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4-3화 : 북천여제(北天女帝)의 무위(武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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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34-3화 : 북천여제(北天女帝)의 무위(武威).(3)


5-1. 북천여제(北天女帝)의 무위(武威).(3)

쩡-! 거대한 범종이 쪼개지는 듯한 강렬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이미 중심을 잃고 떨어져 내리던 내 눈앞으로 검붉은 땅바닥이 밀려왔다.

반사적으로 한 손을 내민 나는 간신히 땅을 짚고 몸을 틀어 거꾸러지는 것을 면했다.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한 쪽 무릎과 손바닥 아래의 땅, 아니 내 주변의 공간이 모두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눈앞의 커다란 바위에 내 정글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불현듯, 조금 전까지의 일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목구멍을 타고 역류해 오는 뜨겁고 비릿한 액체는 진짜였다.

꿀꺽! 억지로 되삼켜버렸다. 소위 ‘선혈을 울컥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싫어서 한 짓이지만 곧바로 후회가 되었다.

가뜩이나 좋지 못한 몸 상태인데 속까지 더 느글느글… 제기, 하여간 이젠 실제 상황에서도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인 상태였다.

아직 약간 흐릿한 시선을 들어 자옥령을 찾아보니 그녀는 이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두 손에 들려있는 자신의 검과 검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뭔가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하여간 나처럼 망가진 기색은 없었다.

< 몽몽…… >

제기, 진기 유통이 빡빡해서 전음 쓰기도 힘겹다.

[ 자옥령은 아직 주인님의 마지막 공격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소지한 병기에 집약된 에너지의 양으로 보아 주인님의 공격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또한, 스캔되는 전신의 에너지 발산 안정도로 보아 현재의 주인님과 달리 추가 전투의 여력이 충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쯧…! 결국……”

졌다. 깨졌다. 넌 여자한테 밟힌 거다 진유준. 나가 죽어라!

그런 생각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러나 진심이 아닌 약간의 장난기를 섞은 푸념이라고 할까…? 비무가 계속되는 동안 자옥령이 예상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질리도록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2년 정도의 기간에 급조된 내가 여제를 상대로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오히려 참 용한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난 비무가 클라이막스에 이르기 전까지의 과정에서도 최소한 두 번 정도는 약간 늦게 대응책을 내놓은 적이 있으니 그 때 이미 패한 거였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자옥령에 대한 최종 결론은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싸워보고 싶은, 그러나 결코 적이 되고 싶지는 않은 상대’였다.

“내가, 졌소.”

나는 깨끗이 항복 선언을 하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두 팔을 뒤쪽에 짚은 채 맑은 물 속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왜 그런지 몰라도 웃음이 나와서 한동안 공연히 싱겁게 피식거렸다.

그러다가 비무가 시작되면서 잊고 있던 참관인 종소가 생각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은 멀찍이 떨어진 언덕 위로 대피해 있는 상태였다. 근데 표정이 참 뭐랄지… 대단한 결투에 감탄했다기보다는 ‘저게 무슨 논검이야?’라고 질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훗-! 하긴, 구체적인 시범을 보이느라 사방에 도강이며 장력을 날려 댄 통에 내 주위의 자연환경은 개판으로 망가져 있었다. 그건 자옥령 쪽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그녀와 가까운 곳의 몇몇 나무들 중간쯤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는 모습은 계절에 맞지 않는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후후~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북천여제… 당신 정말 강하군. 진짜로 싸운다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겠어.”

한판 뜨고 나니까 웬지 더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무심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비무가 끝나자마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너무 예의를 밥 말아먹은 태도인가 싶어서 난 뒤늦게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 쪽으로 자옥령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진하사님의 마지막 공격을 전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옥령은 새삼 바위에 박혀있는 정글도를 살펴보더니 다시 자신의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막아낸다 하더라도… 제 검이 과연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그렇지 않소. 당신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을 거요. 게다가 그 마지막 공격도 실은 정말 운이 좋은 거였소. 또 그런 상황이 된다 해도 회전하는 정글도의 손잡이를 발로 정확히 포착하여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소.”

사실이었다. 발로 차는 타이밍도 그렇고 그 순간 내력을 추가로 주입하고, 동시에 정확하게 공격 방향을 수정하는 복합 동작… 조금 전에도 내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후후~ 나중에 더 연습해보고 성공하면 새로운 초식으로 이름을 붙일까 생각 중이오. 뭐, 그냥 쾌투족(快投足)이라던가……”

일단 비무가 끝났으니 다시 좋은 분위기로 바꾸고 싶어서 농담을 해 본 건데 자옥령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럼 족발도(足發刀)… 하하핫~! 역시 이상한가?”

에구구- 아무래도 자폭 개그 했나 보다. 여기 사람인 자옥령이 돼지족발을 알 리도 없는데 무슨……

“…종소! 이제 내려오너라.”

무심한 방청객(?) 자옥령은 종소를 불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명성 높은 남해오신룡(南海五神龍)의 일원으로 대접해 주는 것 같더니 좀 가까워진 최근에는 종소를 나이 차 많은 막내 동생쯤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넌 앞으로 독(毒)을 버리고 본격적인 무도(武道)를 걷겠다고 했다. 오늘 우리의 비무를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자옥령의 말에 종소는 쭈볏대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종소를 내려다보며 자옥령은 비로소 작게 웃었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지. 너의 신중함이 마음에 드는구나.”

잰 그냥 내성적인 것뿐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종소가 칭찬받는 건 나도 좋으니 그냥 참견 말아야겠다.

“무인에게 필요한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시도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 탐구심이라 할 수 있다. 생사금마도결이라는 전설의 무공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하사님의 모습을 넌 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 아니… 그건 그게……”

난 조금 버벅대다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분위기에서 그건 내가 원래 개념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고백을 하기도 그렇고 참… 에구구… 종소가 벌써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날 올려다보고 있다. 으~ 설마 종소가 내 썰렁한 네이밍 센스만 배우는 건 아니겠지? 나중 남해오신룡으로 복귀한 종소가 적들에게 ‘내 족발검을 받아라!’ 혹은 ‘이 검법은 내가 개발한 순대검이다’라고 외친다거나……

엄한 상상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좀 불안해서 가급적 나 같은 타입을 배우면 안 된다는 말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망설이고 있자니까 갑자기 공터 한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천우신을 앞세운 조예린 공주가 공터 입구에 나타났다. 은비, 동비 두 의녀의 부축을 받으며 숨을 할딱이고 있는 걸 보면 꽤 서둘러 달려 온 듯 싶었다. 조예린 공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연파괴의 현장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옥령…! 네가, 네가 대체 무슨 짓을……”

조예린이 여전히 숨가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자 갑자기 요정몽이 눈앞에 떠올랐다. 녀석은 자기보다도 큰 거울(?)을 힘겹게 들고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그렇게 제공된 거울을 보니, 에구- 아까 피를 도로 삼킬 때 조금 흘렸나보다. 나는 서둘러서 소매로 입가를 닦아내고 흐트러진 머리며 행색을 대충이라도 가다듬었다.

그러나 곧 가까이 다가와 내 상태를 살펴보는 조예린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어, 언니……”

기가 죽은 자옥령이 고개를 숙이자 조예린은 대뜸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 것아~ 나 몰래 뒷산에서 진하사와 뭔 짓거리를 한 거냐아~’라고… 외칠 리가 없지.

내 머리 속은 왜 이리 툭하면 삼천포로 빠지는 지 모르겠다.

“논검이라 하지 않았느냐! 진하사님께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 호승심(好勝心)은 이 언니를 무시할 정도였던 것이냐?”

자옥령을 향한 조예린의 추궁은… 무서웠다.

과연 대제국의 공주답다고 할까? 병약한 인상임에도 항상 자연스럽게 기품이 느껴지던 모습에 분노가 더해지자 저 자옥령을 압도할 정도의 카리스마가 발산되고 있었다.

“아,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우린 실제로 단 한 번도 서로 칼을 부딪친 적조차 없고……”

내가 나서서 한참을 설명하고 말짱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나서야 조예린은 겨우 진정하는 듯했다.

“하아~ 내가 공연한 욕심을 부려서 두 분 자매의 의를 상하게 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마무리로 내가 오히려 고개를 숙이자 조예린도 황망해 하며 마주 고개를 숙이고… 뭐, 그렇게 그럭저럭 사태는 수습이 되었다.

사이 좋은 의자매라고는 생각했지만 조금 전의 상황으로 보면 거의 친자매 수준으로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형식적인 언니라면 ‘야단을 치는’ 상황까지 나오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력을 다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예린 공주가 달려온 바람에, 나는 다소의 쪽팔림을 감수해야 될 것 같았다. 난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웃으며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면서 천우신에게 전음을 보냈다.

< 이봐. 모르는 척하고 저 바위의… 내 정글도 좀 뽑아 줘. >

내가 한 거지만, 젠장. 깊숙히도 박아 놨다.

같은 날, 밤.

늦게까지 운기조식(運氣造息)으로 완전히 몸을 회복시킨 후 눈을 뜨자, 대뜸 요정몽이 나타났다.

[ 하여가안~! 항상 우리의 권고는 콧등으로 흘려들으시는 분이네요. 조심하시라고 누차 강조했건만 기어이 그렇게 몰두해 버리시다니…… ]

“후후-! 너무 그러지 말라구. 기왕 하는 거 그 정도는 해야지 한판 뜬 실감이 나는 거 아니겠어?”

[ 흥~! 이제 난 주인님이 곤란한 상황이 되어도 결코 도와드리지 않을 거라구요! ]

“음… 아깐 깜박했는데. 거울 고마웠다. 네가 아니었으면 조예린 공주가 더 흥분해 버렸을 텐데… 정말 고마워!”

[ 그, 그랬어요? ]

순식간에 표정이 풀어져 버리는 요정몽. 원판 몽몽에게서 완전 독립을 이룬 후에는 어째 더 단순한 성격이 된 것 같아서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누웠다.

그나저나…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웬지 쉽게 졸음이 몰려오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자옥령의 강함을 직접 체험해 봐서 그럴까? 당근 그녀에게 이성으로써 반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닌데도 자꾸만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존경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분야의 최고에 이른 사람에 대한 경탄 같은 거라고 할까……?

음… 과거, 베일에 쌓여있던 북해빙궁의 자옥령이 처음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실 매우 불미스런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북해빙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주민들의 비율이 여자가 적은 편이어서 종종 중원이나 다른 지역에서 배우자를 구해 가는(약탈해 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북해빙궁의 식구가 된 여자들 중에서 가끔 중원의 친정으로 나들이를 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그녀들은 자신들이 탄 마차에 북해빙궁의 깃발을 달아 소속을 밝힌다고 한다.

머나먼 중원의 친정까지 나들이 올 수 있을 정도면 북해빙궁 내에서도 상당한 신분의 여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 마차를 중원 사람들은 한빙거(寒氷車)라고 부르며 터치 불가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뭐… 늘 그렇지만, 그런 존재를 굳이 건드려서 명을 재촉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인데 그 전까지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딱 두 번 그런 경우가 있었고 그때 광분하여 쳐들어 온 북해빙궁의 남자들은 한빙거를 건드린 사람과 그 소속 단체까지 눈오는 날 눈 쌓일 틈도 없이 밟아 주고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 궁주 ‘빙하황 자청인’의 대에 이르러 드디어 역사적인 세 번째의 한빙거 사건이 터졌는데 이게 또 범인의 죄질이 상당히 나빴다.

조홍산장은… 우리 시대로 치면 재벌기업쯤 되는 돈 많은 가문이다. 그 산장의 망나니 후계자가 겁도 없이 수하들을 동원해 한빙거를 습격한 장본인이었다고 하며, 그 망나니 재벌2세는 한빙거의 주인인 미녀를 우연히 목격하고 한 눈에 반해서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미녀는 마침 남편이 사망한 미망인이었다니 잘하면 정당한 ‘로맨스’가 될 수도 있었건만…

“그 Dog망나니는 확보한 빙궁의 미녀를 능욕한 것은 물론이고 증거인멸을 위해 그녀와 그녀의 호위병력들까지 싸그리 죽여서 암매장해 버렸다는 것이다.”

Dog망나니께서는 평소 참아 본 적이 없는 욕정을 또 그렇게 풀어 버린 것일 뿐이었겠지만… 그런 썩은 머리로 완전범죄를 꿈꿔봐야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사고 발생 시기는 겨울, 그리고 실종된 한빙거 주인의 행방을 추적하던 북해빙궁의 고수들이 끝내 범인을 밝혀낸 것은 반년쯤 지난 한여름이었던 모양이다.

그 해 여름 조홍산장의 정문에는 북해빙궁에서 남긴 포고문이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피해자의 사망 1주기가 되는 겨울에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였다. 그리고 약속했던 계절이 돌아 왔을 때 조홍산장은 단 한 명의 심판자에게 처절한 응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으음~ 몽몽…! 오늘밤은 아무래도 간만에 영화 한 편 때리고 자야겠다.”

[ …혹시, 자옥령의 과거에 관한 것입니까? ]

“그래. 자옥령이 조홍산장에 나타났던 때를 만들어봐. 오늘 비무 데이터가 있으니 더 실감나게 만들 수 있겠지?”

[ 그렇습니다. 구성에 4분 28초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

“좋아, 부탁해.”

눈을 감고 잠시 기다리자, 곧 익숙한 초대형 스크린이 허공에 펼쳐졌다. 전에는 우리 시대 영화를 패러디하여 썰렁무쌍한 자막이 나왔었는데 오늘은 전부 생략하고 바로 시작되었다. 나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분으로 영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역시 계절은 겨울. 땅도 나무도 집도 온통 하얗게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몽몽이 재현하는 조홍산장은 최소한 우리 시대 우리나라의 창경궁 크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규모였다. 메인 건물 앞의… 축구 경기를 벌여도 됨직한 넓이의 앞마당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모여 서 있었다. 매우 다양한 행색의 사내들이었지만 하나같이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온 고수들이었고, 그들의 시선은 모두 커다란 정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그 크고 두꺼운 목재 문짝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사내들이 일제히 긴장하여 각자의 병기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부서진 문짝 사이로 후욱- 눈발이 날려 들어왔다. 마당에 쌓인 눈 위로 작고 하얀 맨발이 디뎌지며 사박 소리를 냈다. 잠시 쉬고 있던 잿빛 구름이 다시 흰 눈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막 정문을 통과해 들어 온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가 눈보라를 몰고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모여 서 있는 사내들은 조홍산장 장주의 인맥에 의해 초대되거나 막대한 재물에 고용되어 몰려든 정사마 전반에 걸친 고수들이다. 점창파의 차기 장문으로 꼽히는 ‘만검자 전위형’처럼 거대 문파의 핵심 인물들도 있었고 다른 자들도 각각 만만찮은 명성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두 사고가 일시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을 작은 키에 앳된 얼굴의 소녀 자옥령은… 그러나 나이에 비해 조금도 어설프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먼저 적들을 압도해 버렸던 것이다.

홀린 듯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내들의 면면을 가만히 살피던 자옥령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죄인은… 어디에 있지요?”

그제야 사내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자옥령이 부수고 들어온 문 너머의 상황을 뒤늦게 파악하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자옥령이 지나 온 행로 양쪽으로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조홍산장의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면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로군요.”

자옥령은 눈보다 창백한 맨발을 들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눈 위로는 더 이상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대신 지나치게 긴 끈에 매달린 검집의 끝이 눈 위에 일직선을 그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자옥령이 다시 차갑게 내뱉었다.

“비키세요.”

사내들은 움찔했지만 아무도 그 말에 따르지는 않았다. 그녀의 첫 번째 상대는 공여검군 이단역이라는 중년 남자였는데 당시의 산동 지방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다는 고수였다는데 자옥령에게는 단 열 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 이어 한동안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한 명씩 교대로… 그러다가 결국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검무를 추는 자옥령의 검 끝이 갈수록 서늘한 바람을 일으켰고 새하얗게 피어오른 눈 안개가 그 바람과 함께 그녀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보라를 일으킨 것인지 눈보라가 바로 그녀인지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의 장관이 펼쳐지면서 적들은 차례차례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저게 바로 얼어붙은 계절의 자옥령이로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정신없이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사이 수십 명의 고수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고 누워 싸움이 끝나 있었다. 자신의 두 발로 서 있는 것은 자옥령과 적들 중에서 가장 젊은 약관의 청년 고수, 단 두 명뿐이었다. 점창파의 만검자 전위형은 갑자기 검을 도로 검집에 넣으며 옆으로 물러서 길을 텄다.

“…몽몽. 여기서 중지!”

나는 영화를 멈추고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 다음 이어질 건 자옥령이 한빙거를 덮쳐서 강간살인을 한 개망나니를 찾아 아작 내는 장면일 텐데… 그 것도 시원한 장면이긴 할 테지만, 오늘 굳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날 처음 만났던 만검자 전위형과 북천여제 자옥령이 몇 년 후 재회했을 때의 상황도 볼만할 것 같지만 지금은 만검자의 자료가 부족하니 그건 나중에 만들어 보기로 하고…

“몽몽, 싸움 장면만 계속 반복해 줘. 전황 변화는 랜덤…”

…대교야. 이건 어디까지나… 천하제일인에 가깝다는 고수의 싸움이기 때문이라구.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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