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1-1화 : 기연(奇緣) 속으로.(1)
3-6. 기연(奇緣) 속으로.(1)
얼마 후.
천우신을 다시 선실에 가두어 놓고 온 대교도 쉽게 찜찜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역시… 우리가 실수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천마 노괴의 수하가 아니라면 그의 말처럼 우린 몇 번이고 그에게 큰 도움을 받은 처지이거늘…….”
“그야 그렇지만… 뭐, 이 것도 그가 자처한 거니, 그가 감당하는 수밖에.”
나는 조금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우리의 대접이 심하다고 불평하는 것도 옳지는 않지.”
“음… 진하사님께서는 혹시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계시는지요.”
“그냥 짐작 정도는…….”
사실 의심 가는 구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특별히 증거도 없는 판에 단지 다른 가정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걸 정답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음… 여하간 기왕 이리 된 거 저 친구 정체가 정말 내가 생각하는 쪽이었으면 좋긴 하겠는데 말이다. 그럴 경우 저 친구만 잘 구슬릴 수 있다면 현재 우리 처지에서 가장 큰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있을 텐데… 음… 내가 너무 모든 일을 내 입맛대로만 생각하는 걸까……?
“아, 그보다 지금은… 선원들에게 경고나 좀 해 둬.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치 않을 것 같아.”
몽몽의 기능 덕에 ‘천기를 헤아리는 인물인 척’ 한 번 슬쩍한 다음 나는 선실로 들어와 누웠다. 천우신을 앞으로 어떻게 구워 삼을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하면 내 추리력이 의심받지 않을 상황으로 저쪽에서 먼저 자백을 하게 할지 뭐 그런 것들 고민하며 뒹굴뒹굴하다가… 나는 결국 불연 듯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으… 제기, 과연 바다…라고 해야 할까? 전에 신수성녀의 배 타고 목야평 갈 때는 며칠이 걸려도 크게 못 느꼈는데 이번엔 웬 멀미가 이리 쏠리는지 원.
“들어가 계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정말 바람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런… 바람 좀 쓀까 했더니만 그 바람이 장난이 아니잖아? 바로 얼마 전까지 파도도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더니… 이거 웬지 불길한 기분이 드네…? 그 난리를 치며 탈출에 성공했건만 이러다가 설마 바다에 퐁당~! 허무+허탈하게 사건 종료…? 으… 안되지 안돼!
“선원들은 뭐라고 해?”
내가 외치자 대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위험하니 육지 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쳇…! 가급적 고룡포에서 먼 곳에 상륙할 참이었는 데 고작 하루 만에…….
“하는 수 없지. 그렇게 하라고 해. 아니… 근처에 섬이라도 있으면 그리 가도록 하고 말야!”
고개를 끄덕이는 대교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밀려 파라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젠장, 아무리 바다가 변화무쌍한 곳이라고는 해도… 뭐가 이렇게 뜬금 없어? 난 대교의 재촉에 다시 선실로 돌아오면서 잠시 망설였다. 배를 모는 거야 선원들이 전문가라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손이 모자랄 것 같았다. 그래… 위장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지.
“대교, 난 우리 병력들 나오게 할 테니 넌 천우신을 풀어 줘.”
“그를…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바다에서 도망을 칠 수도 없을 테고… 어쩌면 다시 친해 볼 계기가 될 지도 모르지.”
내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대교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천우신이 갇혀 있는 선실로 향했다. 뭐… 힘든 상황 속에서 원초적으로 고생을 함께 나누는… 그런 상황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결정한 일이긴 한데… 제기…! 막상 모두를 이끌고 갑판으로 올라가 보니 이건, 이건… 정말 X됐다,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쪽 밧줄을 잡아! 뭐 하는 거야~!”
선장이 다른 선원들에게 버럭 버럭 지르는 소리들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바다의 폭풍이란… 낮과 밤까지 바꾸어 놓는 것일까? 너무나 빨리 주변을 덮어 버린 어둠과 그 속에서 꿈틀대는 악마 같은 파도… 난 내가 왜 가장 간단한 사실을 간과했는지를 후회해야 했다. 내가 택한 무난해 보였던 탈출로가 ‘위험한 바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진하사님~! 들어가 계십시오! 위험합니다!”
저만치 앞 갑판에서 선원 한 명을 부축해 주고 있던 대교가 폭풍을 뚫고 외쳤다. 그게 대교였기 때문에… 나는 돌아서지 않았고, 그 직후 내 몸은 거대한 충격과 함께 갑판을 나뒹굴어야 했다.
“진대협!”
어느 틈에 다가온 천우신이 내 팔을 잡아 부축해 주었고 나는 내 쪽으로 달려오려는 대교를 향해 괜찮다고 마주 외쳤다.
[ 위험합니다! ]
“아악~!”
몽몽의 다급한 경고와 대교의 비명…! 그러나 그것은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 주인님! 정신차리십시오! 주인님! ]
나는 공포와 어이없음을 거쳐 간신히 내 처지를 깨달았다. 대교가 나를 따라 바다에 뛰어드는 걸 본 것 같았지만, 배와 대교는 터무니없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검은 파도와 대조적으로 하얗게 일렁이는 물거품들이 몇 번이고 내 시야를 덮었다.
말도 안돼! 이렇게? 이렇게 웃기지도 않게 간다고…? 이봐, 이봐 웃기지 말란 말야-!
나는 이를 악물고 몇 번이고 웃기지 말라고 중얼거렸다. 내 운명을 틀어 쥔 신…? 아니면 그냥 바다의 악마…?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정말 길고 지루하며 끔찍한 악몽의 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무언가가 내 얼굴을 매만지는 것 같았다. 작고 가느다란 어린아이 같은 손…….
[ 주인님! 주인님~! 정신차리세요! ]
몽몽…? 설마 요정 몽몽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건 아닐 텐데, 대체 무슨…….
나는 눈을 뜨자마자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주변을 제대로 살필 생각도 없이 멍하니 누운 채 몽몽의 치유 과정을 받는 동안, 적어도 내 몸이 고정된 땅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고 있었다.
[ 주인님……? ]
몽몽이 불안한 어조로 날 부른 것은 내가 어느 순간 큭큭거리며 괴이한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으… 크큭! 나, 나… 정말 질긴 놈이다. 안 그러냐, 몽몽?”
[ 주인님의 생존 능력은 물론 평균 이상입니다. 또한, 지난밤과 같은 대규모 재해 발생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정신적인 면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밤새 실신을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
“그야… 너라면 열 안 받겠냐…? 기껏 부활씩이나 해서 말야… 포탄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장을 통과하고, 익사 사고라니… 그렇게는 못 죽어 주지… 암. 제기… 썅~! 기분 정말 더럽네.”
나는 웃고 싶은 건지 욕하고 싶은 건지 모를 기분으로 몇 번이나 웃음과 욕설을 내뱉은 끝에야 간신히 감정을 수습하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누워 있던 곳은 숲을 낀 해안선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발치에는 이제 보기만 해도 끔찍한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음… 밤새 바다를 표류할 때 몸을 지탱해 주었던 커다란 통나무 같은 것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군. 배 위의 누군가가 던져 준 건지, 아니면 갑판에 있던 것이 떨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아무리 내가 악바리라고 해도 밤새 물 위에 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쳇…! 병 주고 약주고… 자, 이제 또 무얼 던져 주시려오, 빌어먹을 운명의 신 양반아.”
그렇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옆쪽 숲에서 무언가 후다닥 달아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내 얼굴을 건드리던 건…….
[ 형태로 보아서는 꼬리 감는 원숭이(capuchin monkey)로 추정됩니다. 포유류 영장목 꼬리 감는 원숭이과 꼬리감는 원숭이속의 총칭입니다. ]
“워, 원숭이…? 설마… 내가 어디 아프리카까지 떠내려 왔다는 건 아니겠지?”
[ 원숭이는 적도를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다른 환경에서도 적응 사례가 많습니다. 게다가… 현재 저 원숭이는 보다 자세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1차 스캔 결과 비정상적인 신체 상태가 확인되었습니다. ]
나는 나무 위에서 검고 둥근 눈을 껌벅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원숭이를 잠시 관찰해 보았다. 내 눈에는 그저 귀여운 아기 원숭이처럼 보였지만,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털 색깔이 좀 이상한 건가…? 저렇게 환한 황금빛 털을 가진 원숭이라니… 칫,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그게 말이죠, 주인님. ]
음, 드디어 요정 몽몽이 떴군.
[ 저 원숭이… 아무래도 인간의 고수들 못지않게 내공이 있는 것 같아요. ]
“에…? 뭐시라…? 나도 없는 걸 저놈이……?”
나는 다소 어이가 없어서 새삼 주변을 돌아보았다. 설마 내가 혹성 탈출 같은 영화처럼 인간화 된 원숭이 사회에 떨어진 건 아니겠지……?
[ 현재까지 저 한 마리만이 발견되었습니다. 일단 당분간 행동 패턴을 관찰해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 가능한지를 추정해 보겠습니다. ]
몽몽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설마 그 정도로 황당한 전개가 진행되지는 않겠지 싶어 잠시 녀석과 원초적인 눈싸움을(?) 벌여 보았다. 원숭이를 키워 본 적은 없었지만 난 본래 짐승들과 빨리 친해지는 타입이었다. 뭐… 빨리라고는 해도 처음 보는 녀석들과 친해지려면 나름대로 끈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경계심을 없애기 위한 시간이었다. 내가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나아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대부분의 짐승들은 넘어오기 마련이었다. 내 경험상 그건 지능이 높은 놈일수록 빠르고, 또한 고양이처럼 타고난 반골이 아닌 놈들일 경우인데… 음… 일단 저 녀석은 그리 경계심이 강한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뭐… 지금 당장 꼬시는 건 그렇다 치고… 에효… 아무래도 저것도 무슨 은거 기인이 키우는 영물(靈物)이라던가… 그런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 현재의 장소에 도움이 될 만한 인력이 존재한다면 좋은 일일 텐데 어째서 한숨을 쉬시는 거죠? ]
“아니 뭐… 왠지 너무 전형적인 상황인 것 같아서 말야. 혹시… 내가 깨어나기 전에 저 녀석이 내게 뭔가 영약 같은 걸 먹여 주거나 그렇지는 않았냐?”
[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호기심을 보인 채 계속 근처를 떠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
“역시… 그 정도로 인심 좋은 상황은 좀 무리였나? 뭐, 일단… 한 바퀴 돌고 오는 편이 좋겠다.”
나는 아직 상당히 몸이 피로했지만, 갑갑한 걸 더 견디기 어려워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현재의 장소를 대충 감 잡는 데는 두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몸 여기저기가 결리는 것을 참으며 걸었지만, 걸을수록 몸이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훗! 원판의 몸일 때 이런 꼴 당했으면 벌써 끝장 났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셈인가?’
그나저나, 애초에 몽몽의 계산상 육지는 아닐 것 같다고는 했지만… 역시 섬인 듯싶고 그것도 거의 무인도 분위기… 응…?
[ 아, 아직 생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몽몽이 나보다 더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나도 반대편 해안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순간적으로 대교가 아닐까 해서 정신없이 달려가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몽몽… 너 분명히 내가 배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대교가 다시 배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지?”
[ 선원들의 밧줄을 잡는 데 성공하는 것까지는 확인되었습니다. ]
“후우… 그래. 녀석이 나처럼 멍청하게 파도에 휩쓸리지는 않았겠지. 하아~ 그렇게 믿어야지.”
나는 불현듯 다시 우울해져서 힘없이 또 한 명의 표류자 옆에 주저앉았다.
[ 이대로 두면 자력 회복은 힘들 것 같습니다. ]
“도와야겠지? 이 친구도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이 짝 난 거라고 할 수도 있겠고……”
그 높은 무공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믿음직한 로봇 한 마리(?) 키우지 못한 죄로 파김치 꼴이 되어 늘어져 있는 천우신을 몽몽이 응급 처치해 주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엄한 생각을 떠올려야 했다. 천우신에게는 물론이고 대교에게도 미안한 상상이겠지만, 난 여기에 표류해 온 것이 나와 그녀였다면… 하는 생각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젠장… 인간 진유준, 갈 때까지 갔나 보다. 내가 좋자고 그녀를 고생시키는 길을 원하다니…….’
천우신이 몸 상태가 호전되어 의식을 되찾은 건 그로부터 다시 한 시간 반 정도가 더 흐른 후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우리 두 남자는 한동안 어이없는 기분을 만끽하느라 서로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못할 정도였다.
“후우… 그러니까, 아무래도 배에서 떨어진 건 우리 두 사람뿐인 것 같고… 밤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몰라도 이 섬에 도착해 있었다 이거지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천우신에게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불현듯 아까의 나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대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셈이랄까…?
“이 천우신이 조난이라… 하핫~! 이거야 원……!”
역시 이 친구, 원판의 진을 만나 겪었던 기억을 고백할 때 보았듯 평소에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그리고 상당히 프라이드가 높은 타입인 것 같았다.
졸지에 두 청년 표류기를 찍어야 할 판이 된 우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교적 침착한 태도로 섬의 나머지 구역을 돌아보기 시작할 수 있었다. 다 돌아보는데 반나절 정도면 족할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 섬… 그리고 무인도…….
“…고작 하루 밤을 표류한 정도였으니 설마 사람들 이 영영 못 찾을 정도겠습니까. 한 며칠 고생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천우신은 그렇게 말을 걸어왔고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처음의 당혹감이 가시자 나도 차츰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돌리기 시작했고, 천우신은 간간이 농담을 걸어오기도 했다.
“하핫~! 배에서는 그 많은 꽃 같은 소녀들을 두고 하필 진대협을 부축했으니 이 천우신 생애 최대의 실수였소이다.”
‘훗! 생각하는 게 그 놈이 그 놈인 셈인가……?’
“흠… 나 역시 실은 아까 천공자를 살리는 수고를 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 좀 했소. 여자였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에? 그 무슨 끔찍한 말씀을…….”
천우신은 무슨 말로 반격할까 생각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입을 다물고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절로 걸음과 생각이 멈춰진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맙, 소사…! 이 섬은 설마… 설마…….”
천우신은 흔한 말로 불신과 경악에 찬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젖고 있었다. 방금 해안가의 한쪽 모퉁이를 돈 우리의 눈앞에는 수많은 세월 동안 거기 서 있었을 법한 분위기의 집채만 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누군가 거대한 붓을 들어 단숨에 써내려가기라도 한 듯 굵은 필체의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연옥도(煉獄島).
연옥… 지옥과 천국의 중간쯤이라는 그 연옥…? 아니, 아니… 그건 성경이라던가… 하여간 이 시대 중국의 섬에 등장할 만한 단어가 아니잖아. 대체 무슨…….
[ 주인님 시대 가톨릭의 교의의 하나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정죄(淨罪)를 위하여 머무는 장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단, 이 시대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섬이 있었습니다. ]
몽몽의 설명 이 전에 나도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생사금마도결의 본래 사용자인 패도광협 유운일이 수련을 쌓았다고 알려진 장소… 생사금마도결의 원작자(?)라는 그의 형 유운호가 끝내 신선이 되어 아직도 살고 있다고도 하는 전설상의 섬… 그게 연옥도였다.
패도광협의 친 형에 관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과장된 전설일 뿐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와 천우신은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 우릴 내려다보고 있는 건 아닌지 주변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사이 내 머릿속으로 전설의 기인과 만난 내가 최강의 무술을 전수받는… 그런 상상이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 곧 고개를 세차게 저은 다음 바위에 새겨진 글자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래도 검기나 도기… 하여간 자기 무기로 이 바위에(몽몽이 분석한 바로는 무지 단단한 재질임.) 글을 썼지 싶은 걸 보고 있으려니 패도광협이 고수는 고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서 패도광협이든 그의 형이든… 그 후 수백 년 넘게 여기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발상은 말도 안 되고… 중요한 것은, 여기가 정말 그 전설의 연옥도라면… 나와 천우신은 X됐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수가… 언제인가 반드시 찾아내고 싶은 장소이기는 했으되… 이런 식이 될 줄이야.”
천우신은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떨리는 음성으로 천천히 바위 위의 글자를 매만지고 있었다.
“천공자… 당신, 이제 슬슬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건 어떻겠소.”
내 뜬금없는 말에 천우신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의 정체가 내가 생각한 대로 천이단(天耳團)… 이라면, 그렇다면 천하의 천이단에서도 처음 발견한 모양인 이곳에 서 있는 우리 처지가 바로 보일 듯 싶어서… 그래서 묻는 거요.”
내 씁쓸한 질문에 천우신은 피식 한 번 웃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였소…? 내가 천이단이란 걸 알게 된 건?”
“뭐, 그냥… 비화곡 사정을 비화곡 사람만큼이나 잘 아는 이들은 당신들뿐일 거라고 들은 것 같아서 말이오.”
“훗~! 사실이오. 비화곡 본단의 성지와 당신 의형제의 와룡전… 그 두 곳을 제외하고는 비화곡 전역… 우리가 확인해 보지 못한 곳은 없었소.”
“더 밝힐 일 있으면 지금 말해 주었으면 좋겠소. 놀랄 때 몰아서 놀래 봅시다.”
“하핫~! 더 놀랄 일이 무어가 있겠소. 이 천우신이 천이단의 주인이라는 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면서.”
“음… 충분히 놀랐소.”
내 말투가 자길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천우신은 조금 불쾌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천마 장로에게… 어떤 의뢰를 받았소?”
“그걸 답할 수야 없지 않겠소. 다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만 말해 두겠소. 당신이란 사람을 좀 더 개인적으로 지켜보고 싶었으니까. 후후~ 내 성격이 본래 그렇소. 천만금이 들어오는 것보다 궁금한 걸 못 참지.”
“용케 천이단을 운영했구려.”
“밑에서 워낙 관리들을 잘해서…….”
뭐랄까… 처음으로 이 괴짜 청년의 진짜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원하는 조건은 얼추 주어진 것 같기도 한데… 근데 왜 하필 이런 곳이냔 말야. 제기…….”
나는 불현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땅바닥의 돌멩이 하나를 걷어차 바다로 날려 버렸다.
나는 천우신을 돌아보았고, 잠시 후 천우신도 씁쓸한 표정으로 바다 너머에 던졌던 시선을 내게 돌려 왔다.
우린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뭐… 잘해 봅시다. 어찌 되겠지.”
아무래도… 이 친구, 나랑 같은 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