정신 차려, 진유준! 야 임마아~!

의식하기 힘든 한 순간이 지나고,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목을 부여잡고 컥컥대기 시작했다. 스스로는 방아쇠가 당겨진 것을 느끼지도 못했지만 다행히 그것이 대천마의 몸을 파고들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한참을 호흡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눈물과 땀과 침, 온갖 것을 흘리며 애를 쓰던 나는 간신히 몇 모금의 공기를 폐 속에 집어넣고 난 다음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눈앞을 가로막고 선 것은 분명히 복부에 피를 흘리고는 있으나 그것을 마치 가볍게 긁힌 정도로 여기는 듯한 표정의 대천마였다.

“…무공도 익히지 못하는 자에게는 아까우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는 남자의 무공으로 죽게 해 주겠으니, 영광으로 알라……!”

죽는다. 죽는구나. 정말 죽는구나. 나는… 나는……..

지금까지… 어떤 위기 속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분… 대천마가 손을 드는 순간부터 내리치는 사이의 몇 분의 일 초인지도 모를 순간에 내 이십여 년의 세월이 압축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손안… 내 품안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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