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6-1화 : 마군황(魔君皇).(1)
5-3. 마군황(魔君皇).(1)
천우신은 최고 정보단체의 짱으로서 ‘이번 미션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이건 이미 한 사람을 시험하고 어쩌는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내 우려대로 지금의 지하무림은 마군황의 탄생을 결코 원치 않는 거야.”
내가 봐도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내 발은 이미 움직여 이번에 쓰일 장비들이 놓여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천우신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봐, 유준! 자네는 누가 말리면 더욱 그 쪽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흠… 정글도야 뭐, 항상 기본 장비니까 그렇다 치고… 오랜만에 전투복에 탄띠까지 차려니까 기분이 새롭군.
“그렇지만 나도 이번만큼은 꼭 말려야겠네.”
탄띠 같은 경우 천이단에 부탁해서 비슷하게 만든 거지만 착용감은 우리 시대 오리지널보다 더 좋다. 여기다가 수통을 양쪽에 차고, 본래 탄창이 위치해야 할 곳엔 비슷한 크기로 작은 구급상자와 서바이벌 키트 상자를 장착한다.
“이, 이봐……”
내 바로 한 걸음 등뒤에서 천우신이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그 뛰어난 독문경공으로 순식간에 내 등뒤로 접근하긴 했지만 차마 날 공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내가 무심히 돌아보자 천우신은 흠칫 긴장하며 조금 물러섰다.
“응? 왜?”
내가 짐짓 모르는 척 하자 천우신은 질린 듯한 묘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었네. 불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포기하는 친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설마 이렇게… 즐거워 할 줄이야……”
천우신의 중얼거림 끝자락처럼, 나는 사실 지금 약간 들떴다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천우신이 모르고 있는 건 그 자신이 나를 흥분시켰다는 점이었다. 그가 무심코 내뱉은 ‘패도광협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 그렇다. 지난 번 내 슬럼프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거였다. 아무리 내가 성공해도 결국 패도 선배의 흉내일 뿐… 아니 나는 몽몽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그보다 훨씬 못하다,라는 생각이 계속 의욕을 깎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대교에게 갔다 오는 바람에 다시 어느 정도 의욕이 생기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패도 선배와 최소한 맞먹는 고지를 오르는 거지. 싸워서라도 말리려 했던 친구 천우신이 약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천천히 장비를 점검하며 챙겼다.
우선 전투복의 건빵 바지 양쪽에 육포 같은 비상식량이 가득 채워지자 약간 비둥스러운 건 물론이고 무게감까지 상당히 느껴진다. 그러나 이게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식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 빈약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건 수통 두 개 분량의 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욕심 같아서는 식량이 잔득 든 배낭이라도 메고 갔으면 좋겠지만, 그런 상태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도망 다니거나 칼부림하는 건 도저히 무리이다.
이번 싸움을 위해 내가 추가로 준비한 것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건 역시 등에 멘 가죽 속의 ‘활’일 것이다. 전에 고려무사 ‘신정안’이 활 쏘면서 싸우는 걸 봤을 때부터 나도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서 힘이 생기면 꼭 활을 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몽몽에게 신정안이 쓰는 활을 기본으로 설계를 해 놓으라고 했었고 이번에 연옥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천우신에게 제작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만든 건 이 나라 기술자라도 기본은 우리 나라 국궁(國弓)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헌데 이 활은 그냥 국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재질은 오하철(烏夏鐵)이라는 귀한 금속으로서 무지하게 강하고 탄력이 있다. 그리고 시위는 천잠사(天蠶絲)를 이용했기 때문에 절대로 안 끊어진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줄곧 연습하면서 확인해 봤지만 그 위력은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본래의 국궁도 사거리가 145미터 정도는 된다지만 이 철국궁은 웬만큼만 당겨도 기본이 200미터이다. 지금의 내가 내공을 이용해 최대한 시위를 당기면서 세운 기록은 최대 359미터였다. 물론 목표물에 적중되면 확실하게 꿰뚫는 위력 유지를 기준으로 말이다. 내가 좀 더 숙달이 되고, 거기다가 신정안처럼 활을 전문으로 한 무공을 익힐 경우 유효사거리와 위력이 얼마나 더 늘어날 지 몽몽 선생조차 추정이 힘들다고 했다.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웬만한 총기류만큼이나 강력하니 위력 하나만 보자면 현재 진하연이 보관하고 있는 K2가 아쉽지 않게 된 셈이다. 뭐… 원시병기의 공통적인 약점(화살의 수가 한정)을 지니고 있다 보니 상당히 아껴서 구두쇠처럼 써야 될 것 같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역시… 기존 장비 중의 최강이며 최후의 장비는 역시 이 녀석. 굳이 내가 점검해 주지 않아도 되는 녀석이다.
< 넌 특별한 이상 없지, 몽몽! >
[ 예. 모든 기능에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
[ 옛썰~! ]
< …요정 몽. 이럴 땐, 넌 좀 빠져. >
[ 히잉~ 그러시기예요? 여차하면 저두 도움이 될 수 있다구욧! ]
< 뭔 도움? 너의 유염한 자태로 적을 홀리기라도 해 주려고? >
[ 유염…? ]
< 대교나 하연이 정도 되면 요염. 너 같은 꼬맹이는 잘해야 유염. >
[ 으~ 대체 그게 뭐예엽! ]
< 하여간 넌 좀 빠지고…… >
요정 몽이 더 뭐라 투정을 부렸지만 무시한 채, 나는 천우신과 금동이 앞에 섰다. 금동이 녀석은 분위기를 전혀 감 잡지 못한 듯 멀뚱했지만 천우신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난 아직도 자네를 막고싶네.”
“후후- 아닐 걸? 정말 날 막고 싶었으면 아까 운기 조식 할 때 덥쳤어야지. 안 그래?”
내 말에 천우신은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 그건……”
“날 막지 못한 것도, 막고 싶어하는 것도 다 자네의 진심이라고 생각해. 어쨌든… 고맙네, 친구.”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게. 그래… 내 본심은 결국 보고싶은 거였어. 저 비화곡주가 인정한… 진유준이라는 남자가 과연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까지 가능한 사내인지 말야.”
날 인정했다는 비화곡주가 바로 나야. 넌 사기 당한 거라구…라고 말해 줄 수는 없기에 나는 그냥 피식 싱겁게 웃었다.
“암튼, 다녀올 게. 금동이 술 너무 많이 먹이지 말고.”
“여기서부터 혼자 가려는가? 좀더……”
“아니, 슬슬 혼자 가면서 발동을 걸어야겠어.”
“무운을 비네. 그리고… 조심하게.”
“한 달 후. 마군황이 되어 돌아오지. 자네의 그 멋진 요리를 다시 맛보러 말야.”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빙글 몸을 돌려 걸으며 뒤쪽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뒤에서 끼이 꺅갹하고 금동이가 천우신에게 ‘저 인간 어디 가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천우신과 금동이를 뒤로하고 출전을 하는 엄숙한(?) 순간……
[ 어쩐지…… ]
“응?”
[ 부부의 생이별 장면 같았어요. ]
“…우쒸~! 뭔 소리야?”
[ 후후~ 그냥 그랬다는 거예요. ]
요정 몽 이 자식, 좀 전에 무시당한 복수를 한 건가? 그래도 그렇지 무슨 비유가… 훗-! 그럼 천우신이 마누라고 금동이가 내 아들이냐?
요정 몽 녀석이 좀 분위기를 깨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내 전투모드의 스위치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까 장례 행렬이 지났던 갈림길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왼쪽은 그냥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이 세상의 길이요, 오른쪽 길은 지옥의 전장으로 향하는 입구라고나 할까? 그 오른쪽 길 조금 안쪽에 그것을 알리는 금빛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거기에 전장의 이름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魔). 군(君). 황(皇). 령(領). 마군황의 영토… 그 안으로 첫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길 양쪽에서 쏜살같이 몇 개의 인영(人影)이 날아오르더니 내 몇 미터 정도 앞에 내려섰다.
“령기(領旗)를 보고도 들어섰다면… 신분을 밝히시오.”
무공 수위는 별거 아닌데 목소리는 제법 분위기 있다.
“보면 몰라? 오늘 오겠다고 한 사람이잖아.”
내 시비조 대답에 녀석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나는 전에 구중천으로부터 받은 답장을 가볍게 툭 튕겨 선두의 녀석에게 날려보냈다. 녀석은 내가 날린 종이 서찰을 잡는 순간 힘에 밀려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서더니 기가 죽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서찰을 확인했다. 그래…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이 장면도 꼭 한 번 해 보고 싶어서 무지 연습했었다. 내공도 오버다 싶을 정도로 넣었는데 폼 좀 났으려… 응…? 그래도 이처럼 일제히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정중한 예를 표할 줄은 몰랐는 걸?
“후보자께서 도착하셨음을 알려라.”
편지를 받은 자의 말에 따라 다른 한 명이 뒤쪽으로 신호를 보내는 모습하며… 어쩐지 예상했던 것보다 조직적이라는 느낌이 온다. 그리고 신호가 가자마자 벌써 저만치에서 가마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마를 이끌고 온 중년의 사내가 정중하게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다.
“…구중천의 ‘안인’이라는 자입니다.”
전에 본 리스트에 의하면 구중천의 마군들 바로 아래쯤 되는 신분을 가진 자다. 비록 무지 날카로운 눈으로 날 살피고 있기는 하지만 대선(?) 후보에 대한 대접은 확실하게… 응?
[ 가마 밑에 다량의 화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탑승 직후 자동 폭파되는 구조는 아닙니다. ]
뭐… 이것도 대접이라면 대접이군. 시험장에 도착하자마자 일을 벌이는 녀석들이 기가 막혔지만 나 역시 처음부터 빼는 모습 보이기는 싫고 해서 일단 가마에 오르기로 했다. 모르는 척 오른 가마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몽몽이 재빨리 스캔해 주는 폭발물의 구조와 폭발 시의 위력 추정 화면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가마꾼들이 가마를 놓고 튀는 순간 최대한 경공을 발휘해서 튀면 간신히 회피할 수는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영 찜찜했다. 구중천을 만나서 최소한 내가 누구라는 걸 밝히고 그 반응을 먼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시작해야 하는 건가? 음… 결국 뒤쪽의 놈이 심지에 불을 붙이는 군. 달리는 중에는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를 잡아내기 어려울 거라는 걸 계산한 행동… 인 건 좋은데, 이 자식들 뭐야? 가마꾼들 누구도, 심지어 불을 붙인 놈도 가마를 놓고 튈 생각을 안 하잖아? 뭐야 이 것들! 나는 하는 수 없이 재빨리 정글도를 들어 가마바닥의 한 지점을 찍었다. 놀란 가마꾼들이 주춤거리며 멈추었고 앞에서 길 안내를 하며 달려가던 안인도 경공을 멈추며 돌아섰다. 그도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내가 정글도로 가마 바닥 아래의 폭탄 심지를 끊어냈다는 사실을 바로 감 잡는 거 같았다.
“어이~ 너무 하는 거 아냐? 정말 이렇게 시작하자는 거야?”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인상을 쓰기 시작한 나에게 안인이 다시 정중하게 상체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용서하신다면 곧 구중천 마군들의 인사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실례…? 실례 두 번만 했다가는… 쯧! 하는 수 없지. 일단은……
내가 턱짓으로 계속 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가마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발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첫 공격을 여유 있게 막아냈음에도 난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첫 공격이 ‘자살 폭탄 공격’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