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0-2화 : 각자의 입장.(2)
4-6. 각자의 입장.(2)
“지금… 다행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나와… 하운은 늘 걱정했지. 흑주의 지나친 충성심은 항상 불안한 구석이 있었거든. 충성을 다할 대상이 사라졌을 경우 혼자 서지 못할 것 같이 보였으니까 말야.”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분들이로군요.”
난 어느 덧 흑주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방향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웃었다.
“훗~! 누구나 그런 면이 있는 거야. 흑주처럼 오랜 세월동안 비정상적인 생활을……”
아, 잠깐. 이 녀석 방금 ‘분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너, 지금 누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거냐?”
내가 돌아보자 정권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날 마주보았다.
“‘수하의 충성심이 걱정’이라니… 두 분처럼 남의 위에 서 계신 분들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말이… 그렇게 이상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그게 좋다는 칭찬인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핀잔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변명이나 설명을 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술이나 한 잔 더할래?”
“예, 기꺼이.”
뭐, 어찌 되었든… 흑주가 다시 살아 돌아와 준 고마움에 그녀가 자기 의지로 떠나 준 기쁨이 더해져 내게는 최고의 새벽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짜가 기단노와 산채의 산적들에 대한 사후처리(?)는 정권과 일지, 사성에게 맡기고 난 다시 나머지 두 명과 함께 길을 나섰다. 종소의 보호자로 일지 대신 대오가 따라붙은 건 조금 뜻밖이었지만 뭐… 나야 별 상관없는 일이다. 무지막지한 내공을 얻은 이후로는 몽몽의 도움이 없어도 운기조식 만으로 숙취를 몰아내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몸 상태도 가뿐했다.
천우신과 약속한 날자는 마차로 달리는 걸 기준으로 한 거라 산에서 내려 온 후 처음으로 도착한 마을에서 바로 마차를 구해야 했다. 종소와 금동이를 뒤에 태우고 난 대오와 함께 앞 자리에 앉았는데 고삐는 대오가 알아서 잡았다. 솔직히 마차나 말이나 아직 자신있게 몰 자신이 없었는데 덕분에 공짜 기사 하나 얻은 셈이었다.
“약속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몰아도 돼. 복대성이 어딘지는 알고 있다고 했지, 대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가고 싶지는 않은 곳입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매우 재수없는 인물을 처음 만났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허… 이 녀석 성깔하고는. 기분 나쁜 놈 만난 곳이라고 그 지역까지 싫어한다는 건가?
“하긴 뭐. 나도 그런 곳이 있긴 하지.”
내게 있어서는 낙룡파 같은 경우가 그렇다. 내가 이 시대로 날아 온 후 있었던… 지금 생각해도 빡 도는 일들은 거의가 거기서 일어났고 심지어 한번 돌아가시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꽤 무뚝뚝한 편인 대오가 처음으로 자기 얘기 비슷한 걸 꺼낸 셈이니 조금 더 대화를 이어 볼 꺼나?
“나 같은 경우는 사실 대천마보다도 사갈서생이란 놈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아. 대오 네가 싫어한다는 자는 어떤 부류인 거냐?”
“…명색이 정파의 인물입니다. 허나 인물이 경박하고 비열하여… 아, 그러고 보니 진유준님도 아시겠군요. 무림맹 사천 지부장 ‘장두균’이란 자 말입니다.”
두균…? 옛날 하**표 무협 만화에서는 여자 주연과 조연을 오가던 미녀 이름이 두균이었는데 여기선 남자 이름이란 말인가…? 아, 아니다. 생각났다.
“뭐어야! 그 놈이 지금 무림맹의 사천 지부장씩이나 되어 있다고?”
“예. 석 달 전 정식으로 임명되었답니다.”
이거 참…! 어느 정도 기대는(?) 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네? 장두균이란 자는 다름 아닌, 해남파 ‘장명’의 큰아들이다. 야후 장로에게 개기다가 비화곡으로 잡혀오는 바람에 비화곡과 화천루의 갈등을 야기시켰던 문제의 인물 장명. 뜬금없이 시작된 나와 대교의 파란만장한 시간들의 원흉이었던 그 웬수가 노렸던 것은 사실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인 장두균을 위한 포석이었다.
1단계는 지 마누라인 삼홍랑 ‘구월화’를 동원한 미인계로 해남파의 장로 한 명을 구워 삼아 그가 발견한 해남파의 비전절기를 쓱싹~ 해 버린 것.
2단계는 비화곡에 잡혀간 피해자를 자처함으로써, 해남파 내에서는 물론이고 정파 전체에 동정론을 일으키고 그로써… ‘비화곡에 끌려간 부모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갸륵함’을 연기하는 아들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
3단계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하여간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목야평에서 비명횡사함으로써 2단계의 효과를 극대화 함.
삼홍랑 구월화의 증언과 여러 가지 사후 조사를 통해 파악된 장명의 음모와 결말은 그랬다. 그 인간이 죽었건 말건 모든 걸 까발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자면 정파인들 앞에 증인으로 나서야 하는 구월화의 새 인생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 그만뒀었다. 당시 구월화는 소원대로 자신의 첫사랑인 오상과 함께 잠적하도록 조치해 주었었는데, 이건 지금도 내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화곡과 원판의 악명이야 어차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말이다.
“장명도 장명이지만, 장두균 그 놈도 만만치 않게 더러운 놈이지. 구월화가 아무리 지 친어머니가 아니라 해도 그렇지, 세상엔 출세에 이용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는 건데……”
나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슬쩍 대오의 눈치를 살폈다.
“크흠. 지금 얘긴 잊어 버려. 들춰봐야 냄새나는 얘기일 뿐이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근데… 너희들은 또 왜 그 녀석과 얽힌 거냐?”
“그 자가 일지 누님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망신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로 저희들 남해오신룡을 비방하고 다닌답니다.”
“놈이 일지에게…? 흥! 돼지가 진주를 탐내는 격이로군. 아니, 아니… 내가 말실수했다.”
“예?”
“그런 놈을 돼지에게 비유하면 돼지 님에게 미안하지.”
내 심도 깊은 욕에 대오가 풀썩 웃었다.
“하핫~! 과연, 저도 그 작자를 욕할 때 개나 돼지 님을 들먹이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로써 대오와의 서먹함 제거는 일 단계 정도 된 것 같고… 이젠 뒤쪽의 종소 녀석이 문제로군. 일단 내 결정에 수긍하기는 했지만 마차에 탈 때까지도 잔득 불이 부어 있던 것으로 보아 쉽게 마음을 열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저런 미꼬맹이를 곁에 두고도 귀여운 볼때기 한 번 꼬집어(?) 주지 못한다면 손이 근질거려서 참기 어려울 것 같은데… 으음… 자칭 타칭 ‘남자 보모’였던 내 피가 끓는 구먼.
그럭저럭 4일 후. 별다른 일 없이 약속 장소인 복대성까지 온 것은 좋았는데… 그 동안 종소와의 사이가 전혀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제기…! 어찌된 녀석이 이 몸의 친절 미소 어택과 상냥한 보살핌 전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 앙증맞은 미소와 사랑스러운 손길을… 어째서 금동 선생에게만 제공하느냐 이거야~!
하긴 뭐… 금동이야 본래 어린이와 여자들에게 죽음의 매력을 가진 작고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인데다 종소에게는 금동이에게 빠져들 만한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대오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종소는 귀여운 동물들을 제 손으로 만져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본인은 철저히 관리한다고 해도 동물들에게는 종소가 다루는 독(毒)이 민감하게 느껴지는지 녀석이 가까이 가기만 해도 기겁을 하고 튀어 버리곤 했었다나?
그런 참에 등장한 우리의 금동 선생께서는 그 귀한 고려산삼을 다년간 심심풀이 땅콩으로 집어먹던 분으로써, 독에 대한 저항력이 고 원판에 필적할 정도이다. 지도 그걸 본능적으로 아는지 아주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당근, 종소에게 있어 최초의 동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금동인 인기 많아서 좋겠어, 응?”
내가 장난 반 진심 반 섞어서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기라도 하면 녀석은 툴툴대며(?) 더 종소에게 달라붙곤 했다. 이 배신자 같으니……!
그렇게 금동 선생에게 완패를 당한 아픔이 제법 쓰리기는 했지만, 할 일은 해야겠기에 나는 복대성 부근의 객잔에 여장을 풀었다.
“약속은 복대성 안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이쯤도 상관없어. 어차피 상대는 나 혼자 만나야 하니까 말야.”
천우신과 접선하고 그와 함께 북해빙궁의 맨발의 공주와 그리고 또 한 명의 종소 보모 후보를 만나는 일련의 과정은 천이단의 업무와 겹치기 때문에 처음부터 얘들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금동이 넌 어쩔래?”
내가 혼자 밖으로 나설 기색을 보이며 돌아보자 금동이는 얼른 날 따라오려 폼을 잡았지만 곧 난처한 듯 어물거렸다. 종소가 금동이의 손을 쥐고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배신자 금동이를 당장에 척살…할 리는 없겠고… 두 손을 들어 종소와 금동이의 머리를 박치기시킬… 일도 없어서 그냥 동시에 쓰다듬어 주었다.
“금동이 넌 여기서 대기! 종소는 우리 금동이 잘 좀 보살펴 주고.”
“아… 예.”
음, 종소 이 녀석 이제야 조금 웃은 건가? 비록 보일 듯 말 듯한 입꼬리의 변화였을 뿐이었지만… 하여간 금동이를 라이벌로 삼아 승산이 없는 한 ‘뇌물’로 용도 변경이다. 전략이란 이런 거지, 암.
“대오. 빠르면 내일, 더 늦게 되면… 달리 연락을 취하겠다.”
녀석들을 남겨두고 혼자서 복대성을 찾아가 내가 한 행동은… 공연히 성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음식 냄새가 좋은 객잔이 있길래 암 생각 그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하면 전에 알려 준 요령대로 연락을 취하거나, 아니면 그냥 기다려도 좋아. 별 차이는 없을 거네.”
며칠 전 천우신이 자신만만하게 남긴 말이었다. 나도 어디 천이단의 능력을 한 번 보자 싶어서 그냥 만두나 한 접시 때리며 기다려 보기로 한 것이다. 성 자체도 별다른 특성이 있는 곳은 아니었고 내가 들어간 객잔도 그랬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나 외에는 칼 가진 무인이라고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몽몽의 스캔이나 내 나름대로의 관찰로도 숨은 기인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훗-! 하긴… 처음으로 혼자 이런 곳에 앉아 있게 되어서 괜히 주변에 신경이 쓰였을 뿐, 이 시대에서도 본래 이런 게 가장 평범하고 흔한 상황이다. 사건 위주의 무협지 속에서나 객잔 안에 들어섰다 하면 뭐든 말썽이 기다리고 있는 거지 현실에서도 그럴 리… 있군!
제기… 말, 아니 생각하기가 무섭게 뭔가 등장해 버렸다. 지금 마악 객잔 안으로 들어선 네 명의 사내들은 모두 풍기는 기도가 며칠 전 산채의 비적들보다 한 수위인 것 같고, 결정적으로 다들 ‘우린 악당’이라는 표정과 태도가 여실했다. 물론 각자 살벌한 칼이나 철퇴 같은 살벌한 소도구도 잊지 않고 말이다. 뭔 건수 없나…라는 노골적인 눈빛으로 객잔을 쓰윽 돌아보는 악당(이미 기정 사실.)들의 시선때문에 맛나게 식사 중이던 사람들의 얼굴에 ‘졸지에 X밟았다’라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던 한 남자는 재빨리 식사를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문가로 가던 도중 놈들 중 한 명의 너무나 의도적인 어깨 부딪침에 그만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한 놈은 재빨리 문을 막아서고 두 놈은 능숙하게 카운터 및 점원들을 협박에 들어간다. 마무리로 두목인 듯한 덩치가 철퇴를 들어 탁자 위에 쾅! 하고 내려치면서 주위를 환기시키는데… 아주 손발이 척척 맞는다.
“흐흐흐흐~!”
그려, 그래야지. 그렇게 묵직하고도 비열한 이중적인 웃음을 시작으로 좌중을 협박해야지. 그게 이런 객잔 형 잔챙이 악당들의 정석이지, 암.
“모두들… 본좌가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흐흐~ 듣고 까무러치지나 말아라. 본좌는~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 전~ 중원을 진동시켰던 서진 기루 살인사건! 그 피투성이의 처절한 현장의 한 가운데에 서있던~ 공포의 광혈악마단(狂血惡魔團) 핵심 인물로서~”
에이씨, 뭐야아?
“그 후로~! 본좌는 무림맹에 체포되어 지금까지 갇혀있었으나~ 본좌는 며칠 전 과감히 탈옥하여 이 자리 에 섰다! 자아~ 그러니, 여러분들은 본좌와 본좌의 수하들에게 반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얌전히……”
으이구… 그나마 ‘이 볼펜 하나를 저렴한 가격 만원에 넘기는~!’이딴 말로 마무리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어째 양아치들 언행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거기서 거기냐 그래?
“그만, 스토… 아니, 멈춰!”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대의 눈빛들. 나는 혹시나 해서 정글도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 필요성도 못 느꼈기에 그대로 녀석들에게 달려들어 정글도 찜질을 시작했다. 어? 어? 하는 소리들을 끊고 으악! 퍽! 비명과 타작음이 몇 번 이어진 후… 나는 녀석들을 모두 내 자리 앞에 대가리 박아 시켜 놓았다. 난… 십 몇 년쯤 전, 어린 나이에 버스 안에서 지랄 맞은 양아치를 만나 필요하지도 않은 ‘노란색 우비’를 강제 구매해야 했던 원한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무림 정의를 위한 음… 크흠. 하여간!
“너희들 말야. 우리 힘없는 서민들을 상대로 그러면 쪽팔리지도 않냐? 응? 일하기 싫으면 그냥 굶던가아~ 아니면 저기 저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구걸을 하던가 그래야지. 남이 애써 번 돈을 뻔뻔스럽게 날로 먹으려 들어?”
웬지 조금 흥분해버려서 부적절한 단어가 많이 섞인 것 같긴 하지만, 뜻은 다들 대충 알아들었는지 객잔 손님들의 성원이 장난 아니었다.
“사실 구걸도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너희들 방식보다는 양심적이니까, 앞으로도 정히 일하기 싫으면 이 방법을 쓰도록 해. 아… 구걸도 기본 자세가 나와야 하니까, 일단 더 맞구 하자.”
“아니, 저……”
나는 놀라서 자세를 푸는 두목 놈부터 시작해 다시 한 놈 한 놈 자근자근 밟아 주었다. 이 부분에서도 할 말이 있는데… 난 정말 누구에게 손이고 발이고 써 본 적 없이 살아온 대한민국 모범청년이다. 누군가 오늘의 나를 보며 ‘저 자식 능숙해.’라는 소리를 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순진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약간의 의사소통 요령을 가르쳐 준 군대의 덕분일 것이다. 난… 어디까지나 곱게 자란 사람이다.
“자- 준비 됐나? 어이 거기. 한 쪽 팔은 허공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처럼 좀 더 자연스럽게 들고… 그래. 그리고 몸을 흔드는 요령은 천천히 달리는 마차 안에 서 있다는 기분으로……”
지들이 평소 하던 대로 타의에 의해 매우 불쌍한 몰골이 된 중원의 양아치들은 충실히 내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거기 두 명은 눈물 연기(?), 거 좋다. 그럼 시작해!”
내 신호에 따라 양아치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객잔에 계신~ 대인, 소저 여러부운~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나는 양아치들의 구걸 소리와 손님들의 환호를 받으며 유유히 객잔을 나설 수 있었다. 부디 내 따듯한 사랑의 교육이 녀석들을 갱생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객잔을 나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수상한 미행자가 한 명 따라 붙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몽몽의 보고가 없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완벽한 인피면구와 체형까지 약간 변형시킨 변장술을 지닌… 겉으로는 그저 평범한 행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가 날 스치고 지나며 낮게 중얼거렸다.
“제 뒤를 따라 오십시오, 진유준님!”
난 당근말밥(간만이다 이 표현), 그 사내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천이단은 꽤 신중해서 내가 복대성 바깥으로 안내될 때까지 다섯 번이나 안내자들이 교체되는 과정이 있었고, 결국 인적 없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에는 처음의 그 사내가 다시 나타나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정식으로 상체를 숙여왔다. 여기서 또 불심 검문…까지는 아니지만, 하여간 천우신에게 받았던 소위 ‘천이단 자유이용권’을 보여 주고서야 비로소 천우신에게 안내될 수 있었다.
천우신은 예상외로 복대성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산의 계곡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과 며칠 만인 데도 반색을 하고 날 반겼다.
“어서 오게! 성에 도착했으면 그런 눈에 띄는 소란을 피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어쨌든 잘 왔네.”
“남해오신룡들을 생각보다 쉽게 만나서 조금 빨리 왔지. 더구나 생각지도 않았던 녀석까지 나타나서… 흐흐~ 난 지금 컨디션 만빵이야.”
“흐음… 헤어질 때 만해도 자네답지 않은 모습이어 서 걱정했는데, 건디선이 그리 좋아졌다니 나도 기쁘군.”
우린 그렇게 잠시 인사를 나눈 후, 곧 목적지로 향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평소에는 나 못지 않게 느긋한 녀석인데 서두르는 걸 보니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실은 우리가 찾아 낸 ‘약’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다들 걱정하고 있다네.”
“약도 약이지만, 그걸 써서 그녀를 살려 낼 사람도 필요하다며?”
“그 사람은 지금 도착했잖은가.”
“응? 뭐야…! 우신 자네 정말 날 위해서 정보를 제공한 거 맞아?”
“후후~ 자네 식대로 라면… 겸사겸사 일세. 자네 정도의 적임자를 따로 찾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자네가 하겠다면 그보다 좋은 경우가 없지 않겠는가.”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만… 웬지 이 녀석에게 당한 기분이 드는 걸?
“그야 뭐, 그녀라면 오히려 내 쪽에서 뭔가 돕고는 싶지. 근데… 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야. 설마 치유과정에… 그 뭐냐… 남녀간에… 좀 부적절하게 가까워져야 하는…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니겠지?”
“어허~ 내가 설마 자네에게 음양합일(陰陽合一)같은 낯뜨거운 시술을 요구하겠나!”
“그렇다면 다행……”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상황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으윽! 말투에 장난기가 섞여 있어서 조금 불안하다 싶더니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니… 난 오히려 자네라면 먼저 다른 방도를 제시 할 줄 알았더니만… 후후~ 자네 혹시 속으로는 대교 아가씨만으로 모자라 그 분마저 탐내고 있던 건 아닌가?”
에이 쒸~! 내가 원판이냐?
“오고가는 농담 속에 싹트는 살의!”
“미, 미안하게 됐네. 제발 흥분 좀 하지 말게.”
내 포악한 음성에 천우신이 바로 꼬리를 내리자 난 오히려 공연히 뒷머리를 극적였다. 아직 구체적인 상황을 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초미래 명의 몽몽 선생이 있는 이상 다른 방도를 찾기도 쉬울 텐데 괜히 먼저 오버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얼마 후, 우리는 더욱 깊은 계곡 속의 웬 동굴(또 동굴이다.)에 도착했는데 동굴 입구에는 처음 보는 젊은 여자 한 명이 그림처럼(난 왜 이 표현밖에 안 떠오르는 거야?) 서있었다. 신분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검소해 보이는 백의(白衣)에 피부는 그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여자였다. 흔한 장식 하나 매달고 있지 않은데다 허리에 질끈 당겨 매진 띠까지 흰색이라 그 부근까지 치렁하게 내려온 생 머리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마치 전설의 요괴 설녀(雪女)와도 같은 분위기의 이 여자… 따로 소개받을 것도 없이 저 창백한 맨발만 봐도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본인은 하사, 진유준이라 합니다.”
내가 조금 어색한 동작으로 먼저 인사를 하자 설녀, 아니 나족공주 자옥령도 살짝 상체를 숙여왔다. 앞으 로 살랑 움직이는 그녀의 머리 결을 따라 신비스런 냉기가 사르륵 흘러나왔다.
“자옥령입니다.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먼길 오 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의외로 부드러운 음성과 태도였다. 고개를 드는 순간 언뜻 보이는 한 쪽 뺨의 흉터가 바로 그 유명한 천년설매(天年雪梅)인 모양이다. 말로들을 때는 오래 전 검상을 입었던 흉터에 뭔 별명까지 붙이고 난리였나 싶었는데, 이게 직접 보니 생각이상으로 묘한 느낌을 준다. 여자 얼굴에 난 흉터임에도 그게 흠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 느낌이… 이 아름다운 맨발의 공주께서 다른 천하제오미들에게 없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맨발의 공주는 조용히 몸을 돌려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특징 중 하나인… 지나치게 긴 끈에 매달려 땅에 질질 끌리는 검이 가라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