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29-1화 :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公主).(1)
새벽. 나는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교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다시 풀어볼… 예정이었던 시간이었다. 홀로 다섯 잔쯤 마시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불도 안 켠 채 그러고 있는 건가, 친구.”
천우신이었다. 단판 승부의 삼육구 게임을 이 시간까지 하다니… 소령이나 저 녀석도 참 징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뭐라 할 기분도 아니었다.
“…혼자만 마시지 말고 나도 한 잔 주게, 친구.”
“…그러지.”
천우신은 내 상태가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잠시 침묵했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술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들이켰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천우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미령 아가씨 말로는 대교 아가씨와 재회했다고 하던데…”
“…만났지. 그리고… 싸웠어.”
“싸웠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더라고. 겉으론 내게 가르침을 청하는 형식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 살기는 진짜였어. 결국, 내가 생사금마도결을 익힌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야.”
“…이해할 수가 없군.”
“생사금마도결은… 전에 진하운이 대교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지는 몰랐어. 아니… 잊고 있었던 거야.”
“으음…”
“자네야말로… 소령이와의 승부는 어떻게 됐나?”
“아직 지지는 않았네.”
“지금까지 하고 무승부라니… 게다가 아직이라니?”
“갑자기 금동이가 뛰어들어 장난을 치는 바람에… 그래서 다음에 다시 하기로 했네.”
“다음에 또 언제…?”
“특정한 날은 정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든 다시 그녀를 찾기로 했지.”
“…축하하네. 이제 소령이는 자네를 잊지 못하겠군.”
“그… 글쎄. 아직은 그 의미가 잘…”
천우신은 약간 아쉬워하면서도 만족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싸웠다니 묻기 어렵군. 자네 이번에 대교 아가씨를 만나면 계속 함께 다니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어려워진 건가?”
“…그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하연 쪽에 급한 일이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일단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네.”
“아… 그래도 다행이군.”
“다행인 것처럼 보여?”
“그… 글쎄. 일단 한 잔 더 받을까?”
“계속 부어! 그리고 너도 마셔! 원샷!”
빌어먹을… 그토록 기다린 재회의 날에 이런 꼴이 웬 말인가. 대교와 알콩달콩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모자랄 판국에 밤새 친구의 위로를 받아가며 술판을 벌이다니…
“에이, 쒸—! 이해는… 한다 이거야!”
“응?”
“이봐, 천우쉰! 나도 알긴 알아…! 하지만 너무하잖아 이거… 간만에 복귀했는데… 그런 것 같고… 죽일 듯 달려들다니… 제귀럴~!”
“음, 음…! 나도 불안하긴 해!”
“젠장맞을! 몽몽 이 자식! 딴 때는 잘도 참견하면서… 오늘 같은 때는 왜 생까고… 그런 거냐구우.”
“그래, 그래! 나쁜 놈이구먼! 그런데 누구야?”
“있어, 그런 놈. 하여간… 대교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맞아, 맞아! 소령 아가씨도 너무 했다구! 어떻게… 날 까맣게 잊을 수가 있는 거쥐?”
“대체 진하운이 뭐냐고! 그 노미나 나나! 그 노미 그 놈 아니야?”
“그래! 그때… 나 여장했잖아! 그래서 정말 몰라본 거야?”
“아이, 쒸~ 정말 섭섭하네!”
“에이… 이 노무 변장 습관… 버려야 하는 건가…”
한참을 서로 지껄였지만… 뭔가 뭐가 뭔지 모르겠는 기분에 우리는 결국 서로를 몽롱한 눈으로 마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대체 뭐냐고… 에효오오오~!”
“난 대체… 에효오오오~!”
그렇게 길고 긴 한숨과 함께 우리의 우울한 새벽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소교가 손수 타다 준 꿀물과 함께 정신을 수습한 우리는 간밤의 띄엄띄엄한 기억이 조금 민망해서 둘 다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간만에 꽤 취했던 것 같군.”
“하하… 나도 그래.”
소교는 그런 우리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 쓰바! 빡 도네……!”
잠시 넋을 잃은 나에게 소교가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하사님이 왠지 우울하신 것 같아서… 이 고리아교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주문(?)은 저도 곡주님께 배웠답니다.”
“그, 그거… 고맙다. 근데 그거… 가급적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아, 역시 그랬었군요.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친절한 아가씨 소교가 물러가고 나자 천우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 좋지 않은 표현이 섞인 것 같던데……”
“…그냥 잊어버리게나, 친구.”
“하긴 뭐… 주문이란 것이 꼭 점잖은 표현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커흠! 흠… 음… 그보다, 우리 오늘은 결국 헤어지게 되겠군.”
“그렇군. 이제 각자 할 일이 있으니… 뭐, 급한 일이 끝나면 내가 자네를 찾아가도록 하지. 그 전이라도 남해오신룡의 소식이라던가, 자네의 ‘의뢰’는 완료되는 대로 보고가 들어가도록 하겠네.”
뭐… 특별히 날짜나 장소에 대해 약속을 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녀석이 다름 아닌 천이단의 짱이다 보니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알아서 찾아올 테니 말이다.
“좋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의뢰가 몇 건 더 있네.”
“얼마든지 말해 보게나, 꽁꼬(공짜) 의뢰인!”
윽! 이 자식, 갈수록 나만의(?) 표현을 쓰는데 익숙해져 간다.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겠다.
“음… 전에 천인군도(賤人群島)와 흑련(黑聯)의 현재 동태에 대해 조사해 달란 얘긴 했었지? 이번에는 지하 무림의 구중천에 대해 알아 봐줘.”
“설마… 마군황의 신화에 관심이 생긴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우신은 휴우- 하고 한숨부터 몰아냈다.
“잘하면 몇 백 년 만에 마군황의 부활을 볼 수 있거나… 아니면 내 유일한 친구를 잃게 생겼군.”
“야, 말을 해도 꼭……”
“후후- 아닐 세. 자네라면 꼭 신화를 이룰 수 있을 걸세.”
젠장. 대교도 그렇고 천우신까지 이런 반응이라니… 그야 나도 물론 어려운 건 알지만… 그래도 역시 기분 나쁜 걸?
“쳇! 아무튼, 의뢰는 하나 더 있어. 북해빙궁! 그곳에 대해서… 음… 특히 현재 궁주(宮主)인 ‘빙하황(氷下皇) 자청인’과 그의 딸 ‘나족공주(裸足公主) 자옥령’. 이 두 사람에 대해 뭐든 자세히 알아 봐줘.”
“…이봐, 설마 북해빙궁까지 어쩌려는 생각인가?”
“설마, 설마… 이런 말 자꾸 하지마. 왠지 기분 나쁘군.”
천우신은 잠시 멍하니 날 응시하고 있더니, 이번엔 더 푸욱 한숨을 내쉰 후에야 입을 열었다.
“빙하황 자궁주는 그렇다 치고, 나족공주가 설마 천하제오미 중의 한 명이라는 것만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야 북천여제(北天女帝)라고도 불리는 여걸 아닌가.”
북해빙궁의 최강자는 궁주 자청인이 아니라 그의 딸 나족공주… 일명 ‘맨발의 공주’인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리고 우리는… 그녀를 현 무림에서 가장 천하제일(天下第一)에 가까운 인물로 보고 있네.”
정보의 정확성이 천하에 공인된 천이단의 판단이라면… 에구, 아무래도 그 여자의 강함은 내 예상 이상인가 보다. 설마 정말 괴물……?
“게다가 그녀는 중원의 일에 극히 냉소적이라고 하지. 자네가 북해빙궁의 힘을 탐내는 것은 이해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걸세.”
“그래도 뭐든 시도는… 에이 씨!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하여간 알려달라니까!”
“…알겠네. 두 건의 의뢰를 추가로 접수하겠네. 그리고… 그중 한 건의 정보는 지금 제공하겠네.”
“오, 빨라서 좋… 뭐? 지금 장난 하나?”
천우신은 조금 민망한 기색을 띠며 쩝, 입맛을 다셨다.
“사실 북해빙궁의 공주… 북천여제 자옥령은 현재 비밀리에 중원으로 나와 있다네.”
“에…? 지금 여름이잖아. 그녀는 겨울에만 움직이는 거 아니었나?”
내가 알고 있는 북천여제에 관한 상식(?)은 그랬다. 그녀는 본래 중원에 잘 오지도 않지만, 지금까지 딱 두 번으로 알려진 중원행은 모두 계절이 겨울이었다고 한다. 북해빙궁 사람들이 보통 더위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녀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익힌 특수한 무공 때문에 유독 더위에 약하다고 한다.
“공주가 더위에 약한 건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나 보더군.”
“…가만, 혹시 이번에 자네가 맡은 의뢰가……”
“그래. 후우~ 피할 수 없는 의뢰가 겹친 것도 모자라 한 의뢰는 의뢰주가 의뢰주인지라… 더 숨길 수도 없게 되었군.”
천우신이 소령이와의 재회까지 미루고 갔을지도 모를, 매우 중요한 의뢰라는 것이 바로 문제의 북천여제에 관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포섭 대상은 가장 먼 곳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북해빙궁의 후계자 자옥령 공주였던 것이다.
“나참. 그럼 우린 또 동행이 되어야 한다는 건가?”
천우신과 금동이… 또 이들과 삼인조로 여행을 계속한다는 사실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출발하기 직전, 난 다른 요인 때문에 매우 씁쓸한 기분이 되어야 했다. 소교에게 우리의 출발을 알리자 그녀는 대교가 마중조차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왔던 것이다.
“…실은 갑자기 급한 연락이 와서 새벽녘에… 두 분께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제가 대신 사죄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진하연으로부터 급한 호출을 받고 우리 방에 와보니 내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어서 그냥 떠났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어제 일로 이제는 나와 다시 마주 보기도 싫어진 것은 아닐까……?
“…알겠다. 이십 일 후 장안평에서 만나자는 약속이나 잊지 말라고 전해. 그리고……”
애써 태연을 가장하여 소교와 동생들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린 후 돌아섰지만, 내 마음은 매우 우울뻑적지근할 수밖에 없었다.
“이봐, 우신!”
나는 마차가 교아루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세상 다 산 놈 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당분간… 난 ‘음주여행’을 할까 하네. 그러니 그 동안 마차는 자네가 몰아주게.”
“마차는 본래 대부분 내가… 아, 알겠네. 자네 뜻대로 하게, 친구.”
“땡쓰…!”
천우신은 자신도 약간 씁쓸한 기분인 것 같았지만, 별다른 불만 없이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 뒤 객실 안에 들어가 술병을 입에 대고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흘 후. 나는 그때까지 잠들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단 한 순간도 술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차츰 이게 뭔 짓인가 싶었지만… 역시 기분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술도 좋지만… 오늘은 식사를 좀 제대로 하게.”
점심 식사를 할 만한 객잔을 발견한 천우신이 새삼 걱정스럽게 말해서 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객잔에 들어가기 전에 아직 술이 조금 남은 술병을 길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술은 이제 되었고… 뭔가 맛있는 요리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졌어.”
“알겠네, 유준. 내가 알기로 이 지역에서 유명한 요리는……”
천우신은 요리 이름을 떠올리다 말고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나 역시 객잔 안의 상황이 매우 썰렁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는데… 과연 실내는 난리도 아니었다.
수십 평의 실내에 탁자며 의자들이 부서지고 엎어져 있고 그것들은 강제적인 힘에 의해 입구나 벽 쪽으로 밀어붙여져 있었다. 그렇게 비워진 중앙에 화려한 복장의 사내가 서 있었는데 복장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낯이 익다고는 해도 그건…
음… 그 전에 문 양쪽에 숨어있던 자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우리 둘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이 문제라면 문제로군.
그렇게 길고 긴 한숨과 함께 우리의 우울한 새벽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