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2-1화 : 말짱 도로아미타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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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32-1화 : 말짱 도로아미타불(?).(1)


금동이까지 포함한 모든 애들을 데리고 동굴로 복귀한 후, 천우신은 대뜸 단독 면담을 요청해 왔다. 자옥령이 신수성녀의 병실에 들어가 있어서 공주 자매에게 종소를 소개해 주기도 전이었다. 요청에 따라 동굴에서 충분히 떨어진 장소까지 나갔음에도 천우신은 전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유준, 자네… 기어이 연옥서생의 그·걸· 사용한 거 같더군.>

<아까… 그렇게 티가 나던가?>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묻자 녀석은 쯧쯧~ 혀를 찼다.

<나처럼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쉽게 눈치채지는 못했을 거야. 하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네. 자네가 유수한 문파들의 비전절기를 무력화시키는 파해식을 알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는 날엔, 그야말로 무림 공적이 될지도 모르네. 자네의 사부 진하운은 정파에게만 미움을 받았다지만… 자네는 모든 진영의 척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파해식은 제대로 보지 않았어. 그나마 대부분 잊어버렸는데… 그게… 근데 이상하게도 절월십이검만은 기억에 남아 있더라구.>

<후… 나야 자네의 말을 믿겠지만, 다른 이들도 과연 그러겠는가. 아까 자네와 상해공자의 결투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는가. 혹시라도 안목이 날카로운 고수가 없을까 구경꾼들의 기색을 하나하나 살피며… 하아~ 제발 다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말아 주게.>

생사금마도결을 쓰지 않고도 절월십이검을 꺾기는 어려우니 할 수 없이 그랬다던가, 절월십이검의 파해식을 알고 있다는 걸 들킨다고 해도 바로 대상을 모든 비전절기로 확대 해석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등등…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기껏 걱정해 주는 녀석에게 따지기는 싫어서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주의하겠네.>

<가만 보면 자넨 모든 일에 놀라울 정도로 용의주도한 성격인데, 그러면서도 너무 충동적인 면이 있어서 때로 옆에서 보기 위태로울 때가 있다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난 그런 면이 있어. 그게… 고쳐보려고 해도 잘 안 되더군.>

내가 계속 순순히 인정하자, 천우신도 결국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그런 면이 또 자네의 큰 매력이기는 하지. 지켜보고 있으면 확실히… 지루하지가 않거든.”

“어쩌라구!”

내 항의에 천우신은 애매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웠다.

“쳇…! 그렇다면 언젠가는 우신 자네가 지루함을 그리워할 정도의 일을 저질러주지.”

“으~ 제발 참아주게. 내가 실언을 했네.”

“알다시피, 난 일단 말을 내뱉고 나면 행동도 정말로 해버리고 싶어지는 성격이라 장담은 못하겠지만… 참도록 노력해 보지.”

“참으로 고맙네 그려, 친구.”

그다지, 결코 고마워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하여간 오늘 일에 대한 면담은 그 정도로 끝났고 우린 다시 동굴로 돌아갔다.

대오와 종소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들어가 보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옥령이 나와 있었다. 자기들끼리 인사를 나눴는지 마침 탁자에 둘러앉으려는 참이었다.

“하하- 이미 인사는 마친 모양이니, 따로 소개는 필요 없겠군요.”

그러면서 끼어들자 자옥령은 종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본궁은 중원과 교류가 드문 편이지만, 남해오신룡의 명성만큼은 종종 청량한 남풍에 실려 오곤 했습니다. 독각소아룡이 본궁에 머물게 된다면 저희 쪽이 오히려 영광이지요.”

너무 공식적인(?) 반응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종소를 보는 그녀의 눈에 호의가 섞여 있는 건 분명한 듯싶었다. 종소는 아직 낯설어서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건 시간이 가면 해결될 일이고… 내가 보기에 엄한 대오가 왠지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북천여제 자여협 아니, 공주님을 직접 뵐 날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항상 어떤 분인가 했는데……”

살짝이 아니라 많이 들뜬 모양이다. 뭔가 표현하고 싶기는 한데 쉽지 않은지, 대오는 뒷말을 우물우물거리고 있었다.

“소문이란 항시 부풀려지기 마련이지요. 본녀의 실상은 이렇게 별거 아닌 여자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했습니다. 여제께서는 진정… 진정……”

대오가 계속 버벅대자, 종소가 오히려 민망했는지 슬며시 대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대오는 머쓱한 표정으로 자옥령의 눈치를 살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이미 대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오는 자기 자신도 강호에서는 일종의 아이돌 스타격이면서 조금 전의 모습은 완전 Bba-stone 모드였다. 천하제오미라는 강호의 미녀 스타들 중에서 신수성녀 조예린이 무림인과 일반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국민 스타라면, 북해빙궁의 자옥령은 일종의 컬트 스타라고 할까? 과거 몇 번 되지도 않는 중원 행에서 보여 주었던 이 여자의 신비스런 카리스마는 상당한 매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설마 대오 녀석도 그중에 하난 줄은 몰랐지만… 음, 근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일지에게도 과잉충성(?)하는 눈치가 있었는데… 이 녀석 혹시 연상 취향…?

“예린 언니의 상태가 갈수록 좋지 못합니다. 시술은 언제쯤 시작하시려는지요.”

팬 관리에 무심한 자옥령이 내게 물어서 난 머릿속에서 재빨리 일정을 점검해 보았다.

“…빙룡의 내단이 도착한다는 이틀 후에 바로 할 예정이고… 그때까지 다들 준비할 일이 좀 많을 거요.”

“뭐든 말씀해 주시지요.”

“난 시술을 하기 전까지 거의 운기조식을 하며 준비를 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순서대로 시행해 주시오.”

난 어제 밤 몽몽과 협의했던 준비과정을 자옥령과 천우신에게 지시했다. 사실 내가 시술을 준비하는, 정확히 말하면 ‘연습’하는 시간이야 길수록 좋겠지만 신수성녀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데다 문제의 약재, 빙룡의 내단은 오래 보관하기가 매우 어려운 거라 이 동굴까지 도착하고 나면 가급적 빨리 사용해야 했다. 내단…이라고 표현하기는 하는데, 사실 이 시대에도 빙룡이라는 괴 생명체는 없다. 북해빙궁처럼 눈과 얼음이 뒤덮인 지역에도 드물게 이 동굴처럼 자연의 에너지가 비정상적으로 집중되는 장소가 있다는데, 거기에 또 드물게 기원이 불분명한 영약이 생성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몽몽도 현장답사(?)를 하지 않는 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지만, 진주조개가 자신의 체내에 들어온 이물질을 진주로 바꾸듯 어떤 특정 물질이 그 장소에 장기간(최소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있으면서 그런 에너지 농축제(?)가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작용인지 몰라도 그 에너지 농축제의 주변 얼음산은 특이한 형태가 되기 마련이라는 데, 그게 어딘가 용의 형상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에너지 농축제가 얼음의 용이 품고 있는 내단…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뭐… 나야 그 유래가 어떻든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이틀……

신수성녀와 나 자신을 위한 시술 특훈은 내 예상 이상으로 빡셌다. 그 이틀 내내 난 골방, 아니 골동굴에 앉아 가상 현실에 빠져 지냈다. 현천기공에는 본래 다른 사람의 혈도를 제어하는 운기법도 포함되어 있어서 신수성녀와 나의 운기를 일체화하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걸로 역혈사진대법을 쓰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몽몽이 비화곡 성지에서 입력해 놓았던 역혈사진대법이 어째 내 귀에도 익다 했더니만, 역혈사진대법도 개발자가 다름 아닌 연옥서생 사부였다. 그 괴이한 천재가 만든 거답게, 역혈사진대법은 기존의 치유 목적 운기법과는 상당히 달라서… 필요한 혈도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된 정도의 나로서는 이론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실제 시행할 때는 이론을 전부 이해할 필요까지 없을지 몰라도 정상적인 혈도 운용에서 벗어난 역행의 과정 등은 아무리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라도 극히 힘든 일이었다. 결국 무공 습득 2년 차도 채 안 된 나로서는 그저 반복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것이 최선의 준비였던 것이다.

그렇게 빡세게 대략 삼일(앞뒤 시간 합쳐서) 정도의 시간을 보내다가 중간에 가끔 실제 신수성녀의 몸에 운기를 보내보는 테스트를 할 때도 이제 실제인지 가상현실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드디어 빙룡의 내단이 도착했고, 난 비로소 짧지만 단 휴식과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한 다섯 시간 정도 잤을까? 마무리로 몽몽의 수면 학습을 실행시켜서 그런지 제대로 피곤이 풀리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비교적 괜찮은 컨디션이었다. 그렇게 중노동(?)을 대비한 수면을 마치고 내 전용 골동굴에서 나오니, 중환자실 겸 수술실(?)에서는 모두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나… 닥터 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수성녀의 제자 격이라는… 이름이 ‘은비’, 단비…가 아니라 ‘동비’라고 했던 두 명의 의녀와 자옥령은 시술 보조였고, 내 딱갈이(비서라는 의미의 군대용어?)는 천우신이 맡았다. 의녀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앉은 자세를 취한 신수성녀는 내가 그녀의 등 뒤에 앉기 직전, 슬쩍 고개를 돌려 잘 부탁한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초연한 듯한 미소 너머로 일렁이는 삶에의 열망이랄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이는 환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기백에 나는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듯한 성녀의 등에 손바닥을 얹으면서 나는 새삼 각오를 다졌다.

내가 준비를 끝내자 자옥령은 특수한 상자에 담겨져 있던 빙룡의 내단… 기묘한 광채의 다이아몬드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에너지 집약체를 두 손으로 집어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과 직접 닿은 것이 아니라 그녀 특유의 내력으로 감싸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맨손으로 저 빙룡의 내단이 손상되지 않게 잡을 수 있는 건 빙백신공(氷白神功)을 극성까지 익힌 자옥령이 거의 유일하다고 했다. 내단이 자옥령에 의해 신수성녀에게 전해지려는 순간, 나도 현천기공으로 끌어올린 동천만년영삼 특유의 열기를 발동 시켰다.

시술 첫날.

…첫날부터 X 되는 줄 알았다. 내단의 한기(寒氣)가 예상 이상으로 강력해서 내 내력으로도 간신히 균형을 맞출 수 있었는데, 그 이후 상반된 두 기운을 합치는 데 엄청 뺑이를 쳐야 했다. 신수성녀는 물론이고 나 자신도 두 가지 기운이 충돌하거나 교대로 엄습하는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너무나 극단적인 냉기와 열기의 진수를 정말이지 지겹게 만끽해야 했다.

고기 덩어리 매달린 냉동 창고와 산불이 나 숨 막히는 현장을 번갈아 체험하기…?

하여간 그보다 더 더러웠던 건 그런 고통이 계속해서 수백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여하튼 미친 척 무조건 참아가며 에너지 칵테일(?) 만들기를 장장 열 시간… 그때쯤이 되자 느낌은 한여름에 땡볕에서 삽질하다가 갑자기 옷 속에 얼음물이 부어지는 정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다섯 시간이 지났을 때는 목욕탕 안에 있다가 대기실에 나오는 정도의 기온 변화 정도로 바뀌어졌다. 이 정도면 칵테일 자체는 거의 만들어진 셈이어서 나는 맞은편의 의녀들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의녀들이 재빨리 신수성녀의 몸에 금침술을 썼고 나는 비로소 성녀의 등에 손을 떼었다.

나는 천우신의 부축을 받아가며 한동안 하아, 하아~ 가쁜 호흡을 토해냈다. 지친 것도 지친 거지만 기의 유통이 더 큰 문제라 나는 곧 운기조식에 들어가야 했다.

많은 무협지 속에서는 이런 과정 도중 주인공의 생사현관(生死玄關)이 뻥뻥 뚫려 룰루랄라 신나던데, 난 어째서 무리한 진기 운용으로 기존의 멀쩡한 기맥들까지 삐걱대는 신세인 거냐…라는 식의 어쩔 수 없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사실… 신수성녀 본인이 생각했던 치유책은 이 정도까지였다.”

“이후로는 금침술로 새로 형성된 에너지를 신수성녀의 몸에 정착시키는 과정이 이어지게 되는 거였지만, 신수성녀의 지금 상태로는 침술만으로 무리였다. 기껏 형성된 에너지의 과도 유실, 그로 인한 완치 불가능…!”

“거기다 가능성은 적지만 에너지 소화불량으로 더 악화될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천수성자의 금침이 신수성녀의 체내 에너지 폭주를 막아줄 수 있는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자처한 다음 단계 실시를 위한 운기조식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시술 둘째 날.

첫 날과 달리 격렬하고 극단적인 고통은 없었고, 중간중간 휴식 시간도 가질 수 있어서 남들에게는 그리 빡세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몽몽이 경고한 ‘나까지 주화입마’의 위험성은 오늘이 가장 높았기에 정신적으로는 더욱 빡센 하루였다.

신수성녀의 몸에 가득한 에너지는 내 유도에 따라 그녀의 혈도를 계속해서 일주했는데, 문제가 되는 손상 혈도들에 이르러서는 유실되거나 역류를 하기 일쑤였고 손상된 혈도가 아니어도 역혈사진대법에 의거한 어떤 포인트에 이르면 비슷한 현상을 인위적으로 행해야 했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역류되는 곳은 환자에게 위험하니 조심스럽게 통과해야 했고 유실되는 곳에서는 내 에너지까지 함께 흘러나가니 현천기공을 이용해 최대한 막아내야 했다. 마치 함정 투성이의 어두운 미로를 대강의 지도만 믿고 달려가는 꼴이랄까? 어쨌든 그중 가장 위험한 곳은 그녀의 단전인데, 이곳이야말로 ‘밑 빠진 독’ 그 자체였다. 신수성녀의 경우 선천적으로 단전이 매우 부실해 후천적으로 파괴된 사람만큼이나 에너지 저장 능력이 거의 없었다.

역혈사진대법… 운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사혈 중 몇 군데를 미리 잡아 놓는 걸 기본으로 시작하는… 누구도 이해하기 어렵고 위험한 이 수법은 막상 해보니 신기할 정도로 효과가 있어서 성녀의 단전 같은 커다란 함정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론 운기가 단전에 이르기 전까지의 과정에 한치의 실수라도 있을 경우 바로 X되는 거기 때문에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둘째 날은 내게 있어… 힘들어 죽겠는데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수시로 튀어나오는 ‘장애물 마라톤’쯤이 연상되었다. 더구나 환장할 일은 아직도 이 짓을 최소한 20시간 정도 더 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잠깐의 휴식 시간에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참… 인체의… 음양의 조화라는 건… 대체 얼마나 신비한 건지……”

“무슨 소린가, 유준.”

“아니, 아니… 그냥 한 소리야.”

몽몽에 의하면 남녀 합일, 일명 응응응을 하면서 그 방면 전용 운기법을 사용할 경우, 위험한 역혈사진대법을 쓰지 않고도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거기다 시술 시간까지 훨씬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한다.

“뭐… 심지어는 지금 하는 시술에다 추가로 응응응 전 단계… 서로의 육체를 최대한 많이 접촉시키는 패팅을 병행할 경우 그것만으로도 치유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나? 물론, 전용 운기법을 쓰지 않고 효과를 보는 건 남녀가 서로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경우라는 조건이 붙겠지만 말이다.”

“후… 대교에게는 미안하지만 문득 그녀도 한 번쯤 또 내 앞에서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전의 성지에서와는 달리 아주 화끈한 간호(?)를 해 줄 수 있을 텐데… 음… 대교야 미안.”

시술 셋째 날.

역시 장애물 마라톤의 계속이었다. 중간중간 휴식과 함께 잠깐씩 눈까지 붙였어도 피로는 더해갈 뿐이었고, 언제부턴가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몽몽이 허용한 시간 이상 쉴 수도 없는 것이, 그럴 경우 제어력을 잃은 에너지의 폭주로 이제까지의 치료가 말짱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수가 있었다.

“내 몸의 상태는 그렇게 한계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 반면 정신적인 컨디션은 오히려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군대 훈련소에서 하루 밤 행군을 앞두고 있을 때는 암담해도, 자대에서 일주일 정도 행군을 하다가 하루가 남았을 때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까지 왔다는 생각에 힘이 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랄까?

[주의해 주십시오, 주인님! 조금 전부터 진기의 유통이 약간 불안정해졌습니다.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닌데… 나도 모르게 조금 흥분했나 보다.”

[치유 과정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현재 환자의 손상 혈도는 90% 이상 복구되었습니다. 현재 83%인 단전의 복구까지 완전히 끝날 것으로 예상되는… 74분 후에는 상소배은 현상을 대비해 주십시오.]

상소배은 현상이란, 이번 경우의 신수성녀처럼 전에 스스로 진기 유통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진기를 주입할 때 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외부 진기가 신체에 완전히 안착하는 순간, 그 직전까지의 진기 유입 방향으로 반발력이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까? 물론 대부분 이런 비슷한 경우에는 그리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까지 누적된 기맥의 피로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쨌든 남은 시간 74분이라… 지금까지 뺑이 친 시간이 얼만데… 그 정도야 껌이지, 껌이야.”

단전 복구 89%… 94%…

현천기공에 의해 거의 내 몸과 마찬가지로 진기를 운용해 온 성녀의 혈도였다. 몽몽의 카운터가 없어도 그녀의 단전에 서서히 진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97%… 99%… 100%-!

순간, 나는 재빨리 진기 운용을 중단하며 손을 떼었다. 예상했던 상소배은 현상에 의한 반발력이 내 기맥에 심술궂게 부딪쳐 왔다. 살짝 언 얼음이 작은 충격에도 깨어지듯 몇 군데의 혈도가 엉키기 시작했다. 그걸 스스로 풀 기력도 없는 상태의 내게 뭔가 뜨거운 기운이 보태지기 시작했다. 천우신이 재빨리 내 등에 손을 대고 자신의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한 것이었고, 이제 예민한 작업도 다 끝난 나는 안심하고 눈을 감으며 그 진기를 받아들였다.

잠시 후, 나는 한숨을 돌리며 눈을 떴다. 엉키려 했던 혈도를 대충 안정시켰을 뿐 몸의 안팎, 정신까지도 거의 탈진 상태였다.

“그래도… 결국 해냈다는 생각에 여단 전투력 측정 때 사격 만발인 것만큼이나 기뻤다.”

[축하합니다, 주인님! 무사히 해내셨군요!]

“수고했네, 유준! 진정 장하고 대단한 일을 해냈어!”

몽몽과 천우신이 동시에 호들갑을 떨었고, 슬쩍 살펴 본 자옥령과 은비, 동비 의녀들도 경탄과 존경의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흐흐흐~ 좋아, 진유준. 또 한 건 해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나는 애써 웃음으로 여유를 보이며 천우신의 부축을 거부했다. 실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지만 기왕 해낸 거 끝까지 강인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진 나는 스스로 돌 침상 모퉁이를 짚고 내려서기 시작했다.

근데, 에구구… 얼마나 지쳤는지 손이고 발이고 다 졸라 떨린다. 괜히 폼잡을 욕심에…

억! 뭐, 뭐야?

난 뜬금없이 벌어진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체중을 지탱하던 오른손을 누군가 파악! 쳐버렸고, 아차 하는 순간 나는 끈이 잘라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거꾸러지고 말았다. 무방비 상태에서의 충격과 놀라움 때문에 순식간에 기혈이 들끓으며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천우신으로 추정되는 다급한 손길이 날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내 눈동자는 반사적으로 침상 옆의 의녀 은비에게 향했다.

“이런 썅~!”

<주인님! 진정……>

몽몽의 경고는 한 타임 늦었다. 으윽~! 이 놈의 성질 머리! 혈도가 뒤엉키기 시작한 놈이 입을 열고 지껄이기까지…

으아아~ 더 X됐다.

“유준! 정신차리게!”

천우신이 서둘러 내 몸 몇 군데의 혈도를 짚고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막나가고 있었다. 가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는 것 같더니 곧 불덩이 같은 것이 목구멍을 밀고 올라왔다.

울컥, 선혈을 토해 낸 것이 내 의식의 거의 끝자락에 걸쳐져있는 기억이었다. 흙탕물에 던져진 돌맹이처럼 순식간에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나는 ‘주화입마’라는 불길한 단어를 떠올렸다.


깜박! 마치 버스 속에서 졸기라도 한 듯, 일 초인지 한 시간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눈을 떴다.

눈앞의 허공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지만 익숙한 공기의 느낌이 없었다. 벌려진 내 입에서 말 대신 부글부글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내민 손은 허공을 움켜쥐었을 뿐이고 애써 힘을 준 다리에는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물…속……?

어느 순간 그걸 깨달은 나는 다시 정신없이 손발을 휘젓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에 빠져 의식을 잃었던 내가 왜 물 속에 있는가, 라는 의문보다 이대로는 죽는다. 죽는다. ‘또’ 죽는다… 그런 생각이 먼저 요동을 쳤다.

필사적인 몸부림이 얼마나 더 계속되었을까. 새하얀 무언가… 천·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눈부신 빛을 등진 아름다운 천사가 환상처럼 두 팔을 펼치고 날 향해 내려앉았다.

정신이 없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라는 건 틀림없는 듯한 천사에 의해 물 밖으로 끌어 올려진 순간, 나는 쿠악~하고 물을 뿜어냈다. 퉁 소리와 함께 무슨 바닥엔가에 내려진 나는 또 한동안 미친 듯이 속 안의 물을 토하고 또 토했다.

결국 힘을 잃고 바닥에 고개를 박고 엎드린 채 숨을 고르는 내 어깨 위로 부드러운 모포 같은 것이 얹혀졌다. 이어 몇 개의 손이 모포를 내 앞으로 여며 감싸더니 모포와 나를 함께 가볍게 들어 어딘가로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푹신한 침상 위에 눕혀진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얼마간 더 숨을 몰아쉬었다. 차츰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내 손목에 몽몽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에는 모포 밑의 내 몸이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나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식을 잃고 있었던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비로소 코 속을 파고드는… 여러 가지 한약재 냄새…?! 주화입마 상태의 사람을 통째로 한약 탕(?) 속에 던져 넣어 치유한다…? 몽몽의 데이터에도 그런 엽기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몽몽은…? 그녀석이 왜 내게서 떠난 걸까? 설마 그 사이 몽몽에게도 무슨 사고라도……?

나는 이어지는 의문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조심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다. 침상 옆의 등잔불이 이상할 정도로 밝게 느껴져서 눈살을 찌푸리며 몇 번 깜박이고 있자니… 문득 굉장히 낯익은 느낌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설마…라는 생각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의 천사… 아니 더 옛날부터 내 천사였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꿈…? 언제부터…? 조금 아까 수중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혹은… 혹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다음 두 손을 새삼 눈앞으로 들어 올려 보았다. 연옥도에서의 무공 특훈 중에 생긴 영광의 흉터…같은 건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내…? 하여간 지금 내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손을 그보다 작고 가냘픈 손이 잡아왔다. 낯익은 숨결의 천사가 입을 열었다.

“아아~ 드디어… 드디어 돌아 오셨군요. 저의… 곡·주·님·.”

꿈이… 아니었다.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감격에 겨워하는 대·교·와 달리 나는 그저 망연자실, 아니 망연사실, 아니, 아니… 하여간……

이게 대체 뭐냐고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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