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5-1화 : 애증(愛憎)의 옛 고수.(1)
5-2. 애증(愛憎)의 옛 고수.(1)
자옥령과의 논검…치고는 과격했던 비무가 있었던 다음 날 오후.
나와 천우신, 금동이 삼인조는 다시 길을 나서게 되었다.
조예린은 내가 아무래도 생명의 은인이다 보니 꽤나 아쉬운 기색으로 나중 꼭 그녀의 백아(白鵝, 신수성녀 전용 민간의료 지원선. 진유준 하사 추억록 각 권 군데군데 참조.)를 방문해 달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물론 삼태자 조명환 전하에게 갈굼 당하는 만약의 사태가 아니라면 내 쪽에서 그녀를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하여간 난 마음속으로 중국의 여자 슈바이쳐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앞으로는 자신의 행복도 찾을 수 있기를 빌어 주었다.
자옥령 같은 경우, 인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별다른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약간 냉기가 가신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자옥령은 얼마 후 대천마와의 한판 승부 때 다시 만날 예정이라 지금 헤어지네 마네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 통과!
마지막으로 종소가 문제였는데… 녀석은 처음으로 사귄 동물친구 금동이와의 이별이 서러워 눈물을 글썽이며 좀처럼 금동이의 팔을 놔주려 하지 않았다.
금동이 녀석도 한참을 미적대며 난처해하는 것 같다가 결국에는 우리를 따라 나섰는데… 마치 ET와 지구 소년의 아름다운 이별 장면 같았다고 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사실 우린 지가 원하기만 한다면 배신때리고 종소에게 남는다 해도 인정해 줄 생각이었는데… 녀석은 역시 의리파 원숭이였다.
나 같은 경우, 암흑기(?)의 한국 무협지에서처럼 ‘이 여자를 살리려면 이게 유일한 방법!’을 외치면서 천하 제일미 겸 황실의 공주를 뚝딱 해치우고, 이어 초미녀 고수와 무공 한 판 뜬 걸 인연으로 전혀 다른 한 판 뜨기로 넘어가는 그런 삐리리~ 한 이벤트가 발생할 위험을 모두 피하여 순결을 지키는데 성공했으므로… 음… 좀 오버인가…?
하여간 난관을 극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해결하였으므로 비교적 발걸음 가볍게 출발할 수가 있었다.
얼마 후, 뜨거운 여름 햇살을 두 공주로부터 선물받은 방갓으로 가린 나와 천우신은 인적 드문 산길을 걷고 있었다.
조금 전 종소와 눈물의 이별을 했던 금동이도 자기 몫의 작은 갓을 쓰고 있어서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모습이었다.
동굴을 떠난 후부터 계속 어제의 논검비무에 대해 묻던 천우신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결국 자넨 자신이 완벽하게 패배했다는 말이지?”
“자꾸 강조하니까 웬지 기분 나쁘지만… 하여간 그렇게.”
“흐음~ 그런데 왜 북천여제 또한 자신이 승리한 비무가 아니라고 하는 걸까?”
“그거야 그녀가 내 체면을 봐줘서 그런 거지 뭐.”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던데… 어쨌거나 대단하군. 우리 천이단에서는 앞으로 적어도 십 년 동안은 북천여제와 비슷한 연배에서 그녀와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인물이 나오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거든. 미안하네. 솔직히 난 아무리 자네라도 당장은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네. 자네가 몇 년 더 생사금마도결을 수련한다면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아니 날 과장해서 평가할 필요 없어. 그 여자… 정말 징하게 강하더라구. 만약 앞으로 그녀와 진검 승부라도 할 일이 생긴다면 난 그냥 튈… 아니 하여간 피할 생각이야. 뭐… 이젠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말이야.”
“동생의 복수를 끝내고 나면 대교 아가씨와 함께 무림을 떠나겠다는 말… 기어이 실행할 생각이로군.”
“그래. 대천마 노인네에게 한 방 먹이는 일이 끝나면 굳이 여기 머물고 있을 필요가 없지. 대교와… 음… 그래 그녀와 함께……”
막상 대교 얘기를 꺼내고 나니 공연히 불안해져서 나는 슬며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천우신도 뭔가 감을 잡았는지 굳이 캐묻지는 않을 기색이었다.
“…그보다 우신. 정말 자네가 직접 안내를 할 생각이야?”
“응? 아… 그야 자네 덕에 중요한 의뢰를 깨끗하게 마쳤으니 당분간은 자네와 함께 다녀도 될 것 같네. 자넨 이제 지겨울 지 모르지만 말일세. 하하하~”
천우신은 슬쩍 아까 떠난 동굴 쪽에 슬쩍 시선을 주더니 정말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었다.
천이단의 짱이라는 숨겨진 신분이 있긴 하지만, 그의 본래 태생은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공신 가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녀석이나 천이단 자체가 황실의 비밀 수호 조직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1차적인 정황증거로, 천이단의 역사는 현재의 황실보다도 길다.
명문 귀족 집안의 자제가 어쩌다 천이단 같은 조직의 짱이 되었는지 그 사연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자신의 겹쳐진 신분 때문에 이번 의뢰에는 상당히 부담감을 많이 느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하무림 쪽의 일은 오랜만에 직접 맡아보고 싶기도 해. 후후~ 사실 꽤나 재미있는 인간들이거든, 구중천을 이끄는 자들은 말이야.”
그건 그럴 것도 같다. 지금이야 구중천을 구성하고 있는 마군(魔君)들이 예전 마군들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를 못해서 각각의 마군들은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고, 지하무림도 몇 백 년 전처럼 사마외도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현재에도 정사마를 막론하여 구중천을 무시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심지어 비화곡 조차도 구중천은 함부로 취급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건 비화곡 내에 북두살성(北斗殺星) 마오천 장로처럼 구중천 출신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어 시간이 더 지났을 때쯤 산에서 나온 우리는 천이단에서 준비해 준 마차를 타게 되었다.
마차로 본격적인 이동을 시작한 후 나는 역시 천이단에서 받은 보고서를 읽어보았는데, 그건 전에 부탁했던 흑련(黑聯)과 천인군도(賤人群島)의 최근 동태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가장 가까운 흑련부터 들를 생각이겠지?”
천우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써 조사해 준 건 고마운데… 아무래도 바로 구중천부터 가야 할 것 같아.”
“흐음~ 뜻밖이군.”
천우신은 나름대로 상황을 분석해보는 듯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보고서에서 나와있듯, 흑련 같은 경우는 겉으로야 지하무림과 별도의 연합체이지만 련주인 ‘오륜마군(五輪魔君) 마삼진’이 구중천 출신이니 자네가 마군황으로 등극했을 경우 굳이 손댈 것도 없이 자네의 영향력 아래가 될지도 몰라. 하지만 천인군도의 경우는 좀 다르고, 흑련 역시 그간의 오륜마군의 탈 구중천 행각을 보면 확실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굳이 구중천을 먼저 치겠다는 건가?”
“응. 상황이 좀… 변했거든. 빨리 진행해야 할 필요가 생긴데다, 그럴 수 있는 변수도 발생했고…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사실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야.”
‘필요’는 물론, 타이밍 안 맞게 나타난 것도 모자라 또 무슨 짓을 저지를 지 알 수가 없는 미래 여자 싸가지의 존재 때문이고… 일의 진행을 빨리 할 수 있는 ‘변수’란 내 원판 신분의 부활이다. 본래 흑련과 천인군도를 따로 접수하려고 했던 건 그보다 몇 배나 어려울 것이 분명한 마군황 등극이 실패했을 경우의 보험으로 생각했던 거였다. 그러나 지겹게도 또 부활한(?) 원판의 카리스마라면 천인군도를 빼고도 충분한 전력의 군소 사마외도 세력들을 규합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원판의 육체를 원격조종(?)하는 건 아직 불안한 요소가 많아서 함부로 하기는 꺼려지지만… 어쨌든 꼭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실행할 수 있는 방법(다소 무식한)이 있다. 도를 닦는다거나 하는 건 내 취미나 특기가 결코 아니지만, 그 동안 비록 얼·결·에라 고는 해도 꽤나 자주 영체 들락날락을 체험해서 그런지 조절 요령을 감 잡는 것이 어찌 금방 될 듯 싶기도 했다.
“하여간… 그렇게 되었으니, 바로 구중천으로 가세. 아니, 그들을 소집할 수 있는 장소로 가는 게 정확한 표현이려나?”
“알겠네. 그리고… 또 내게도 말해 줄 수 없는 이유로 일정변경이라… 후후~ 변함없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친구로군.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자네의 그 숨겨진 비밀들을 모두 밝혀낼 때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게.”
“마~음대로 하게. 그게 자네 특기이자 취미이니, 나도 말릴 생각없네.”
내가 짐짓 태연하게 반응하자 천우신도 피식, 웃는 것으로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천우신의 방금 말은 사실 무지하게 신경 쓰이는 ‘선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녀석은 본래 정보 수집 전문가인대다 원판과 나의… 결국 전부 나에 대해서는 특히 스토커 수준으로 관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그 동안 좀 친해졌다고 내가 너무 방심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설마 정말로 내 주위에도 항상 천이단의 감시를 깔아 놓은 건 아니겠지?”
“…솔직히 그렇게도 하고 싶었네만, 자네가 어지간해야지 말야. 자네의 무섭도록 날카로운 이목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나무들도 없고……”
정보 수집대상 주변의 엑스트라 급 인물들… 길에서 옆을 지나가는 행인이라던가 길거리 노점상, 주변에 아무도 없을 환경이면 그냥 은신술로 몰래 접근하는 방식 등을 의미하는데, 이 가장 기본적인 첩보 수법을 천이단에서는 목이(木耳)라고 부른다고 했었다.
“게다가 자넨 평소 같이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없어 서 심지어 대교 아가씨에게도 말을 아끼는 것 같으니 땅의 목소리를 듣기도 어렵고……”
땅의 협조라는 건 말 그대로 지이(地耳)라 칭한다는 데, 대교와 그 동생들처럼 나와 개인적으로 무지 가까운 사람들이나 시중드는 시녀 등의 주변 인물들을 포섭하거나 여하간의 방법을 동원해 그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는 수법을 의미했다.
“다름 아닌 나 자신만이 자네에게 통하는 지이라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거참! 웬지 씁쓸하기도 하고 그렇군.”
우정과 전공에 대한 자부심이 충돌하는 듯 천우신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천이단에게는 단체명의 유래인 천이(天耳)라는, 나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단계의 정보수집 노하우가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까지 내 비밀이 안 들킨 걸 보면 정말로 하늘에 귀가 달린 건 아닐 것이다. 음… 게다가 지금 공연히 엄한 일에 가뜩이나 빡빡한 두뇌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아- 그보다 유준.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내 생각에는… 음… 아무래도 구중천이 옛날의 그 구중천이 아니니, 자네가 그 점을 더 유의해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옛날의 그 구중천이 아니라는 점……?”
“그 옛날 패도광협 유운일이 최초로 마군황의 신화를 이루어 지하무림을 통일했을 때… 그들은 패도광협이 자신들을 죽음의 길로 이끌었을 때조차 군말 없이 따랐을 정도로 절대적인 충성을 다했지. 결국 그로 인해 지금의 약화된 지하무림이 된 셈이니… 다름 아닌 생사금마도결의 전인인 자네가 다시 마군황에 도전한다고 하면 그들은 어쩔 수없이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걸세.”
어…? 그게 또 그런가? 사실 난 패도광협 선배의 전설 중의 하나가 마군황이어서 내가 더 쉽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확실히 구중천에게 있어 패도광협 선배는 영원한 존경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원망의 대상인… 애증의 존재일 수도 있겠다. 이런, 제기… 내가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었던 건가?
“구중천과 지하무림이 마군황의 탄생을 열망했던 유래를 생각한다면 지금도 마군황의 권위는 분명히 유효하겠지. 하지만 조심하게. 내 생각에 지금의 지하무림은 자네를 결코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을 걸세.”
“…충고 고맙네. 그 점을 미처 생각 못했어.”
나는 간단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약간 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패도광협 선배… 그 동안 계속 도움이 되어 주어서 약간(?) 좋아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려나…? 쳇…! 하여간 나에게도 애증의 존재라니까, 그 옛날 아저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