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4-1화 : 북천여제(北天女帝)의 무위(武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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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34-1화 : 북천여제(北天女帝)의 무위(武威).(1)


허공에 고등학교 칠판 정도 크기의 큼지막한 차트 하나가 좌~악 펼쳐졌다. 차트 한 쪽에는 이 시대 중국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비화곡 본단을 포함한 현 대천마 세력이 장악한 구역과 우리 측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위치한 지역이 두 가지 색으로 나뉘어 표시되어 있었다.

요정몽이 지시봉을 들고 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 보시다시피, 대천마의 세력은 비화곡을 중심으로 중원 전역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반천복화 세력은 산발적이고 비효율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단순 분석일 뿐이며, 반천복화 세력은 일정 조건이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각 세력 간의 굳은 연계가 가능하여 그럴 경우 기존의 대천마 세력과 동등하거나 일부 압도가 가능할 정도의 통일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

요정몽은 평소와 달리 나름대로 차분한 어조와 태도로 브리핑을 계속했다.

[ …여기서 필수 필요 조건이란, 주인님의 지하무림 장악과 북해빙궁의 협력 확보 등의 활동에 의한 추가 세력 확보와 주인님의 인지도 향상입니다. 여기 이 쪽의… 지하무림 장악으로 인한 반천복화 세력의 업그레이드와 주인님의 인지도 향상에 따른 조직 장악력 강화에 관한 도표를 보아주십시오. 3일 전까지 천이단이 제공한 자료를 추가하여 총 72차례의 시뮬레이션을 더 했으므로 연옥도에서의 최종 보고 때보다 오차율이 3% 내외로 줄었습니다. 주인님의 영체가 원판의 육체를 소생시킴으로써 발생한 상황 변동에 대한 분석에는 기간이 좀 더 소요되므로 차후…… ]

보고 내용은 사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해 보면서 고민을 거듭했던 내용들이어서 그리 집중해서 볼 필요는 없었다.

“야, 요정몽!”

[ 예! 주인님! ]

“너… 그냥 원래대로 해라. 좀 어색하다.”

[ 헤에~ 그래도 공식적인 보고인데 이 정도 자세를 갖춰야지요. ]

“아니, 말투보다… 그, 덩·치·를 본래대로 하라구, 임마.”

[ 치이… 큰마음 먹고 인간 크기 구현화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

“응!”

[ 우아~ 너무해요! 나도 항상 쬐그만 건 싫다구요. ]

지 멋대로 보통 여자 크기로 커져 있는 요정몽은 강한 불만을 표했지만 나는 얄짤없이 고개를 저었다.

“넌 쬐깐한 게 어울려, 임마! 그러니 까불지 말고 얼른 원상 복구해라, 응?”

내 퉁명스런 명령에 결국 요정몽은 익숙한 본래의 크기로 돌아갔지만, 역시 꽤나 불만인 듯 이후로는 보고가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 그니까요. 여기, 여기, 요오기 쯤이 마군황 테스트 무대로 예상되는 곳이래요. ]

요정몽은 지도 위를 날아다니며 몇 군데를 손바닥으로 탁탁탁 짚었다.

[ 뭐어~ 어디든 뭔 상관 있겠어요? 한 달 동안 그냥 저냥 얼추 살아남으면 되는 거죠, 뭐. 울트라캡짱 잘난 우리 주인님은 생존이 특기이니 뭔 걱정이 있겠어요? 그래도 예상 지점 확대한 건 다시 보실래요? 그렇게 질리도록 보시고도 또…… ]

“야, 너……”

[ 임시 코드명 요정몽의 활동을 일시 제한하겠습니다. ]

결국 원판 몽몽이 떴고 요정몽은 흥~ 하는 소리를 내고는 혀까지 날름 내밀고 나서야 사라졌다.

[ 죄송합니다. 인격 부분의 독립 이후 시간이 갈수록 소위 버릇이 없어졌습니다. 곧 제가 적절한 교육을 하겠습니다. ]

“…일단 그냥 놔 둬. 어디까지 가나 봐서 나중에……”

그렇게 말하던 나는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같은 인공지능끼리 대체 어떤 식으로 교육을 시키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엄한 기계마왕 이미지의 원판 몽몽이 요정몽의 종아리에 회초리로 맴매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 보고는 제가 이어서 계속하겠습니다. ]

“아니, 됐다. 오늘은 이만 하자.”

[ 요정몽의 불성실한 언행에 불쾌하셨습니까? ]

“아냐. 그런 것도 녀석다운 거지 뭐. 그보다… 역시 대(對) 대천마 전략의 기본 방향이 바뀔 필요는 없을 것 같지?”

[ 그렇습니다. 주인님 전략의 기본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대천마만을 축출하는 것입니다. 원판의 부활이란 중요 전술 요건을 잘 활용하면 주인님 측 진영의 승률은 높아지겠지만, 그 경우에도 지하무림 정도의 추가 세력 확보가 있을 경우가 주인님의 뜻을 이루는 데 유리할 것입니다. ]

“…그래. 원판이 부활했다고 하면 아무래도 많은 세력이 반천복화 진영으로 돌아 올 테지. 하지만 애초에 진짜 원판에게도 반역의 뜻을 품고 있던 대천마가 새삼 얌전히 꼬리를 내려 줄 리가 없지.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의 우리 측 피해도 피해지만, 난 대천마에게 빚이 있는 거지 그의 추종자들까지 어쩌고 싶지는 않고 말야.”

[ 전략의 변화도 없는데 새삼 전체적인 상황을 다시 확인하신 것은… 역시 전 사용자 진의 소식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신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

“훗…! 이젠 나에 대해 귀신 다 됐구나.”

[ 칭찬 감사합니다. ]

사실 지금까지는 몽몽이 나에 대해 잘 분석하는 게 싫었지만, 본 사용자보다도 내 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하여간, 그 여자에게서 또 연락이 오고… 만약 내가 통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너라도 계속 잘 다독거려서 더는 엄한 짓 못하게 해라. 승려들이니 가만히만 있으면 함부로 해치거나 그러진 않을 거야.”

[ 알겠습니다. 하지만 진은 갑갑한 일을 잘 참지 못하는 성품이라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

후우… 역시 문제가 많은 여자다. 하필이면 소림사(少林寺)씩이나 되는 곳에서 말썽을 피울 건 뭐냐. 과거에 한 번 패도광협에게 망신을 당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흔한 말로 소림은 소림이다. 패도광협에게 한 번 깨졌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陳)도 그 후 백 년쯤 후에 소림사가 배출한 ‘탄공’이란 천재 무승에 의해 더 보완되어 지금은 그 명성을 다시 되찾은 상태이다. 만약 내가 소림사로 간다면, 그리고 내 무공을 그들이 알아본다면… 그들은 얼씨구나~ 날 반길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설욕을 위해서라도 친절하게 백팔나한진이라는 진미를 대접하려 들 텐데… 솔직히 나는 그런 진미를 즐겁게 먹어 줄 자신이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백 팔 그릇이나 퍼먹으면 배가 터질……

“크흠! 음……”

[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하신 모양이군요. ]

“으응… 내가 늘 그렇지 뭐.”

[ 소림사에 대해서 생각하신 거라면, 소림 출신인 성승(聖僧)과의 사건 또한 상기해 주십시오. ]

아, 맞다! 그 일도 있었지? 상황으로 보아 아직 들키지는 않은 것 같지만… 으-! 이래저래 소림과 나는 영 친해지기 어려운 관계로구나.

“하여간… 나도 패도광협 그 양반처럼 소림사의 백팔나한진을 멋지게 깨 보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긴 해.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어. 난 아직 패도광협이라는 벽도 넘어서지 못한 상태인데다, 소림사 또한 수백 년 동안 그냥 놀고 있었을 리가 없고…말야.”

[ …진을 구출하는데 있어 반드시 백팔나한진을 상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 패도광협 선배 때문에 백팔나한진을 먼저 떠올린 것뿐이고… 내 정체를 들키지만 않는다면 의외로 쉽게 싸가지 진과 면회가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과연 나나 대교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정도로 소림사 사람들이 만만할까? 자신들의 중죄인을 내주는 일인데 적당히 대처할 리도 없고 말야.”

정말이지 운이 좋아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비교적 평화적으로 교섭이 진행된다 해도… 그 전에 싸가지 진이 얌전히 지내고 있어야 말하기도 좋은데 과연… 음… 제기! 대체 그 여자는 전생에 나와 무슨 웬수였길래… 으… 모르겠다. 모르겠어!

“에이 쒸~ 모르겠다. 오늘 회의는 이 것으로 마치자. 뭐… 어찌 되겠지.”

[ 후후~ 일단 닥치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거죠? ]

다시 뜬금없이 나타난 요정몽 녀석… 표정을 보니 일시 활동 제한과 함께 벌써 기분까지 풀린 모양이다.

난 몽몽의 가상현실이 꺼지자마자 눈을 뜨고 누워 있던 장소에서 몸을 일으켰다. 싸가지 진과의 통신을 끝내고 대충 누울 때까지는 잘 몰랐는데, 그늘 진 나무 아래로 불어오는 산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지극히 ‘나 스러운’… ‘어찌 되겠지.’라는 결론을 내린 것만으로도 벌써 어느 정도 우울함은 날아가 버렸기에 난 몇 번 깊게 산 공기를 들이킨 다음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와 신수성녀의 동굴로 돌아와 보니, 입구 근방에서 종소가 금동이와 공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실을 원형으로 감아서 만든 공이 내 발치로 통통 굴러 오길래 집어서 건네주니 종소 녀석은 여전히 수줍은 태도로 손을 내민다.

입구 바로 앞에는 그 사이 안에 있던 탁자를 내놓고 신수성녀(神手聖女) 조예린과 북천여제(北天女帝) 자옥령, 두 명의 공주가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두 명의 젊고 아리따운 공주가 오전의 한가로운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작은 아이와 원숭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불과 보름 정도 전의 같은 장소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하하~ 오늘은 더 좋아 보이셔서 저도 기쁘군요.”

짐짓 인사말을 하자 의자에서 일어난 조예린이 가벼운 목례를 보내왔다.

“모두 진하사님의 덕분이지요. 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후후. 이렇게 건강하신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겐 충분한 보답이니, 이후로는 고맙다는 말씀은 말아 주시지요.”

솔직히 아직 초췌한 모습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바로 어제 밤보다도 어딘가 더 피어 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으로 보아, 예전의 미모를 되찾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진하사님께선 그야말로 철인이라도 되는 분 같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상태에서 깨어나시고 불과 하루 밤 만에 이렇듯 당당한 모습이시니……”

으음… 웬지 낯이 좀 가렵군, 그래.
어제 밤에도 그랬지만 날 향한 칭찬과 감사만이 이어지는 분위기는 웬지 거북해서 나는 자리에 앉자 곧 화제를 종소에게 돌렸다.

“아, 저 아이 문제라면 저희들도 조금 전까지 상의하는 중이었습니다. 헌데……”

두 공주는 서로를 마주 보며 피식 웃음을 교환했다.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는군요. 진하사님의 은혜도 은혜지만… 저렇게 사랑스러운 소녀와 지내는 것을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음… 이런 걸 행복한 고민이라고 해야 하나…? 두 공주는 벌써 당사자인 종소에게도 물어 본 모양인데, 종소도 쉽게 답변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가장 큰 정신고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류의 질문일 테니…

어쨌든 종소 문제는 이걸로 일단락 된 걸로 치고, 나는 몸 상태 봐서 가급적 빨리 지하무림의 일백마군들과의 미팅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렇게 일정을 결정하고 나니 뭔가 좀 허전…했다. 꼭 해야 할 때는 그리 내키지 않고 영 찝찝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게 막상 안 해도 되는 일이 되니까 오히려 더 무지 땡기는… 그런 심리랄까? 으음~ 할까 말까…? …역시 그냥 넘어가기는 좀 아쉽…지?

“음… 실은 내가 북천여제께 한 가지 청이 있소.”

“뭐든 말씀하시지요.”

자옥령은 뭐든 다 들어준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바로 본론을 꺼내 버렸다.

“우리 한 판 뜹… 아, 아니……”

에구, 역시 은근히 긴장했나보다 말이 헛나왔다.

“…무의 길을 걷는 자로써, 전부터 늘 북천여제 자여협께 한 수 배울 기회를 얻고 싶었소.”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옥령의 표정이 슬며시 가라앉았다. 그녀의 반응은 그렇다 치고, 옆에 있던 조예린 공주가 오히려 당황한 기색으로 자옥령의 눈치를 살폈다. 소문에 의하면, 자옥령은 일단 칼을 뽑으면 상대와의 관계고 뭐고 일체의 사심 없이 승부에 몰두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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