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8-1화 : 진유준의 난중일기(亂中日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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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38-1화 : 진유준의 난중일기(亂中日記).(1)


5-5. 진유준의 난중일기(亂中日記).(1)

  • 2일 째.

…예감했던 대로 정말 긴 하루였다. 해가 진 후 세 시간이나 지난 현재는 다행히 추적대를 따돌리는데 성공한 상태지만……

<…아까 그 절벽에서 과감히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놈들과 씨름하고 있어야 했을 거야.>

[그렇습니다. 주간에 미리 뛰어내릴 장소의 안전도를 체크해 두지 않았다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으음~ 여긴 낯에도 잘 눈에 띄지 않는 위치이긴 한데… 밤새 안전할는지 모르겠군.>

[장담할 수 없으니 속히 수면을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래야겠다.>

매우 피곤한 상태여서 군말 없이 눈을 감았지만 웬일인지 금방 잠이 들기보다 낮 동안의 일이 TV 재방송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벽에 만난 매복 병력은 전날 겪었던 추적대와는 달리 각각 서너 명씩 조를 이루어 협공을 해왔었다. 비화곡주 직속 혈랑대(血狼隊)가 구사하는 혈재진(血才陣)과는 비교할 바 못되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훈련된 움직임이라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뭐, 나도 새삼 정신 바짝 차리고 상대했더니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문제는 거기서 생각보다 시간을 끌다 보니 결국 메인 추적대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전날의 교훈 때문에 개들도 몇 조로 나누어 동원했는지, 내가 쓴 약에 당하지 않은 듯한 사나운 개들이 먼저 달려와 내게 이빨을 드러냈었다. 다시 약을 쓰기 도 애매한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그 개들을 개 패듯… 음, 개를 개 패듯…? 당연한 말인데도 뭔가 이상하다. 하여간 개들은 일단 전부 줘 패서 정리했다. 그러나 그 사이 추적대는 개들의 뒤만 쫓아 온 게 아니라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이 포위망의 두께와 구성원의 수준이 어제와는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표면상 드러난 정황은 어제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큰 어려움 없이 적들을 쓰러트리며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포위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적들은 나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내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 방향으로 빠르게 병력이 보충되었던 건가…? 혹은 예상 도주로에 미리 배치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오전 내내 거의 쉬지도 못하고 싸워야 했다. 결국 내가 간신히 포위망의 허점을 뚫고 달아날 수 있었던 건, 해가 내 머리 꼭대기 위에서 싸움을 관람하며 낄낄대고 있을 무렵이었던 것이다.

간신히 추적대를 따돌리고 점심이랍시고 육포 몇 조각을 먹을 수 있었지만, 빌어먹을 놈들이 잘도 쫓아오는 바람에 식후 커피 한 잔 때릴 틈도 없이 오후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때부터는 지형 선택을 잘한 덕에 싸우다 튀다 쉬다 그러는 패턴을 비교적 적절하게 배합할 수가 있었는데… 그러다가 해질 무렵 다시 대규모 포위망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로는 또 지루할 정도로 비슷한 칼부림의 반복……

…결론적으로… 그래도 할만했다, 아직은. 하지만 내일은… 아니 얼마가 되었든 잠을 좀 잔 후에 다시 시작될 싸움은 어떨까…? 쳇…! 싸움 자체는 훈련 때보다 오히려 수월하다는 느낌인데도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한 걸까? 물론 실전이란 부담의 무게가 훈련 때와 다른 것이 당연하겠지만… 으음~ 이렇거나 저렇거나… 일단 자자. 그런 건 자고 나서 생각하자, 자고 나서……

  • 3일 째.

다행히 생각보다는 길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래서 비교적 말끔한 기분으로 전투를 시작했고, 그리고… 또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싸우고 또 싸웠다. 어제보다 더 늦은 시간에야 간신히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빡센 하루였던 것 같지만, 차츰 익숙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 4일 째.

어제와 동일했다고 해도 무방했고 어제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부터 짱 박혀 쉴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실전에 적응해가면서도 방심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긴장은 유지되는 상당히 바람직한 흐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4일 째지만 이대로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 5일 째.

역시 어제와 거의 동일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의 성과는 예정대로 상당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지역의 추가 지리 정보를 얻었다는 것과 아직까지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점. 문제는… 예상보다 조직적이고 끈질긴 추적과 공격 때문에 벌써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배부른 소린지 모르겠지만… 첫 날처럼 표창이며 화살, 창 등을 이용한 다양한 공격도 없이 오직 칼을 든 비슷한 수준의 놈들에 의해 계속되는 개떼 러쉬가 점점 지겨워지고 있다는 것!

<…그러고 보니, 몽몽. 이 것도 놈들의 작전이 아닐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지루해서 죽게 만들려는… 훗~! 너무 썰렁한 농담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저도 의심하는 중이었습니다. 적들은 단순화된 패턴으로 주인님의 경계심을 무디게 하는 작전을 진행 중인지도 모릅니다.]

어…?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런 작전도 있을 수 있겠다. 실제로 며칠 째 비슷한 싸움이 반복되니까 차츰 내 싸움 패턴도 그에 맞춰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다른 패턴의 다양하고 강력한 공격이 시작된다면……

< 머리로는 대비하고 있다 해도 몸에 익은 패턴을 한 순간에 바꾸는 건 어렵겠지…? 아무리 내가 적응력의 황제, ‘진적응’이라 해도 말야. >

[ 그렇습니다. 이 것이 적의 의도된 작전이라면 대책이 필요합니다. ]

대책이라, 으음~

< …몽몽. 지금까지 내가 처리한 사냥개들이 몇 마리나 되냐? 아니,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저께 이후로는 사냥개들이 동원되지 않고 있지? >

[ 지금까지 총 27마리가 주인님에 의해 후각을 잃거나 운동 능력을 잃을 정도의 부상을 당했습니다. 지하 무림에 더 이상의 추가 동원 여력이 없다기보다는 주인님의 효과적인 대처에 의한 사냥개 역할의 효력 상실로 인해 동원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 그렇다면, 좋아! 오늘은 네 시간 정도만 잔 다음… 새벽부터 곧 바로 반격에 들어간다. >

[ 반격이시라면…… ]

< 뭐… 별건 아니야. >

사실 순수한 반격이라기보다는 2-3일 후부터 시작할 생각이던 ‘식량 보급’ 작전을 앞당기는 계획이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같은 싸움이 반복되거나 더 심해질 테니까 아직 체력 소모가 덜한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 놈들의 ‘지루박 작전’에 대응하는 ‘식모 변비 작전’ 정도… 랄까? >

[ 그건 또 뭔 소리래요~? ]

< 요정 몽, 넌 심각할 때는 껴들지 말랬지? 이젠 애매한 강원도 사투리냐? >

[ 흥-! 이상한 건 주인님이시라구요. 무슨 작전 명이 그래요? ]

< 적들이 아무래도 ‘지루’하게 나가다 갑자기 ‘박’ 터지게 하는 작전을 쓰는 것 같아서, 나는 ‘식’량 ‘모’으기 겸 전황에 ‘변’화를 주는 ‘비’상 작전으로 반격에 나서겠다는 거다, 왜! >

[ 에구~ 꿈보다 해몽이 좋다더니, 주인님은 하여간…… ]

< …넌 닥치고! 원판 몽몽! >

[ 예. 원하시는 기간 동안 요정 몽의 활동을 제한하겠습니다. ]

< 그럴 거까진 없겠지만… 일단 내 취침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 >

[ 우~ 너무해요. 최근에는 계속 구박만 하시고! 두고 보시라구요오! ]

윽, 이젠 내게 협박까지…? 저 녀석을 정말 몽몽 시켜서 정신 교육이라도 좀 시켜야 하는 건지 원.

네 시간 후. 나는 예정대로 몽몽의 알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으……?”

무심결에 약간의 소리를 내던 나는 몽몽의 다급한 쉿~! 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어야 했다.

[ 실은 주인님께서 수면을 취하는 사이 적의 병력이 멀지 않은 거리에 나타났습니다. 약 1시간 23분 전, 적들은 52미터 전방에 매복 진을 펼쳐 현재까지 안착한 상태입니다. ]

이런…! 웬지 다른 때보다 몸이 무거운 듯한 느낌이 더니만 내가 잠결에 소리를 낼까 봐 몽몽이 몸을 제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제어권을 주인인 나에게 다시 넘긴 상태지만 나는 계속 누워 움직이지 않은 채 내공을 집중시켜 청력을 높여 보았다. 불쑥 커지는 주변 풀벌레 소리를 넘어, 보다 먼 곳의 기척을 더듬거려 보고 있자니까 몽몽이 다시 말을 이었다.

[ 병력 이동 배치 때의 움직임으로 보아 이 쪽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온 것 같지 않아서 주인님의 휴식을 우선으로 했습니다. 제 판단이 잘 못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

< …아니, 그건 특별히 잘 못한 것 같지는 않다만… 음, 잠시 대기 해줘. >

52미터라고 하면 꽤나 먼 거리 같지만 야간에는 소리가 좀 더 멀리 가게 마련이고, 심지어 부대에서는 음향 전달 효과를 다음과 같이 배웠었다.

풀잎 밟는 소리 – 70미터.
작은 나무 가지 밟는 소리 – 100~130미터.
군화발 소리 – 150미터.
소총의 격발 소리 – 100~150미터.
몽둥이(?) 부딪치는 소리 – 600미터.
구령 소리 – 500~100미터.
야전삽 소리 – 1000미터.

물론, 그런 예시들은 구체적인 상황과 사람에 따라 수치가 제멋대로 바뀔 테고… 실제로 정확히 거리를 재가며 훈련을 한 적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내가 매복 설 때는 밤에도 은근히 주변에 잡소리가 많아서 대항군이(훈련 때 적군 역할을 하는 병력) 침투할 때의 소리를 예시와 같은 거리에서 적발(?)해 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내공을 이용해 오감의 능력을 몇 배나 높일 수가 있는 몸이다. 그런데도 적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 …매복 병력의 수준이 상당한 것 같아. 안 그래도 매복 병력보다는 이동 중인 녀석들을 습격할 생각이긴 했지만…… >

그 외, 액션 영화 같은데 보면 수많은 병력들이 수색 작전을 펴고 있다 보면 그 중 뒤에 처진 병사를 주인공인 특수부대 대원이 소리 없이 습격하여 어두운 구석으로 끌고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곤 하지 않은가. 나 역시 그런 방식을 택할 생각이었던 건, 숨죽여 짱 박힌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놈들보다야 자기 자신과 동료들의 걸음 소리가 주변을 어지럽히는 상황의 녀석들 상대하는 편이 쉬울 것 같아서였다.

< 분명히 그랬기는 한데…… >

어찌 되었든 눈앞에 진을 친 적을 피해서 후퇴하는 거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낯과 달리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린 지금 상태에서는 더욱 말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엎드린 자세로 바꾸며 말을 이었다.

< …좋아! 여기부터 시작한다. 몽몽! >

[ 옛! ]

< 요정 몽 불러. >

[ 예? ]

< 필요해서 그러니까, 녀석의 행동 제한을 풀어 줘. >

몽몽은 내 뜬금없는 명령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고, 나도 사실 요정 몽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하여간 녀석은 곧 뾰로통 한 모습을 드러냈다.

< 네가 웬일로 말이 없네? 정말 삐쳤니? >

[ …흥! 절 가둬 놓고 주무시니까, 속이 시원하시던가요? 돼지꿈이라도 꾸셨어요? ]

[ 징계 차원에서 이번에는 요정 몽의 행동 제한과 함께 외부 정보도 차단했었습니다. ]

호오~ 어째 다른 때와 달리 화가 풀리지 않았나 했더니만… 몇 시간 동안 외부 정보가 차단된 상태였다 는 건 요정 몽에게는 그야말로 독방에 ‘감금’된 상태였었던 셈이다.

< 훗~! 화 풀어 임마. 심각한 상황에서 네가 자꾸 분위기 깨니까 그런 건데… 앞으로는 몽몽에게 널 가두지는 말라고 할게. >

[ 정말…요? 약속 지키셔야 해요?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

< 후후~ 알았다. 대신 너도 앞으론 너무 까불지 좀 말고. >

[ 알았어요. 헤헤~ ]

흐음~ 갈수록 이중인격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체라는 실감이 나는 군.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보다는……

< 자아- 난 지금부터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할 거야. 방해하지 말고 따라 오도록 해. >

[ 넵! 조용히 구경만 할게요. ]

기운차게 대답한 요정 몽이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녀석에게 피식 웃어 보인 후, 낮은 포복 자세로 천천히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일단 과감히 나서긴 했지만… 일반인들의 몇 배나 되는 감각으로 날 경계하고 있을 적과의 거리 52미터가 520미터, 아니 5200미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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