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4화 : 다시 강호로…….
3-9. 다시 강호로…….
이곳 연옥도는 겨울이 짧다. 그리고 여름은 무지 빨리 온다.
섬 생활하면서 좀 덥다…라는 걸 두 번째로 느껴질 때쯤, 연옥도를 불법(?) 점유하고 있던 우리, 전직 전국구 강호 조폭 짱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서도 업소 수금(천연 진주) 잘 되고, 가끔씩 개기는 놈들(상어)은 스트레스 해소 겸 오히려 두들겨 패고 아예 봉(식량)으로 삼는 등 구역 관리는 꽤 잘 되는 편이었지만… 역시 우리 조직은 본래의 전국구로 돌아가는 일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나 천우신이나… 강호에 남겨 놓고 온 것이 너무 많았다.
“뭐, 내 사부(급, 자는 빼기로 했다)께서 남긴 기록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제 얼마 후면 다시 강호로 돌아갈 수 있겠지. 헌데… 그 친구는 어쩐다?”
내 시선은 천우신과 두 손을 맞잡고 쎄쎄쎄(?)를 하며 놀고 있는 금동이로 향했고, 천우신도 문득 갈등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이 친구의 뜻에 따라야겠지.”
“뭐, 어쨌든… 금동이는 오랜 세월 이 섬에서 계속 자란 아이야. 강호로 나간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리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우리가 과연 무사히 강호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 자체도 불확실하잖아.”
내 말은… 사실이었다. 연옥도를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작년에 확인했듯, 내 사부의 기록대로 소용돌이 수역이 일 년에 딱 한 번 잠잠~ 해지는 몇 시간 동안 나가면 된다. 문제는 기록된 날짜가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정확성이 떨어져 있어서 작년 이맘때는 ‘음… 이때쯤이었군’ 하고 확인만 했을 뿐이었다. 물론 연옥서생 사부의 기록에는 그 후로도 마의 해역을 빠져나가는 코스가 상세히 나와 있긴 한데… 일년에 딱 하루만 열린다는 그 코스를 우리가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건 정식으로 제작된 것도 아닌 우리 두 사람이 만든 엉성한 배이기 때문도 있지 만… 하여간 우리가 무사히 강호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좀 가혹할지도 모르지만 내일 출발할 때 저 녀석의 선택에 맡길 수밖에.”
내 말에 천우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우리에게 떼기 어려운 정이 든 건 사실이지만… 야생의 짐승을 인간계로 끌어들이는 것도 찝찝한 판국에, 가다가 꼬르륵~ 꽥! 할지도 모를 상황이니 더욱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연옥도를 떠나기로 한, 혹은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날의 이브(?).
본래 해가 떨어지면 바로 취침에 들어가는 천우신은 벌써부터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금동이는 뭔가 느끼기라도 한 듯 평소보다 더 유난히 강하게 옷깃을 잡고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몽몽… 혹시 말야, 웬만한 배는 그냥 감아서 침몰시키는 크기의 문어나 그 이상의 초거대SF틱극악해양괴물… 그런 것들이 주변 해역에 어슬렁거리고 있다거나… 그런 가능성은 없냐?”
[ 진심으로 물어보시는 거예요? ]
“요정몽… 임마. 너도 지금까지 봐왔잖아. 너희 시대는 물론이고 우리 시대에도 없는 해괴한 놈들이 등장하는 거 말야. 비화곡 한룡소의 이무기도 그렇고… 여기 연옥도의 금모신원도 그렇고… 또…….”
[ 또… 뭐가 있었나요? ]
솔직히 말하면 바로 네 놈도 이 시대에 오기 전까지의 내게는 상상 속에서나 나오던 존재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 자신도 이제는 정상인이 아닌 상태이고 말이다.
[ 주인님 말씀처럼 현재까지의 진행 상태라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여기서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이 주인님의 뜻, 아니었나요? ]
“당근이지. 그냥 좀… 막상 가려니까 불안해서 그래. 사실 난 바다가 좀… 무서워. 이젠 상어 정도는 가볍게 씹을 수 있게 되어서 좀 덜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 속을 알 수 없는 심해는… 웬지 꺼림칙하더라구.”
[ 미지의 세계와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만… 주인님도 그러실 줄은 몰랐네요. ]
“에이… 내가 뭐 초인이나 악마쯤 되냐? 두려움이 없게?”
[ 아뇨, 두려움보다… 그 특유의 적응력 말이에요. 후후… 제가 아는 주인님은 만약 무서운 바다 괴물들이 몰려나온다 해도 곧 그들과 친해져서 함께 어울려 놀… 그런 분인 걸요. ]
“훗~! 칭찬은 고맙다만 그건 좀… 음… 그러고 보면, 바다 괴물 중에도 귀여운 녀석은 있으려나……?”
몽몽의 위로는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나는 어느 사이 귀여운 쪽에 속하는 괴물들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주로 환타지 쪽에 등장하는 생선 머리를 가진 해왕의 심복 부하라던가, 아리따운 인어, 해마(海馬) 자가용… 음… 근데 인어라… 전설상의 인어는 항상 무지 예쁜 아가씨만 나오던데… 혹시 할아버지 인어나 할머니 인어는 없는 걸까…? 음… 근데 왜 할아버지 인어보다 할머니 인어가 더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걸까……? 나는 어느 사이 엄한 상상의 나래 속으로… 그리고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땡쓰… 몽몽.
다음날 아침.
“이봐, 이봐…! 그만 일어나게!”
나는 드물게 천우신의 재촉과 함께 눈을 떠야 했다.
“쯧~! 본래 잠버릇이 심한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좀 심하군, 그래. 뭐… 나쁜 꿈이라도 꿨어?”
“아, 아니… 그냥 좀…….”
나는 어색하게 얼버무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섹시한 인어와 응응응을 응응하고 응응을 응응한 다음 응응은 응응하는 그런 상황에서 해왕에게 들켰는데, 그 인어가 하필 해왕의 약혼녀라 그 이후 해왕의 군대인 살벌 무쌍의 바다 괴물들과 대가리 터지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는… 그런 꿈 내용을 차마 발설할 수는 없었다.
“후후… 역시 대단하단 말야. 잠자면서까지 무공을 연마하니 곧 강호의 누구도 자네를 감당하기 어렵게 될 거야.”
“아, 아니 뭐 꼭… 흠…! 여하간 오늘은 바쁠테니 식사 빨리 하고 준비해야지.”
나는 더 민망해져서 공연히 천우신을 재촉하며 동굴을 나서야 했다. 막상 나가서 생각해 보니 준비 어제 거진 다 끝났고 할 게 별로 없어서 또한 번 민망했지 만… 하여간… 으~ 두려움을 약간 극복하자마자 오히려 그런 깽판을… 나란 놈은 대체…….
어쨌건, 아침 식사 후 나와 천우신은 해안가에 배를 띄워 놓은 채 잠시 우리의 배를 바라보며 감상에 잠겨야 했다. 우리 배는… 당근, 천우신과 나 둘이서 만들었다. 영약 덕분에 작년부터 이미 한 칼 하게 된 나는 아무리 굵은 나무라도 단칼에 베어 버리고는 ‘또 벨 거 없어? 응? 음핫핫~’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재료 장만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설계도야 몽몽이 있고… 또 시간 이 널널했기 때문에 재료들을 공들여 깎고 다듬어서 뗏목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진짜 완벽한 배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오히려 어려웠던 건 바람을 받을 돛을 만드는 거였는데… 당근 섬에는 천 종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 많지도 않은 연옥도의 짐승들을 거의 멸종시켜야 했다. 난 그래도 우리 시대의 법령(?) 떠올라서 최후의 쌍들만이라도 남겨 두자고 주장했고… 결국 그 공백은 나도 싹 잡아 죽여도 괜찮다고 인식되는(결국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쥐’들로 메꿔지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참 힘들었다. 짐승의 힘줄로 실을 만들고… 그 작은 쥐 가죽들을 모아서 바느질로 연결하던 일들… 우리는 그런 지난 고생을 다시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나름대로 뿌듯한 기분으로 우리의 배에 올랐다. 헌데, 출발하기에 앞서 결론지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자 그럼… 금동아. 어쩔…래?”
우린 먼저 배에 탄 채 금동이의 선택을 기다렸다. ‘우린 강호에 나가니 따라 올래 말래?’라는 문장의 뜻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부터 해변가에 배를 옮겨 놓고 준비를 하는 우리를 보며 이 섬을 떠나려 한다는 것은 감 잡고 있는 듯했 다. 그 증거로… 우리가 배에 올라탔는데도 금동이는 따라 오지 않고 해변에 남아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임마. 우리… 간다구.”
내가 뱃전에 서서 다시 묻자 금동이는 우리와 연옥도… 특히 금동이 일가(?)의 무덤 방향을 번갈아 보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선가 금동이 하나만 남기고 전멸해 버린 원숭이 무리들… 금동이는 그 시신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놓고 있었다. 지금은 뼈만 남아 있는 가족과 고향… 그리고 새로 정을 붙인 우리를 두고 금동이는 정말이지 오래도록 갈등하고 있었다. 우리는 웬지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어서 한동안 말없이 녀석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주인님. 회오리에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작년 데이터에 의하면 앞으로 15분 이내에 출발해야만 때 맞춰 수역을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몽몽의 경고에 따라 나는 서둘러 돛을 감아 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장비는 없어서 내공을 이용해 그냥 힘으로 끌어올린 거지만… 하여간 그런 후 다시 해변가를 보니, 젠장! 금동이 녀석은 매정하게 숲 속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쳇! 따라오는 건 그렇다 치고… 배웅이라도 좀 해줄 것이지.”
천우신이 씁쓸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나는 조금씩 파도를 타고 섬에서 멀어지는 배의 상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후… 하는 수 없지. 여긴 녀석의 고향이고… 또, 우릴 따라간다고 꼭 좋으리라고는…….”
“하핫~! 보게, 녀석이 와! 돌아 온다구!”
천우신이 갑자기 소리를 치는 바람에 나도 다시 연옥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금동이… 천하장사 금동이는 우리가 거처에 놓고 왔던 나무 물통 하나를 머리에 이고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야! 서둘러 임마! 이제 멈출 수 없단 말야!”
내가 고함을 지르자 금동이는 더욱 힘을 낸 듯 순식간에 해변에 도착하더니 이고 온 물통은 우리 배로 던졌다. 무게를 줄여야 해서 꼭 필요한 짐만 실었는데…라는 불만을 토할 겨를은 없었다. 녀석이 던진 물통을 받아 낸 나는 재빨리 내공을 운용해서야 간신히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금동이는 이어 놀라운 경공(?)으로 휘익- 날아 왔고, 녀석은 천우신이 받아 안았다.
“으… 이거, 이거… 술이잖아? 이 자식이 이거 가지러 갔었구나!”
난 얼마 전 새로 담근 금동이의 술을 확인하고 기막힌 목소리를 냈고 천우신은 금동이를 안은 채 특유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바다에 뿌리고 있었다.
“뭐… 좋아. 이제 정말 출발이다!”
나는 배 자체보다도 만들기 힘들었던 돛을 세우며 크게 GO 강호!를 외쳤다. 정말이지 기막히게도 오늘 만 방향이 바뀌는 바람을 안고 배는 힘차게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의 사부가 여전히 있음직한 방향으로 경례를 붙였고 금동이도 옆에서 따라하고 있었다. 결코 더 있고 싶지는 않지만 어쩐지 세월이 흐르면 그리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내게는 군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장소… 연옥도는 그렇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연옥도의 무수한 회오리 수역을 거짓말처럼 간단하게 통과한 우리는 계속 미리 계획했던 해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이 방향… 맞겠지?”
천우신이 조금 불안한 음성으로 묻자 나는 안심하라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흠… 배를 다루는 것으로 보아 익숙치는 않은 것 같은데… 이 막막한 바다 위에서 방향은 놓치지 않는 다니… 자넨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야 물론 몽몽이라는 다용도 특급 로봇이 있어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니 적당히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 거야… 배를 몰아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어쩌다 보니 많이 타 봐서 말야. 게다가 우리 가문은 대대로 여행을 많이 해서 방향 잡는 건 천부적이랄까…….”
유전자에 길 찾기 능력까지 새겨지는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고… 그냥 대충 뻥을 친 거였지만, 천우신은 그 정도로도 납득하는 눈치였다. 뭐랄까… 우리 시대에도 그런 게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시대 중국인들은 특히 집안 내력이라던가, 전통이 유전된다는 개념이 강한 것 같았다.
“뭐, 사부 기록대로라면 이대로 반나절 정도 가면 문제의 해신묘(海神墓)가 나온다니… 그때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을 것 같군.”
해신묘라는 곳은 기록의 묘사대로라면 아마도 연옥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언급했던 것과 비슷한 수역인 모양이었다. 바람 한 점 없어서 배의 돛은 무용지물이 되고, 이유가 뭔지 몰라도 해류의 흐름까지 거의 없어서 이 시대의 무동력 선으로는 아예 움직일 수도 없는 장소 말이다.
“그나저나… 그 녀석 좀 어떻게 해보게, 친구.”
내 말에 천우신이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준, 자네 말도 안 듣는데 내 말이라고 듣겠나, 친구.”
우리의 대화가 자길 두고 그러는 걸 아는 건지 금동이가 끼익~ 끽끽~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항의를 했다. 제 딴엔 고향을 떠나는 것이 서러워 그러는지 어쩐지 몰라도… 그 사이 혼자 술을 푸고 고주망태가 된 금동이는 나나 천우신을 가리지 않고 시비를 걸거나 뭔가 집어던지지를 않나… 나중에는 뱃전에서 꺼이 꺼이 울어대기까지 했다.
“나참~! 그럼 남아 있지 뭐 하러 따라와서… 금동이 너, 자꾸 그러면 바다에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
윽…! 장난스럽게 잔소리를 한 것이 실수였을까…?
우리 금동이는 이미 이 정도 장문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어 히어링 능력이 늘어났던 모양이다. 우리가 말리고 어쩔 틈도 없이 금동이는 정말로 바다로 뛰어 들어버렸던 것이다.
“금동아~!”
천우신이 재빨리 따라 뛰어 들었지만 문제는 오히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그동안 연옥도에서 우리에게 설움을 당하고 있었던 토박이 조폭들… 즉 상어가 떼지어 몰려들고 있었다.
“천우신! 빨리 돌아와! 상어! 상어!”
내 고함 소리에 당황한 천우신이 재빨리 금동이를 끌고 배 쪽으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공포의 삼각 지느러미들이 조금 더 빠를 것 같았다. 아무리 우리가 한다는 고수라 해도 장시간 물속에서 상어 떼와 붙는다는 건 좀……. 나는 황급히 배 안에서 적당한 도구를 찾아보았지만 딱히 쓸 만한 것이 없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돌을 쪼아 만든 촉으로 된 작살이 몇 개 있었지만 그 수에 비해 상어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일단 작살과 밧줄을 챙겨서 다시 뱃전에 돌아왔을 때, 이미 사단은 시작되어 있었다. 천우신과 금동이를 둘러싼 상어들이 일제히 그 한 점에 몰려들어 그 큰 아가리를 탐욕스럽게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어의 공격과 천우신의 장력이 맞물려 수면에 거친 파도와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천우신! 받아!”
나는 밧줄을 던지며 외친 다음, 즉시 몸을 날려 그 난리통 속으로 뛰어들었다.
번쩍!
다급함 때문이었을까? 내 삼시전결은 가상현실에서처럼 네 갈래로 갈라져 상어들을 폭격했다. 나는 마침 수면 가까이 솟아 있던 상어 한 마리의 코끝을 밟은 채 다시 주변의 상어들에게 삼시전결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어 발 밑의 상어에게 내력을 쏟아 부음과 동시에 그 반탄력으로 다시 재빨리 배의 갑판으로 돌아왔다. 내 곡예와도 같은 지원 사격 후, 천우신 역시 내가 던져준 밧줄을 당겨 배로 복귀할 수가 있었다. 나는 천우신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물었다.
“그, 금동이는?”
“머, 먹혔…어.”
천우신의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으로 연옥도에서 보낸 금동이와의 시간이 영화 하이라이트 필름처럼 펼쳐졌다.
“이, 이 새끼들! 전부 죽여 버…….”
연옥도 근해의 상어들을 모조리 패 죽여 버리고 싶다는 분노에 휩싸여 돌아본 내 시선 속으로… 뭔가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나타난 놈들 중 가장 큰놈 같아 보이는 상어 한 마리가 수면 가까이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내 정글도에 베인 것 같지는 않은데… 왠지 몹시도 괴로운 몸짓이었다.
“서, 설마…….”
나와 천우신은 거의 동시에 작살을 하나씩 잡아들고 그 놈을 겨냥했다.
“넌 등! 나는 꼬리! 하나, 둘, 세엣~!”
나와 천우신의 작살은 동시에 쐐앵- 소리를 내며 날아가 각각 상어의 등지느러미 부분과 꼬리 부분에 정확히 꽂혔다. 우리는 내력을 총 동원해 작살에 이어진 밧줄을 끌어당겼고, 잠시 후에는 상어를 배 위로 끌어올릴 수가 있었다. 우리 배는 그리 큰 크기가 아니라서 끌어올릴 때도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지만… 보람은 있었다. 상어의 배 부분이 웬지 꼼지락거린다 했더니 이어 목으로 무언가 밀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불쌍해 보이기 시작한 상어의 아가리를 열고… 귀찮다는 듯 상어 이빨을 밖으로 쳐내며 금동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꺼억~!”
술 냄새 물씬 풍기는 트림 소리… 그게 상어의 뱃속에서 돌아온 금동이의 귀환 인사였다. 금동이는 우리가 자길 구하려고 생난리를 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이 취해 게슴츠레한 눈으로 잠시 상어를 내려다보더니 그 작은 발로 상어의 코끝을 툭! 찼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그런 분위기였다.
얼마 후.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인사불성(?)이 된 상어를 다시 바다에 던져 놓고 다시 정상적인 항해로 돌아간 우리는 얼마간을 말없이 가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우리… 이제껏 금동이 걱정만 했었는데 말야. 저 놈이 가게 되면… 강호의 다른 짐승들이 괜찮을까?”
“그, 글쎄… 본래 전설에는 금모신원이 백수지왕(百獸之王)이라고 하지만… 저 놈은 진짜 금모신원도 아닌데 어째…….”
“그게 더 문제 아닐까? 진짜도 아닌 것이 힘은 동등하거나 그 이상… 게다가 성질도 더럽고 주정뱅이에……”
내가 심각하게 말하자, 천우신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갑판 위에 팔자 편하게 누워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는 금동이를 보았다. 그리고 역시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관리… 잘해야겠어.”
금동이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치르긴 했지만, 그 후로는 별다른 일 없이 항해는 계속되었다. 마치 아까 당한 상어들이 ‘저 배에는 우리보다도 성질 더러운 괴물들이 있어’라고 소문을 퍼트리기라도 한 듯, 바다 괴물들은 고사하고 상어들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흐음… 시간상 얼추 도착하긴 한 것 같은데…….”
몽몽의 계산에 따르면 목표로 했던 수역에 얼추 온 것도 같았는데 아직 특별한 뭔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많이 약해져 있는 바람이 그 징조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 어쩌면 우린 이미 해신묘를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우신은 얼마 전부터 우리 앞에 등장했던 안개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가도 안개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건… 안개가 우리의 접근과 같은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배가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사방에 앞뒤를 구분할 수도 없이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는 죽음의 수역… 그 수역이 1년에 한 번, 바로 오늘 하루만 부는 바람에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더욱 신중해야겠군. 해신묘에는 암초도 많다니… 음, 지금부터는 내가 선두에서 앞을 살피겠어.”
“음, 그럼 수고 좀 해줘.”
사실 몽몽의 스캔 기능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미안해, 친구.
“아, 저것 좀 보게.”
천우신이 별안간 놀라서 외쳤고,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물안개가 걷혀가며 예의 유령선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나쳐 가며 보니 적어도 수십 년은 거기 짱 박혀 있었던 듯 배 꼴이 말이 아니었고, 갑판 위에는 해골 몇 구가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를 가자 비슷한 꼴의 배들이 하나 둘 더 발견되기 시작했다. 흠… 연옥도를 찾아 나선 자들이었는지, 그저 운 나쁜 어부들이었는지 몰라도 과연 무덤이라고 해도 좋을 풍경이었다.
“흠… 저 배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 생존자라도 있을지 한 번 가보… 응?”
천우신은 갑자기 말을 잃었고, 나 역시 바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새로 등장한 배는 우리가 탄 배의 열 배는 됨직한 대형 배였는데 갑판 위에는 멀쩡한 인간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난 저 배에 접근해 접촉을 해 봐야 할지 어떨지 망설였지만, 천우신은 이미 감격에 찬 음성으로 낮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천노(天老), 지노(地老)… 당신들……!”
천우신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그래! 그래야지! 천하의 천이단이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찾아와 줘야지! 하하하핫~!”
천우신은 계속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고, 나는 물어 볼 것도 없이 키를 그쪽으로 잡기 시작했다.
얼마 후. 우리는 천이단의 배에 올라타 그들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노복들이 암천주(暗天主)의 무사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천우신이 천노, 지노라고 불렀던 두 명의 노인네가 먼저 고개를 숙였고, 이어 수십 명의 천이단 제자들이 갑판 위에 엎드려 몸을 조아렸다.
“후후~ 당신들의 그 쭈그러진 얼굴들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야.”
천우신의 싸가지 없는(?) 인사에 천노, 백의(白衣)에 매우 인자한 표정인 노인이 빙글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핫-! 여전하시군요, 도련님. 저희는 그동안 끼니도 거를 만큼 도련님을 걱정했건만… 오히려 안색이 더 좋아지신 듯합니다.”
“흐음… 설마 지노도 끼니를 걸렀다는 건 아니겠지?”
천우신의 미심쩍어 하는 표정에 화려한 장식의 홍의(紅衣)를 입고 있는… 최소한 백 킬로 이상은 나갈 듯한 매우 비대한 몸집의 지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도련님 덕분에 이 늙은이… 살이 자그마치 한 근이나 빠졌다오.”
지노의 말에 천우신은 다시 껄껄대고 웃었다.
“그런 줄 알았다면 한 몇 년 더 숨어 있다 나올 걸 그랬군. 그랬다면 지노의 몸매가 더 볼만해졌을 텐데 말야. 하하~!”
“크음… 제 살이 이 이상 빠지면 매력이 없어질 터…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표현은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었지만 매우 화기애애한 재회 분위기였다. 전에 잠깐 들은 것처럼 이 두 노인네가 바로 천이단의 양대 산맥이며 천우신을 어렸을 때부터 키운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본명은 따로 있는 데 천우신이 그냥 천노, 지노로 줄여 부르는 것 같고… 그리고 이 노인네들 말고도 천이단의 실세는 몇 명 더 있다는데, 천우신은 아직 나에게도 그게 몇 명인지 어떤 사람들인지는 밝힌 바가 없었다.
“아참, 소개가 늦었군. 이 친구가 바로 문제의 진유준 하사일세.”
“아, 역시… 이 분이 바로 그 비화곡주의…….”
천지 두 노인네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상체를 숙였지만, 난 그냥 가벼운 포권으로 답례했다. 속으로는 약간 찔렸지만, 두 노인네의 개의치 않는 표정을 보니 다행히 내 신분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자기들의 주인과 친구여서 그런 걸까?
“강호에서는 마중제일녀 마봉낭자 대교 아가씨가 생사금마도결의 유일한 전승자라고 알겠지만… 실은 이 친구야말로, 정식으로 연옥서생으로부터 생사금마도결을 전해 받은 후계자라고 할 수 있지.”
천우신의 약간(?) 왜곡된 소개에 두 노인들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스쳤다.
“과연… 그러셨군요. 하긴, 마봉낭자의 수라진경(修羅眞經)은 본시 생사금마도결에 적합한 게 아니니…….”
척 보기에도 유식해 보이는 천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새삼 우리의 행색을 살폈다.
“그, 그럼… 두 분은 그 연옥도를 발견하셨던 겁니까?”
“후후… 아니면 우리가 이제껏 어디서 살다 왔겠어.”
천노와 지노는 오오~ 하는 감탄 소리를 내며 서로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그러나 약 2초 후(?) 흥분이 가라앉자 갑자기 안색을 싹 바꾸며 동시에 서로 상대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나참…! 또 뭔가로 다툰 거야, 두 사람? 자그마치 80년이나 친구로 지내면서 그렇게 툭하면 서로 삐치기나 하고… 우릴 보라구, 우릴.”
천우신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팔을 둘러 어깨동무를 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냉냉한 표정으로 천우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뉘-신지요?”
“윽! 이 친구, 하필 이럴 때…….”
우리의 다소 썰렁한 장난을 지켜보던 천노와 지노가 새삼 흐뭇한 표정으로 내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희들의 하늘을 되찾아 주신 데 대한 감사를 아직 드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얼결에 인사를 받았지만 천우신은 옆에서 불만스러운 음성으로 투덜댔다.
“뭐야아~ 내가 뭐, 순전히 이 친구 덕분에 살아 돌아온 줄 알아?”
“흠… 맞네. 우리의 생환은 모두 자네 덕분이지. 난 손끝하나 까닥하지 않았지. 고맙네, 친구!”
나는 열렬히 감사하는 표정으로 천우신의 손을 잡았고, 그것도 모자라 녀석을 뜨겁게(?) 포옹하며 ‘자네가 최고야. 내 은인이여~’를 연발했다.
“으… 못 당하겠군.”
결국 항복을 선언하는 천우신의 표정을 보며 천노와 지노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도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상당히 오버해서 장난을 친 것도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꽤나 기분 좋게 천이단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일주일 정도 그 해역에 갇혀 있었다는 천이단의 배는 마치 우리가 몰고 오기라도 한 듯 처음으로 불어온 바람을 타고 차츰 해신묘 지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해신묘를 벗어났다고 여겨질 때까지 갑판에 남아 있다가 결국에는 일단 선실에 들어가 잠시 쉬기로 했다. 아까 깨어나기는 했는데 숙취 때문에 칭얼대고 있는 금동이를 보살핀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다른 속셈이 있었다. 나는 금동이를 침상에 눕히고 나도 그 옆에 눕자마자 중얼거렸다.
“몽몽… 도청, 부탁해.”
역시 그래서 그런가 싶게 다소 먼 선실을 배정해 주어서 내 발달한 청력으로도 갑판 위의 대화는 들을 수가 없었지만, 몽몽이라면 이 배 어느 장소도 도청이 가능했다. 천우신은… 기본적으로 사교적이고 붙임성 좋은 성격인 건 확실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과 사가 뚜렷한 성격이라 모든 정보를 무상 제공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엿들어 줄 수밖에.
“…그러니까… 이제 연옥도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씀이로군요.”
“그래.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아닙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이 남아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강호에 적잖은 혼란이 생길 터… 잘하셨습니다.”
천노…로군.
“그리고… 용케 참으셨습니다. 도련님이 실은 무공에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제 정말 천이단의 주인… 암천주의 풍모가 갖추어진 느낌입니다.”
“쯧~! 전에는 아니었단 말이지?”
지노의 말에 장난스럽게 반응한 천우신은 곧 말을 이었다.
“솔직히, 참기 힘들었어. 후후… 천하의 누구라도 연옥서생의 비서를 앞에 두고서야 참기가 어려웠겠지. 하지만… 난 덕분에 좋은 걸 깨닫게 되었어.”
도청되는 거라 그런지 감정까지는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천우신의 음성에 뭔가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암천주의 의무, 그 중에서도 ‘지나치게 강한 힘을 경계하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아무리 과거 우리 천이단이 지나치게 강해진 암천주 때문에 힘든 세월을 보낸 바 있다고 하지만 말야.”
흠… 그랬었나? 역대 천이단주 중에서 엄청난 고수가 되어 뭔가 깽판을 친 사람이 있었다는 건가?
“사실… 지금도 그 때문에 암천주들이 대대로 무조건 너무 강해지지 말라는 개념에는 찬성하기가 어렵군.”
“도련님. 누차 말씀 드리지만… 인간이 강하다는 건 무공의 강력함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후후… 알아, 안다구. 그리고 난 이번에 깨달았지. 세상에는 적어도… 내 무공이 강해지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있다는 걸 알았어.”
나는 마치 천우신이 바로 내 앞에서 내게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가… 강해지는 걸 지켜보는 것 말야.”
…아, 쓰바… 이 자식이 갑자기 감동 어택을… 으… 도청하기 미안하게 스리…….
“하하하- 요 일 년의 행방불명이 도련님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나 봅니다.”
천노와 지노의 흐뭇해하는 기색이 한 동안 이어졌다. 나는… 갈등 끝에 결국 몽몽표 도청기를 끄고 말았다.
“젠장… 저 자식, 어떻게 알았지? 난 그런 공격이 쥐약이라는 걸……?”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잠시 쥐약 맛(?)에 취해 음미하고 있었다. 제기… 이 시대를 떠날 때 아쉬울 요소가 하나 더 늘은 것을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나는 얼마가 지난 후에야 일단 선실로 오기 전에 들었던, 그 동안의 기본적인 강호 정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사라진 후… 일단 다행인 것은 대교 자매들이 모두 무사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천우신을 바다에 흘리고(?) 난 다음에도 어찌어찌 무사히 강호로 돌아간 대교 자매와 다른 병력들은 그 후 일단 모두 잠적해 버린 모양이었다. 뭐… 애초의 내 의도대로 강호 상에는 전원이 고룡포의 무인도에서 극악하사(?) 진유준의 손에 의해 불타 전멸했다고 소문이 나 있다는데… 역시 천이단은 진상을 대충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최소한 모두 무사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건데… 음… 근데 역시 더 구체적인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기 전에 천지인지 천치인지 그 두 노인네가 천이단의 최고 간부들답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구체적인 정보를 막 흘릴 수 없다는 눈치를 보이는 바람에 내가 스스로 선실에 들어온 거였다. 음… 제기, 역시 이게 아닌 것 같지……?
“몽몽, 도청 재개!”
서로 신뢰하는 우정도 좋지만… 역시 실익이 최고지, 암. 게다가 생각해 보니 아까 내가 자리를 피해 준다고 하니까, 천우신도 말리지 않았었다. 짜식… 친구 사이에 치사하게 말야!
“오~! 내 검도 챙겨 왔던 거요, 천노?”
“하하~ 그간 녹슬지나 않았는지 한 번 뽑아 보시죠.”
“후후-! 내 암천검(暗天劍)을 너무 모독하는 건 아니요, 지노?”
자기 보검을 다시 찾은 천우신이 검을 뽑아 공연히 휘둘러보는 기색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늦은 모양이다. 으으~ 괜히 감정에 치우쳐 중요 정보 확보의 기회를 스스로 버리다니…
“으으~ 바보, 바보, 바보오~!”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한 내게 몽몽이 차분하게 말했다.
[ 모두 녹음해 두었습니다. 재생해서 청취하시겠습니까? ]
나는 쥐어뜯던 손을 멈추고 잠시 굳어졌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몽몽… 흑~ 너 밖에 없다.”
[ 홍홍~ 그죠? 그죠? ]
“…언제부터 니 웃음소리가 그렇게 굳어 졌는지 모르겠다만… 암튼 땡스 닷, 요정몽!”
[ 흐응… 주인님이야말로 언제부터인가 제 코드명을 바꿔 부르시네요? ]
“아, 그건… 글쎄, 어째 슬슬 네 기본형과 널 완전히 구분하고 싶어져서 말야. 그렇다고 지금까지 부르던 습관이 있는데 아예 새로 만들긴 좀 그래서… 이상해? 요정몽?”
[ 흐으응~ 웬지 좀 그렇지만… 뭐, 마음대로 하세요. ]
요정몽의 개명 확정 후, 나는 녀석이 다시 틀어주는 도청 내용을 다시 천천히 들어보기 시작했다. 과연… 천이단은 그 명성에 걸맞게 잘도 비화곡의 현재 정세와 대교 자매들의 행적까지 줄줄이 꽤 차고 있었다. 기본적인 것만 정리해 보면… 예상대로 반 년 정도 전에 대천마는 비화곡을 정식으로 접수, 새로운 곡주로 등극했다고 하고, 반대파였던 혈신 장로와 그 파벌의 장로들은 끝까지 개겼는지, 모두 누명을 쓰고 투옥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걱정했던 야후 장로와 그 일가는 다행히 비화곡으로 복귀하지 않고 반 대천마 세력의 주축이 되어 있다고 했다. 뭐… 비록 대천마가 정식으로 곡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전임 곡주인 독각와룡 진하운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루머… 그리고 본래 대천마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던 세력들이 많아서 전 강호의 사마외도가 양분되어 갈수록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혈신 장로 일파를 존경하는 자들의 세력도 결코 적지 않고… 음… 이 상황에서 내가 다시 등장한다고 해서 얼마나 변화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서로 치고 받고 개판 친 다음에 이미 별로 남은 사람도 없는 황량한 상태가 되어있으면 어쩌나… 그런 걱정도 했었던 것이다.
근데, 대교 자매들 같은 경우… 얘들의 현재 상황이 더 문제였다. 그 동안은 계획대로 묘강에 짱 박혀 있었던 모양인데… 이 녀석들이 역시 반년쯤 전에 비밀리에 강호로 돌아왔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헌데 어이없게도… 이 녀석들이 현재 소위 ‘화류계’에 진출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상태가 된 녀석들이니 뭔가 위장 신분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기녀가 되어 있으리라곤…! 설마 대교가 사랑하는 남자가 죽었다고 막 나가기로 한 건… 아닐 거라 믿지만… 그래도 역시 상당히 찝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천우신도 흥분하여 그 상황을 거듭 묻는 바람에 다른 얘기보다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는데, 아마 비화곡에 대항하기 위한 자금 확보와 정보 수집… 뭐 그런 것들 위해 택한 길인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발상 자체가 아무래도 저 귀여웠다 얄미웠다 헷갈리는 진하연 녀석이 시킨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중원의 비화곡과 일전을 겨루기 위해 얼마 전 묘강의 공주 신분에서 정식으로 물러났다고 하니 뭐든 아쉬운 상황일 건 이해하겠는데… 진하연… 이 못된 여동생 같으니라구! 뭔가 필요하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삼태자 조명환도 있건만 그 좋은 혼처 놔두고 왜 대교 자매들을 업소에 내보냈는지… 하여간 이 녀석, 만나기만 해봐라!
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누구도 그 기루의 간판 스타인 자매들을 차지했다고 알려진 놈은 없었던 모양이다. 결정적으로, 자신들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방어 법을 쓰고 있다는데… 그 시험이란 게 무지 어렵다나? 어쨌거나… 막내 미령이 녀석, 가명이 뭐 묘미미(猫 迷美)…? 지노의 표현대로라면, 고양이처럼 애교 많고 귀여우면서도 제멋대로의 성품을 지닌 미녀로 알려져 있으며 남자들이 묘미미의 비위를 맞춰 주지 못해 오히려 학대(?)를 당하면서도 녀석의 옷깃 한 번 만져보기 위해 전 재산을 바치기 일쑤라나…? 제기… 전에 걱정했던 것처럼 내 공백기 동안 끝내 진하연의 수제가 되어 남자 홀리는 비법을 터득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 것도 본래의 성격을 극대화하여 작은 여왕님(?) 분위기…
소령이 같은 경우는… 제기, 그보다…! 아무리 친해도 공과 사를 구분하겠다는 건 인정한다. 아무리 그래도 천우신, 이 자식…! 지가 좋아하는 소령이도 그렇지만, 내가 대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 그 정보까지 팔아먹겠다는 거야, 뭐야?
[ 불쾌하신 기분은 알겠지만, 주인님 역시 소령님에 관한 정보로 천우신님에게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았던가요? ]
“몽몽… 너, 그거 알아?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야, 불륜!”
[ 웅~ 웬지 알 수 없는 이론이네요. ]
“어쨌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도청만 할 수는 없고… 연옥도에서 가져온 진주 보따리를 몽땅 털어서 고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진주의 소유권도 반은 천우신 꺼니까… 제기, 역시 뭔가 다른 수를 내야 할 텐데…….”
나는 약간 흥분해 버려서 몽몽이 내 행동 패턴을 습득하거나 말거나 열심히 사악한(?) 음모를 연구해 보았다. 물론… 쉽게 떠오를 리는 없었다. 천우신 하나라면 몰라도 천이단이 그 혼자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제기, 간만에 담배 땡기는 군. 음…? 담배…? 아, 맞다. 연옥도를 탈출하게 되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지? 나는 엄한 상황에서 잊고 있던 것을 깨닫고 자리에 서 벌떡 일어섰다. 후… 그 오랜 세월 동안 툭하면 뒷골을 간지럽히던 흡연에의 욕구… 난 그걸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 왔다. 더블 백 속에 있던 비닐로 포장해 놓은 진짜 군용 팔팔 한 가치를 지금까지 아끼고 아끼며 가지고 있었던 건… 연옥도를 탈출하게 되는 그 순간에 기념으로 꼬시르며 기쁨을 배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일단 생각이 나니까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선실을 나와 갑판으로 나왔다.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진미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침을 질질 흘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무지 흥분된 마음으로,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비닐을 뜯어 이 시대 최후의 군용 팔팔을 꺼내 입에 물었다. 바닷바람 때문에 불붙이기가 좀 어려웠지만 간신히 불을 붙인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한 모금을 빨아 들였다.
“어이~ 유준!”
뒤에서 갑자기 천우신이 부르는 바람에 나는 별 생각 없이 몸을 돌렸고, 그 순간 눈앞으로 뭔가 번쩍하고 스쳐 갔다. 실은 날 부를 때부터 천우신이 간만에 잡은 자기 검으로 장난을 치려고 든다는 것을 눈치 깠기에 나는 태연히 피식 웃어 주었다. 천우신은 마주 웃으며 자신의 검을 들어 보였다.
“후후… 역시 눈도 깜짝하지 않는 군. 어떤가, 내 암천검일세. 자네의 정굴도 보다야 못하겠지만, 제법 날카롭다네.”
“음… 얼핏 봐도 대단한 보검인…….”
나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뭔가를 깨닫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하~ 역시 보는 눈이 있군. 이 검이 실은… 응? 왜 그러나, 유준. 아… 내 검에 자네의 연초가 잘려 나갔군, 그래. 후후… 걱정 말게 지노가 천하에서 가장 질 좋은 연초를 준비해 왔다니 그걸 피우세. 응? 왜, 왜 그러나, 유준. 응?”
“내, 내… 내… 도, 돗대… 돗대가… 돗대가… 돗대가 아~”
나는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서 더 이상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우정이고 나발이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 사라져 가고 있었다.
“유, 유준. 그거, 많이 귀한… 연초였나? 아,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흥분할 것까지는… 어, 어?”
“내 돗대를~!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포효하며 정글도를 뽑아 들었고, 당황하여 주춤주춤 물러서는 천우신에게 미친놈처럼 달려들었다.
“죽어어어엇~!”
이성을 잃은 내 분노의 절규가 넓고 넓은 바다 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