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0-3화 : 무인도에서의 혈전(血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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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20-3화 : 무인도에서의 혈전(血戰).(3)


3-5. 무인도에서의 혈전(血戰).(3)

모든 병력들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응…? 안색이 굳어져…? 어, 어……?

“하명하십시오! 저희들은 언제라도 죄 값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말릴 틈도 없이 전원이 오체투지로 엎드려 버리는 것과 동시에 소교가 대표로 나서 외쳤을 때에야 나는 이번 작전의 마지막 단계를 달랑 대교에게만 말해 주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니, 그게… 내가 말한 건… 그냥 표현상…….”

나는 괜히 멎적어져서 뒷머리를 극적이며 대교를 돌아보았다.

“모두들 괜한 오해를 하지 마라. 진하사님께서는… 이제부터 우리의 행방이 외부에 어떻게 알려져야 할 것인지, 그를 말씀하신 것뿐이다.”

대교가 나서서 설명을 시작하자 그제야 다들 아~하 하고 깨닫는 분위기… 음… 오해였다고는 해도 이 쌈장부대의 극단적인 충성심… 솔직히 좀 놀랐다. 주인이 있을 때라면 몰라도 현재 상황에서 제 3자가 뜬금없이 죽으라고 하면 게기는 놈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우리는 진정한 흉수의 피를 보지 못했다. 진하사님께서 말씀하셨듯, 아직은 각자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우리는 이후 한 명 한 명이 흉수의 가슴에 박힐 보검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마라.”

어이, 어이 대교… 같은 말이라도 너무 삭막한 거 아니야…? 그리고 내가 자기 목숨을 아끼라고 할 때 언제 ‘아직은’이란 단서를 붙였냐? 너 그렇게 내 말을 왜곡해도 되는 거야?

“…바로 하명하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으응… 그래.”

제기~ 웬지 극악..때보다 더 빠르게 극악의 길로 접어드는 기분이 든다. …하긴, 그때는 알려진 것보다 약하게,가 포인트였는데, 지금은 알려진 것보다 극악하게,가 목표인 셈이니 대교의 선동적인 발언도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칫…! 역시 대천마를 잡는 날까지는 계속 이 분위기로 가야 하려나?

내가 다소 찝찌구래(?)한 기분으로 금단의 무기를 조합하는 사이 다른 병력들은 신속하게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섬 곳곳에서 적의 시신을 한 군데로 끌어 모으고… 그 중 우리 병력과 같은 숫자의 시신에 우리 옷을 갈아입히는… 그런 일이었다. 그 위에 예의 금단의 무기, ‘네이팜 탄’이 터지고 나면 시신이 어느 쪽 편인지 구분이 안 갈 것이 뻔하지만 옷 쪼가리 하나라도 남아 있을 경우를 대비해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음… 뭐… 그래도 스스로 ‘금단’이라고 규정한 녀석을 인명 살상에 쓰지 않고 ‘위장’에 쓰게 된 자체는 다행이었다. 사실 각각의 재료는 여러 형태로 이 시대에도 많이 있어서 구하기는 우리 시대 수준의 화약 구하기보다 쉬웠지만 그 위력은 살벌한 이 무기… 솔직히 옛날부터 한 번은 터트려 보고 싶었었다. 람보 영화 같은 거 보면서 그 화려한 불꽃에 반해 버렸다고 할까…? 물론 나중 다른 진짜 전쟁 자료를 보면서 네이팜탄이 얼마나 끔찍한 무기인지 실감하여 처음의 단순한 느낌을 수정하기는 했지만… 하여간 현재 상황에서는 딱 맞춤의 폭탄이었다.

와룡전에서 가지고 나온 화합물들을 조합해 놓은 데다가 여기까지 오면서 보충한 기름류가 더해져 커다란 드럼통 두 개 정도의 크기와 무게가 되어 버린 네이팜탄을 섬에 설치해 놓은 후 나는 다른 병력들과 함께 배로 철수했다. 촛불을 이용한… 무기 급수(?)에 비해 상당히 원시적인 시한 장치가 작동하길 기다리는 동안 얼추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더 캄캄할 때 터져야 시각적인 효과가 클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뭐… 이 정도 어둑한 저녁 무렵이라도 충분히… 웃! 잘해야 수류탄 정도의 폭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작은 폭음 뒤로 이어진 것은 섬을 일시에 뒤덮어 버리는 거대한 지옥의 불길이었다.

“아아- 세… 세상에…….”

네이팜탄의 불꽃이 한 순간에 섬을 통째로 삼켜 버리자 대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던 배에까지 후끈한 열기가 후욱 몰아치자 대교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꽤 쓸 만한 이 시대 섬과 숲이 20세기 극악 군발 때문에 처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 다른 이들… 고룡포 출신의 선원들은 그대로 갑판에 주저앉아 떨고 있었다.

에… 다른 폭탄이나 미사일과 달리 네이팜탄은 거의 태우기만 하는 거니까 섬 자체는 무사하고… 숲이나 그런 건 세월이 흐르면 다시 생성될 테고… 난 그런 식으로 한참을 자기 변명에 몰두해야 했다. 근데… 쓰바… 불장난이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건지… 죄책감보다 졸라 멋있다는 생각이 앞서니… 으… 나 정말 극악……?

“저, 저런 것도 만들 수… 있습니까, 인간이?”

천응이었다. 그는 선원들보다야 빨리 이성을 찾는 것 같았지만 역시 질린 듯 창백한 안색을 쉽게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더 한 것도 만들어, 인간은. 그 더 한 건… 정말이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거지만… 뭐, 지금 저 놈도 충분히 써선 안 되는 물건이지. 알아… 나도 이제 다시는 쓰지 않을 거야.”

“…비화곡주의 무서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천응의 말에 더 대꾸하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의 음성에 배어 있는 떨림으로 보아 내가 다른 이들에게 신비인으로써의 경외심이 아니라 극악으로써의 두려움만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우리는 모두 ‘죽은 자’가 되어 강호에서 사라지는 거로군요.”

대교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내가 고룡포를 떠나기 전에 상관마 당주에게 남기고 온 서찰의 내용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난 상관마 당주에게 내 서찰을 나중에… 섬에서 뭔가 엄청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목격되고서야 읽어보라고 했었다. 서찰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왜인들을 치고 나면, 낙룡파에서 내 동생을 지키지 못했던 녀석들까지 내가 전부 죽여 버리겠다’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난 강호를 떠나니 찾지 마라.’를 덧붙였었다. 뭐 기본적으로 현재 우리의 병력이 완벽하게 튀려는 거고… 강호의 신진 극악.. 진유준의 극악 평가도를 높이고자 하는 것도 있고… 겸사겸사…

몇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탄 배는 밤바다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백골단의 배가 윌 추적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일단 거의 내 의도대로 작전이 마무리된 듯 싶었다. 현재 갑판 위에는 나와 대교, 그리고 천응… 그 외에는 모두 선원들뿐이었다. 선원들은 전투 시작 직전에 배 안 선실에 가두어 놓았었는데, 전투가 끝난 후에는 먼저 우리 병력들이 전부 다른 선실에 짱 박혀 숨은 다음에 풀어 주었다. 내가 대교와 천응 빼고는 전부 죽였다,라고 인식시키려는 건데… 뭐, 혈랑대 백인장 녀석들은 목격자인 선원들을 전부 죽여 없애자는 의견도 내놨었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혈랑대 쪽이 짱 박히는 거로 한 것이었다. 적당히 소문을 왜곡해 줄 목격자도 필요하다는 게 내 주장인데… 음… 여하간 그보다 지금은 다른 일 처리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대교, 이제 데려 와, 그 친구.”

문무겸비의 대갓집 도련님… 치고는 무지하게 수상한 인물, 천우신이 다시 갑판 위로 끌어 올려졌고… 곧 혈도도 일부 풀게 했다. 혈도가 풀렸다고는 해도 일단 팔은 뒤로 밧줄에 묶인 상태의 천우신은 그래도 웃음을 앞세우며 입을 열었다.

“하,핫-! 이거야 원… 하하하~ 제 장난이 좀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장난…이라? 혈전을 앞둔 병력 속으로 인피면구를 쓰고 침투한 게… 장난이라고……?”

“아… 죄송합니다, 진대협. 아무리 그래도 제가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의 무용을 꼭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에 그만…….”

웬지… 상당히 열 받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날… 아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했던… 그런 당신의 행동이… 단지 싸·움·구·경·을 하고 싶어서 그랬다… 그건가?”

천우신은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싱겁게 웃더니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말을 해도 오해를 풀기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 조금도 진대협에게 나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천우신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명문가의 자손이며, 문무 겸비…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백골단의 이목을 속일 정도의 정탐 능력… 귀종모 같은 걸 키우고 있지를 않나… 비화곡의 외당(外堂) 사람들보다도 뛰어난 변장 기술… 후… 난 정말이지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겠군. 스스로… 한 번 말해보지 그래.”

“…진대협! 한 가지는 확실히 합시다. 내가 지금까지 진대협과 일행에 나쁜 일을 하였소?”

내가 바로 대답을 못하자 천우신은 지극히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날 의심하게 된 것은 분명 내 자신의 잘못이 크나, 진대협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옳지는 않소이다. 난 지금까지 당신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고 오히려 도움을 주어 왔는데 어찌 이런 대접을 하시오. 아무리 사마외도라고는 하나 은혜를 이렇게 갚아도 되는 거요?”

음… 적반하장이라는 기분은 들지만, 별로 틀린 말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뭣보다 정말 도움을 받긴 했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지. 천공자, 당신은… 정말 싸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단지 그것 때문에 우릴 따라 온 거였나?”

내 말에 천우신은 잠시 갈등하는 것 같았다. 표정으로 보면 별 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일단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이 지휘하는 싸움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었소.”

천우신의 적나라한(?) 고백에 나는 나도 모르게 대교를 보았고, 대교는 불연 듯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야, 저거 바다에 던져 버렷!”

대교와 천응이 내 명령에 따라 천우신의 상체와 다리를 잡고 들어올리자 천우신은 비로소 원초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얘기하겠어! 얘기하겠다구~!”

쌔뀌… 진작에 그럴 것이지.

“후… 결국 같은 얘긴지 모르겠지만… 난 당신의 싸움이 보고 싶었소. 그건… 당신이 저 비화곡주에게 인정받은 인물이기 때문이오.”

천우신은 그렇게 내게는 다소, 아니… 상당히 떨떠름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실은, 우리 천가장으로 연결된 비화곡주 진하운의 비밀 통로를 나는 오래 전부터 탐색해 보았소. 훗…! 나 천우신… 나름대로 잘난 놈으로 자부하며 살아왔소. 헌데… 세상에 뭐 이런 게 다 있는지… 진하운이라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불과한 인간이 만들어 낸 진법… 이 천우신이 그의 진법 하나 깨는데 삼 년이 걸렸소이다. 자그마치 삼 년이…….”

천우신은 지금까지의 여유롭고 마음 넓은 청년의 이미지를 무너트린 채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하고 그 자부심이 상처받은 쓰라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 어느 곳도 마음 먹은대로 드나들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소. 진하운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진법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오. 헌데… 단 하나를 깨는데 삼 년이라면… 그렇다면 과연 내 평생 그의 와룡전을 볼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더란 말이오.”

음… 이 자식… 삼태자를 능가하는, 아니 그보다 원론적인 진짜 스토커 체질……?

“…최근 진하운이라는 희대의 천재가 요절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믿겨지지 않았소.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며칠 밤을 샜는지… 그 후 당신을 알게 되었지. 진하운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형님으로 모신다는 당신…….”

윽…! 이봐, 그건 오해야, 오해! 오해와 오버에 기타 등등… 하여간 그건 좀…….

“이번 싸움… 일찌감치… 역시 자신 있었던 변장을 당신에게 들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소리만 들어도 짐작이 가오. 확실히 당신은 지켜볼 의욕이 나는 사람 이오.”

에…? 여기서 얘기를 끝내는 분위기…? 뭐야 이거…? 말은 길었지만 결국 자신의 정체가 뭐라는 얘기는 없잖아? 으… 제기, 차라리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게 낫겠다.

“…너, 천가장의 후계자… 아니지.”

“천가장의 후계자는 맞소. 다만 세상에 알려져 있는 천가장은 아니겠지만.”

“…대체 정체가 뭐야?”

“후후~ 설마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터… 당신 정도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 입으로 직접 말할 수는 없소이다.”

내가 알긴 뭘 알아. 그냥 말을 할 것이지… 으… 결국… 천우신에 대한 심문은 그의 정체를 완벽하게 밝히지 못한 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대교가 우려했던 것처럼 대천마의 부하는 아닌 것 같았지만……. 우쒸~! 대체 뭐야, 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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