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3-2화 : 연옥도의 사망유희(死亡遊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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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23-2화 : 연옥도의 사망유희(死亡遊 ).(2)


3-8. 연옥도의 사망유희(死亡遊).(2)

이제는… 친숙함마저 느껴지는 암흑 속에서 나는 푹- 한숨을 몰아냈다. 벌써 몇 번째인지… 그래서 이젠 이 기묘한 정적과 방향을 구분할 수 없는 암흑 속에서도 그리 초조하지 않게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 있게도 된 거지만…

후… 제기… 이제까지의 싸움에서는 너무나 강력한 적과 치고 받다가 당한 거라 죽거나 다쳐도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오늘은…….

빌어먹을 몽몽 녀석, 간만에 A급 모드로 나간다고 하기가 무섭게 그런 설정을 해 놨다 이거지?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을… 음… 아니, 아닌가…? 쳇! B급 모드 이상부터는 적의 기본 수준만 몽몽이 결정할 뿐 나머지는 모두 ‘렌덤’이니까, 녀석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을 것이다. 조금 수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사실 나 자신이 그 상황에서 적의 암습도 대비하지 못한 주제에 뭐라 따지는 것도 우스운 노릇일 것이다.

나는 차츰 흥분이 가셔 가자 오늘 내가 어이없이, 그리고 철저히 깨진 이유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뭐…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전까지와는 다른 조건… 몽몽의 가상 현실 속에 처음으로 등장한 총관 지천공… 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그 아저씨 때문이었다. 현실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과 입장에서 만나게 될지 몰라도, 만약 오늘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냉정하게 그 아저씨를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야후 장로나 월영당주, 상관마 당주 커플… 또 그밖에 많은… 내가 마음에 들어 하던 사람들… 제기…! 어렵다 어려워. 이기던 깨지던 그냥 막바로 대천마와 한 판 뜨는 것이 최고인데… 과연 그런 여건을 만들 수 있을지…….

나는 웬지 평소보다 길어진 육체 복귀 시간이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칫…! 아무리 가상현실 속의 캐릭터라지만… 실제 인물 이상으로 재수 없었던 시체짱 한기에 이어 단목상 그 싸가지도 날 어지간히 잔인하게 죽였나 보다. 몽몽이 내 육체를 회복시키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 보면 말이다. 싸움에 강해지기 위해서는 역시 실전이 최고라는 모토를 가진 나는 항상 가상현실의 ‘감각인지도’를 최고로 높인 상태에서 실전 배틀을 하고 있다. 총 열 단계로 나누어진 감각인지도의 중에서 최고 단계는 가상현실과 내 신경조직과의 싱크로(synchro, 동조)율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음… 간만에 어려운 얘기 나왔는데 무지 자연스럽게 했다. 하여간… 간단히 말해서 가상현실에서 난 아무리 사소한 상처나 고통도 모두 실제와 똑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오늘처럼 가상현실 속에서 죽을 경우, 내 몸이 정말로 죽어버리는 것이다. 전에도 한 번 든 예를 다시 들자면…

최면술에 걸린 사람에게 ‘이 것은 펄펄 끓는 물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 피부에 찬 물 조금 뿌려 주면, 정말로 피부에 화상이 생기는 것과 같은 패턴인 것이다. 나 같은 경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정말로 칼에 베인 것처럼 상처가 쩍쩍 벌어지는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수준의 고통과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충격은 두뇌가 고스란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몽몽은 처음부터 이 위험한 가상현실을 극구 반대했었다. 하지만 이쯤 되지 않고서는 실전을 경험했다고 할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음… 지금까지 총 699차례의 실전 훈련 중에서 이렇게 죽어 본 것도 벌써 열 몇 차례나 된다. 물론 그건 대부분 오늘처럼 난이도 A급에 도전했을 때였고… 츳…! 오늘은 어찌 될 것도 같았는데… 결국 실전 경험 700회 기념 혈전도 별 볼일 없이 끝난 셈인가?

생각해 보면… 가상현실이라는 거 뻔히 알면서도 매번 진짜처럼 진지하게 상황에 몰입한 나도 나이기는 했다. 후후… 난 역시 연기파 배우의 자질이 있는 건 아닐까…? 나중에 우리 시대로 돌아가게 되면 탤런트 시험이나 한 번 쳐봐…? 음… 아니… 아니다. 될 가능성도 물론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 내가 연기자가 될 수 있다 해도 그래 봤자겠다. 심지어 액션물이라 할지라도 주인공은 전부 희어 멀건 한 계집애 같은 녀석들이 하게 되어 있으니, 나 정도 마스크는 잘해야 ‘주인공의 좋은 친구’… 여차하면 주인공 대신 죽어 주며 주인공의 ‘멋진 분노’에 양념을 더해주는 역할밖에 못할 것이다. 뭐… 나도 꼭 주인공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최악의 경우, 같은 배우조차도 아닌, 어디서 립싱크 가수나 하던 것들이 미끈한 외모와 빽만 가지고 중요한 역할을 다 차지해 버리면… 그건 정말 인정할 건덕지도 없이 무조건 빡도는 일이다. 썅… 응…? 에구, 실제로 그 쪽 세계에 진출할 것도 아니면서 괜히 지래 흥분하고 말았다. 역시… 내가 배우가 된다는 것도 어째 좀… 위험할 것 같다. 나처럼 배역 몰입도가 심한 놈이 만약 극악한 연쇄살인범 역할이라도 맡게 되면… 음… 그냥 조용히 살아야겠다.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엄마 손이 총총 총…은 가사부터 뭔가 좀… 음… 심심하니까 별……. 보~람찬! 하루일을~ 끝 마치고서어~ 두 다리 쭉 펴고… 오… 음… 군가도 재미없고… 으… 정말 할 거 없네.

…제기, 몽몽 녀석… 오늘따라 진짜 복구가 늦군. 사망 상태가 길어질수록 육체와 영체의 결속도가 떨어진다고 걱정하던 건 제 놈이면서 왜 이리 뜸을 들이는… 아, 됐나……? 에…? 아닌가…? 뭐지…? 다른 때 깨어나는 것처럼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긴 했는데… 그리고 나 자신이 뭔가… 어딘가로 스륵 들어간 기분은 들었는데 어째 느낌이 좀… 이건 마치 내가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흔들리는… 서, 설마… 내가 정말 죽은 줄 알고 천우신이 날 바다에 던져 장사지내 버렸다는……?

나는 갑자기 당황하여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어찌 된 게 손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야 임마 몽몽~! 뭐 하는 거야! 몽몽! 소리도 나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몽몽을 부르던 나는 문득 모든 시도를 멈추고 말았다.

아… 이럴… 수가. 대…교? 나는 바다 속에 잠겨 햇살이 아른거리는 수면을 올려다보고 있는 익사체의 기분으로 멍하니 대교의 모습을 보았다. 물결이 흔들리는 데로 이지러지는 형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바다에 떨어진 후 수백일 넘게 보지 못한 대교…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내 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손은 고사하고 내 몸의 어느 곳도 존재한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난… 영혼인 채로 대교를 찾아 온 걸까? 그러면 왜… 왜 더 이상 대교에게 다가갈 수가 없는 거지? 눈앞의 이 물… 이게 뭔데 나와 대교를 가로막고 있는 거지? 썅! 대교가 저기 있는데! 손만 뻗을 수 있어도, 손만 내밀면…

저렇게, 저렇게 슬픈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왜! 왜 안 되는 거야!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안타까움에 치를 떠는 내 귓가로 쿵!쿵!쿵! 북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검은 장막이 눈앞을 치고 지나갔다.

“주인님!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주인님~! 숨을! 숨을 쉬라고요오~!”

요정 몽몽의 안타까운 음성이 귀청을 때렸다. 나는 눈을 뜨고 잠시 몽몽의 말처럼 호흡 조절에 애를 썼다. 옆에서 끽~ 끽~ 소리가 추가되는 것 같더니, 이어 천우신의 걱정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세상에… 이봐 진유준! 괜찮아?”

“하아~ 괘, 괜찮은… 후… 거… 같냐?”

내 대꾸에 천우신은 핫~!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금동이가 하도 호들갑이어서 한 번 와 봤더니…….”

나는 누운 채 잠시 운기를 돌려보고는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연무를… 좀 심하게 한 거지 뭐. 웃! 이 녀석…! 난 괜찮아. 괜찮다고!”

난 내게 매달리며 안타까운 울음소리를 내는 금동이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금동이 녀석, 평소에는 내 수련 시간에 잘 내려오지 않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와 봤다가 혼자 생쇼를 하던 내가 결국에는 픽 쓰러져 죽자(?), 천우신에게 달려가 난리를 피웠었던 모양이다.

“나참-! 명상을 통해 가상의 적과 머리 속에서 비무를 벌이는 건… 웬만한 고수들은 다 하는 거지만 자네처럼 유별난 사람은 보다 보다 처음 일세. 잠시지만 정말로 심장이 멈춰 버리다니…….”

질린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천우신에게도 자세한 걸 설명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저 싱겁게 웃으며 귀여운 우리 금동이… 내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 준 금동이를 오래도록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음~ 근데, 깨어나기 직전에 뭔가 좀 이상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보통 영혼 상태가 되었을 때의 느낌이라던가 그때 뭘 생각했는지 같은 건 육체로 돌아와 깨어나고 나면 꿈을 꾼 것처럼 막연한 느낌밖에 남지 않았었다. 이번엔 웬지 대교를 만나는 꿈을 꾼 것 같은데… 칫…! 기왕 대교를 꿈꾸려면 확실하게 꿔질 것이지…….

얼마 후. 거처로 쓰는 동굴 앞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천우신이 문득 물었다.

“그래… 이번엔 누구와 대결해 본 건가?”

“그냥 좀 친했… 아니 그러고 싶었던 사람.”

“흐음~ 괴로웠겠군. 그래서… 졌군.”

“음, 그 사람에게 진 건 아닌데… 결국 냉정을 잃고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엄한 놈에게 당했어.”

“훗-! 정말 특이하다니까, 너 진유준이란 남자…! 이봐, 앞으로는 저 금동이 녀석을 위해서라도 적당히 좀 하게. 아니면… 절대로 지지 말던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말야.”

“가급적 그래야겠지. 어쨌건 현실에서 죽지 않으려 고생하는 거 아니겠나.”

천우신은 진주 몇 알을 들고 금동이와 가볍게 캐치볼(캐치 주?)을 하고 있는 내게 슬며시 다가오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대교, 라고 했지? 그 미녀.”

“응? 으응. 근데 왜?”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본래 자네 동생의 여자 아니었나?”

나는 금동이가 던져 준 진주를 제대로 잡지 못하여 떨어트리고 말았다.

“미안해. 난 단지… 네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설마 조금 전 혼수상태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릴 정도로… 그렇게 진심인 줄은 몰랐거든.”

“…왜. 그러면 안 돼?”

내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문하자, 천우신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극적였다.

“뭐, 안 될 거야 없겠지. 뒤에서 떠들어대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비화곡주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것도 아니니… 당사자인 자네가 그녀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야…….”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아직 순결한 처녀야. 몸도 마음도.”

천우신은 내 말에 담긴 진심을 잠시 가늠해 보는 것 같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흠…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가만…? 이거 혹시……?”

천우신은 지금까지와 달리 갑자기 매우 미묘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알겠다. 알겠어. 이 음흉한 친구 같으니! 자네 그래서 비화곡주에게 그 고리아 교의 교리를 가르쳤구만!”

“에…? 뭔 소리야 그게.”

“하핫! 절묘하다 절묘해! 이제 자네가 강호로 돌아가면 마침 그녀는 고리아 교의 교리에도 어엿한 성년(性年)이니 말이야!”

천우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오래도록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으… 이 자식, 살생유택이나 그런 교리(?)는 몰라도 내가 성년(成年)이란 개념을 성년(性年)으로 바꾼 건 비화곡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했었는데… 역시 천이단의 주인… 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야, 임마! 내가 대교를 만난 건 비화곡을 탈출하기 직전…! 바로 그 때였단 말야! 너, 날 뭘로 보는 거야, 지금.”

“흐음~! 그게 정말인가?”

“…나나, 너나… 하기 싫은 말은 아예 안 하고 말지,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야. 안 그래?”

거짓말에 대한 장담 자체는 상당히 찔리기는 했지만… 일단 오해를 풀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실례했네. 하지만, 뭐… 그 정도의 미녀를 얻기 위해서였다면, 설사 자네가 정말 그런 수를 부렸다고 해도… 그리 흉은 아니라고 보는데?”

천우신이 내 말을 어디까지 믿는지는 몰라도… 생각해 보니 정말 타이밍이 그랬다. 지금의 나와 원판이었을 때의 나를 따로 놓고 보는 관점에서는 만약 앞으로 내가 대교와 잘 될 경우, 충분히 루머(?)가 만들어질 법도 했다. 극악서생보다도 더 음흉무쌍한 하사 진유준이 실은 오래 전부터 자기 의동생의 비서인 대교를 찍어 놓고, 천하의 풍운아 겸 바람돌이 극악서생으로부터 그녀의 순결을 지키려고 극악서생을 고리아 교에 귀의 시켰다는… 그런 스토리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천상 친구로구먼. 결국 같은 자매들 중 두 명을 선택하다니 말야.”

“그건 그렇군. 근데… 천우신, 자넨 누구야 그게?”

“음… 아직은 말하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쳇, 지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내서 말할 마음이 들었나 했더니…….

“대체 뭘 그리 숨기는 거야? 내가 알아야 뭔가 도울 게 있나 미리 생각해 볼 거 아닌가, 친구.”

“그냥… 웬지 쑥스러워서 그러네, 친구.”

“천하의 천이단을 이끄는 남자가 뭐 그리 소심한가, 친구.”

“내가 그런 신분이니까. 그래서 더 좀… 훗-! 짝사랑이란 걸 할 나이도 아니고 말야.”

“짝사랑은… 나도 마찬가지일세, 친구.”

“응…? 정말? 그 아가씨, 그럼…….”

“음… 분명히 육체적인 정염을 불태운 적은 없지 만…(쬐금은 있었나…?) 그녀는 아직도 진하운이라는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지. 그녀도… 진심이었던 거야.”

“천하의 비화곡주가 경쟁자라니… 자네는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니… 나 역시 마찬가지인가? 내가 생각하는 그녀 역시 진하운이라는 남자의 그림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야.”

가만있자…! 천우신 이 친구. 이제 보니 조금 전 극악서생과 고리아 교의 관계를 생각해 내고 그렇게 웃어댄 건 내 문제보다 자기 문제로 그렇게 기뻐했던 거잖아? 쫘식, 너도 결국… 아, 가만…? 그럼 이 친구를 자백시킬 방법이 하나 있다. 흐… 좀 잔인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우신, 자네는 내 아우 진하운이 자신의 모든 일을 내게 말해 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렇다고 듣긴 했네.”

“뭐, 내가 와룡전에 갇힌 채 하도 오래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니 위로 차원에서 그런 거였지. 하여간… 당연한 얘기겠지만, 대교와 그 동생들과의 얘기도… 난 모두 낱낱이 알고 있네.”

“그래서……?”

“내 아우가 실은 어느 날 실수로… 순전히 실수로… 소교, 소령, 미령… 이 세 아이 중 한 명과 동·침·을 하고 말았다네.”

나는 말을 하며 슬며시 천우신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 자세히 살필 필요도 없이 갑자기 천우신의 입가가 미묘하게 실룩거리고 있었다. 태연한 척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마, 말도 안 돼는… 설마 자신이 사랑하는 큰아가씨도 손대지 않은 자가 어찌…….”

“그러니까… 실·수·라고 하지 않았나. 뭐… 대교가 장청란과의 대결을 위해 오래도록 폐관 수련에 들어가 있었을 때였고 말야.”

“그게, 누구… 라던가?”

“이보게… 우신.”

“말해 보게.”

“안 갈켜 주~지.”

“에? 뭐, 뭐?”

나는 당황하는 천우신을 무시하고 그대로 안면 몰수해 버리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 쪽에서 진주로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금동이에게 다가가 옆에서 나도 공연히 진주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난 이미 그녀,들… 모두에게 수궁사(守宮砂)가 뚜렷한 것을 확인한 바 있네, 친구.”

훗-! 이 친구 급했군.

“그 수궁사가… 매우 높은 확률로 제 구실을 못한다고 하지, 아마?”

수궁사는 노루피에다 이런 저런 약재를 섞어서 만든다는 모종의(?) 화학 물질로 여자 팔뚝에 점을 찍어 놓는… 이 시대 처녀 감별 법인데, 우리나라의 여러 무협지에서는 백 프로 완벽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몽몽의 계산에 의하면 아주 잘 만든 것도 대충 십 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반응할 거라는데, 그 것도 여성 호르몬의 급격한 증가에 반응하는 것뿐이니 특별히 처녀 감별법이라고 하기는 좀…….

“여하간 자네도 그걸 아니까 조금 전 내 걱정을 해 준 거 아니던가, 친구.”

내가 다시 그렇게 확인 사살을 하자 천우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내가 이렇게 나온 건 조금 전 녀석이 대교를 삐딱한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응징(?)의 의미도 있었지만…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녀석이 이 대로 그냥 삐지기만 하는 건 아닌가 약간 걱정은 되었다.

“…원하는 게 뭔가, 친구.”

흐흐… 빨리도 항복해 버리는군.

“글세에~ 몇 년 정도의 ‘천이단 자유이용권(?)’ 정도…랄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윽, 이 친구 정말 심각한 표정인 걸? 역시 이 정도로 천이단의 정보망을 날름하겠다는 건 너무 뻔뻔했나?

“에… 그냥 일년 정도도 괜찮네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 한 번 더 찔러 봤지만, 천우신의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난 ‘한 달 자유이용권’이라도 말하려다가 역시 너무 치사스럽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후후~ 이 친구야. 농담이야, 농담! 누가 그깐 얘기로 천이단을…….”

“아니, 아니야! 설사 십 년이라 해도 정당한 거래 조건일 것이야! 허나… 난 역시 한 단체의 장! 사사로이 지위를 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난, 그 정보를 포기하겠네.”

에구, 이번엔 내가 정말 실수한 것 같다. 세상 물정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는 청년을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놀려댔으니……

“이봐, 이봐! 그만 심각하라구! 미안해. 미안하다구, 친구!”

“훗~! 나야말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 건가?”

“그래… 그리고, 그보다 우리 지금 웬지 좀 치졸한 대화를 나눈 것 같지 않나, 친구.”

“…그렇군.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그녀의 과거나 사사로운 허물에 연연하는 건 소인배나 하는 짓이거늘… 나도 반성하겠네, 친구.”

우리, 대한민국과 중원을 대표하는 모범 청년(?)들은 새삼 서로를 마주보며 해맑은 웃음소리를 허공에 날렸다.

“하하~ 그 동침이란 것도 실은 별거 아닌 일이었어.”

“하하~ 전부 농담… 아니었나?”

“아, 그거야 그냥 술 취해서 잠을 같이 잤을 뿐이라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 아이가 보기엔 안 그래도 엄청난 말술이거든.”

“마, 말술…? 그,래……?”

오호~ 그래도 이대로 끝내긴 좀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한 번 찍어 본 거였는데… 딱 걸렸잖아?

“흐음… 소령이었군 그래, 친구.”

“무, 무슨 소릴 하는 지 모르겠네, 친구.”

“흐흐… 이미 늦었네. 인정하게 친구.”

내 음흉한 웃음과 태도에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천우신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극적였다.

“끄음… 하는 수 없군. 그래… 삼 년 전 처음 만났던 때부터 내가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던 소녀는… 술독을 기울이는 모습까지 너무나 사랑스러운… 바로 셋째인 소령 아가씨라네.”

에…? 고백하는 건 좋은데 시기가 좀……

“삼 년 전…이었다고?”

“후후~ 전에 말했지 않았나.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은 비화곡에서도 와룡전과 본단의 성지뿐이라고.”

“호오- 천이단의 업무… 정보 수집을 위해 직접 침투해 들어갔다가 우연히 소령이를 만났고,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하하~ 이거 정말 드라마틱 한 걸?”

“무슨… 틱? 그 것도 자네의 특공가에서 쓰는 말인 모양이군.”

역시 항상 학습하는 자세의 천우신.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어디서, 어떻게 처음 소령이를 만났던 거지? 소령이도 널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야? 응?”

“자네 식대로 하자면… 난 이제부터 ‘묵비권’을 행사하겠네.”

천우신은 애써 평정을 가장하면서 획 몸을 돌려버렸다.

에구, 실수… 흥분해서 너무 섣불리 캐묻고 말았다. 하지만, 흐흐… 일단 대상을 알았으니 그간의 사연을 하나씩 꺼내들 게 하는 것도 시간 문제지 뭐. 어쨌거나 소령이라니…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소령이는 웬지 남자와 연관해서 연상이 잘 됐었는데… 음… 여하간 축하해 줘야 할 일인 것 같다. 양 쪽 다 내가 좋아하는 녀석들이니 맺어질 수 있도록 다리도 좀 놔주고 말이다. 흐… 그리고 역시 이걸 잘 이용해서 천이단의 정보망을 내 것처럼 쓰는 방향으로… 음… 끄음…….

“몽몽. 너… 제 2 구현 형태 제작… 그만뒀지…? 맞지?”

날 모델로 한 제 3의 몽몽… 최근 나는 그게 가장 두려웠다.

[ …현재 사용자의 거부로 유보 상태입니다. 다시 시작할까요? ]

“아니이~ 오히려 그냥 영구 폐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야.”

[ 죄송하지만, 다중 구현 형태 구성은 저도 제한까지만 가능할 뿐입니다. ]

“그, 그래…? 알았다. 내가… 똑 바로 사는 수밖에…….”

나는 웬지 다소 기가 죽은 태도로 천우신에게 향했다. 천우신은 아까 하다만 식사 준비를 다시하여 거의 마치고 있는 중이었다.

“저기, 좀 전에는 충분히 설명이 안된 것 같은데…….”

“그보다, 유준!”

천우신은 내가 말 걸어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불쑥 나를 불렀다. 그리고…….

“식사 끝나고 말일세. 오랜만에 대련 한 판 어떤가, 친구.”

나는 천우신의 뜬금없는 제안이 웬지 불안했다. 평소엔 내가 하자고 해도 피하던 친구가…….

“역시 오랜만인데 서로 봐주기 없기네, 친구. 뭐… 꼭, 자네가 그 잘난 절세미서생…의 의형제라 이러는 건, 아닐세. 내가… 엄한 상대에게 화풀이를 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친구!”

웃고 있는 천우신의 머리 위에 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공은 내가 조금 앞선다 하지만… 천이단의 저력은 강호의 누구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우리가 먹는 요리를 모두 담당하고 있는 천우신이 나 몰래 내가 먹을 요리에 코딱지를 파 던져 넣거나 씻는 걸 본 적도 없는 발가락을 담근다 하더라도… 그건 몽몽도 검색 못한다.

“이, 이봐. 난 지금부터 그날 밤 사연의 진상을 알려 주려는 거야. 응? 들어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원판이) 소령이와 술 마시다 결국 동침까지 하게 된 사연을 자세히… 그러나 오해가 생길 법한 부분은 적당히 편집해서 들려주었다.

“하하~! 그러니까, 천하의 비화곡주가 소령 아가씨와 술 대작을 하다가 실신을 했다…? 핫핫핫~!”

“…그래, 이 친구야. 그 후에 소령이도 그냥 잠든 걸… 다른 시녀들(같은 자매들이라고 하면 좀…)이 과잉 충성으로 같은 침상에 옮겨 놓았다고 하지. 뭐… 내 아우 진하운은 그 다음 날 깨어나자마자 혼비백산하였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교 자매들 모두에게 고리아 교의 교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고 하지.”

“크하하핫~! 실신! 비화곡주가 술 마시다 실신…! 하하핫!”

누가 보면 내 말이 굉장히 재밌는 사건이라 웃는 것으로 볼 지 모르고, 실제로도 재미있는 얘기에 속하기는 한 것 같지만… 역시 천우신의 반응은 상당히 오버였다.

“…이제 진상을 모두 알았겠지, 친구?”

“하하- 알겠네, 알겠어.”

“하하~ 알았으니 이제 그만 진정하게, 소인배 친구.”

에구, 끝내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또 트집을 잡고 말았다. 하여간 나란 놈은…….

“소, 소인배…? 내가… 말인가?”

“아니 뭐… 지금 자네 반응을 보니… 아까 자네 스스로 한… ‘사랑하는 여자의 과거나 사사로운 허물에 연연하는 건 소인배나 하는 짓이거늘’이라는 말이 떠올라서 말야.”

기왕 내친 거 어쩔 수 없다 싶어 구체적으로 언급해 버리니까, 천우신은 급격히 기가 죽어 헛기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커흠~ 흠… 음, 음… 거… 일단 식사나 하세, 친구.”

“음… 진하운이 없는 이상… 최소한 그의 복수를 끝내기 전까지는, 대교 자매들 모두… 특히, 소령이는 내 말에 복종하게 되어 있지 아마?”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친구. 음식 식겠네.”

“뭐, 그런 거 아니라도. 난 이미 대교 자매들과 매우 친해진 상태이니… 내가 자네 흉 조금 보는 정도로도 충분히 ‘깽판’은 놓을 수 있겠지. 깽판… 전에 설명해 줬지? 음… 나야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냥 해보는 소리지, 뭐.”

“…물도 떠다 드릴까요, 형님.”

말은 물어보는 거였지만 이미 천우신은 그의 독문 경공으로 순식간에 물 한잔을 떠다 바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천우신이 바치는 물을 여유 있게 마시며 ‘앞으로 잘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고, 한참을 낄낄대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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