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5-2화 : 애증(愛憎)의 옛 고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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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35-2화 : 애증(愛憎)의 옛 고수.(2)


5-2. 애증의 옛 고수 (2)

공주들과 헤어져 구중천을 찾아 떠난 후 칠일째 되는 날. 출발하던 당일 천이단을 통해 구중천에게 마군황 도전 의사를 밝혔었는데, 정중하게 날 초대한다는 식의 문구로 된 구중천의 답신이 이제야 도착했다. 좀 뜻밖인 건 난 아직 내가 누구라는 걸 밝히지 않았는데도 그걸 묻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무림인 누구나 알고 있는 전설의 마군황에 도전할 정도의 배짱이라면 실력을 따로 검증할 필요도 없다는 뜻인가? 뭐… 어찌되었든 그들이 지정해 온 도전 실행 장소가 다행히 나와 몽몽이 지금까지의 기록을 조사해서 뽑아 놓았었던 지역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천이단이 해당 지역 상세 지도까지 구해 준 상태라 작전 짜기에 더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아, 물론… 거긴 구중천 중의 리더격인 ‘초사마군(貂蓑魔君)’의 세력권이니 지리를 알아도 그들이 더 잘 알겠지만 말이다.

우린 기다리는 동안 노느니 뭐하냐는 심정으로 예상 지역들의 중간 정도 지점을 목표로 해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약간은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칠일이나 먼저 출발해서 전체 기간으로는 상당히 이득인 셈이었다.

목적지가 확실해지자 운전병(?) 천우신은 좀 더 의욕 있게 60트럭… 아니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헌데… 웬일일까? 정작 전투를 치러야 할 특공병인 내가 갈수록 의욕과 투지가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마군황 도전이란 게 솔직히 너무나 빡세기는 하다. 수백 년 동안 합격자가 달랑 한 명이었을 정도로 어렵다는 이 시험… 더구나 점수 미달이면 진짜 목까지 써겅~ 해버리는 거니 왕년에 우리 시대에서 치러봤던 입시지옥은 게임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시험인 것이다.

뭐어 그렇다고 겁먹을 나는 아니다. 나도 이 시대에 와서는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면서 무공과 깡다구 그리고 잔머리에 기타 등등(?)까지 업그레이드 시킨 역전의 용사다. 심지어 내가 넘나든 사선은 말 그대로 진짜다. 음… 간단히 말해서 시험 빡세다고 겁먹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난 충분히 우등생(?)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날짜가 가까워져 올수록 왜 이리 심난해지는지 모르겠다. 대학 입시 수험생 우울증도 아니고…

“이봐 우신. 이쯤에서 잠깐 세워 주겠나?”

“응?”

내 부탁에 천우신은 조금 의아한 모양이었다. 내가 세워 달라고 한 장소는 객점이라던가 여행 중에 필요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 그냥 특징 없이 조용하기만 한 산길이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갑자기 뭔가 떠올라서 말이야. 잠시 좀… 부탁하겠네, 친구.”

뜬금없는 내 요구에도 천우신은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인기척도 없고 조용한 것이 자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에 좋은 장소인 것 같군 그래, 친구.”

무림인이 운기조식(運氣造息)이나 깊은 명상에 빠지겠다고 친구에게 알린다는 의미는, 그 시간 동안 친구에게 호위를 맡기겠다는 뜻이다. 명문가의 도련님이자 막강 정보조직의 짱인 녀석이 나와 다니다 보면 운전병에 보디가드에… 하여간 모든 시대의 부모님들 말씀이 맞다. 친구 잘못 만나면 고생인 것이다.

어쨌든 나는 천우신과 금동이 콤비에게 경호를 맡긴 채, 길가의 적당한 바위 뒤로 돌아가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지난번에 원판의 육체로 돌아갔을 때 이후로 나는 틈틈이 몽몽의 권고를 따라 명상으로서 유체이탈과 복귀를 스스로 조절하는 걸 시도했었다. 그러나 무공 익힐 때 빼곤 언제 그딴 걸 제대로 해 봤남? 스스로 무아지경에 빠지기 전에 그냥… 다리만 아팠을 뿐이다.

“…몽몽. 유체이탈 조절, 아니 원판 육체와의 접속… 지금 다시 해봐야겠다.”

[ 뭔가 감각이 느껴지신 겁니까? ]

“아니, 왠지 그냥… 지금 해보고 싶어서. 일단 너의 알람은… 1시간으로 해둬.”

내 애매 모호한 말에도 몽몽은 군소리 없이 따르기 시작했다. 몽몽이 조심스럽게 내 몸의 신경계를 조작하자 나는 마치 잠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조용히 가사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잠시가 지나자 어두웠던 주변이 문득 조금 밝아지는 듯하면서 몸이 풍선처럼 둥실 떠오르는 듯한… 이제는 그리 낯설지도 않게 된 느낌.

후우~ 점차로 유체이탈의 감각에 익숙해지는 건 좋은데, 그럴수록 내가 점점 비인간적이 되어 간다는 생각에 씁쓸해지기도 하는군. 그리고 여기까지를 몽몽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또 이상한 점이다. 명상으로는 택도 없지만 현천기공을 이용하면 나 스스로 육체를 가사 상태로 만드는 것이 언제라도 가능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스스로 가사 상태가 되었을 때는 잠이 든 것처럼 한없이 막연한 기분만 들었을 뿐 유체가 몸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음… 어쨌거나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일은 원판의 육체와 접속하거나 그냥 내 몸으로 복귀하는 걸 시도하는 것뿐이다. 지금까지는 몽몽이 내 육체를 깨워주기 전까지 그 두 가지 중 하나도 성공해 본 적이 없었다. 이탈을 자꾸 반복하면서 바뀐 것은 유체 상태일 때의 기억이 깨어났을 때도 많이 뚜렷해졌다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실은… 지금도 갑자기 뭔가 성공할 것 같아서 시도를 해 본 건 아니었다. 그냥… 마군황 도전을 앞두고 심란해진 기분 속에서 충동적으로 한 행동인 것이다. 그리고 막상 하고 보니 이건 또 뭔 짓인가 싶기도 하다. 내가 무슨 개그 만화 속 인물도 아닌데 영혼 단계로 현실도피한 것 같기도 하고… 쯧! 하지만… 적어도 현실도피는 아니다. 사실 마군황 도전을 그렇게 두려워한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래 대체 난 뭐 하러…

…어? 어랏…? 뭐야 이거…? 어? 어!

나는 슬며시 눈을 뜬 다음, 변함없이 무기력하면서도 용케 항상 기동을 해주는… 내 세 번째(?) 팔을 들어 올려 V자를 그려 보였다.

“합체 변신… 영혼 군발 로보… 진유준. 제 2호에… 세 번째 도킹 성공!”

잘 돌지도 않는 혀로 유치한 대사를 중얼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작게 울먹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변함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여장원판… 아니, 진하연의 얼굴이었다.

“오, 라버니……!”

“아,하. 또 걱정… 시켰구나. 미안.”

누운 채인 내가 힘없이 웃어 보이자, 진하연은 내 가슴에 엎드려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격렬한 반응은 아니지만 여전히 오라버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절절이 느껴지는 진하연의 머리 위에 한 손을 얹었다. 쳇~! 그렇게 애를 써도 안되더니……

“요령이란 게 결국… 이런 거였나…? 순수한… 순수하게……”

나는 눈을 돌려 진하연 뒤쪽에 서 있는 나의 그녀, 대교를 올려다보았다.

“보고 싶어하는 마음……”

대교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때보다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조용히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전처럼 괴의(怪醫), 닥터 양에게 진찰을 받으면서도 계속 대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바라보나 내가 아닌 자를 보고 있는 대교… 그래서 나 역시 대교를 항상 그리워하면서도 이 육체로서는 싫다는 마음이 족쇄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처럼 견딜 수 없게 될 때까지 말이다.

“대교…! 조금 더… 야윈 것 같은걸?”

“그런… 가요?”

“그래.”

“사람들은 더 예뻐졌다고 하는 걸요.”

“훗~! 그래?”

내가 웃자, 대교도 따라 웃었다.

“…그래도 식사는 제때에 해. 잠도 충분히 자고……”

“그럴게요.”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 보여.”

“…곡주님도요.”

우린 또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별거 아닌 얘기 몇 마디 하는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심이 된다. 이미 2년 정도나 ‘죽음’을 경계로 헤어져 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이번의 짧은 이별에는 크게 동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라 이건 좀 더… 훨씬 안정된 분위기였다.

“흥~!”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진하연이 낸 소리였다.

“오라버니 눈에 난 아예 보이지도 않나 봐?”

“아냐… 그럴 리가 있나.”

“아아~ 대교 동생은 좋겠다. 님께서 눈에 담아 꺼낼 줄을 모르네.”

으~ 이 자식, 그런 말을 잘도 태연하게……

진하연은 짐짓 샐죽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정말 삐친 기색은 아니었다.

“내 잠시 오라버니를 대교 동생에게 양보하겠어요. 하지만 오늘 식사는 함께 해야 해요.”

“아니, 그럴 수 없어. 난 곧… 다시 잠들 거 같거든.”

“예?”

돌아서던 진하연이 흠칫 놀라 멈추었다.

“괴의처럼 뛰어난 의원이 모르는 것을… 환자 본인은 느낄 수도 있지.”

“그, 그래서요. 이번엔… 이번엔 언제 깨어나실 수 있다는 거죠?”

나는 내가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잠시 망설였는데, 그 사이 진하연은 숨도 쉬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몰라.”

하는 수 없이 일단 솔직히 말하고는 무조건 씨익웃어 보였다.

“나도 잠들어 있을 때는 잘 모르겠다. 글쎄… 늦으면 두 달 정도? 혹은 그보다 조금 빠를지도… 미안하구나.”

진하연이 그제야 하아숨을 토해냈다.

“…알겠어요. 오라버니는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니 믿겠어요.”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진하연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이번엔 그리 오래 깨어 있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녀석은 처음 말했던 것처럼 바로 나와 대교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내가 떠날 때는 저 녀석 하연이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이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아가씨의 곡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에는 저도 가끔 숙연해질 때가 있답니다.”

“그야… 음, 크흠! 그럼 너는 어떠냐?”

뻔한 걸 괜히 물었나? 말하다 보니까 괜히……

“예? 아, 저는… 후훗~!”

엣! 얘 봐라? 웃어? 그것도 대답 회피의 의미로? 뭐야. 옛날처럼 ‘곡주님에 대한 신앙심은 제 영혼을 걸고 보증할 수 있으며…’ 어쩌고 그딴 식의 소리는 안 할 줄 알았지만 이건 어째 좀……

“뭐, 뭐냐. 넌 나를 사랑하지 않고 믿지도 않는다는 말이냐?”

“…곡주님께서 제게 뭔가 숨기시는 일이 있는 이상, 저도 뭔가 하나는 숨기고 있어야지요.”

뭐야? 곡주와 대등하려고 드는 것도 그렇고, 숨긴다는 게 사랑과 신뢰에 대한 대답…?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린가……?

“야, 사실 내가 너에게 숨기는 비밀은 하연이에게도 마찬가지란 말야.”

“흥~! 저는 하연 아가씨와는 다른 걸요?”

우오우~! 그동안 대교 많이 컸다, 컸다 그래왔는데, 이제 보니 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 멀리 하늘을 날고 있었잖은가.

“후후. 제가 곡주님을 놀라게 해 드렸나요?”

“그래. 그렇지만……”

나는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네 모습이 더 좋다. 곡주와 수하라는 신분 때문에 내게 너무 거리를 둔 모습보다는 말이야.”

“그런 말씀하시면 저 앞으로 더 버릇없어질지도 모릅니다.”

“하하~ 마음대로 해.”

나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웃었다. 막연히 그녀를 보고 싶어 왔지만 그녀의 보고 싶은 모습만 보게 되어 더 행복한… 그런 기분이랄까? 난 몽몽에게 복귀 시간을 너무 짧게 지정한 것이 아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면회(?) 시간이 몇 분이나 남은 건지를 잘 모르겠다. 지금의 2호 신체는 생체시계가 너무 불규칙적이고 더구나 유체이탈 상태였을 때 보낸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유체 상태에서는 시간관념에 대한 감각이……

“아니, 그런 생각하는 시간도 아깝다.”

“예?”

“아, 아냐. 그보다 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말야.”

나는 별거 아닌 질문인데도 공연히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약간 뜸을 들이고서야 말을 이었다.

“넌 그… 패도광협 유운일이라는 인물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어. 그와 같은 사내가 너의 이상형이라고… 에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젠장. 이 기집애 갑자기 왜 그렇게 배시시 쪼개는 거야? 으… 그래도 하던 말은 끝까지 해야겠지?

“너 그러면서 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지? 난 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이지 않나?”

어, 야~ 웃지 마. 그것도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재밌어 죽겠다는 듯 큭큭대는 그런 웃음은… 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곡주님이……”

내가 뭐~?

“너, 너무… 귀·여·우·신 것 같아서……”

허어어억-!

“죄송합니다! 소녀가 지나쳤습니다!”

막상 말하고 나니까 지도 이건 너무했다 싶었는지 비로소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 예상치 못했던 강펀치를 맞아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건 그… 예전에 꼬맹이 조카아이에게 ‘삼촌 귀엽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아니, 그건 종류가 좀 틀린… 하여간 이 녀석, 감히 싸나이에게 그딴 모욕적인 소리를……

“야, 너어~”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못 이겨 이를 악물며 이불을 부여잡고 몸을 부르르 떨고 대교를 무섭게 노려보며 간신히 외쳤다.

“그러니까! 어떤 남자를 좋아하냐니까?”

으으~ 왜 또 돌발적으로 쿡, 소리를 내느냐고 응?

“죄송. 용서하세요.”

대교는 결국 다시 표정을 수습하고는 새삼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곡주님께서… 설마 제게 그러한 것을 물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그게 뭐 어때서?”

“이상한 질문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아니, 알겠습니다. 대답해 드리지요. 저는, 대교는……”

그, 그래……

“두 분 다 좋아합니다.”

으윽! 이, 이럴 수가! 대교 본색…! 그녀의 정체는 알고 보니 바람둥녀?

“후후일단 그렇게 답하겠습니다.”

뭐냐? 일단이라니. 그럼 이단은 뭐고 삼단, 사단도 있다는 거냐? 대체 뭐냐고오~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까지 불리는 패도광협 유운일 대협과 비화지천(秘花之天) 독각와룡(毒角臥龍) 진하운 곡주님… 두 분은 물론 비교하기가……”

어어-? 으이런 제기! 대교가 뭔가 설명을, 이단인지 삼단인지 몰라도 하여간 하려고 그러는데 하필 지금… 으으~

“자, 잠깐! 나, 나 지금은 일단……”

“곡주님!”

안색이 변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교의 모습이, 전처럼 급속도로 멀어지며 어둠 속에 묻혀갔다. 나 역시 마지막으로 “일단”이라는 말을 남긴 채… 우라질~!

“으……”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다른 신체로의 접속에 성공하신 겁니까?]

“…그래. 성공했어. 하지만……”

지금 또 바로 돌아갈까? 마군황 도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천천히 대비해도 되지 않을까?

[특별한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잠깐만……”

나는 잠시 호흡과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대답했다.

“글세… 문제라면 문제지. 적어도 접속에 필요한 게 뭔지는 알게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다시 접속을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몽몽의 말에 다시 유혹이 생기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대교의 이단 삼단 생각이 엄청 궁금하긴 해도… 아무래도 나중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선은 내가, 이 진유준이 마군황의 자리에 올라 조금이라도 패도 선배에게 가까워진 후에 말이다.

“흐음. 표정이 밝은 거 보니 뭔가 훌륭한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군. 축하하네, 친구.”

기꺼이 내 호위를 서줬던 천우신이 마차를 출발시키며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군. 고맙네, 친구.”

어쨌든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대화가 끊기는 바람에 처음엔 광분해서 돌아가려고 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오늘 듣지 못한 게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나중에 들어도 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녀를 만나고 왔다는 거고… 또 내가 앞으로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내가 처음부터 삐딱하게 대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오늘은 대교의 달라진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독립적인 여인으로서 훨씬 당당해진 모습 말이다.

아, 생각해보니까 내가 좀 전에 만약 또 바로 접속했다면……

결국 다시 깊은 의식불명 상태로 들어간 비화곡주. 그의 연인 대교는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려 정성스럽게 다독거린다. 그가 다음에 깨어날 때를 기약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너무나 가련하고 애잔한 모습의 그녀… 그때 그가 번쩍 눈을 뜨며 외친다. “하던 얘기 계속 해!” –

이런 식이 되었을 테니 아무래도 상당히 썰렁했겠지?

대교와의 면회를 마치고 온 후 다시 기운이 난 나는 다시 마군황 도전 준비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마군황 시험은 자그마치 한 달에 걸쳐 치르므로 체력 비축도 중요해서 우선 술 담배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았고 일류 요리사(천우신)의 도움으로 매일 고영양식을 충실하게 먹었다. 물론 소화 잘되게 운동(무공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몽몽과 매일 작전 회의를 열며 연구하고 가상 현실로 실전 연습도 하고… 하여간 꽤나 빡센 일정이었다.

아참! 연옥도에서 강호로 복귀하자마자 천우신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놓은 내 “비밀 무기”가 최근에야 완성되어 (주)천이단 택배(?)로 도착했는데, 그거 연습하는 시간만큼은 정말이지 순수하게 재밌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수험생(?) 생활은 신수성녀의 동굴에서 떠난 지 이십 오일 만에 끝이 났다. 구중천의 영역으로 접어들어 약속된 장소를 코앞에 두었을 때는 아직 해가 많이 남은 오후였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좀 끌어야겠다 싶어서 적당한 곳에서 운기 조식을 하며 지하무림과 마군황이란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지하무림의 마군황 선출 방법은 아주 간단 명료하면서도 엽기 무식이다.
한 달 동안 단신으로 전 지하무림 고수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참으로 어이없는 지도자 선출 방법이긴 하지만, 당시의 지하무림은 지하무림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사실 지하무림은 출신이 비천한 계층이라는 점과 수많은 머릿수가 중국 전역에 퍼져 있다는 점에서 떼거지 개방(丐幇)과 많이 닮아있다. 그리고 본업이 거지인 개방처럼 지하무림인들도 각기 본업이 있다. 전국 주방장 연합이니, 길거리 노점상 연합, 전국 나무꾼 연합… 대충 그런 식의 조직 아닌 조직들의 총 연합이 바로 지하무림인 것이다.

이 지하무림도 다른 문파들처럼 세월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강호에서 은연중에 힘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오직 무공만 파고드는 명문 정파들보다 개개인의 무공 실력이 떨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지만, 나름대로 발전시킨 무공 중에는 명문가들도 한 수 접어 줄 만큼 고강한 것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데도 여전히 강호에서는 지하무림을 잘해야 3류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 거지들이 당하면 전 중국의 거지들이 개떼처럼 몰려오는 개방과 달리, 지하무림은 서류로만 같은 소속이지 각각 따로 노는 성향이 너무 강해서 다른 조직이 위기에 처해도 도와주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전 조직원이 다 같은 거지인 개방과 달리, 지하무림의 구성원들은 직업이 가지각색이었기 때문에 직업상으로 서로 라이벌이거나 아예 원수인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단합이 안 되는 지하무림이다 보니 오랜 세월 이 조직 저 문파에게 이리 깨지고 저리 밟히고… 그러다가 결국 모두의 오기가 발동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아니, 오기라기보다는 자신들 생존 자체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나 많고, 그 수만큼이나 개성이 있는 군소 조직들이 용케도 모여서 통일된 지도부와 보스를 선출하는 데 합의를 본 것이었다.

“물론 일단 모였다고 해서 일이 그리 쉽게 될 리가 없었다. 서로 자기한테 유리한 보스 후보를 내세우다 보니 후보자들이 툭하면 암살이나 당하지 않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우리들이 아무리 죽이려해도 못 죽이는 분이라면 모시고 살 수밖에 없지’라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지도자 선출을 시도할 수가 있게 되긴 했는데… 그게 또 무수한 인재들이 후보로 나섰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치게 될 뿐이었다. 그 당시의 다른 강호인들은 ‘영원히 지도자를 가질 수 없는 자들’이라는 말로 지하무림을 비웃었다고 하던가?”

“그렇지만…!”

그 당시 지하무림 사람들도 결코 삽질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마군황’이라는 절대 충성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자 그의 권위에 걸맞는 지도부를 형성하는 건 훨씬 빠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장에는 마군황이 탄생하지 못했어도 처음으로 각 조직의 이해관계를 떠나 만들어진 지도부만큼은 그 역할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었고… 그 지도부가 그토록 원하던 하나로 통일된 지하무림의 기틀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게 바로 지금의 구중천(九重天)이다.

운기조식을 잠시 멈추고 눈을 떠보니 천우신은 금동이와 함께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봐, 우신.”

“응? 왜 그러나 유준.”

“내 생각에는… 지하무림 사람들 스스로도 마군황이란 존재가 정상적으로는 결코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 같아. 그래도 그런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면 그를 보좌할 지도부 역시 무조건 능력 위주가 될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목적은 마군황이 아니라 구중천 탄생이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군.”

“음… 그럴듯한 분석이야. 나 역시 비슷한 가정을 한 적이 있네. 그보다……”

“응?”

“덕분에 금동이 한테 졌네, 친구.”

그러고 보니 천우신이 허공에서 돌리던 여섯 개의 공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옆에서 금동이가 기뻐서 춤추고 있었다.

“덕분에 아끼는 소홍주(笑鴻酒)를 잃었네.”

“…말 걸어서 미안하네. 계속하게 친구.”

나는 모르는 척 다시 눈을 감았다. 음… 소홍주를 걸었다면 금동이가 졌을 경우 금동이에게 정말 엄청나게 이상한 음식을 먹여 볼 생각이었던 모양이군. 공부(?)하다 잠깐 숨 좀 돌리려고 했더니 틀렸군. 이어서 마군황 도전의 핵심 체크나 다시 복습해야겠다.

  • 한달 동안 단신으로 전 지하무림 고수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음…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사실 핵심은 별거 없다. 우선은 ‘한달’이라는 기간으로 보아 정말로 지하무림 전체를 상대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현실적으로 지하무림 사람들을 전부 만나려면 한 달 아니라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한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결국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엄선된 인원으로 시험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하무림에서 마군황의 신비를 유지하기 위해 그 숫자를 멋대로 부풀려 소문을 퍼트려 놓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천, 혹은 몇 만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천이단의 정밀조사 결과로는 패도광협 때의 숫자가 대략 천명 정도. 그리고 실제로 현재까지 이 지역에 집결한 인원도 그와 비슷하다고 한다.

물론~! 1 VS 1000 같은 경우도 터무니없기로는 마찬가지이다. 일반인도 천 명이나 칼을 들고 덤비면 끔찍한 판국인데 그들 전원이 엄선된 고수니까 말이다. 그러나 두 번째 포인트… 그건 그 천명과 전부 싸워서 이기라는 얘기가 아니라 ‘살아 남으라’는 조건이다. 즉, 이건 아주 실전적인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얘기다.

부대에 있을 때, 우리 대대 전원이 수색 작전에 나선 적이 있었다. 거의 뒷동산 수준의 작은 산 하나를 정밀 수색하는 거였는데… 작전에 나서기 전에 누군가가(아마도 짬밥 낮은) 연병장에 주욱 늘어선 대대 병력과 그 기세를 보며 ‘이 정도면 저 산 속에 뭐가 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옆의 분대장 한 명이 피식 비웃었었다.

“부대 안의 말년 하나 못 찾는데 무슨……”

그렇다. 이발소에서 놀고 있거나 창고에서 자고있는 말년 병장 혹은 하사 때문에 부대원 모두가 수색에 나섰다가 못 찾고 탈영신고 할 뻔한 일도 있었다. 대한민국 군대 말년은 한 번 짱 박히면 못 찾는다. 같은 말년이 찾아내지 않는 한! 그리고 나도 제대 전 말년을 거치며 짱 박힘의 묘의를 터득한 몸이고 말이다.

음… 좀 엄한 비유였나? 하여간 요는, 잘만 짱 박히면 굳이 한달 내내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물론 정말로 한달 내내 짱 박힐 수 있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 어쨌든 여기엔 비겁이고 뭐고 없다. 본래 규칙이 그거인 거다. 패도광협 선배도 설마 한달 내내 싸우기만 하지는 않았을……

“이보게, 이보게 유준!”

갑자기 불러서 눈을 떠보니 길가 방향으로 서 있는 천우신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심각해 보였다.

“아직 자네가 말한 시간은 되지 않았네. 하지만… 자네가 아무래도 저걸 좀 봐야 할 것 같아.”

대체 뭐야? 뭐가 나타났기에 그래? …뭐야. 장례 행렬? 어디 돈 많은 집 인물이 죽었나? 행렬이 꽤나 긴… 아, 잠깐만?

“저들이 향하는 방향은 이미 지하무림에서 장악하고 있는 곳일세.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으며 가고있다는 건……”

“같은 지하무림의 위장 병력이라는 얘기로군.”

“맞아. 게다가 방금 또 보고가 들어 왔었네. 다른 방향에서도 계속 의심되는 자들이 장사꾼 같은 일반인들을 위장해서 모여들고 있다하네.”

천 명에서 더 계속 플러스되고 있다고…? 이런 젠장! 이건 반칙이다. 무슨 시험이 당일 날 시험문제 수를 늘리는 게 어딨어?

“더구나 각지에서 대량의 독극물과 기름 등이 추가로 수송되어 오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네. 독극물 중에는 종류를 파악할 수 없는 괴이한 것도 있다하고……”

헉-! 거기다가 기출 문제를 무시하고 난이도까지 높였다구? 그럼 족보로 공부한 난 어쩌라구?

“패도광협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대체……”

계속 어두운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천우신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뜬금 없는 말을 꺼냈다.

“유준. 내 부탁하나 들어주겠나?”

그를 알게 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이 된 천우신이 내게 말했다.

“난 자네가 이번 일만은 그만 두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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