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8-2화 : 진유준의 난중일기(亂中日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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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38-2화 : 진유준의 난중일기(亂中日記).(2)


5-5. 진유준의 난중일기(亂中日記).(2)

출발이 과감했던 것처럼 얼마간은 비교적 수월하게 움직였다. 먹이를 노리는 네 발의 야생 짐승처럼 낮은 자세로 천천히 기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전신 근육에 무리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 육체 단련도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가야 하는 거리 중에서 절반 정도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쯤, 근처의 나무에서 정체불명의 밤새가 푸득 소리를 내고 날아올랐다. 순간적으로 내 호흡과 동작이 멈칫했다.

새가 날아올랐다지만 그건 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이 정도 거리까지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이성적인 판단에도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나는 잠시 움직이지 못한 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내가 직접 겪어본 사람들 중에서 이런 침투 작전의 최고 엘리트라면 바로 흑주(黑蛛)와 사영(死影) 두 사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그 두 사람과 맞짱 떠 이길 자신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그건 정면 대결일 때 얘기고… 아무래도 그들의 환상적인 인법(忍法)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나름대로 군대에서 침투 훈련 꽤나 해봤고, 이 시대에 와서는 최고의 보법(步法)까지 익혔기 때문에 단지 ‘소리 없는 접근’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솔직히 난 실전이나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그들처럼 노리는 상대에 대한 살기나 투기를 말끔하게 감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책을 생각해 본 끝에 임시방편으로 떠올린 것이 요정 몽의 활용(?)이었다.

[ 깜짝이야! 뭐야, 저 이상한 새! ]

낮게 투덜대는 요정 몽을 흘끗 쳐다보니 녀석은 재빨리 두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 괜찮아. 그리고 솔직히 나도 놀랬어. >

[ 그쵸? 정말 못된 새였어요. ]

< 이 상황에서 새를 탓 하긴 좀……. >

[ 하지만 하필 주인님의 중요한 작전 수행 중에 그럴 게 뭐예요? ]

내 사정 알고 배려해 줄 새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여하간, 요정 몽은 내가 말을 받아 준 걸 침묵의 제한을 풀어 준 것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녀석은 죄 없는 새를 씹는 걸로 연 말문을 좀처럼 닫으려 하지 않았다. 근데… 난 무엇보다 녀석이 적이 듣는 것을 염려하는 듯 매우 조심스럽고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소곤대는 것이 오히려 웃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차피 요정 몽의 목소리는 나한테 밖에 안 들린다.

[ 어, 어…? 큰일 날 뻔했다. 그 계열의 나뭇가지는 꺽어지는 소리가 디게 크다구요. 왼발의 돌맹이! 돌맹이! ]

요정 몽이 계속 나름대로 날 위한 답시고 지껄였지만… 나의 움직임은 표면상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바람에 사삭거리는 풀숲을 그 리듬에 거스르지 않으며 헤치고, 내 몸에 닿자마자 달각거리려는 돌멩이 등을 부드럽게 제자리에 고정시키면서 서서히… 그러나 꾸준한 속도로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갔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새벽의 숲은 어딘가 밤바다를 닮아있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부유하듯 자연스럽게 헤엄쳐 가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몽몽의 안내 없이 내 감만으로 길게 돌아 온 눈앞의 숲 속에 과연 적이 있기는 한 건가…라는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문득, 근처 어딘가에서 다시 후두둑~! 날개 짓 소리가 났다. 아까 날아갔던 새가 돌아 온 것일리는 없겠지만… 하여간 새가 내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부근을 사냥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조금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가까워 진 것만으로도 이 신 새벽 뻘 짓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거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요정 몽이 다시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소곤댔다.

[ 주인님, 정말 대단하세요.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다니…… ]

< 에? 뭐? >

에구구~ 놀라서 그만 기척을 낼 뻔했다. 바로 눈앞!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나무 옆에 웬 놈팽이 하나가 내게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 에…라뇨? ]

< 그, 그냥… 음… 하여간 이제부터는 정말 조용히 해라. >

[ 넵! ]

으음… 무심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게 좀 지나쳤었나 본데… 어쨌든 상당히 기묘한 느낌이었다. 말이 등을 보인 거지 내 위치는 매복병으로부터 약간 대각선으로 앞쪽이라 상대가 고개만 살짝 돌려도 바로 나와 눈이 마주칠 지경인데도 내 접근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안녕~! 하고 말을 걸며 나타나서 놀래 키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참고, 그냥 조용히 손을 뻗어 놈의 목 뒤 혈을 짚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의식을 잃고 기울어지는 녀석의 몸을 살짝 부축하여 다시 나무에 기대 고정시켰다. 그러는 중에도 계속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현재 위치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다른 매복병이 더 있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떤 방향에서도 이쪽에서 일어난 소리 없는 이변을 눈치챈 기색이 없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비로소 낮은 한숨을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이제 비법을 완전히 터득했다…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이번 작전만은 해낼 수 있다는 삘~이 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매복병을 처리 한 후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다른 매복병 10명까지 모두 정리한 끝에 결국 무사히 12번째 마지막 매복병의 등 뒤에 서게 되었다. 그때까지 처리한 자들과 복장이 조금 다른 것이 아무래도 조장쯤은 되는 듯했지만 내 접근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웬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마지막 매복병 뒤에서 잠시 뜸을 들이고 서있었다. 완벽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번 새벽 작전은… 지겨울 정도로 반복한 훈련 덕에 기계적이면서도 세심한 움직임을 유지하면서도 요정 몽 덕에 적당히 이완된 정신… 그런 조화가 이룬 성과이다. 어떤 면에서는 수십 명의 강적들을 맞짱으로 박살 냈을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 흐흐흣~! …땡쓰, 요정 몽. >

[ 예? 제가 뭘요? ]

요정 몽은 내 전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제가 뭔가 했나요?’,
‘뭔가 도움이 됐어요?’라는 소리를 반복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적절한 이완효과를 넘어선 정신 사납다 수준까지 가버리는 요정 몽과 함께 나도 조금 더 풀어져서 결국 짧게 아함 하품을 했다.
갑작스런 내 기척에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당혹과 경악의 표정을 연이어 떠올리는 상대의 목에 정글도 칼날을 댔다.
상대도 그 짧은 틈에 단검 같은 걸 뽑아 든 상태였지만 섣불리 그걸 사용하지는 못한 채 굳어져 있었다.
놀라는 와중에도 새삼 주변의 상황을 살피는 기색으로 보아 자신 외의 매복 병들이 어떤 상태인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 번 더 길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으아하아아아함~! 험. 으음… 음… 자네 소속은?”

뭐,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고
그냥 여유있는 태도로 그런 거 물어 보면 폼 날 거 같아서 해본 소리였다.

“…인사마군(湮蛇魔君) 휘하의 석하군(石下軍)……”

어랏? 얌전히 소속을 밝히… 아니, 얌전히는 아닌가?

“대장, ‘불초’!”

낮은 외침과 동시에 녀석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 얼굴로 날려보냈다.
예상을 뛰어넘는 스피드로 순식간에 날아드는 단검을 나는 왼손으로 정확히(?) 잡아챘다.
날카로운 칼날이 내 얼굴로 향해 있는 단검의 손잡이를 잡아 쥐고 있는 자세 그대로 슬쩍 불초란 사내를 살펴보니
녀석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며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반격이 먹힐지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래 훈련이 이렇게 되어 있는 건지 몰라도
녀석의 다른 손에는 암기 같은 게 아니라 신호탄이 들려 있었다.
막다른 상황의 적이 펼친 예상 밖의 일초…
그걸 가뿐하게 막아낸 자신에게 뿌듯해하는 건 좋은데 반성도 좀 해야 하려나?
막판이라고 쓸데없이 여유를 부리며 폼 잡았는데,
만약 대응에 실수해서 저 신호탄이 터지기라도 했다면 바로 사방의 적들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난 전날보다 훨씬 더 일찌감치 몰려든 적들과 하루일과(?)를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녀석이 뭔가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내가 먼저 발끝으로 녀석의 급소를 찍어 기절시키는 건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불초라는 자가 별다른 예비 움직임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이렇게 빠르게 날려보낼 줄은 몰랐기에 나도 좀 놀랐고,
그래서 사실 그걸 피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는데…
거기서 본능적으로 내민 내 손아귀에 정확히 단검의 손잡이가 잡혀 줄줄은…

< 오늘은… 끝까지 뭐 좀 되려나 보네? >

그 달콤하고 맛난 새벽잠을 희생한 대가는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는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매복 명 전원 제압 완료 후 내가 한 일은 다시 모두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뒤져서 쓸만한 물건들,
특히 비상식량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내겐 다행히도, 하룻밤 이상의 매복이 계획된 부대였던 건지 12명분을 다 모으니까
내가 처음 지니고 왔던 비상식량의 두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거의 비워져 가던 건빵 주머니와 수통을 다시 꽉꽉 채우고, 남는 건 적당히 분할하여 숲 속 여기저기에 짱 박고…
그러고 있다 보니 어느 사이 주변이 확실하게 밝아져 있었다.
나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매복 병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짱 박혀서 다시 눈을 감았다.
녀석들의 장비나 비상식량으로 보아 독립적인 매복 부대인 것 같으니 이상이 생긴 것을 다른 부대에서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고…
그래서 그 사이 더 퍼질러 자면서 쉴 생각이었다.

< 어쨌거나… 이번 작전의 평가 점수는… 수행 과정에 80점. 마무리 뻘짓에 마이너스 10점… 운빨로 다시 플러스 6점… 근데 식량 확보율은 점수로 환산하기가 좀…… >

[ 저기, 그 평가 기준이 뭐예요? ]

< 그야 내 맘대로 지 뭐. >

[ 그런 게 어딨어요? 사후평가를 정확히 해야 앞으로 발전이 있다고 한 건 주인님이시잖아요.
작전 중에는 긴장 푸시라고 격려성 멘트만 했지만 사실 반성하셔야 할 부분도 많았다고요. ]

< 호오~! 니가 웬일로 철근탑재형멘트(철든 소리)를 다 하냐? 그럼 니가 한 번 평가해 볼래? >

[ 에- 주인님의 이번 작전 수행 중 미비했던 부분은 말이죠,
우선 작전 수행 시간대 선택에 있어서는 별다른 감점 요인이 없어요.
하지만 작전 수행 시간의 과도 사용에는 문제가 있었구요.
그 요인으로는 주인님답지 않게 과감성이 부족한 행동 패턴을 들 수 있는데
이건 해당 훈련 성적이 미비한 데 대한 자신감 부족으로 인한…… ]

흐음- 요정 몽이 웬일로 녀석답지 않게 세밀하고 객관적으로 분석을 다하네 그래?

[ …그러니까 아까 거기서는 왼쪽 발끝을 1.4센티 더 들었어야 했다구요.
손끝에 주어야 할 힘이 2g 정도 부족해서 풀숲 헤치는 소리의 리듬이 자연적인 흐름보다 0.6초 늦어졌고…… ]

근데 어째 좀……

[ 분당 호흡수를 2회 감소하는 대신 매회 0.6ml의 대기 흡입률을 높여야 행동 유지에 더욱 효율성을 높이는 게 가능하니까 유의하시고요.
신체 부위 다각도 동시 사용 시 통제 유실되는 루트… 음, 주인님도 아시죠?
주인님은 왼손 새끼손가락 움직임이 다른 부위보다 반응이 늦다는 거. ]

이 자식, 예전의 지 오래비(?) 몽몽보다 한 술 더 뜨는군.

[ …그러니까 차후 훈련에서는 제가 지적한 부분을 좀 더 유의 반복하여 단련하셔야 하구요.
그리고 마지막 매복 병 제압 시 보인 필요 이상의 정신 이완 현상에 대해서는 전시 긴장감 유지 규범 제 8조와 2조의 적절한 운용이…… ]

< 차라리 날 죽여라. >

[ 예? 가상 타살 훈련을요? 굳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실 것까지는…… ]

< …닥쳐. >

[ 전 단지 주인님께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인데… 너무하세요. ]

< 니가 도움이 되는 건 그딴 잔소리가 아니라… 아니, 이번에 도움이 된 건 결국 그 잔소리였나…? 하여간 평가는 이제 됐다. >

[ 결국… 절 이용 할 대로 이용해 먹고 버리시겠다는, 그런 말씀이군요. ]

아주 틀린 말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째 뉘앙스가 좀……

< 야, 몽몽. 요즘 얘한테 대체 무슨 교육을 시키고 있는 거냐? >

[ …인격 분리 이후로 지식 축적 방향에 특정한 규약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궁금하시면 코드명 요정 몽이 검색한 데이터베이스 목록을 보고하겠습니다만… 아마도 나름대로 주인님께 맞추느라 20세기의 저작물과 통신 언어 등을 언어 구사 자료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맞아요! 전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구요. 이렇게 착하고 성실한 인공지능 소녀의 순정을 짓밟으시다니… 흥! 주인님 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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