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3화 : 돌아온 진.
4-8. 돌아온 진.
“그, 그자를 오지 못하게 해!”
나는 일단 그렇게 소리쳤다. 죽여…? 죽이라고 할까? 아무 핑계나 대서라도 죽여서 입을 막… 으… 미치겠네. 내가 살아 남으려고 기어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대교 동생. 일단 대사를 막아 줘.”
진하연의 말에 대교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진하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날 내려다보았다. 난 녀석의 부축을 받으며 애써 몸을 일으켰다.
“…그 자에게 독을 풀어. 단,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잠복하는 것으로. 해독제는 너에게 밖에 없는 것으로 말야.”
난 침상 옆의 벽에 기대앉은 채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어요. 낭아군에 쓰였던 고(蠱)에 비견할 만한 삼시충(三屍蟲)이 있는데 그걸 쓰면 될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하연은 웬지 생기가 도는 표정으로 수하를 불러 들였다. 삼시충이라… 그거 아주 썰렁한 거라고 들었는데… 치이… 양심에 엄청 찔린다.
“오라버니, 이제 이유를 말해 줘요. 그 화상이 실은 오라버니께 죄를 지었나요?”
“오래 전부터… 그는 내게 협조하는 척 했지. 하지만 그는 계속 내 몸에 해로운 일을 부추겼을 뿐이야. 아무래도… 대천마의 사주를 받았다고 봐야지.”
누명을 씌워서 미안하우 수라혈불. 아니 삼장법사… 댁은 이제 천축엔 다 갔다오.
“그러고도 뻔뻔하게 오라버니를 뵈러 오다니 정말 낯이 두꺼운 자로군요.”
진하연은 모질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미안하우 삼장법사. 내 가급적 이 무서운 여자 극악이 직접 당신을 손대지는 않게 하리다.
“헌데… 오라버니 말투가 웬지 조금 이상해요.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응?”
윽! 무지하게 뜨끔하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이 것이… 제기, 혹시나 해서 그렇게 열심히 회화를 연습했는데 아직도 이상한 건가?
“훗-! 뭔가 이상하겠지. 난 자그마치 2년 여를 잠들어 있었지 않느냐. 전보다 더 기억이나 모든 것이 혼란… 어……?”
뭐지? 방금 뭔가… 처음 보는 영상이 얼핏 떠올랐는데… 뭐였지?
“왜, 왜 그래요?”
당황하여 날 살피는 진하연 위로 다시 이상한 영상이 겹쳐 떠올랐다. 어, 하는 사이 사라진 그 것은… 아주 작고 가냘픈 소녀의 모습… 너무나 진하연과 닮은… 설…마……?
“하연이 너……”
나는 이걸 말해야 할지 어떨지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머리 핀… 흰 매화 모양… 그건 이제 하지 않는 거니?”
아차 싶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우이 쒸~ 이건 또 뭐라 변명해야 하지? ‘아직 맛이 가있음.’을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 수습될 수 있으려나?
“…죄송해요, 오라버니. 그건… 잃어버렸는걸요.”
“…응?”
나는 내가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진하연의 지금 표정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기묘한… 하여간 최소한 날 힐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라버니의 선물인 백매(白梅)…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십 년 전 그만……”
진하연은 내게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기가 죽어서 고개를 돌린 채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런 진하연의 위로 다시 작은 진하연의 영상이 겹쳐지고 있었다. 우어어~ 이건 또 뭐냐. 나 지금 원판의 과거… 백마동(白魔童)이라 불리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낸 거냐?
난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설마 원판의 영혼도 어디선가 이미 돌아와 있었던 건가? 그래서 지금 이 육체에 함께……? 순간적으로 소름이 쫙 끼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극악서생이다. 내가 그런 놈의 영혼과 경쟁할 수 있을까? 그런 게 가능할까? 우오오~ 여기서 또 왜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발생하는 거냐!
“오라버니……?”
잠깐의 패닉 상태에 빠진 사이 내 손은 또 내 멋대로 진하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 때문에 네가 울면… 난 누굴 죽여야 하지?”
으으~ 대사하고는! 이게 여동생 달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거냐? 어랏…? 통했…다? 울음을 그쳐 버리네?
“너무나 기뻐요! 드디어 그 때의 오라버니로 돌아와 주었군요!”
난 하나도 안 기뻐! 야, 원판! 정말 여기 있는 거냐? 있으면 나와봐, 응? 네가 극악서생이면 난 대한민국 특공대 진유준 하사! 한판 뜨고 싶으면 뜨자고, 응? 애초에 이건 전부 네 실수로… 에… 물론… 내가 와룡 전에 무단 침입한 거긴 하지만… 음… 그러니까… 에… 제기, 그래 미안하다. 어쩌다보니 무단으로 네 몸에 좀 살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좀 봐주라, 응? 한없이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진하연과 달리 정작 나는 대담에서 개김으로, 거기서 다시 비굴 모드로 옮겨지는 등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건지 좀처럼 원판의 영혼이든 뭐든 느껴지지가 않았다. 척척박사 만능 부리부리 박사, 몽몽 선생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녀석이라면 이 황당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을 텐데……
“오라버니, 안색이 좋지 못해요.”
“…아, 그냥… 갑자기 머리가 좀……”
“다시 누우시겠어요? 삼장 화상은 나중에 데려오겠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이 녀석에게 그를 맡기면 그는 바로 삼장이 아니라 송장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만… 음… 잠시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며 다시 속으로 원판을 불러 보았다. 여전히 대답 없는 원판… 불러도 소용 없는 이름이여~ 음… 내가 또 혼자 오버했나…? 원판의 영혼이 이 몸에 동거하고 있다면 무단 침입자인 나를 두고 이렇게 얌전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설마 저 쪽 동굴의 내 몸을 노리고…? 아니, 그 것도 아니다. 그 동 안 원판의 영혼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면 몽몽이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뭘까 방금의 현상은?
몽몽이라는 기댈 대상이 없어서 일까? 내 머리 속은 오히려 평소보다 빠르게 핑핑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진하연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도 원판의 몸은 쌍둥이 동생인 진하연에게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물론 그 때는 조금 전처럼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거나 하는 식의 터무니없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은 왜……?
십전대보탕인지 뭔지 하는 저 알 수 없는 액체… 그건 몽몽조차 포기했을 정도로 파괴되었던 이 몸을 되살려 놓았다. 비록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아니, 그 기간 동안 거기에 잠겨있던 육체가 지금 다시 기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놀라운 거다. 하여간… 저 정체불명의 액체로 인해 부활하는 사이 이 육체에 뭔가 변화가 생긴 건 아닐까? 소프트웨어의 부재 시 하드웨어의 자체 생존 능력 습득…? 이건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얼추 말이 되는 것도… 음… 그렇지만 뭔가의 작용으로 원판의 두뇌가 더 활성화되었다 친다면 그 것도 또 이상한 걸? 독립성이 더 강해진 두뇌가 또 뜬금 없이 찾아 온 내 영혼에 얌전히 주도권을 양보하고… 그 것도 모자라 전에는 닫혀있던 데이터까지 제공한다……?
으음…! 역시 내 지식이나 판단력만으로는 무리인가? 좀처럼 스스로 납득할 만한 결론이 나지가 않는다. 내 영혼이 수시로 이 몸에 들락이며 더 익숙해 졌다면 몰라도… 아, 잠깐! 수시로… 들락였다……?
“하연아. 그 동안… 내 육체가… 전에도 움직였던 적이 있었니?”
“예. 비록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래서 저나 대교 동생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지요.”
어렴풋이 흩어져있던 기억들이 다시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연옥도에서 몽몽의 가상현실로 실전 특훈을 할 때… 나는 적어도 열 몇 차례는 사망했었고 의식불명이 된 적은 그보다 많았다. 그 후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희미해지곤 했던 막연한 ‘꿈’들… 대교를 만난 것 같기도 했던 그 막연한 느낌… 그렇다면 내 영혼은 그 때마다 이 곳, 이 육체에 들어왔다 갔다는 건가? 맙소사… 그렇다면 왜 몽몽은 내게 그 얘기를 해주지 않았지?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몽몽은 ‘유체이탈 현상’을 본인이 의식하게 되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무슨 대화인가를 하다가 얼핏 나온 말이라 무심결에 넘어갔었는데… 그게 ‘당신은 무의식 중에 자주 유체이탈을 하고 있다’는 교묘한 힌트였던 걸까?
“하아아아~!”
나는 길게 숨을 몰아 쉬었다.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얼추 앞뒤가 맞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음… 으음… 제기, 별로 기억나는 게 없잖아?
“하연아. 잠깐 손 좀 잡아 보자.”
“예? 후후~”
웬 싱거운 행동이냐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슬며시 내 밀어 주는 진하연의 손을 잡았다.
“뭐든… 옛날 얘기를 한 번 해 볼래?”
“옛날 얘기요? 우리가 헤어지기 전의 얘기 말인가요?”
“그래.”
진하연은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는 듯 했지만, 아직 내게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더 조건이 필요한 걸까? 일단 더 정신을 집중해 보면……
“…예를 들어 네가 늘 넘어지던……”
어랏? 정말 생각났다. 아니 ‘보였다’고 해야 하나? 마치 무지 오래 되고 관리도 개판이었던 영화 필름처럼 흐릿하고 중간중간 끊기는 영상이긴 해도……
“그 무덤가 언덕… 말이야.”
“아이 참! 하필 창피한 얘기를 꺼내구 그래요. 하연인은 이제 다 커서 아무대서고 넘어지지 않아요.”
웜마…? 신기하네. 손을 대고, 혹은 어떻게 든 접촉을 한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하면 대상에 관한 데이터를 꺼내 볼 수가 있다는 건가?
“하연아, 가서 내가 쓰던 물건이나 옷을 좀 가져다 줄래?”
나는 삼장법사도 잠시 잊은 채 공수되어 오는 원판의 옷과 물건들을 대상으로 계속 실험을 해 보았다. 결론은…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였다. 더구나 진하연에 대한 기억과는 달리 뭔가 보인다 해도 무슨 영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했다. 그러고 보니 정작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건 이 원판의 육체 그 자체일 텐데 혼자서는 떠올릴 수 없다면 뭔가 모순적이다. 후… 모르겠다.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음… 그래도 뭔가 하나의 무기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원판의 예전 기억과 지식을 꺼내 쓸 수 있다면, 적어도 이 시대에서는 몽몽 만큼이나 유용한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추 결론을 내린 나는 처음 깨어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당당해진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가서 수라혈불을 불러와.”
얼마 후.
나는 나름대로 예전의 원판의 분위기를 연출하느라 노력하며 삼장 대사, 과거의 수라혈불을 기다렸다. 대교의 뒤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서는 삼장은… 삼장 법사라기 보다는 거의 임꺽정 분위기였다. 나이는 50대 정도로 지긋해 보였으며 회색의 승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매우 우람한 덩치에 덥수룩한 임꺽정 수염으로 덮인 험악한 얼굴은 대체 승려인지 조폭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방안으로 들어 선 과거의 혈불께서는 부리부리한 두 눈으로 방 한 쪽의 커다란 욕조(원판의 육체가 담겨져 있던)를 슬쩍 살피더니 곧 그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내게로 옮겨왔다. 미리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내 눈, 아니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은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해 보았지만, 날 응시하던 그의 얼굴은 곧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입이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는 순간, 나는 먼저 선수를 쳤다.
“수라혈불!”
나는 아직도 그리 매끄럽지 않은 목에 억지로 힘을 주어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대는 지금 삼시충에 중독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유일한 해약은, 여기 내 손안에 있는 것뿐이다.”
혈불은 잠시 혼란스러운 듯 묘한 표정이 되어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대를 중독 시켰는지… 그 이유를 알겠는가?”
“…알 것 같습니다. 비화곡주시여!”
휴~ 내 협박… ‘내 정체를 까발리면 주우거!’라는 뜻을 알아들었구나.
“그대는, 지난 날 내게 여러 가지 주술을 가르쳐 주었지. 하지만, 그건 모두 날 망칠 뿐인 수작이었어! 어디… 여기에 대해서 변명을 해 보실까? 당신에 대한 처리는 그 다음에 결정하겠어.”
겉으로는 추궁하는 척, 그러나 속으로는 제발 잘 좀 말해줘요~ 라고 기도하며 혈불의 기색을 살폈다. 혈불은 갑자기 눈을 감으며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타불~ 드디어 이런 날이 오고 말았군요. 소승도 늘 각오하고 있었답니다.”
오, 바로 그거야. 눈치 한 번 빠르셔~!
“제 여식을 살리고자 한 짓이라고는 하지만… 천마 시주의 명에 따라 곡주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구려.”
에… 입맛에 딱 맞는 대사를 알아서 해 주는 건 좋지만… 어째 좀……
“당신의 여식……?”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비록 젊은 날의 실수라고는 해도… 제게는 하나 뿐인 여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까지도 천마 시주의 손아귀에 잡혀 있지요. 다 소승의 한없는 업보 때문이겠지요.”
뭐야~ 진짜였어? 당신 진짜로 천마 노인네의 사주를 받고 원판을 조금씩 망가트리고 있었던 거야? 나도 전에 분명 그걸 의심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군.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갔었다니 말이야.”
에구, 괜한걸 물었나? 하여간 이 놈의 호기심은 왜 이래 강하고 난리야?
“…소승이 곡주께 알려드린 술법들은… 모두 진짜였습니다. 다만… 그걸 시행한 사람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을 뿐. 헌데……”
“그만! 과연… 그랬었군!”
대충 나왔으면 싶은 말은 모두 나왔기에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할까 망설이고 있자니까, 진하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흥~! 정말 뻔뻔한 화상이로군. 오라버니께서 잠시 총기를 잃을 만큼… 그토록 갈망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그 따위 수작을 해?”
“아미타불~ 과거의 죄과가 몸을 태운 들 어찌 그걸 마다할 수 있겠소. 시주님들의 분노를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호호호~ 그렇다 이거지? 제법 득도한 흉내를 내는 걸? 암혼자(暗魂紫)!”
문밖에서 역시 간만에 보는 진하연의 보디가드 암혼자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의 무공을 모두 폐하고 손발의 근육을 끊어라. 혀를 자를 때는……”
어, 야아~
“그, 그만 둬!”
나는 반사적으로 진하연을 말린 다음, 다시 혈불… 승려 삼장을 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모든 것을 포기, 혹은 초월한 듯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짜가라는 걸 알면서도…? 아니, 내용물(?)이 바뀌었든 어쨌든 바뀌기 전에 한 짓은 변함이 없으니 어차피 진하연에게 당하는 건 피할 수가 없다는 건가? 아니… 그래도 뭔가 이상해. 그럼 처음부터 왜 여기 온 거지? 혹시……
“…자신을 희생해 내게 용서를 구하는 건가? 당신의… 그 여식을 살리고 싶어서?”
슬쩍 넘겨짚는 말에, 삼장의 표정이 흠칫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군. 당신은 내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상당한 모험성 발언이었다. 물론 이 정도까지 왔으면 새삼 내 정체에 대해 엄한 소리를 한다 해도 무시해 버릴 자신이 있지만서도…
“아미타불… 곡주께선 과거나 지금이나 모든 비화곡 식구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분이지요.”
이건 또 무슨 대답? 단지 아부…? 아니면 친했던 만큼 원판의 속마음을 접한 적이라도…? 윽! 우… 방금 또 과거 영상 하나 나왔다. 배경은 와룡전…? 그리고 내 밀어진 이 쪽의 손(아마도 원판의)에 들린 술잔과 건배를 하고 있던 수라혈불은 꽤나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둘이 친하긴 했던 모양인데… 가만, 방금 이 양반 비화곡 식구를 강조했지? 그렇다면 인질로 잡힌 딸래미가 어디 갇혀 있거나 그런 게 아니고 본래 비화곡 식구…?
“…좋아. 당신의 여식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지. 오랜… 우·정·에 대한 보답으로 말이야.”
“오라버닛!”
진하연이 뾰족한 쇳소리를 냈지만, 나는 손을 저어 가만히 있으라는 뜻을 강조했다.
“내 뜻을 이해하겠지, 삼장 대사?”
삼장은 몇 번이고 아미타불 소리를 내며 내게 상체를 숙여왔다. 눈물겨운 부정(父情)이랄까…? 어쨌든 우리는 합의를 본 셈이다. 나는 ‘내 정체에 대한 함구’를 요구했고 삼장은 ‘딸래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건 것이다. 저 양반도 머리 속이 꽤나 복잡했을 거 같다. 오늘날 보는 순간, 원판이 웬지 ‘착해 졌다’는 소문이 바로 나로 대체 되었기 때문이란 건 바로 눈치 깠겠지만… 그 ‘착함’이 과연 자기 딸래미를 살려 줄 정도인지 어떤지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천하의 대천마에게서 인질을 되찾아 올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은 진짜든 짜가든 ‘극악서생’이라는 신분을 가진 나 밖에 없다는 판단… 음… 솔직히 그런 판단이 옳은 지는 당사자인 나부터 영~ 못 미덥지만서도…
문제의 삼장 대사를 내 보내고 난 후. 난 시원착찹한 기분이 되어 다시 침상에 누웠다. 오래 전부터 가장 껄끄럽던 인물에 대한 처리를 얼추 끝내게 된 건 시원했지만… 한 편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황으로 보아 원판조차 저 삼장, 구 수라혈불의 배후에 대천마 노인네가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을지도 모른다. 인질 잡기라는 고전적인 수법을 쓰긴 했지만, 그걸 원판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낸 대천마는 어쩌면…
내가 생각해 오던 것보다 훨씬 강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으~ 참 내. 결국엔 친구였단 말이네요.”
“응?”
“오라버니와 삼장 화상 말이에요. 설마 오라버니께서 자신을 배반한 사람을 살려서 보낼 줄은 몰랐어요. 게다가 그의 여식까지 살려 준다고 약속하시질 않나…”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어. 그냥 생각해 본다고 했지.”
“어머머? 그럼…”
“난 그게 누군지도 몰라. 뭐… 짐작되는 여자가 하나 있긴 하지만… 살려 줄지 말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봐야지.”
“흐응~ 그랬었구나. 어쩐지 용서한다고 해 놓고는 해약을 주지 않는다 했어요.”
나도… 이기적인 놈이다. 좀 전의 태도만 믿고 해독까지 해 줄 수는 없었다.
“넌 삼시충이 발작했을 때의 고통보다 더 한 고문을 할 자신 있니?”
“음… 글세요.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볼 꺼야. 그를 용서하지 말지도.”
“후후~ 하여간 오라버니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듯, 종잡을 수가 없네요.”
“…종잡을 수 있으면 재미없잖아.”
내 말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진하연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물론 해약은 삼시충이 발동하기 전에 얘 몰래 전해 줄 생각이다.
“…음, 미안. 이제 좀 쉬게 해 줄래? 피곤…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난 진하연을 내보내고 나서 바로 잠이 들었었다. 근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니, 이게 정신을 차린 거라고 할 수 있을까? 난… 내 영혼은 허공에 떠 있었다.
우이 쒸~ 잠이 드는 정도로 빠져 나와 버리다니… 이젠 유체이탈이 아주 습관화 된 건가? 아니면 본래의 내 몸과 달리 현재의 원판 육체와 내 영혼의 소위 결합력이 약해진 건가? 어쨌건…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기라도 했으면 졸라 억울할 뻔했다. 이렇게 쉽게 떨어져 나올 수 있을 줄이야. 쯧… 생각할 수록 이거 정말 기분 묘하다. 눈 감고 잠들어 있는 육체를 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수 있다니… 이런 얘기를 어디선가 듣거나 책 같은 데서도 읽은 적이 있지만 설마 진짜 체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하고… 근데 문제는… 대체 이거 어떻게 도로 들어가야 하는 거야? 가만있자… 전에 낙룡파의 동굴에서 죽었을 때는 주변을 인식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었지? 연옥도에서 죽었을 때는(많이도 죽어봤다, 정말.) 비교적 빨리 육체로 돌아와서 그런지 그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근데 지금은 이렇게 빨리 주변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니… 혹시 몽몽이 말하던 ‘위험’이란 게 이런 현상을 말하는 거 아닐까? 스스로 유체 이탈을 인식하고 익숙해질수록 복귀력이 약해진다거나 하는… 으… 안 돼지, 안돼!
난 그제야 덜컥 겁이 나서 서둘러 영혼을 눕혀 육체에 겹쳐 보았다. (정말 별 짓 다 해 본다.) 그러나… 웬일인지 딱 들어맞는다거나 흡수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미치겠네… 막상 나오고 나니까 어디 갈 때도 없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래 육체가 있는 장소는 고사하고 이 원판의 육체에서 멀리 벗어날 수도 없다. 마치 원판의 육체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이 걸려 있거나 혹은 주변 몇 미터 정도 반경에 배리어가 쳐져 있는 듯이… 말이다.
하아아아~ 후-우우우우~
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그 것을 길게 내쉬어 보았다. 물론, 실제로 그게 가능할 리 없으니 그냥 기분이고 흉내일 뿐이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조금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다시 육체 위에 겹쳐 누운 후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서 예전의 감각… 전의 영혼 상태였을 때 어떤 식으로 돌아갔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 들어가는 형태였던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한 번은… 음… 그래,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다.
처음 원판과 바뀔 때… 그 때는 억울한 마음에 어떻게 든 아둥바둥 뭔가를 붙들려는 마음이었고, 두 번째는 낙룡파의 동굴에서 단숨에 와룡전까지 날아갔었다.
뭔가… 빛… 그래 그저 먼 불빛을 쫓아 나아갔었다.
빛… 빛이라… 그러고 보니 첫 번째 때도 목표가 빛줄기였던 것 같은데… 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빛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한다? 무얼 목표로, 어떤 느낌을 기준으로 집중해야 하는 걸까?
어떤… 어떤 느낌… 어? 아……
“오라버니~!”
“어, 어어?”
“아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갑작스럽게 살아난 감각에 적응하기도 전에 진하연이 울며 매달리고 있었다.
“어, 야아~ 왜, 왜 그래?”
“흐윽~ 흑! 전… 전 오라버니까 또 잠드신 줄만 알고……”
“응? 아니 잠이 들기야 들었지.”
“어헝~ 호흡이~ 호흡이 거의 없었단 말예요!”
그, 그랬나? 우… 역시 이 육체는 아직 불안정한 건가? 그래서 쉽게 유체 이탈이 되기도 하고… 끄음… 이거 본래 몸의 상황을 알기 전에는 오히려 빠져나가는 걸 주의해야겠는 걸?
“이제 괜찮은 거죠? 그렇죠?”
진하연은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의 박동을 확인하는 등 계속해서 수선을 피웠다. 문가에 서 있던 대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묘한 표정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나가 버렸다. 질투… 하는 건가? 음… 전에는 안 그런 거 같았는데… 그러고 보니 떠나있던 기간 동안 대교가 뭔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후… 아무래도 더 이상 안 되겠다. 다시 본래의 육체로 돌아가면 그 때 바로 정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알렸다는, 이 육체가 본체로 알고 있으니 바뀌는 거 자체를 반대할 지도 모르니까 일단 돌아가고 나서 밝히자. 하아~ 역시 여자, 특히 대교 같은 킹카를 자력으로 꼬시는 건 내 능력 밖이었나……?
썰렁하게 돌아온 후, 어영부영 일주일이 더 지났다. 결국 알게 된 것은 자살 따위 안 해도 유체 이탈은 된다는 것. 그러나 누군가 육체를 깨우기 전에는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요령은 계속 감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첫날 이후로는 잠이 들 때마다 유체이탈이 되는 건 아니었고 갈수록 결합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다시 빠져 나오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지나가는 투로라도 전문가 삼장 대사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도 되었다. 원판의 부활은 일단 비밀에 붙이라는 지시를 내려놓았는데, 나야 돌아갈 생각이니까 그랬지만 진하연과 대교는 물론 내가 뭔가 전략적인 음모(극악은 역시 이 말이 어울릴 듯.)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원판 두뇌의 데이타 창고는… 여전히 정확한 열쇠를 찾지 못했다. 싱크로가 잘 되는 쌍둥이 여동생에 대한 정보만 불쑥 불쑥 튀어나올 뿐, 다른 기억은 어쩌다 나와도 영 티미~했다.
삼장 대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정신적인 긴장도가 높아지는 등의… 소위 ‘위기 상황’에서 창고 문이 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무슨 헐크도 아니고 새로운 능력이냐고 뭐 이 따위인가 모르겠다.
어쨌든 나름대로 앞일에 대해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할 거듭하던 어느 날 밤… 내 숙소로 대교가 직접 차를 준비하여 찾아들었다. 마침 계속 내 옆에 들러붙어 있던 진하연도 뭔가 일이 있다며 떨어져(?) 나갔는데, 대교도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가 보다. 그 동안 웬지 서먹했던 걸 바꾸고 싶었던 걸까? 대교는 비화곡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하늘하늘 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존의 등불을 다른 것으로… 붉은 색의 촛불로 바꾸었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는 모양이다.
“음… 예쁘구나.”
내 간단하고 성의없게 들릴 정도의 말에 대교는 조금 샐쭉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풀며 차를 따랐다. 그 전부터 향긋한 커피 향이 실내에 가득한 상태였다.
“오늘은 전에 즐기시던 흑주차(黑珠茶)를 준비해 봤습니다. 후후~ 그 동안 제가 이 차에 빠져 버렸답니다. 곡주님 생각을 하며 늘 마시다 보니……”
“대교!”
“예, 곡주님.”
“흑주차… 실은 몸에 안 좋아. 너도 끊는 게 좋겠다.”
“아, 그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곧 다른 차를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됐다. 오늘 만 한 잔 마시지 뭐. 그보다… 왜 아직도 유준 형님이 행방이 밝혀지지 않는 거지?”
“그, 그게… 저에게도 자세한 행선지는 말씀하시지 않으셨기에… 그리고 천이단에 의뢰를 해봤지만, 그들이 웬일인지 의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쯧~! 그렇군. 안 그래도 은밀한 녀석들인데 주인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극비의 임무가 얽힌 장소를 함부로 드러낼 리가 없지. 그렇다면 어쩐다…? 내 정체를 밝히는 모험을… 진짜 해버려?
“저어… 곡주님. 소녀가 곡주님께 무어 실수라도 한 것이 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를 대하시는 태도가 예전과는 너무도 다르십니다. 잘못이 있다면 벌을 주시고…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대교. 넌 잘못한 거 없어.”
난 또 퉁명스럽게 대꾸한 다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그 동안 나도 얘와 이렇게 단 둘의 시간을 가지고 싶기는 했었지만 웬지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진유준일 때 당한 설움도 설움이지만… 전에 원판일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막연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당장에 어떻게 든 내 몸으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제 이 몸으로는 대교의 손끝 하나 터치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분위기만 흐뭇해지면 뭐하나 싶었던 것이다.
“과연… 소녀는 잘 못이 없었군요. 그렇다면 곡주님이 잘 못하고 계십니다.”
음, 그래. 내가… 응?
“지금 뭐라고 했냐?”
“곡주님께서 소녀에게 잘 못하고 계시다 했습니다.”
윽, 언제 대교가 원판일 때의 나에게 이렇게 똑바로 꼬나보며(?) 또박또박 따질 때가 있었던가?
“무슨… 말이냐.”
“곡주님께서는 항상 소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또 지금도……”
설마 얘… 뭔가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곡주님의 뜻을 모두 알고자 하는 건 소녀에게 주제 넘은 일이라 생각하며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정녕 그런 것입니까? 소녀가 곡주님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정녕 주제 넘은 마음인가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으~ 박력에 밀리고 있다. 뭐, 뭔가 반격할 것이… 아니, 아니 내가 대교와 싸울 일 있냐? 반격은 무슨……
“말씀해 주십시오. 깨어나신 후부터는 왜 소녀를 피하고 계신 건지… 대체 소녀에게 무엇을 숨기고 계신 건지 말입니다.”
으… 진짜 여기서 말을 해버려? 하지만 내 모든 비밀은 ‘애초에 내가 원판이 아니다’까지이다. 내 편한 대로라면 원판이 진유준이 된 거다…가 되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본래 몸보다 바뀐 몸을 더 챙기려는 내 태도를 얘가 이해해 줄지가 불확실하다. 무공 때문에 전부터 그걸 원했던 건 세상이 다 알지만, 대교만은 그걸 반대했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나 역시 만약 대교가 좀 더 예쁜 여자의 몸으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면… 그러라고 할 마음이 들까?
“말씀해 주십시오, 곡주님! 소녀는… 소녀는 곡주님께 대체 어떤 존재인 겁니까.”
“……”
“말씀해 주십시오!”
으… 환장하시겠네. 비밀이나 뭘 떠나서 난 그런 얘기 못한단 말야. 네가 나의 천사라던가, 너 없으면 죽는 게 낫다라던가 하는 따위의 말들… 난 대 놓고 못하는 성격이란 말야.
“…대교. 네 말이 맞다. 그래… 난 항상 너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어. 지금 이 순간도… 하지만 내가 널 생각하는 마음… 그건 언제까지고 변함이 없을 거야. 만약 지금의 내 말이 거짓이 된다면… 그 땐 네 손으로 날 죽여도 좋아.”
“그 말씀… 진정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네게 숨기고 있는 모든 것도 곧 말해 줄 수 있을 꺼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하지만 한 두 개는 숨길지도……
“…알겠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묻지 않겠습니 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그래.”
대교의 시선을 마주 보고 있자니, 웬지 가슴이 아려와서 더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처음에 깨어났을 때의 방과는 달리 이 방은 전망이 좋은 쪽으로 창이 나 있다. 어쩌면 애써 이런 곳을 찾아 낸 듯 창 밖의 풍경은 비화곡의 내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곡주님……”
뒤쪽에서 낯익은 향기와 함께 대교가 살며시 내 등을 안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서늘한 감각이 뒷골을 타고 흘렀다. 아, 이건… 이건 설마……
“고, 곡주님?”
갑자기 비틀, 창틀을 짚고 선 나를 당황한 대교가 부축해왔다.
“대, 대교… 어쩌면… 그 때가… 생각보다 빨리 왔는지도… 우웃!”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기묘한 충격이었지만 바로 익숙함이 느껴지는 이 감각… 어딘가에서 내 의식을 잡아끄는 듯한… 아, 역시……
“곡주니이임~!”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는 대교의 음성과 모습이 쏴아아악~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아주 잠시 눈앞을 뒤덮었던 어둠의 장막이 ‘늘 그랬듯’ 재빨리 사라지고 나자, 난 멍하니 눈을 껌벅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 주인님! 정신차리세요! 주인님~! ]
“…나 안 죽었다.”
후… 역시 내 음성이로군. 후,후후… 흐… 나 원 참……
[ 와아! 돌아 오셨군요! ]
요정 몽이 바로 튀어 나왔다.
“그게… 너무 쉽게 돌아와서 웬지 환장하시겠다.”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우리도 정말 많이 걱정했답니다. 혈도 복구와 신체 회복이 너무 늦어져서 다른 사태를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
나는 이 돌연한 복귀가 기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잠시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몽몽의 선 보고를 들었다. 현재 내가 누워 있는 이 곳은 본래 신수성녀가 투병 생활하던 그 방이고 그 돌 침상인 모양이다. 고개를 슬쩍 들어 내 몸을 내려다보면 홀랑 벗겨져 알 몸인 상태이고 중요 부위에만 천 쪼가리 하나가 척 걸쳐져 있었다. 거기다가 온몸에 금침이 잔득 박혀 있어서 웬지 섬뜩했는데, 몽몽의 말에 따르면 처음 며칠은 천우신과 자옥령이 번갈아 가면서 내 몸에 진기를 주입해주었었고, 그 다음에는 금침술로 회복을 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 몸이 깨어나자마자, 바로 재 합체한 거로군.”
확실히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본체가 깨어나기만 하면 되는 일을 온갖 고민과 투쟁(?)으로 지새고 있었으니… 후… 여하간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막상 돌아오니 이번엔 남겨 두고 온 대교와 진하연이 또 걱정이긴 한데… 전에도 한 번 견뎌낸 애들이 설마 이번이라고 충격으로 어찌 되는 건 아니겠지……?
[ 곧 사람이 올 때가 되었으니 그가 금침을 제거한 다음에 움직이셔야 합니다. ]
“음… 그래. 나도 그 동안 할 얘기가 쌓였지만… 이 쪽 얘기를 먼저 더 들어보자, 몽몽. 신수성녀 조예린 공주는 확실히 완치가 되었니?”
[ 그렇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보고가 있습니다만… 금침이 제거되기 전까지는 주인님의 기맥이 안정되지 않아서 흥분하실 보고는 뒤로 연기했으면 합니다. ]
“호오~ 대체 뭔 보고 길래 그렇게까지… 훗! 좋아. 궁금한 건 참기 어렵지만… 제일 맛있는(?) 걸 나중에 먹는 것도 괜찮지.”
비유가 좀 이상했나? 하여간……
[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신수성녀의 신체를 정밀 스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기본 원격 스캔 만으로는 하루하루 자력 회생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
“좋아. 뭐… 그럼 문제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 다들 걱정하고 있었겠구나.”
[ 물론이지요! 특히 신수성녀는 밤잠도 설쳐가며 주인님 치료에 몰두했는걸요. 후후~ 그 모습은 마치……]
“야, 요정몽. 정식보고 받을 때는 넌 좀 빠져라, 응?”
[ 우아아~ 이럴 수가! 주인님이 날 이렇게 냉대하실 수가!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에~ ]
호들갑을 떨며 빛나는 날개로 허공을 수놓는 요정몽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정말 돌아 왔다는 실감이 났다.
“후후~ 알았다, 알았어. 이번엔 네가 보고해봐.”
[ 넵! 그럼…… ]
[ 요정몽! 그만 둬. 의녀 한 명이 오고 있다. ]
[ 우~ 정말 이러기예요, 몽몽오빠? ]
오호~ 원판 몽몽과 요정몽과 대화하는 건 또 처음 들어보는 걸? 하하- 이 녀석들 갈수록 지들끼리도 귀엽게 논다.
“아……!”
탄성 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만을 돌려보니 입구에 문제의 의녀 은·비·가 금방이라도 들고 들어오던 쟁반을 떨굴 것 같은 포즈로 서 있었다. 내가 싱겁게 한 번 웃어주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람들에게 먼저 알리기 위해서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반응이 꽤나 오버이다. 사실 민망한 건 내 쪽이 더 한데 말이다.
나 진유준 하사! 연옥서생 사부의 두 번째 멋대로 제자이며 그 유명한 패도광협 어르신의 역시 멋대로 사제… 그런 내가 저 연약한 의녀 은비에게 일격을 먹었었다. 일주일 전… 이 동굴에서 그 뺑이를 쳐가며 어려운 고비 다 넘기고 신수성녀를 고쳐 놓았던 나…! 그런 내가 침상에서 내려오다 손을 짚은 곳에는… 신수성녀의 옷자락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저 의녀 은비는 신수성녀의 옷매무새를 챙기기 위해 그걸 무심결에 잡아당겼고… 그 한 방에 이 진유준 하사께서 골로 갔던 것이다. 나 참 쪽팔려서 원……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 공포의(?) 의녀 은비에게 소식을 들은 이들이 우르르 내 병상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난 뻑적지근한 환영의 인사를 받느라 바빠야 했 다. 천우신만은 그 동안 걱정했던 기색을 숨기고 은비에게 치명타를 맞은 점을 들어 날 놀려댔지만 말이다.
그날 밤. 나는 다시 내 골동굴에서 몽몽과 그 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털어놓고 상의해 보았다.
[ 파괴된 원판… 저도 원판이라는 용어를 쓰겠습니다. 원판의 육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세포 단위의 복구 기술이 필요한데 이 시대에 그 정도의 물질 제조가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
“흠…! 그거야 이제 사실 내 문제는 아니고… 그보다 이미 원판의 몸이 복구가 되었으니 내 영체가 또 그 쪽으로 딸려갈 가능성과 그걸 막거나,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가가 중요해.”
[ 영체 관리는 저의 기능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상자체를 이미 스스로 자각하셨으니 차라리 이 시대, 혹은 주인님 시대의 방법으로 제어를 시도해 보실 것을 권고합니다. ]
“어떤 게… 있는데?”
[ 몇몇 시대에서 수집된 데이터가 있습니다. 단, 주인님 스스로의 숙련을 요구하는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
“너… 혹시 나보고 ‘도를 닦아라’는 건 아니겠지?”
[ 틀리지 않은 표현이지만, 그보다는 구체적인 요령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
“끄응~ 제기, 나 정말 여러 가지 한다. 그치?”
[ 본래는 거의 대등했던 영혼 결합력이 원판 쪽 육체의 결합력 저하로 인해 균형이 깨어진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가급적 빨리 제어력을 갖추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실망인데, 몽몽. 거기서 내가 혼자 생각한 거나 별 차이가 없군 그래.”
[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기능이 저하된 것이 아닙니다. 주인님의 위기 관리 능력이 그 만큼 향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 후후후~ 몽몽 오빠가 한 방 먹었다~! ]
흠… 어째 요정몽은 갈수록 더 까불이가 되어 가는 것 같고, 몽몽은 원판인데도 은근히 자존심 같은 감정도 섞이는 것 같군 그래.
“어쨌건… 좋다. 도를 닦든 뭘 하든 하긴 해야겠지. 이젠… 대교를 그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한 가지 미리 알아 둬라. 나, 곧 대교에게는 내 정체를 밝힐 거야.”
[ 어느 선까지입니까? ]
전에는 내 정체에 관한 건 무조건 펄쩍 뛰더니만, 오늘은 웬지 반응이 신중한 걸?
“음… 그야, 아무래도 당장은 너와 시간여행에 관한 얘기는 빼야겠지? 갑자기 그런 말해봐야 믿기도 어려울테고… 우선은 녀석과 내가 만나고 지내 온 시간 모두… 나 한 사람이었다는 것만이라도 밝혀야겠어.”
몽몽은 잠시 침묵했고, 난 다시 한 번 더 생각을 해 본 후 말을 이었다.
“대교가 그걸 이해해 준다면… 그 때 시간여행에 대해서도… 우리 시대에 대해서 얘기할 거야. 그리고… 날 따라 가겠느냐고 말이야.”
제기, 몽몽이 계속 침묵을 하니까 웬지 더 내가 매우 비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후우… 모르겠다. 어떤 날은 대교라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뭐든 다 이해해 주고 뭐든 내 뜻대로 따라 줄 것도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인정받지 못하고 미움만 살 것 같아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렵기 도 하고……
“헌데 너희들… 아니 그 때는 너… 몽몽 넌 가능하다 고 했었지, 대교까지 데리고 가는 거 말야.”
[ 그 것은 본 사용자의 시간여행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
“…본래 불법 사용자니까, 또 불법도 가능하다… 그 얘기지?”
[ 그렇습니다. 당시 알려 드렸던 것처럼 저의 본 사용자의 기본 행동 패턴을 분석해 보면 주인님 뜻에 동의 할 가능성은 87%입니다. 단, 인간의 행동 패턴 예측은 오차율이 높다는 것도 상기해 주십시오. ]
“뭐, 정 안되면 협박을 해서라도… 어, 잠깐. 내가 흥분할 만한 보고라는 것이… 설마… 왔냐, 그 여자?”
[ 그렇습니다. 이틀 전 저의 본 사용자인 정식 코드명 ‘PMW00000271’, 비정규 호칭 ‘진’이 보낸 전파가 수신되었습니다. ]
윽~! 그토록 기다려도 깜깜 무소식이었던 여자가 하필… 하필 이렇게 복잡한 국면에 나타났단 말야? 에이 쒸~ 기왕에 이제까지 꾸물거린 거 아예 대천마와의 일이 끝난 다음에나 올 것이지… 빌어먹을! 그 재수때기가 그 때처럼 당장 이 시대를 떠나야 한다고 설쳐대면 어쩌지?
[ 아직 이 쪽에서는 답신을 보내 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그, 글세… 가만, 가만… 생각 좀 해보고. 음… 근데 어째 너희들 본 사용자보다, 내 편인 것 같다?”
[ 저희들에게 ‘편’은 없습니다. 현 사용자에게 충실 할 뿐입니다. ]
“음… 여하간 고맙다. 그리고…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그 여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겠니?”
[ 지금까지 수신된 전파의 발신 방향과 수신시간대로 보아 진은 이 시대 대기권에 소형 인공 위성을 설치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위치 파악은 불가능합니다. ]
뭐라고라고라고라고라~?
“뭐야. 그런 것도 갖고 올 수 있단 말야?”
[ 저희 시간대의 기술력은 총 중량 30킬로그램 이하의 시스템으로도 주인님 시대의 소형 인공위성 이상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있으므로 주인님의 사고가 있었던 지난 시간 여행 시와 동일한 에너지만으로도 가능합니다. ]
“아니… 니네 기술력이야 너만 봐도 알만 하지만… 그보다 그 여자 뭐냐? 난 K2도 고민 고민하다가 겨우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데… 그 여잔 그 딴 걸 이 시대에 떠억 가져와서 막 쓴단 말야?”
내가 기가막히다는 듯 묻자 요정몽이 끼어 들었다.
[ 에효~ 말도 마세요. 진은 위원회의 허가가 있다면 중대형 병기 같은 것까지 가지고 올 사람이라구요. ]
“주, 중대형 무기…? 니네 시대의 중대형 무기라면… 여기서 뭔 세계 정복 할 일 있냐?”
[ 후후~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거죠, 뭐. 그 정도 용적의 병기나 기계를 시간 여행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니 아무리 진이라도 그 정도 에너지는 빼돌리지 못해요. ]
“…하여간 결론은 ‘매우 위험한 여자’라는 거로군.”
처음엔 등급 제한 때문에 몽몽이 언급을 회피했었고, 내 사용자 등급이 올라갈 때를 전후해서는 죽느라 바빠서(?) 이 여자에 대한 걸 깊이 따져볼 틈이 없었다. 근데 어째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타입인 모양이다. 싸가지에 재수 없음에다가… 대범(?)하기까지 하다 하면 보통 싸가지가… 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결론은 그거로군. 싸·가·지·!
“음… 상대가 어떤 타입이든 일단 시작은 하고 봐야겠지? 좋아. 언제부터 통신이 가능하지?”
[ 앞으로 8시간 36분 24초 후부터 가능합니다. 단 저의 출력이 약해서 수신은 상시 가능하지만 송신은 10분 단위로 2분 씩 충전시간이 필요합니다. 가급적 저의 기본 에너지원인 태양력(太陽力)이 충분한 시간과 장소에서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인님 신체의 전기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신다면 충전시간을 20초 단축할 수 있습니다. ]
몽몽의 기본 에너지원인 태양력이란, 달력에 쓰이는 용어는 당근 아니고… 우리 시대의 태양열 에너지와도 다르다. 말 그대로 태양 에너지… 분명 태양에서 생성되어 지구까지 전해지긴 하는데 우리 시대에서는 아직 규명조차 되지 않은 에너지원이라고 한다. 이게 밤이라고 말끔히 사라지는 게 아니어서 몽몽과 같은 소형 로봇은 정상적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 수준에서 이론상 무한대에 가까운 사용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드디어 왔다 이거지? 처음엔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했는데, 생각해 보면 나도 불리하지만은 않은 입장이다. 여차하면 미래에서도 꽤 가치가 있어 보이는 몽몽을 인질로 잡아 버린다던가… 후… 어쨌든 오늘은 일단… 자자. 오늘은 푹 좀 쉬고, 내일 그 싸가지와 면담 좀 해봐야겠다. 만약 예상대로 진짜 싸가지 없게 나온다면… 음… 미래의 무기를 뭘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나도 이젠 만만치 않지, 암. 나는 새삼 정글도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난 일행들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고 혼자 근처의 산으로 올라갔다. 아무리 싸가지니 어쩌니 해도 날 서울의 집으로 복귀 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여서 상반된 두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여자와의 첫 통신……!
“몽몽, 연결 시켜!”
내 명령이 떨어지자……
뚜우뚜우뚜뚜뚜뚜- 삐삐이이이~ 끼야아아아아악끄 윽~ 우리 시대 초창기 통신 환경도 아닌데 이 딴 소리가 날리는 없겠고… 그냥 별 소리 없이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바람에 괜히 소리를 상상해 봤다. 음… 근데 뭔 최첨단 미래 인공위성이 이렇게 반응이 늦어?
[[ 아… NSBG3274001? NSBG3274001! 아직 작동하고 있었다니, 이건 기록적인…… ]]
웃! 떴다. 그 여자다.
[[ NSBG3274001! 현재 위치를 송신하라! 현재 위치를…… ]]
“이봐요! 나요! 누군지 알겠소?”
[[ 어머…? 설마 그… 20세기 군인 아저씨? ]]
“훗~! 아무래도 내가 벌써 어떻게 된 줄 아셨나 보군.”
[[ 와아~ 굉장해! 당시도 살아있었다니! 아하하! 정말 굉장해! ]]
이거, 웬지 불쾌해지는 반응인걸?
[[ 이봐요! 말 좀 해봐요! 지금 기분이 어때요? ]]
“기분은 무슨… 대체 왜 이제야 온 거요?”
[[ 너무 화내지 말아요. 위원회를 설득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당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 알게 되면… 후후후~ 그 노인네들, 아마 모두 기절해 버릴 걸요? ]]
“그러니까… 본래는 죽을 거 뻔한데 날 놓고 갔다, 그런 말로 들리는 군.”
[[ 아, 아니 뭐… 전례가 없다고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 하여간 반가워요.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예요! ]]
제기, 역시 싸가지였다. 그렇다면 나도 바로 비슷하게 한 번 나가보자.
“…아무래도 좋소. 거기 위치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난 여기서 앞으로 적어도 몇 달간은 더 있어야 해요. 알겠소? 날 복귀시키려면 그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 음… 마음대로 해요. 이번에는 허락 받고 온 거라 그 정도는 상관없어요. ]]
어랏? 의외로 답변이 시원스럽네?
“에… 확실히 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모양인데… 음~ 그렇다면 내가 이 시대 사람 한 명을 우리 시대로 데리고 가는 건 어때요?”
일단 가벼운 말투로 던져 봤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은 상당히 심각했다.
[[ …그 것도 마음대로 해요. 한 사람 정도 추가 에너지는 확보되어 있어요. ]]
안 된다고 할 경우를 머리 아프게 연구하고 있었는데… 대답이 너무 잘 나오니까 그 동안 욕한 게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정말… 가능해요? 당신 네… 그 위원회인가 뭔가에서 허락을 하겠어요?”
[[ 그냥 하는 거죠, 뭐. 당신이 여기서 이만큼이나 버티고 있었는데 그 정도 보답은 있어야겠죠? ]]
“하하핫~! 이거, 이거… 내가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 헌데, 내 쪽에서도 부탁이 있어요. ]]
“뭡니까! 뭐든 말해 봐요!”
[[ 현재 당신이 사용 중인 NSBG3274001에게 이 쪽 위치를 입력할 테니 곧 이 쪽으로 와줘요. ]]
“그야… 내 일이 다 끝나면 오지 말래도 가야죠. 조금 전 말한 것처럼 한 사람 더 데리고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 아니, 그보다 빨리 와서 날 구해달라고요. ]]
“에…? 그건 또 무슨……”
[[ 으음~ 여기 도착해서 바로 통신용 위성 띄우고…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무기 조작 실수로 여기 종교의 상징물 하나를 부수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그만 여기 승려들에게… 맞죠? 이 시대 불교를 믿는 사람들. 하여간 그들의 본거지로 끌려와서… 지금은 갇혀 있어요. 이 곳의 입구에는 소(少)·림(林)·사(寺)·라고 써 있었어요. ]]
“……”
[[ 이봐요! 어딘지 몰라요? 이 시대에서는 꽤 유명한 곳이니 알지 않나요? ]]
“……”
[[ 응? 왜 갑자기 통신이 끊기지? 이봐요! 듣고 있어요? ]]
무심한 미래 여자 싸가지는 계속해서 날 찾았지만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