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7-2화 : 교아 자매 쟁탈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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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27-2화 : 교아 자매 쟁탈전.(2)


우리 시대 야전놀이의 명작이랄 수 있는 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당근, 내가 원판이었을 때 자매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이런저런 잡담 끝에 화제가 어렸을 적엔 뭐하고 놀았나라는 것으로 옮겨졌을 때 내 입에서 나온 여러 놀이들… 그걸 걔들은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쓰임새는 좀 이상해졌지만 말이다. 게다가 본래 이 놀이는 끝까지 걸리지 않고 술래에게 접근한 사람이 그 때까지 걸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규칙이 있지만 ‘미령이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그 부분이 없다. 술래에게 걸리지 않고 접근에 성공한 이가 술래를 터치하면 ‘합격’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니… 안 그래도 고도의 집중력과 순발력, 인내력 등이 필요한 놀이가 단판 승부라는 매우 가혹한 시합이 되어버린 셈이다.

“무궁와 꼬치 피었습니다!”

패액! 이번엔 모두 무사.

“무~궁~와 꼬치폈습니다!”

팩! 두 명 추가 탈락. 앞부분의 의도적인 늘임과 뒷말의 빠른 마무리라는 완급 테크닉에 당한 셈이다.

“무궁와 꼬치폈습니다!”

패액! 이번엔 전원 무사. 다들 몸을 사리고 한 두 발짝밖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관중들 쪽에서 우우~하는 야유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치 없는… 아니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무궁와 꼬치폈습니다!”

스으-패액! 전원 무사…? 일단은 그런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돌아보는 속도의 완급에 당황한 두 명 정도가 무리해서 동작을 멈추느라 매우 괴이한 자세가 되어 있었다.

“와아- 멋져요.”

미령이는 공연히 두 손을 모아 입가에 가져가며 감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후… 저는 이렇게 침착하고 인내심 많은 분들이 정말 좋아요.”

이건 감탄도 칭찬도 아니다. 공연히 시간을 끌어서 불편한 자세로 굳어있는 사람들을 압박하는 사악한 짓인 것이다. 특히 후다닥 달려가려던 자세 그대로 한 쪽 발로만 서있게 된 사내의 목 뒤로 땀방울이 조르륵 흐르고 있었다.

< …유준. 이런 건 반칙… 이라고 하지 않았나? >

< 본래는 그런데…… >

우리가 어렸을 때 하던 놀이들이 다 그렇듯,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술래가 시간을 끄는 행위에 대한 제재는 순전히 술래의 양심(?)과 다른 애들이 용인하는 정도… 즉, 매우 주관적인 기준밖에 없었다. 동네 애들과 놀이 중이었다면 당장에 술래에게 ‘야, 빨리 안 해?’ ‘비겁해.’ ‘죽을래? 무효야 무효!’ 이런 소리들이 난무하며 술래를 왕따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이 ‘미령이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말 그대로 녀석 입맛대로인 것 같았다.

“오늘은 그럼… 무광 꼬치폈슴다!”

패액! 허억-! 이번에는 나아 천우신도 당할 뻔했다. 뭔가 중얼거리며 자연스럽게 등을 돌리다가 느닷없는 기습을 해온 것이다. 젠장… 한국어를 압축(?)하는 건 가르쳐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잘도 한다.

“꺄아~ 잡았다! 잡았다!”

미령이는 허무하게 걸려버린 사내들 세 명을 손으로 가리키며 어린애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이번에 걸린 사내들은 상당히 분한 표정이었지만 미령이 편을 들어 연호하는 관중들의 분위기에 눌려 결국 별 항의도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지들은 참가 못하고 있다는 질투 때문인지, 우리 편인 관중은 없어 보였으며 심지어 어떤 빌어먹을 놈은 날 가리키며 “움직였다, 움직였어.”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이 후로는 몇 번 더 미령이 식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울려 퍼졌음에도 탈락자는 없었다. 다들 몸을 사리느라 아주 찔끔찔끔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아아~ 시시해라. 다들 이 묘미미에게 빨리 오고 싶지 않은 가봐.”

미령이가 아까의 말을 싹 뒤집고 칭얼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관중들에게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사내답지 못하다느니, 이러다 날 새겠다느니… 쳇! 저것들을 금동이 시켜서 손 좀 봐줘 말어?

“무~궁와- 고치이~ 피었습~니다아.”

스으윽! 시위하듯 느릿느릿 구호를 외치고 돌아보는 동작도 느긋~! 그런 미령이의 도발에 유일하게 반응하여 후다닥 달려나간 것은 남아있는 사내들 중 가장 날렵해 보이던 회의 사내였다.

“흐응~ 이제 보니 이 분만이 용기 있는 분이었군요.”

미령이는 유일하게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회의 사내에게 살짝 윙크를 해보이더니 그 뒤로 십여 미터 정도 떨어져 사이좋게 모여있는 우리 쪽에는 인상을 쓰며 혓바닥을 날름해 보였다. 회의 사내에게 쏟아지는 응원의 소리와 우리에게 쏟아지는 야유… 그러나 그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무광꽃폈슴다!”

팩! 궁극의 발음 압축 술과 초신속 고개 돌림! 그에 못지않게 빠른 회의 사내의 손길! 미령이의 시선이 회의 사내에게 향한 것과 회의 사내의 손바닥이 미령이의 어깨에 올려진 순간은 거의 동시에였다. 미령이와 회의 사내에게 집중하고 있던 관중들 위로 잠시 정막이 흘렀다. 대부분의 관중들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미령이 조차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미령이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려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아… 어느새!”

다소 멍한 목소리를 흘리는 미령이에게 천우신은 예의 바른 태도로, 나는 조금 거만한 자세로 그녀의 머리핀 겸 장식 핀을 내밀었다. 뒤늦게 관중들의 탄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우리가 뛰쳐나가는 순간이나 미령이의 머리 위를 스쳐 날며 머리 장식을 손에 넣는 순간을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저 안쪽 건물 창가에서 어른거리는 몇몇 인물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훗~! 이제 보니 두 분은 절정의 내력을 지닌 강호의 고수였군요. 그 장식은 두 분이 가지세요.”

미령이는 웃음기 있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돌아서는 순간의 얄궂은 표정으로 보아 아무래도 속으로는 기습을 당한 것에 심통이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애써 합격한 우리들 엿먹이려는 듯, 이후 매우 성의 없게 시합을 진행하더니만 결국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사람들까지 모두 합격시켜 버린다.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니오. 묘미미(猫迷美) 아가씨……!”

내가 노골적으로 찔러보자, 우리의 묘미미 미령 아가씨는 흥-! 하는 콧바람 소리와 함께 몸을 돌려 안쪽 건물로 들어가 버린다. 참내… 저런 제멋대로의 녀석이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지 모르겠다. 얼씨구, 관중들은 물론이고 우리 덕에 합격한 다른 참가자 녀석들까지 모두 날 노려보고 있군. 다른 때 같으면 다음 시합까지 참관하고 있을 미령이가 벌써 들어간 것이 꽤나 섭섭한 모양이다. 물론 천우신 같은 경우는 미령이가 사라진 건물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가 저 놈들과 다르겠지만 말이야.

< …두 번째 시합에서는 그녀가 나오겠지? >

< 종목에 따라 직접 시합에 참가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참관 정도는 하겠지 뭐. >

< 음… 다음 시합은 뭐가 될 것 같은가. >

< 글쎄에~? 내 의제가 자매들에게 전수한 게… 종류가 좀 많잖은가. >

천이단의 정보에 따르면 소령이와 미령이는 예전에 내가 가르쳐준 여러 ‘놀이’들을 모두 시합화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실시되었다는 놀이인지 시합인지는 구슬치기, 오징어, 자치기, 비석치기(망까기?), 알까기, 공기놀이 등등… 전부 우리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웃기부터 할 놀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구슬치기로 상대방 구슬을 따먹을 수 있다고 할 때 구슬이 옥으로 된 구슬이나 진주라면…? 알까기 하는 데 알이 황금 알이라면…? 혹은 오징어나 자치기 한 판에 걸린 판돈이 수 억 원이라면…? 그래도 애들 놀이라고 웃을 수 있을까?

< 어떤 것이 채택될지 모르지만, 뭐… 오는 동안 자네에게 알려준 종목 중의 하나일 거야. >

< 일단 기억하고 있긴 하네만… 휴우- 그 모든 걸 꿰어 차고 있는 자네가 있어 정말 든든하네. >

< 가급적 나도 같이 이기면 좋겠지만 만약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자네만이라도 올려보낼 테니 자네는 세 번째 단계에서 소령이를 이길 걱정이나 해 두게. >

천우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자신만만한 전음을 보내기는 했지만 사실 나도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조금 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가장 먼저 자력으로 합격하면서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었던 회의 사내. 그는 무공이 꽤 높은데다 판단력이 좋아 모든 종목에 강할 것 같다. 처음부터 계속 손에 쇠 구슬 두 개를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콧수염 사내는 아무래도 구슬치기에 강할 듯싶고… 여하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할 때의 상황을 보면 다른 경쟁자들도 이미 실시되었던 시합은 그 내용을 숙지하여 대비해 온 것 같았다. 만약 저들 중에 골목길 놀이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유한… 소위 동네 지존이 있을 경우에는 우리가 X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아, 셋째 설랑(雪琅. 소령이 예명)이다.”

누군가가 외침이 있자, 다시 군중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 봄날 만개한 개나리처럼 화사한 황의(黃衣)의 소령이가 사람들의 호의에 찬 환호 속에 걸어오고 있었다. 일견 크게 변한 구석이 없어 보이던 미령이에 비해 소령이는 그 사이 부쩍 성장한 모습이었다. 키나 몸매는 물론이고 얼굴 윤곽도 한층 더 여자다워져서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훗-!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 큰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불편해하는 표정을 보니 소령이가 맞는 것 같군. 미령이와 달리 매니저 분위기의 여자가 옆에 따라 붙어있는 것도 녀석의 수줍은 성격 때문일 것 같은데… 근데 뭐야. 저 여자는… 그러니까, 에… 그러니까…

[ 혈의문(血衣門) 살수(殺手) ‘홍초명’입니다, 주인님. ]

그래, 나도 기억났다. 저 잊을 수 없는 ‘꽃이 피는 순간 지는 장소’에서 나와 맞짱을 떴던 바로 그 여자였다. 성승(聖僧)이자 혈의문(血衣門)의 주인이었던 그 노친네의 수하로써 날 죽이려고 했던 여자 살수… 결국 내 어깨에 조올라 아프게 칼침을 놨던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내청(內廳)의 홍초명, 여러 대인들께 인사드립니다.”

소령이만은 못해도 어디가서 그리 빠지지는 않을 미모의 홍초명은 인사가 끝나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참가자들, 특히 조금 전 인상 깊은 플레이를 펼쳤던 나와 천우신을 살폈다. 나한테 썼던 가명을 그대로 쓰다니 혹시 그게 본명이었나? 어쨌건 살수계 은퇴하고 화류계 진출…은 아니겠고…

< 이봐, 우신. >

< …그래. 더 아름다워졌군. 소령 아가씨는…… >

< 야! 천우신! 정신 안 차릴래? >

< 응? 아… 미, 미안하네. 방금 뭐라고 했나, 친구. >

쯧~ 아주 넋이 나갔구먼.

< 우리가 연옥도에 있는 동안, 전 혈의문 살수(殺手) 사영이 결국 혈의문을 접수했다고 했었지? >

어제의 웬수가 지금은 친구? 뭐, 그 정도는 아니어도 동료 정도는 된 셈이다.

< 소령 아가씨의 아버지 말이로군. 음… 그렇다는 소문은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야. 그 사람이나 혈의문 정도의 행적은 1급 정보라 기본 활동으로는 알기가 어렵지. …아, 설마 그 사람이 여기 나타난 건가? >

< 아니,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그래. >

< 후후… 하긴 그 사람은 자네에게도… 아, 저건 대체 뭘 준비하는 건가. 다른 자들이 당황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으로 실시되는 시합인가 보네. >

천우신이 가리킨 곳을 보니, 교아루의 점원들이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몇 개나 들고 와서는 그 내용물을 소령이 앞에다 쏟아 놓고 있었다. 에…? 저건 고운 모래와 흙, 거기다 돌멩이들……?

< 아, 저건… 저건 설마… 그… 그…… >

내 전음이 심상치 않자, 천우신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 유준… 설마 자네도 모른다는 건가? >

< …몰라. 아니, 알아. >

< 대, 대체 무슨 말인가? >

< 걱정하지 말게, 친구. 어찌되었건 저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시합이야. >

천우신은 내 호언 장담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다시 소령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령이는 좀 전까진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스러워하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미령이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좋아하는 것처럼 소령이는 저 놀이에 꽤나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우리 시대의 누구든… 적어도 흙바닥이나 모래밭에 앉아 놀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아는 놀이가 있다. 지금 저 소령이처럼 자신 앞의 흙과 모래를 끌어 모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리고 그 한 가운데에 나무 막대기 같은 걸 푹 꼽아 넣는 것만으로 놀이 준비는 끝이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번갈아 가면서 막대기 주변의 흙과 모래를 손으로 퍼낸다. 주변을 지탱하는 흙과 모래가 차츰 사라져 가면 당연히 막대기는 위태로운 상황이 되어가고… 그러다가 누구든 자기 차례에 흙과 모래를 뺏을 때 그 막대기가 쓰러져 버리면 그 사람이 바로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심플한 방식에 도박성도 있긴 하지만, 보기보다 상당한 집중력과 판단력도 필요한 이… 이 놀이… 제기, 내가 좀 전에 천우신에게 이상한 답변을 한 건 나도 이 놀이의 명칭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난 어렸을 때 하던 놀이들도 명칭을 다 기억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건 기억이 안 났다. 그냥 ‘모래 탑 놀이’? 설마 ‘막대기 늦게 쓰러트리기’는 아닐 것 같고… 분명히 무지 자주 ‘얘들아 우리 %#^&@하고 놀자…라고 한 것 같은데, 통 %#^&@ 부분이 생각 안 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이 먹고도 가끔 그게 괜히 궁금하고 갑갑할 때가 있다.

“잠깐!”

응…? 아까의 회의 사내가 왜 소령이에게 태클을 걸 기세로 나서지?

“본좌는 강남의 ‘부평자’라 하오. 난 오늘 처음으로 이 대회에 참가한 사람이오.”

부평자라면 풍신수(風身受)라는 명호를 가진… 특히 경공으로 제법 이름이 높은 자다.

“커험…! 내 오늘 보니 과연 아가씨들이 다 경국지색으로 명불허전이요! 헌데… 이 대회는 대체 왜 이런 거요? 미인을 차지하고자 하는 대회라면 각자의 특기를 겨루어 우열을 가려야지, 이런 흙장난을 해서 무얼 보자는 것이오.”

이봐, 이봐. 불만이 있는 건 알겠지만 하필 지금 나서면……

“풍신수 부공자! 나 좀 봅시다!”

우리 천우신 공자께서 출동한단 말이다.

“헉-!”

풍신수 부평자가 대경실색한 것은 십여 미터나 떨어져 있던 천우신이 순식간에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수법때문이었다.

“무, 무탄력(無彈力)으로 이렇게 빠른… 귀, 귀하는 대체 누구시오?”

“그저 별 볼일 없는 무명소졸이오. 소, 아니 백랑 아가씨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와 한 번 재주를 겨뤄 보겠소?”

“아, 아니… 저, 그게……”

사실 크게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공연히 깨갱 신세가 된 풍신수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소령이였다. 마냥 어린애도 아닌 나이가 되었음에도 웬일인지 흙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소령이는 흙투성이의 손을 맞잡아 꼼지락대면서 힘없이 입을 열었다.

“저어~ 전 이게 가장 재미있던데… 공자님들께서 싫으시다면… 다른 걸로… 할까요?”

정말 싫다고 하면 울어버릴 거야…까지는 아니더라면 꽤나 안쓰러운 표정이 된 소령이의 표정이 모두의 심금을 울린 모양이었다. 처음엔 풍신수에게 동조하는 분위기였던 다른 참가자들까지 안면을 싹 바꾸더니 입을 모아 풍신수를 성토에 바빴다. 관중들 반응은 돌아볼 필요도 없고… 하여간 여기에 고전적인 표현을 쓰자면, 약한 자여 그대들 이름은 남자니라~(맞나?)

“저 홍초명이 한 말씀 덧붙이자면, 저희 아가씨들이 무력이 높은 남자만을 원했다면 어찌 이런 대회를 준비했겠습니까. 무공의 높고 낮음, 용모의 미추(美醜), 박식함 등은 누구나 사정에 따라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법. 아가씨들은 그런 것보다 여러분들의 보다 근본적인 면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의도는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정작 돈 갖다 바치는 당사자들이 불만 없다면 된 거지 뭐.

“후후~ 더구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합이 막상 해 보시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음… 그건 맞는 말이다. 이 모래 탑…(대체 진짜 명칭이 뭐야?) 하여간 이 놀이를 할 때 궁극의 옵션은 돌멩이들이다.

흙을 끌어낼 때 흙 속에 박혀있는 돌맹이가 손끝에 걸리면 그게 막대기를 지탱하고 있는 건지 어쩐 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몽몽. 이제 니가 활약할 때다. 흙 속을 스캔하여 내부 상황을 내 망막에 투영해. 또한 막대기에 가해지는 힘의 역학관계를 실시간으로 계산하여 중계하는 거다. >

[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

흐흐… 다른 녀석들에게는 좀 미안하군.

더구나 좀 전에 풍신수가 나섰을 때의 분위기로 보아 다들 이 시합만은 처음인 모양인데 말이다.

“이 시합은 서너 명 정도만 함께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께서 먼저 저희 아가씨께 도전하시겠습니까.”

나는 홍초명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천우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불쑥 앞으로 나섰다.

“나와 이 친구가 먼저 도전해 보겠소.”

내가 굳이 먼저 나선 이유는… 다들 감을 못 잡고 있을 때 고춧가루 좀 뿌리려고 그러는 거다.

“자, 그럼 본 공자가 먼저 시작해도 되겠소?”

소령이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맞은편 땅바닥에 앉으며 녀석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흙더미를 그러모아 단숨에 4분의 1정도나 확 빼버렸다.

예상대로 살짝 굳어지는 소령이의 안색.

“그, 그럼 이번엔 내가……”

천우신 역시 내 전음 지시에 따라 손끝을 조심하며 막대기 주변의 흙 대부분을 치워버렸다.

그로써 막대기 밑에 남은 흙은 거의 없어서 막대기가 어떻게 서 있는지 용해 보일 정도였다.

이제 소령이 차례지만 소령이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졌어요. 이런 건 너무해요.”

소령이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항복 선언을 해버리자, 관중들과 경쟁자들 역시 할 말을 잃어버렸는지 교아루의 넓직한 정원에는 잠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미, 미안합니다. 난 다만……”

천우신은 소령이가 울상을 짓고 있자 자기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쩔쩔매고 있었지만, 나는 소리 내어 음 뿌아하핫핫핫~! 하고 웃어버렸다.

“대범하게 밀고 나갔더니 생각보다 너무 쉽구만 그래. 지금까지 교아 자매에게 도전한 자들은 대체 얼마나 못난 자들인가 말이야. 음뿌핫핫핫~!”

내 의도된 오버만땅의 기고만장 시건방짐에 관중들의 야유가 내 한 몸으로 쏟아져 들었다.

그런 것들보다는 홍초명의 날카로운… 뭔가 수상하다고 의심하는 눈초리가 더 따가웠지만 견딜 만했다.

< 고맙네, 친구. >

< 후후… 내가 걱정 말라고 했잖은가. 이제 느긋하게 다른 경쟁자들이 떨어지는 거나 감상하자구, 친구. >

내가 단숨에 승부를 결정지으며 한 편으로 파놓은 함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시합이 생각보다 쉬운 거구나…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놓은 거고, 또 하나는 나처럼 쉽게 못 끝내면 등신~ 얼래리 꼴래리~ 뭐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후후… 그러나 나처럼 흙더미 속의 상황을 훤히 비춰주는 초미래궁극호화판 로봇도 없는 자들에게 나 같은 플레이가 쉽게 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다음의 도전자들은 겁도 없이 처음부터 왕창 흙을 덜어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두 명이 허무하게 막대기를 쓰러트리고 말았다.

결국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진 자들은 조금 신중하게 시합에 임했지만 역시 줄줄이 소령이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나선 자들은 가장 오랜 시간을 끌었는데, 그들은 얍실하게도 테두리 흙만을 깔짝대다가 관중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결국 주최 측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조금 적극적이 되었다가 역시 자멸하고 말았다.

음… 그러고 보면 내 물밑 작전도 작전이지만 소령이 녀석의 실력 자체도 상당한 것이, 아무래도 시간 나면 항상 저거 하고 놀았지 싶다.

소령이의 최대 적수는 마지막 상대인 풍신수 부평자였는데 그와는 정말 치열한 접전이었다.

몇 번째인가에 풍신수가 얼마 남지 않은 흙과 돌을 조심스럽게 빼내고 있는 도중 막대기가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풍신수는 손과 숨을 함께 멈추는 것 같았다.

그의 부릅뜬 두 눈은 약 30도 정도로 기울어지다가 간신히 멈춘 막대기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흙장난’이라고 비웃던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오랜 시간 수술을 하고 있는 의사처럼 땀을 뚝뚝 흘려가며 다시 손을 움직여 간신히 흙을 빼냈고 막대기는 넘어지지 않았다.

이제 다음 차례인 소령이가 단 한 줌의 흙만 빼내도 막대기가 쓰러질 판이었기에 풍신수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허공에 두 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리고 막대기가 툭 쓰러졌다.

뭐… 이 정원에 불고 있는 자연 바람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풍신수가 무심코 휘두른 팔에서 생긴 풍력(?)이 막대기를 건드렸을 수도 있다.

혹은 내 옆에서 넘어져라, 넘어져라…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천우신의 염력(?) 때문일 수도 있다.

하여간 우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고 울부짖는 풍신수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이 놀이의 진수를… 그는 온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얼마 후.

금세기 최대의 명승부를 펼치며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한… 음, 민망하군.

하여간 나와 천우신은 당당하게 교아루의 내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밀화원(蜜花院)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이 건물은 본래 교아루 기녀들의 숙소라 평소에도 ‘손님 출입 금지’란다.

즉, 세 번째부터는 비공개 시합이 되는 것이다.

“흐음~ 과연 실내의 향기가 남다르군 그래. 하핫! 여기가 묘미미 아가씨의 침실인 건가? 오늘은 나도 이곳에서 잘 수 있겠군.”

내가 들어서자마자 주접을 떨자, 방안에서 대기 중이던 미령이의 눈꼬리가 대뜸 올라가 붙었다.

“흥! 승부에서 지고 쫓겨날 때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요.”

난 기왕 장난을 치는 김에 더 막 나가고 싶었지만 천우신은 난처한 듯 소령이의 눈치를 보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 유준… 자네 자꾸 왜 이러나? >

< 후후. 재밌잖아. >

“서울공자 한국군님께서는 과연 무예도 출중하시고, 대길(大吉)의 운도 타고 나신 분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합이 남아있으니 말씀을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홍초명의 음성에도 약간의 가시가 돋히기 시작한 것 같았다.

“흐흐… 이제 보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도 보통 미색이 아닌데… 나 같은 타입은 어떠시오?”

“호호호! 정말 어쩔 수 없는 풍류공자시군요. 이제 자리에 앉으시지요.”

음… 나와 비교해 천우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깔린 껄떡쇠 연기였긴 한데, 여차하면 또 칼침 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 여자, 전에는 허벅지에서 칼 꺼냈지 아마?

< 우신, 잘 듣게. 알고 있겠지만 이번 시합은 상당한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많아. 힘들더라도 내가 보내는 지시를 잘 따라 줘. >

< …아니. 그러지 말게. >

<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

<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이번만은… 소령 아가씨와의 승부만큼은 내 힘으로 하고 싶네. >

< 그럴…래? >

< 이해해 주게. >

< 아니, 뭐… 그건 내가 이해하고 말고 할 얘기가 아니지. 훗-! 알겠어. >

솔직히 말해서 이 친구가 결정적일 때 객기를 부린다 싶었지만, 심정은 이해가 갔다. 뭐… 나 역시도 같은 상황에 처해서 대교와 승부를 겨루게 된다면 결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이기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두 분께 이번 시합의 방식과 규칙을 설명드리겠습니…”

“아니, 그럴 것 없소.”

나는 홍초명의 말을 막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생각해보니, 난 백랑과 시합을 할 필요가 없잖소. 내가 원하는 것은 저 묘미미…! 그러니 우린 우리끼리 다른 시합을 하는 것이 좋겠소.”

“아니, 이 시합은 본래 두 분 아가씨와 하도록……”

“알겠어요! 한공자님의 뜻대로 하도록 하죠.”

“아가씨!”

“흥~! 걱정 말고 한공자님을 내 방으로 모시도록 해요.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할게요.”

안 그래도 계속 벼르고 있었던 듯, 미령이는 앙칼진 표정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딘가 도발적인 눈빛으로 날 응시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짜식이… 많이 컸다.

“후후후~ 신조,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겠네.”

< 고맙네. >

이제 와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난 정말 화가 날 것 같았다.

바로 이 근처 어딘가에 대교가 있는 걸 알면서… 환장할 정도로 당장 녀석이 보고 싶어도 참고 밀어 줬는데 결과가 시원찮으면… 으음… 그렇다고 저 친구든 누구에게든 뭘 어쩔 수는 없는 거지만… 하여간 화가 날 것 같다.

부디 힘내라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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