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2-1화 : 연옥도의 무법자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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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22-1화 : 연옥도의 무법자들.(1)


천우신은 내 어깨를 쥔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

“부탁 하나 하세.”

내 극단적인 예상과는 뭔가 다르다…?

“난 잠시 여기서 대기할 테니… 자네가 먼저 들어가서 안을 확인해 줬으면 좋겠네.”

“…어째서?”

“만약 이 안에 무공서가 있다면… 나도 내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한 이후로는 칼을 쥐고 살아온 자… 일단 보면 욕심이 생기지 않겠나.”

“미리 치워 달라…는 건가?”

천우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 쪽으로 물러섰다. 나는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다시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이번엔 몽몽이 나섰다.

[동굴 내 진입로에 현재까지는 특별한 트랩이나 위험 생물은 스캔되지 않고 있습니다.]

“몽몽… 이제 쪽팔리게 그러지 말자.”

[…전 다만…]

“…그래, 안다. 네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칫…! 나만 나쁜 놈 된 기분이군. 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다, 몽몽. 내가 만약 여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말야. 난 이미 너희들이라는 ‘기연’을 얻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거야.”

모처럼 뭉클한 기분을 그렇게 표현했지만… 아무래도 이 동굴 역시 자기도 기연이기를 주장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화섭자의 불빛과 몽몽이 제공하는 스캔 화면에 비친 동굴 안쪽의 풍경들… 나는 그 감상을 금동이에게 먼저 밝혔다.

“금동아, 너… 참 많이도 남겨뒀구나.”

공연히 금동이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영문을 모르고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는 금동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녀석의 비밀 아지트에 허락도 없이 쳐들어와 떼강도 짓(?)을 하려는 건 우리 쪽이니까… 처음에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모를 영약 중에서 단 한 뿌리만 남겨두었건 어쨌건…

“흠~! 아까 받은 것까지 해서 짝퉁(?) 동천만년영삼 세 뿌리라…”

[다행히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스캔 결과, 동굴 안쪽 벽 안에 고여 있는 액체는 공청석유(空淸石乳)로 판명되었습니다.]

“…대교가 딱 한 방울 먹고도 날아다니던(?) 그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일단 맞습니다. 공청석유 같은 경우 타 영약과 달리 반복적인 복용이 모두 누적되므로 특히 유영한 영약으로 판단됩니다.]

쳇…!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도 모르게 히죽 웃고 말았다. 패도광협이 모두 먹고 그 이후 다시 생성된 공청석유라 할지라도 몇 방울은 되는 것 같으니…

“뭐, 영약은 그렇다 치고…”

누구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다시 찬찬히 동굴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이 동굴은 역시 연옥서생의 마지막 은신처가 맞는 모양이었다. 그가 남겨 놓은 책은 모두 이십 권이 넘었다. 일기 형식으로 당시의 연옥도 생활을 적어 놓은 것이 몇 권, 나머지는 모두 천우신이 말한 것처럼 무공에 관한 것들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어이없다 못해 섬뜩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다행히(?) 연옥서생도 그 책의 권수만큼 무공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금방 전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은 몽몽이 찍어 준 단 한 권의 책만이 새로운 무공 비서였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무공을 연구하는 중에 나온 단편적인 성과들의 모음인 것 같았다. 음… 정작 생사금마도결 비급이 없는 걸 보니, 주인을 찾은 비급은 없애 버린 걸까?

[주인님,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선 이 무공 서적은 보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몽몽의 경고에 책장을 넘기던 내 손이 문득 멈췄다.

“무슨 뜻이지, 몽몽?”

[추가 분석 중입니다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무공서입니다. 현재까지 분석된 내용만으로는 시전자 자신과 주변의 타인들을 모두 파괴하는 형태의 에너지 운용이 주가 되며, 수련을 하게 되면 발동 후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연옥서생이 죽기 전 최후로 만들어 낸 것으로 추정되는 무공비급이 설마 자폭용 무공이라는 건가? 천지파멸식(天地破滅式)…이라는 단순 무식한 제목이 좀 찝찝하긴 했지만 설마… 연옥서생이 동생이 떠난 후 홀로 지내다가 살짝 맛이 갔다는 건가? 아니면 본래 그런 성격…?

영약에 대한 반가움과 이 섬의 전 주인이 남긴 무공에 대한 황당함이 뒤섞인 묘한 기분 탓에, 내가 천우신을 안으로 부른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흠… 거 참 묘하군, 묘해. 그 연옥서생이 이런 무공을 남겼다고?”

천우신 역시 갸웃댔다. 한편으로는 불 같이 이는 호기심을 참느라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이 것만은 세상에 유출되지 않게 여기서 파기하고 싶어.”

내 말에 천우신은 흠칫 놀라더니 꽤 한참 동안 천지파멸식의 표지를 노려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아니 나도 그런 무공은 세상에 필요 없으리라 생각하네. 연옥서생이 무슨 마음으로 만들어 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지나친 욕망으로 추해진 강호인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지.”

후… 이 친구 정말 대단하다. 나야 그렇다치고, 이 친구는 강호인이면서도 이런 위험하다고는 해도 어쨌든 초울트라강력일 것이 분명한 무공의 유혹에 견뎌내다니 말이다.

“하하하-! 민망하게 쳐다보지 말게. 난 본시 잘 참도록 훈련된 사람일뿐이니 말이야.”

곧 남은 미련까지 털어낸 듯 호탕하게 웃어 버리는 천우신 앞에서 나는 천지파멸식을 불태워 버렸다.

“몽몽… 나도 이 무공은 쓰지 않을 거야. 추가 분석도 할 필요 없어.”

나 역시 그렇게 중얼거리며 불타는 천지파멸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궁금하긴 했다. 알려지기로는, 연옥서생이 동생인 패도광협과 함께 추구한 것은 중원을 위한 대의(大義)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 강호인들을 엿 먹일 생각도 했었다…? 전설상의 신비인이긴 했지만 정작 자신의 활약은 없어서 그런지 동생 패도광협에 비하면 그리 많이 언급되지는 않는 사람… 음… 왠지 나도 천우신과 함께 연옥서생 조사팀이라도 만들어 보고 싶어진다.

“어쨌든 일단… 인사는 하고 넘어가야겠군.”

무슨 무협지처럼 몇백 년이 흘렀음에도 신비롭게 생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거나 하는… 그런 건 고사하고 유골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나는 저기쯤 누워서 잠들지 않았을까 싶은 방향으로 척, 경례를 올려붙였다.

“특공~! 대선배 겸, 사부… 급, 연옥서생 유운호 선생께 진유준 하사가 인사드립니다!”

호칭은 좀 애매했지만 그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은 사실이었다. 몇 백 년 전의 사부… 당신이 남겨 준 거… 고맙게 잘 먹고 잘 쓸게요오~!

그 후, 나의 연옥도 생활은 본격적인 무공 수련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일단 탄력을 받기 시작하니 24시간 거의 끊임없이 연무(硏武)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나는 글로 쓰면 단 몇 줄이 안 될 정도로 단순한 생활을 거듭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계절이 두 번 바뀌었을 때에야 나는 간신히 어라…? 하고 세월의 흐름을 깨달았던 것이다. 후… 만약 내가 계속 이런 세월을 보낸다면, 다시 계절이 두 번 바뀐다 해도 잘 느끼지 못하려나…? 이런 걸 글로 표현하기라도 한다면… 가뜩이나 문장력 없는 나는 잘해야 이렇게 표현하게 되지 않을까?

우쒸~! 세월 졸라 빠르네. 벌써 일 년이 넘었어…라고. 아참, 그래도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그 전에 몇 칸 정도는 띄어야 할라나…?

“우쒸~! 세월 졸라 빠르네. 무공 시작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잖아.”

음… 세월 흐른 거 감상 몇 마디 중얼거렸을 뿐인데 왜 기분이 묘한 거지…? 뭐야, 이거?

나는 뜬금없이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 이상 특별한 생각이 이어지지는 않아서 천천히 의미 없이 목을 양쪽으로 움직여 두둑, 소리를 냈다. 오전 체력 단련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나는 문득 내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었던 향긋한 꽃내음과 함께 바닷바람을 깊게 들이킨 후, 서 있던 모래사장을 가볍게 차고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후욱~하고 시작된 귓가의 바람이 쐐액- 쐐액- 휘파람을 불었다. 일 년 전에는 전속력으로 삼십 분이 넘게 걸렸던 모래사장을 단 몇 분에 주파한 나는 모래사장 끝의 바위에 내려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육안 식별이 가능한 발자국이 일곱…! 열 개 이하로 단축하셨습니다.]

“양호!”

나는 다시 정면을 향해 몸을 날리며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을 시작으로 해안선을 따라 바위와 숲을 통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난해한 절벽과 암초 지역… 간단히 말해서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요즘의 내 아침 구보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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