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9-2화 :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자.(2)
빌어먹을. 아무리 힘들었어도 운기조식으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을 걸 그랬다. 어, 근데 아까 보천구룡대가 왔던 코스를 그대로 밟아 오고 있는 저 패거리들은… 이거 너무 어린 거 아냐?
“뭐야, 저건.”
내가 누구에게 랄 것 없이 묻자 구양청이 다가왔다.
“지역과 소속별로 명칭은 다르지만 저기 저 소패룡(少龍)을 중심으로 한 지하무림의 후기기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흐음… 지하무림의 보이스카웃들이란 말이로군.
“이럴 수가…! 이봐 사부! 보천구룡대가 전멸한 거야? 응? 정말 당신도 진 거야?”
구양청이 소패룡이라고 한 소년이었는데 덩치는 이미 어른에 얼굴만 소년이라 약간 언바란스한 느낌이다.
“…당신 제자인 모양이군. 별로 예의가 바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예. 무공은 이미 상당한 경지라고 할 수 있지만……”
“말도 안돼! 정말 단 한 사람에게 보천구룡대 모두가 당하다니! 당신들 창피하지도 않아?”
성큼성큼 이 쪽으로 오면서 녀석은 계속 고함을 치고 있었다. 구양청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가 없는 정도가 아니지요.”
“뭐… 어느 시대 건 신세대가 다 그렇지 뭐.”
음~ 내가 너무 노인네 틱 한 대사를 했나? 그리고 저 보이스카웃들하고도 정말 싸워야 하는 건가? 물론 전에는 어린 대교 자매들에게 얹혀 지냈던 때도 있는 나이기는 하지만 역시 얼라들과 칼부림하기는 좀……
“흥~ 그자가 바로 잘나신 마군황이 되려는 자로군.”
“소패룡! 말조심해라!”
“헤에- 벌써 지고는 주인으로 섬기게 된 모양이지? 하지만 난 달라!”
소패룡은 등에서 자기 키보다도 큰 검을 꺼내 들고 외쳤다.
“아무리 내 사부를 이겼어도 나까지 지배할 수는 없어! 날 수하로 삼으려면 내 검도 꺽어야 할걸?”
흐음~ 웬지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의 녀석인데… 어쨌든 이 녀석 사부까지 날 인정한 상태이니 굳이 상대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뭐야! 부상 중인 건가? 어쩐지 꼬리만 개처럼 얌전하다했더니……”
뭐시라고라고라~~
“소패룡!”
난 결국 녀석의 입을 막으러 나서는 구양청 노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 천사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녀석, 내가 잠깐 교육 좀 시켜도 될까?”
“아, 그… 그럼 부탁드립니다.”
나는 새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포로롱~ 요정 몽이 날았다. 녀석은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밝은 표정이었지만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내 모습에 얼마간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참! 아까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그… 나무에 매달아 놓은 소년 말예요.]
요정 몽은 계속 안 나오다가 마침 내가 소패룡을 잠시 상대해 주는 중에 나왔었다.
<…버릇없는 놈이었어. 지 사부에게도 막 게기고 난리더라구. 난… 음, 난 별 관계없지만 그냥 옆에서 보고 있기 뭐해서 대신 혼을 내줬지.>
[하긴, 주인님에게 덤빌 때도 말을 너무 막하긴 하더라. 주인님은 매우 친절하게 무술 지도를 해주시는 거 같던데 말예요.]
친절한 무술지도라… 좀 찔리는 군. 녀석이 공격할 때마다 가볍게 받아넘긴 다음, 다정한 미소와 함께 “얘야, 안간힘을 써 공격해도 이 모양이니 정말 안타깝구나. 엄마 젖을 더 먹고 힘을 키운 다음에 백만 년쯤은 열심히 연습해야겠구나.”라는 식으로 말해 줬던 걸 요정 몽은 좋게 해석했던 모양이다. 물론 소패룡 당사자는 별로 그런 거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좀 불쌍하긴 했어요, 그 애. 결국 막 울던데……]
하긴… 소패룡 녀석에게 다소 심하긴 했다. 명색이 그 많은 보이스카웃들의 짱이라는데 그 앞에서 개망신을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녀석이 눈물을 보인 건 또 의미가 좀 달랐다. 결국 녀석을 구하겠다고 다른 보이스카웃들도 전부 내게 덤벼드는 바람에 난 놈들을 제압하는데 상당한 체력 낭비를 해야 했는데… 단순한 소패룡 녀석은 자신을 위해 악마같은 내게 덤벼든 부하들의 의리에 감격해서 눈물까지 보였던 것이다. 뭐, 나름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난 셈이고… 여러모로 이번 싸움에선 실보다 득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보천구룡대 사람들 모두 싸울 땐 그렇게 지독하더니 끝나고 나니 뒤끝 없이 담백한 성격들이어서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주인님!]
< 몽몽? >
[ 예. 전투를 대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
쳇-! 좀 전에야 겨우 상처마다 금창약 바르고 붕대 감는 거 끝냈더니만 더럽게 타이밍 잘 맞추는 놈들이 다. 하긴, 구양청이 적당한 탈출 코스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이런 바위틈에 숨어 상처를 돌볼 틈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적들의 이동 대형으로 보아 구양청이란 인물의 말대로 현재의 지역을 동시에 정밀 수색 가능한 병력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쳇-! 역시 그런가? 구양청은 보천구룡대의 패배와 동시에 모든 작전의 지휘권은 마군(魔君)들에게 넘어갈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 마군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안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와 치밀한 조직력으로 공격이 이루어질 거라고 전망했다. 사실 이런 규모의 작전은 전에 없었기 때문에 구양청도 예상일 뿐이라고 했지만, 누구보다 지하무림과 마군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예상이니 신빙성이 높았다. 사실 난 규모가 커질수록 조직력이 약화되는 걸 기대했는데 말이다.
[ …상처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옆구리의 부상은 재출혈이 일어날 경우 저의 지혈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
나중에야 기억해 냈지만, 혼전 중에 내 옆구리를 벤 건 그 승룡 대주라는 깍두기 아저씨였다. 다행히 내장이 상하는 건 피했지만 상당히 깊은 상처라 이게 가장 부담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처 입은 부위를 위주로 잠시 몸을 움직여 본 다음, 깊게 심호흡을 몇 번했다. 아직도 20일이 넘게 남은 전투에 새삼 부담을 느끼는 건 부상도 부상이지만, 앞으로는 보천구룡대와의 싸움처럼 기분 좋은 전투가 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 주인님!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뭔가 도울 수 없나요? 네? ]
요정 몽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딴에는 걱정이 되는지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인 것이 왠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 마음은 고맙지만… 넌 가급적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 >
[ 예? 왜요? 왜요? 왜요? ]
< 생각해보니까, 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녀석인데 너무 험한 꼴 많이 보면서 크면 정서에 안 좋을 거 같아서 그래. >
[ 그렇지만 인공지능 1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
< 큭큭~! 으- 야. 웃기지마! 상처 쑤신다. >
[ …주인님은 널 소중하게 키우고 싶은 거야, 요정 몽. ]
헛-! 몽몽이 그런 낯간지러운 말로 거들 줄이야.
[ 아, 알았어요. 하지만 주인님이 위험해지면 언제라도 절 불러주세요. 꼭요! ]
불러주면 지가 뭘 어쩔 건가 싶기는 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니 녀석은 다소 풀죽은 모습으로 스륵 사라졌다. 뭐랄까… 낯간지럽긴 해도 과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좋아! 간다, 몽몽! >
나는 평소처럼 정글도를 어깨에 걸친 자세로… 요정 몽 때문에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몸을 숨기고 있던 바위틈에서 나오니 곧바로 삐익-!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 사이 10여 미터 정도 거리까지 수색해 오다 날 발견한 녀석들의 그 신호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같은 음색의 피리소리들이 화답하기 시작했다. 끝없이 삐익- 삐익- 울려대고 메아리치는 신호음… 현재의 숲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대체 어디까지 포위망이 구축된 건지 가늠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6.25때 중공군을 만난 국군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근데… 왜 빨리 덤비지 않고 그러고 있지?”
내가 물었지만 숲을 가득 메우고 꾸역꾸역 모여 든 녀석들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정글도를 든 손에 불끈 힘을 주자, 수백의 병력들이 일제히 움찔하고 겁을 먹는다. 왠지 조금… 재밌는 기분.
“…보천구룡대! 그들이 패했기 때문이오.”
그래도 좀 튄다 싶은 인물 네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중 길고 두꺼운 낭아봉(狼牙棒)을 든 등빨 좋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하무림에는 보천구룡대만이 있는 게 아니지. 특히 이 몸 ‘거산’의 낭아봉이라면 구룡대의 누구보다……”
녀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파악- 몸을 날린 나는 녀석의 낭아봉 위로 강력한 일격을 먹였다. 크악- 하는 비명과 함께 자신의 낭아봉과 함께 뒤로 밀려난 녀석의 몸은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고서야 멈출 수가 있었다. 무기 위로 맞은 거라 의식을 잃지는 않은 거산이란 놈이 뭐라 궁시렁대며 일어서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거산인지 뭔지 몰라도… 네 놈의 낭아봉은 소패룡이란 어린애의 검보다도 가벼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소패룡의 검을 쉽게 상대할 수 있었던 건 녀석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 직전까지 보천구룡대와 싸웠던 경험 때문이었다. 날 막다른 곳까지 몰아붙여 한계를 초월하게 만들었던 녀석들을 별것도 아닌 자들이 맞먹으려드는 건 참기가 어려웠다.
“좋아. 보천구룡대가 어떤 놈과 싸웠는지 보여주마.”
나는 저벅저벅 수백의 병력들에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섰던 세 명이 뒤로 물러서며 부하들에게 나를 치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스왁-! 소리는 한 번 섬광은 세 번!
삼시전결을 세 명에게 날려 동시에 쓰러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괴성을 지르며 숲 그 자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인의 파도가 날 덮쳐왔고, 나는 그걸 정글도를 휘두르며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창이 찔러오는 걸 피하며 단숨에 파고들어 놈의 손목을 내리쳤다. 구룡대의 단검보다도 못한 창이었다.
힘껏 찍어오는 도끼를 역으로 올려쳐 날려버렸다. 안인의 검보다도 약한 도끼였다.
틈을 타고 날아든 편을 한 손으로 잡아 빼앗아 버렸다. 삼룡대의 연검보다도 변화가 뻔했다.
앞에 날카로운 칼날을 단 방패로 밀고 들어오는 녀석들에게 돌맹이를 던져 방패 뒤의 얼굴에 하나씩 맞춰주니 자멸한다. 구룡대 누구의 맨몸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방패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엄한 자기 편을 맞추기에 단숨에 궁수에게 달려가 군화발로 밟아 버렸다. 삼룡대의 철구보다 못한 활이었다.
극, 곤, 구, 추, 겸, 봉… 그야말로 온갖 무기가 난무했지만 어느 것 하나 내 정글도에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오지 못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은 병기들을 자르고 치고 베었을까…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등을 나무에 기대어 섰다. 셀 엄두도 안 나는 숫자의 사내들이 주변에 널부러져 있었다. 내가 해놓고도 실감이 나지 않고 마치 다른 누군가… 아니 어떤 거대 괴수가 인간들을 습격하고 사라진 현장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멀찍이 물러나 있는 녀석들이 바로는 다시 덤벼들 것 같지는 않아서 잠시 더 숨을 고르며 쉬기 시작했다.
[ 주인님! 수고하셨는데 죄송하지만… 이번에도 냉철하시지 못했습니다. ]
< 그, 그래. 인정해. 제기… 괜히 흥분해 가지고… 후우우- 하지만 별 문제 없었잖아. >
[ 적으로부터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적의 수준에 비해 필요 이상의 과격한 동작으로 상처가 더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이 한 장소에 머물며 전부 상대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
몸을 사리며 싸웠으면 과연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몽몽의 말대로 고집을 부린 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에구, 만난 지 얼마 되도 않은 보천구룡대 애들에게 뭔 의리가 있다고 그리 흥분했는지 모르겠네. 암튼… 큰 소리 친 만큼 보여주긴 한 거 같으니, 이젠 떠야겠지? >
운기조식까지 하게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나무에 기댄 채로만 잠시 더 쉰 다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쓰러져있던 자들이 좌우로 썰물처럼 물러나는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가다 보니 곧 새로운 병력들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 쳇-! 1.4후퇴했던 분들의 심정까지 알게 될 것 같군. 나름대로 보복도 미리(?) 한 거긴 하지만… >
[ 지금으로서는 적의 포위망 범위를 가늠할 수가 없어 탈출 루트 선정이 어렵습니다. ]
< 하는 수 없지. 일단 최대한 뚫고 나가는 수밖에… >
몽몽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을 듯한 루트를 알려주었고, 나는 그 쪽의 지리를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떠올려 본 다음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놈들이 몰려왔다.
나는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내 키보다도 큰 갈대밭 사이에 누운 채 사라라 바람에 날리는 갈대들 사이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천구룡대와의 싸움 이후 20여일…! 그 동안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연옥에서 돌아왔던 내가 이번엔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 셈이었다.
끝도 없이 덤벼드는 적을 상대로 식사는 싸우면서 했고 잠은 아주 잠깐 추적을 따돌렸을 때 5분, 10분 정도씩 눈을 붙이는 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믿기 어렵지만 자면서 싸운 적도 있었다.
승룡 대주에게 입은 옆구리의 부상 이상의 상처를 입은 일은 없지만 자잘한 상처는 셀 수도 없었다. 적의 병기에 묻혀진 독도 날 죽일 수는 없었지만 몽몽의 해독이 끝날 때까지의 고통만은 그대로 감내해야 했다.
독에 의한 열로 허덕이며 싸울 때와 며칠을 굶어가며 정글도를 휘두를 때 중 어느 쪽이 더 더러운 기분이었는지…
혹은 놈들이 수류탄 형식으로 만든 화약 무기를 던져 댔을 때의 황당함과 놈들을 피해 절벽에서 몸을 날린 후 그 아래의 호수가 독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황당함… 어느 쪽이 더 컸을까?
< 몽몽…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
[ 모르겠습니다. ]
< 다 때려치고… 뭐든 실컷 먹는 거야. 제기랄~ 먹는 거 갖고 장난치는 놈들은 삼대가 옴붙어야 하는데… >
처음 매복 병들에게 빼앗았던 비상식량에 첨가되어 있던 건 역시 독이 아니긴 했다. 나중 다른 병력들에게서 빼앗은 식량에 섞인 성분과 합쳐진다 해도 역시 독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일종의 산공분으로 거듭나게 되어 있었다.
그걸 알고 해당 성분의 작용을 막는 약초를 캐서 섭취했더니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곧 전 병력이 비상식량을 아예 휴대하지 않기 시작했다.
저렇게 많은 인간들이 설치니 산짐승들도 있을 리가 없고, 전 지역의 식수는 독에 오염되었으며 나중에는 초목마저 독으로 쳐발라 놓았다.
그런 자연보호협회가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 만행이 벌어졌음에도 내가 살아남은 것은 역시 몽몽 덕분이었다.
독과 독이 서로 해독작용을 하는 조합을 찾아내 주어서 그게 든 걸 먹으며 버틴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고 난 원판처럼 독에 익숙한 몸이 아닌지라, 현재의 내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기본 수치를 100으로 잡아 가늠해 보면 체력 1, 내공 1, 정신력 1… 뭐 그 정도 상태랄까?
< 에이 썅-! 이… XX를 XX해서 XXXX한 다음 XX하고 XXX에 XX하는 것도 모자라 XX에 튀긴 다음에 XX에 XX해 버려야 할 놈들 같이니라구! >
나오는 데로 온갖 끔찍한 욕설을 퍼부어 봤지만, 그래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부모나, 중국민족의 철천지원수도 아닌데 이런 지독하고 악랄한 짓거리를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 주인님. 갈대밭 주변으로 적의 추적이 감지되었습니다. ]
썅…! 이번 휴식도 30분을 넘기지 못하는 군.
< …그래? 그럼 또 싸워야지 뭐. >
뭔가에 홀린 듯 말하며 몸을 움직여 보니… 움직인다. 스스로도 참 용타는 생각이 들었다.
< 근데 몽몽… 나 지금 정말이지 형편없는 상태잖아. 그런데 왜… 요 며칠은 적들이 좀처럼 내게 덤벼들지 못할까? 폭탄 던지고 독 뿌리기 같은 건 해도 직접 접근은 안 하는 것 같아. >
[ …거울을 보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
< 거, 거울……? >
몽몽은 잠시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했다.
[ 예. 인간은 보통 요괴, 괴물, 악귀, 악마 등의 초자연적인 존재와 만나게 되면 본능적으로 도망을 치게 되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거울은… 안 보는 게 좋겠군. >
악귀나 악마의 분위기라… 하긴 악에 받히긴 했지. 아무리 첨 보는 내가 지들 보스가 되려고 한다고 해도 그렇지 무슨 시험이… 씨앙- 이 튀겨 먹을 놈들 같으니!
[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치명상을 입히지 않으셨습니다. ]
< 몰라. 지금이라면 누가 정상적인 음식 주면서 황제의 목을 따오라고 해도 하러 갈 것 같아. >
젠장! 괜한 말을 했더니 갑자기 “정상적인 음식”이 못 견디게 먹고 싶어지네.
<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냐? 녀석들이 나타났다면서 왜 아직 아무도 안 쳐들어오지? 이 갈대밭은 물론 내 쪽이 유리한 지형이긴 하지만… 어? 가만? 이거 혹시…… >
[ 적들은 조금 전부터 갈대밭에 기름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
< 이씨- 그럼 빨리 말했어야지. >
난 산 쪽에서 들어 온 거였고 여기선 반대편이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갈대밭 옆에는 물이 있을 것 같았다. 강이 흐르면 최상이고 호수처럼 고인 물이라 독이 풀려있다 하더라도 불에 타죽는 것보다는……
“후보자께서는 들으시오! 여기가 바로 마군황령의 경계선이오! 따라서 반대편 강물로 뛰어들어 피한 다면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판단하겠소!”
갈대밭 바깥에서 들려 온 고함 소리였다. …환장하겠네.
[ 주인님. 이것은 오히려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
< 뭐? >
이어지는 몽몽의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니 확실히 그런 방법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현 상태의 내 몸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내 몸은 이미 와룡전에서의 고행(?)을 버틴 바 있지 않은가.
난 몽몽 말대로 급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화공을 선택했을 만큼 꽤 오랜 가뭄으로 마른 땅이고 정글도 말고는 달리 도구가 없다 보니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제기, 내공이 조금이라도 더 남았더라면 단숨에 구덩이를 만들던가 지둔술을 쓸 수 있었을 텐데……
[ 서둘러 주십시오. 이미 화공이 시작되었습니다. ]
나는 몽몽의 재촉을 받으며, 아니 벌써 느껴지기 시작한 열기와 매캐한 연기의 압박을 받으며 정신없이 땅을 팠다. 군대에서도 이 정도로 열심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미친 듯이 파다 보니 드디어 내 몸 하나가 들어갈 공간이 생겼다. 너무 얕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불길이 다가오는 것이 너무나 빨라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덤 속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흙 속을 파고들어 누웠다.
고대의 호흡법에는 단 한 번의 호흡으로 몇 날,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했다. 우리 시대에도 땅속에서 발굴된 수 백년(혹은 수 천년?) 전의 개구리가 되살아난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의 나는 현천기공으로도 그 정도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얼마간 버틸 수는 있었다. 호흡만이라면 아예 유체이탈 해버리고 육체는 몽몽에게 맡기는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불의 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산채로 구워지는 끔찍한 기분을 견디며 끈기있게 현천기공을 운용해야 했다. 반 이상 무의식의 상태였지만 약간 남겨진 감각 때문에 화르르~ 타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주변의 땅 혹은 내 몸이 지글지글 끓는 듯한 느낌과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지난 20여 일 간의 경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지옥 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 이상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불길이 지나갔거나 꺼진 걸까? 아니면 내가 완전히 무의식 상태가 되어 감각이 닫힌 걸까…? 어느 것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저 계속 기다리며 현천기공의 요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계속… 계속…..
[ 주인님! 주인님! ]
…몽몽의 호출에 반응하여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아, 쓰바~ 눈에 흙 들어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땅속에서 계속 운기조식을 한 덕에 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인지 꽤 두텁게 덮인 흙의 무게를 거의 느끼지도 못한 듯했다. 눈물을 흘리며 눈의 흙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사이 내 뒤쪽에서 요란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여기다! 살아있다!”
그럼, 살아있으니까 일어나지. 죽어서 일어나면 그게 사람이냐?
그 사이 눈의 흙도 흘러 빠지고 해서 천천히 일어나 보니… 무성한 갈대밭이었던 주위가 모두 불타 재만 남은 검은 벌판이 된 가운데 아직도 작은 불꽃과 연기가 군데군데 피어오르고 있는… 어찌 보면 지옥의 한 모퉁이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서 흙과 재투성이로 독기 어린 눈만이 번득이고 있을 내 모습은…
“으어어~”
날 발견했다고 소리쳤던 자가 정말 지옥의 악귀라도 본 것처럼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며 허둥대고 있었다. 쳇-!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모습이 지금 그 정도란 말인가?
“뭐, 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덕분에 잘 쉬었어. 내력도 어느 정도 돌아왔고… 계속해 볼까?”
달려온 무리들에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배는 아직도 고프고 피곤해 미치겠지만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녀석들에게 씨익- 웃어 줄 여유까지 돌아와 있었다.
“이, 이제 저희들은 더 이상…”
무리들 중 수장인 듯한 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머지 녀석들도 일제히 뒷걸음질을 치더니 급기야 전부가 썰물 빠지듯 우-하고 갈대밭(이었던) 바깥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복하는 거면 이제 뭐 먹을 거라도 좀 주지. 매정한 녀석들……”
혼자 중얼거릴 게 아니라 “정말로 달라 그래 볼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자니까, 곧 녀석들의 무리가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의 노인네와 그 일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최종 보스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저, 초사마군 이하 구중천 모두는 진심으로 후보자께 감복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빨리 뭐 좀 내놔봐. 밥이든 국수든 만두든 독 안 든 걸로…
“그 몸 상태로 우리 마군들의 협공을 받아내실 수 있다고는 생각치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지하 무림의 모든 이들은 영원히 후보자를, 진유준 대협을 잊지 못할…”
“아이 쒸~ 진짜 짜증나게 하네! 줄 거야 말… 아니 싸울 거야 말 거야!”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비로소 초사마군을 비롯한 마군 아홉 명이 일제히 태세를 갖추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성질이 나버려서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정글도를 치켜들었다.
“월광절화결… 참화지수!”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런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지만 내 정글도는 이미 좌에서 우로 길게 허공을 갈랐다. 부우우웅-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푸른빛의 실선이 허공에 떠서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미 보천구룡대에게 월광절화결에 대해서 들었는지 마군들의 얼굴에 공포와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오오오오~”
독특한 기합성과 함께 초사마군이 내력을 자신의 두 손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사람 허리 정도 높이로 날아가고 있는 참화지수의 실선에 손을 댄 초사마군의 안색이 일변했다. 피가 튀기 시작한 손을 다급하게 거두며 체조 선수처럼 뒤로 몸을 젖혀 피하자 참화지수는 초사마군의 배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모두 피하라! 절대로 막을 생각하지 마라!”
초사마군의 외침에 따라 다른 마군들은 엄습하는 참화지수의 위아래로 피하기에 바빴다. 사실 좀 더 완벽하게 펼쳐진 월광절화결의 여러 초식들은 이보다 훨씬 빠르게 날아가게 되는데 지금은 뭐… 누굴 죽일 생각은 없으니 상대의 기죽이기로 쓰기에 오히려 적당한 셈이다.
기껏 회복한 내력의 대부분을 월광절화결 펼치느라 날려버리긴 했지만 나는 별로 부담감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맨 앞의 초사마군에게 일검, 이검, 계속해서 날렸지만 바로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참화지수의 공포에서 벗어난 다른 마군들까지 합세해 일제히 협공으로 나왔다. 초사마군 한 명도 바로 쓰러트리지 못한 주제지만… 왠지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기했다. 상대의 장력을 보는 것보다 빠르게 느낄 수 있었다. 피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피하고 반격을 하는 중이었다. 전후좌우 상하 어디서 들어오는 공격에도 저절로 발이 보법을 밟아 피하고 손이나 정글도를 뻗는 곳에 적의 급소가 스스로 찾아오는 것 같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못하던 것도 하게 된다더니… 문득 그런 말이 떠올라서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 대체 몇 번이나 죽어 본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기분 좋게 죽어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지금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아니… 아니, 아니다. 난 아직 더 싸우고 싶고, 더 기쁘게 웃으며 더 많이 오래오래 대교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죽는 건 아직 이르지. 좋아, 더 덤벼 보라고. 누가 날 죽일 수 있는지. 계속, 계속, 언제까지나 날 공격해 보라고. 자아- 계속- 계속- 계속-
[ 주인님!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몽몽이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 정신차리세요!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
< 끄, 끝나……? >
[ 아,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요. 진정하시고 천천히 상황을 확인해 보세요. ]
녀석 말대로 천천히 살펴 볼 것도 없이 내 앞의 마군들 모두가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으며 하나 같이 전의를 상실한 모습들이었다.
[ 주인님은 무아지경에 빠져 느끼지 못하셨을지 모르지만… 마군들과의 싸움이 시작된지 이미 22시간이 지났습니다. ]
에…? 그저 잠시의 시간이 지났다는 느낌밖에 없는 데 어떻게… 아, 그보다!
[ 저로서는 거의 다 소진된 체력과 내력으로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저 마군들을 압도하며 싸우실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
<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럼 아직 이틀 정도는 더 남았잖아. >
[ 예. 하지만…… ]
“뭐 하는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내가 외치자 초사마군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의,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후보자를 이길 수도, 해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원·히·.”
“그래도 정해진 건 끝까지 지켜야지. 안그래?”
“그, 그건……”
초사마군은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고 다른 마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쳇-!”
나는 혀를 차며, 결국 자리에 앉고 말았다. 아까(22시간?) 날 살짝 미치게 했었던 배고픔까지도 느껴지지 않았고 싸움이 끝났다는 사실이 웬지 아쉬웠다. 후- 어쩌면 이게 더 미친 것인 걸까……?
“좋아, 그럼. 다시 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덤벼. 언제든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예 벌렁 누워 버렸다. 말은 그랬지만 이젠 더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갑자기 그 저… 그저 대교가 보고싶을 뿐이었다. 눈을 감자 대교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라 웃고 있었다. 나도 마주 웃으며…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문득, 눈을 떴다.
[ 와아- 드디어 깨셨다. 아하하하- ]
요정 몽이 눈앞에서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어서 녀석이 깨웠나 싶었지만, 잠이 깬 원인은 녀석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보니 난 누운 채 오른 팔을 들고 있었다. 팔과 손, 손에 쥐고 있는 정글도를 주욱 따라가 보니 그 끝에 초사마군의 얼굴이 있었다.
“뭐야…! 또 하자구? 좋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이미… 모든 기간이 끝났습니다.”
[ 그렇습니다, 주인님. 마군황 시험은 이미 어제 밤을 기해 모두 종결되었습니다. ]
< 어젯밤…? 어, 그럼 나… 삼일 밤 낯을 잔 거야? >
[ 정확히는 65시간 25분입니다. ]
< 핫-! 이거야 원. >
[ 그보다, 주인님. 새로운 수하의 목에 댄 칼은 치워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
몽몽의 말을 듣고야 천천히 팔을 내리니 초사마군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재빨리 내 곁에서 물러났다. 어쨌든 66시간 25분이나 퍼 질러 잔 몸으로 부시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켠 다음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어서 헛-! 하고 김빠지는 소리로 웃고 말았다.
하늘… 하늘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산도 들판도 강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초사마군이 입을 여는 낌새가 보이자 재빨리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고막, 아니 온몸이 저리도록 엄청난 굉음(?)이 나를 강타했다. 하늘을 뺀 모든 공간을 빽빽이 메우고 있는 지하무림 인들이 동시에 제 2대 마군황에게 보내는 첫 “인사”였다. 그리고 곧 초사마군이 화려한 쟁반 같은 것에다 무언가를 담아들고 다가왔다. 한 손 안에 딱 들어 올 듯한 크기의 직사각형 명패… 거기에는 붉은 색으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생사령(生死令).
글귀는 틀려도 비화곡주의 명패하고 디자인이 비슷하네? 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생사령을 잡는 순간, 다시 엄청난 굉음의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게다가 앞에서는 지금까지의 대빵이었던 초사마군이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이 늙은 것이 죽기 전에 신물(神物)의 주인을 만나 뵙게 될 줄은……”
어랏? 노인네가 기어이 운다. 진짜 울어. 으~ 이거야 정말 부담스러워 죽겠네.
“뭔가… 저희들에게 하명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내가 계속 가만히 있자 초사마군이 슬며시 그렇게 말해 주었고, 나도 최소한 인사는 해야 겠기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 넓은 공간이 일순 조용해지며 하늘의 새들조차 입을 막고 지나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잘 나가는 비화곡주 생활도 제법 해봤지만 이들은 정도가 더 지나친 거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난 멀리까지 잘 들리도록 음성에 내공을 실어 기본적으로 “반갑다”느니 하는 인사말을 한 후, 곧 바로 본격적인 선언을 했다.
“나는… 선대 마군황의 전통 한 가지를 이어갈 것이다. 그 것은 바로 여러분들 위에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것이다.”
…별 반응 없군. 약간 웅성대는 기미는 있지만… 역시 내가 그와 같은 과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나 보다.
“또한, 나 진유준은… 선대 마군황과 다르다! 알겠나? 앞으로는 천하의 그 어떤 세력도 지하무림을 가볍게 보지 못하도록 하겠다. 또한 여러분 중 한 명이라도 죽이지……”
윽!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분위기 휩쓸려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정치인이 되어선 안되지, 암!
“…아니, 그 얘기는 나보다 여러분이 내게 약속해 줘야 할 것 같다.”
그래. 사실 진짜 핵심은 이거다.
“죽지마라!”
역시 반응 없군. 하지만……
“아무도… 함부로 죽지 마라. 그 누구라도! 설사 내 명령이라 할지라도 가치 없는 죽음을 강요한다면 저항하라! 알겠나? 2대 마군황의 첫 번째 명령이다!”
…쳇! 나름대로 이 시대에서는 혁신적인 정책(?)을 발표했는데 반응이 뭐 이래?
< 몽몽. 내가 뭐 잘 못 말했냐? >
[ 잘 못된 얘기를 하셨다기 보다…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역시 그런가…? 이 시대의 절대자들 중에서 ‘내 말도 듣지 말고 목숨을 아껴라’는 소리를 할 자가 없었을 테고… 나도 사실 말 잘 듣는 게 더 좋지만… 후- 모르겠다. 나도 결국 많은 사람들을 이용해 내 욕심을 차릴 거면서 너무 위선을 떨었나? 나는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 자신이 갑자기 싫어져서 씁쓸한 기분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갑자기 사방에서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사람들이 뒤늦게 왜 이러나 싶었지만, 그들은 곧 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가치있는 죽음을 하자!”
“마군황을 위해서만 죽자!”
“마군황의 명령없이는 함부로 죽지 마라!”
…돌아가시겠네.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 거냐? 으-
[ 주인님. 마지막 명령은 그렇다 치고… 곧 떠나셔야 할 텐데 ‘아무도 지하무림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한다’라는 공약은 어떻게 지키실 건데요? 네? ]
< 아직 몰라, 요정몽. 하지만 어떻게 든 하면 될 거 아냐, 하면~! >
나는 이 시대에 생명존중 사상을 심기에는 내가 너무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하며 초사마군을 불렀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