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2화 : 흑주(黑蛛)의 과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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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4-2화 : 흑주(黑蛛)의 과거 (2)


“흑주 녀석, 비화곡 안에서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겼는지 가마로 이동할 때는 조금 앞서 달려가곤 했었는데, 오늘은 아예 가마 밑에 붙어있다.”

가마 주변을 호위하는 자들이나 심지어 가마를 들고 뛰는 자들도 이 무임승차객을 모른다.

“아… 호위대장인 대교는 알고 있으려나? 그녀의 무공수위는 이미 총관에 필적할 정도이니까 말이다.”

사실 흑주의 무공 수위는 지금의 대교와 비교하면 오히려 조금 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특유의 은신술은 참으로 특별해서 만약 이 녀석이 본업인 킬러로 돌아선다면… 거의 틀림없이 대교 정도의 고수도 못 막는다.

무협지… 아니, 무협만화 같은데서 보면 흑주 같은 킬러 스타일의 경호원은 대부분 평소엔 어디 짱 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다가, 마치 초능력자가 워프하듯이 사삭~ 혹은 스르르~ 땅속에서(?) 솟아난다.

나도 한동안은 흑주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에 거의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과연 어떻게 이동하고 다니는지 며칠 동안 일부러 비화곡 내부를 여기저기 뜬금없이 다니면서 몽몽에게 녀석을 스캔 추적시킨 일이 있었다.

그 후 처음 몽몽의 녹화 화면을 볼 때는 좀 실망했던 것이, 흑주는 달랑 내 시각에만 벗어나 있었을 뿐 다른 이들 앞에는 꽤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긴 내가 여러 사람들과 사방이 탁 트인 장소에 있다던가 할 때는 지도 어쩔 수 없겠지, 정말로 공간을 넘나들며 내 그림자에도 숨을 수 있는 초능력자나 요괴가 아닌 이상…”

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녹화 분을 다시 돌려보게 되었다. 다시 찬찬히 화면을 살피며 내가 느낀 이상한 점을 확인해 보니… 흑주가 항상 내 시각 안에 없었던 게 아니었다. 비록 잠깐이라고는 해도 바로 옆이나 심지어 나와 누군가의 대화 중 그 사이의 삼각점을 이룬 위치에 은폐물도 없이 서 있었는데도 내가 몰랐던 것이다.

“아니, 보이는데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할까?”

막상 몰카(?)로 녹화된 화면으로 확인하고 나니까 비로소

“어, 그때 보긴 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흑주를 목격한 순간의 다른 사람들 반응도 다시 살펴볼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보니 역시 그들 모두 흑주에게 무반응…

물론 흑주야 본래 내 경호원인 걸 아니까 그럴 수도 있겠기에, 나중에 목격자들에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랬더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주를 본 기억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고, 내가 흑주의 용모를 물어보면 소문으로 들어서 연상한 듯 막연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대교자매의 아버지 사영(死影)이나 총관 정도의 초고수들은 다른 것 같았지만, 웬만한 고수들은 다 비슷한 상황이었다.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른 수도승이나 그 비슷한 사람들이 자신의 살기나 기타 기척을 완전히 죽인 채 앉아 있으면, 그를 사람이 아닌 바위나 나무 정도로 여기고 어깨나 손에 산새가 날아와 앉고 다른 산짐승들도 경계를 풀고 지나가거나 발치에 앉아 잠이 들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흑주의 은신술도 그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기는 한데… 흑주는 수도승이나 선인도 아니고 오히려 그 정반대인 ‘킬러’이다. 애초에 살생을 할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추는 것이 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녀석이 대체 어떤 훈련을 받고 저 정도가 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지옥훈련에서 어떤 보상을 약속받았는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가마는 고룡촌 입구에 도착했고 나는 입구에서 내려 거기부터는 천천히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반년 정도 전에 한 번 오고 이번이 두 번째인가…?”

그때와 달라진 건 미리 내가 오는 걸 알렸기 때문에 입구, 고룡촌이라 새겨진 커다란 비석 옆에 두 노인이 마중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동글동글한 얼굴과 이목구비의 소살파파 할머니는 유일하게 두 눈을 반달 모양으로 가늘게 하며 웃고 있었다. 전에 흑주에게 잘렸던 지팡이는 버렸는지 다른 지팡이를 짚고 선 소살파파…는 그렇다 치고 남편 거두마군은 왜 안 나왔지?

소살파파 옆에 서 있는 건 역시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전에 본 거두마군과 비교하자면 덩치도 훨씬 크고 훤칠한 키였지만 옷차림은 매우 지저분한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비화곡… 거기서도 고룡촌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답게 내공 수치는 소살파파 못지않은 것 같고 눈빛은 그보다 더 불길했다. 여기서 불길하다고 한 건 전에 본 이화의 아버지에게서 느낀 그런 종류의 느낌이랄까?

그래서 웬지 다가서기가 찝찝해서 두 노인네로부터 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섰다. 그런 내게 소살파파가 곰살맞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강호에 나가셨을 때 조금 소란스러웠다고 하여 걱정했는데… 여전하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나야 뭐… 그보다 소살파파야 말로 나이를 반대로 먹는지 오늘은 마치 새색시처럼 곱네.”

뻔한 아부 발언에 소살파파는 정말 새색시처럼 몸을 꼬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는가 싶더니

“오~홋홋홋호호~”

그야말로 자지러지게 웃어 제낀다.

‘주책…’이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밖으로 뱉지는 못하고 보고 있자니, 조금 진정한 다음에도 나름대로의 애교스런 표정으로 곁눈질을 하며 입을 연다.

“곡주께서는 역시 여자 보는 눈이 있으셔요. 홋호호~!”

“뭐, 난 항상 솔직한… 핫하하~!”

더 맞장구 쳐주기가 괴로워서 그냥 웃음으로 때우고 있자니까 소살파파 옆의 백발 거지(?) 노인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산만하게 늘어뜨린 백발 사이로 불길한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내가

‘뭐야 이거…’

하는 사이 내 주위를 돌며 전신 앞뒤를 샅샅이 살피는 것이 아닌가.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찾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지만 분위기가 영…

“저런, 저런… 이 것 봐요. 광박사…!”

소살파파가 난처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광박사라는 거지(?) 노인은 불쑥 손을 내밀어 내 소매 깃을 잡으려 들었고 나는

“어?”

하며 한 발을 물러섰다.

내가 물러서는, 아니 그전에 이미 내 양쪽에서 동시에 검고 흰 그림자가 광박사를 덮쳤다. 번득하는 검광과 일장이 교차하는 파팟 소리가 교차했다.

“자, 잠깐!”

내가 다급하게 외쳤을 때는 늘 그렇듯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흑주와 대교가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는데, 아마도 대교는 맨손으로 광박사의 손목을 잡으려 했던 것 같고 흑주는 검을 휘두른 모양이었다.

흑주에 대한 그동안의 내 교화 노력 덕인지 원래 광박사가 그만큼 강한 건지 몰라도, 광박사는 가슴께의 옷깃이 조금 잘려나갔을 뿐 몸은 멀쩡한 듯했다.

게다가 지금 그는 흑주의 공격에 의해 잘려나간 옷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대교를 공격했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에구, 에구— 저 미친 영감이 끝내 사고를 치는구먼.”

나는 혀를 차는 소살파파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할망구… 충분히 사고 칠 사람이란 거 알면서도 데리고 온 거잖아, 이거.’

“소살파파… 부군 거두마군은 어따 팔아먹고 저 광박사 노인과 함께 나온 거요?”

“홋호호~ 그러고 보니 제가 그 양반을 팔아먹었나 봐요. 호호호~”

내 말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또 웃기 바쁜 소살파파에게는 바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다시 광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광박사는 이미 대교와 흑주 말고도 혈랑대와 비연대 연합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는데,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로 이번엔 대교에게 불쑥 다가섰다.

혈랑대와 비연대가 동시에 움찔하며 달려들려는 순간, 대교는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정지시켰다.

대교는 방금 서로 공격을 가했던 광박사에게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비연대 대장 대교가 고룡촌의 고인께 인사드립니다.”

곡주를 호위하는 자신의 직책을 나타내며 대선배에게 사과를 대신하는 적절한 인사…라는 해석은 광박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았다.

광박사는 인사를 받기는커녕 조금 전 나에게 했던 대로 이번엔 대교의 전신을 노골적으로 훑어보고만 서 있었고, 대교도 조금 민망한 표정이 되어 내게 구원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아, 이봐요. 광박사……”

나는 그를 부르다가 또 흠칫했다.

내 목소리를 듣자 다시 생각났다는 듯 광박사는 내게 관심을 돌렸고 대교를 비롯한 호위무사들이 모두 긴장하여 검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광박사는 다시 내게 접근하지는 않았고, 대신 내게 구걸하듯 두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그리고 비로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좀… …줘……”

‘내참… 이거 정말 고룡촌의 거지 노인 아냐? 그럼 한 푼 던져 주어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고 있는데…’

별안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광박사가 크윽, 인상을 구기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소살파파였다. 그제야 끼어든 소살파파가 지팡이로 광박사의 머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크악~!”

“안 보여 준다?”

괴성을 지르며 소살파파에게 달려들던 광박사는 소살파파의 외침에 갑자기 멈춰 몸을 굳혔다.

“그거, 니… 거야?”

“아니, 저 비화곡주님의 것이지. 하지만 내가 잘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안 보여 줄걸?”

“크음… 음… 음……”

“얌전히 좀 있으라구. 그럼 내가 꼭 보여 주도록 할 테니까.”

“알았…어. 소살파파.”

광박사는 별안간 한숨을 크고 길게 푸우욱~ 내쉬더니 얌전히 소살파파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하여간 광박사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소살파파가 내게 자랑스럽다는 듯 웃어 보인다.

‘제기, 저거였나? 이화의 아버지 화산화염랑(火山火炎狼) 손한성과 저 광박사의 공통된 눈빛… 그건 아무래도 좀 맛이 간… 노골적으로 말하면 미친 사람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맛이 간 광박사가 대체 내게 뭘 보여 달라는 건지 물어 볼 셈이었는데, 소살파파는 그 전에 대교에게 관심을 보였다.

“음… 자네가 바로 그 마봉후(魔鳳后)님의 전인인 모양이군. 이렇게 어린 나이에 광박사의 일장을 받아낼 수 있다니 대단하구먼.”

“인사가 늦었습니다. 운이 좋아 마봉후님의 비결을 엿본 대교라고 합니다.”

“호호~ 예의도 바르고… 우리 흑주와는 천지 차이일세.”

“별말씀을, 저는 아직 흑주님께 미치지 못합니다.”

확실히 예의 바른 우리 대교와 소살파파가 주거니 받거니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광박사를 주시했는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계속 날 흘끔거리는 모습이 첫 인상과는 달리 왠지 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곡주님이 만드셨다는… 그 독각포(毒角砲)를 보고 싶어서 저 난리입니다.”

“에? 케이… 아니 독각포……?”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아닌가요?”

“…아니, 그건 맞긴 한데. 그거 보고 싶어서 저런 거라고?”

독각포라는 명칭은 내가 붙인 건 아니고 누가 시작한 건지 몰라도 어느 틈엔가 다들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었다.

‘우리 시대에도 새로운 발명품에는 발명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 진유준포, 유준포, 진씨포… 이런 조합은 나도 붙이기 썰렁했다.’

“그러고 보니 곡주께선 아직 저 미친 늙은이를 모르시겠네요.”

소살파파의 오두막으로 가는 동안 광박사의 기본적인 신상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광박사의 ‘광’자는 미칠 광자가 아니라 ‘광(廣)’자인 모양이었다.

‘본래 명호는 광박기마사(廣博機魔士). 그걸 줄여서 보통 광박사라고 부른다고 하고 아마도 예전의 마병신(魔兵神)처럼 기계류에 미쳐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평소에는 약간, 내 독각포처럼 신기한 물건에 대해서는 심하게 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판과는 인연이 없었는지 전에는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했고… 음, 그에 대해 들은 건 일단 그 정도지만 더 듣고 싶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두막에 도착했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거, 이 늙은이가 본의 아니게 곡주께 무례를 범하는구려.”

방안에서 내게 포권하는 거두마군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우선 놀란 건 전에 거두마군이 두 다리를 잃어 더 자그마해진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잘려진 자리에 감긴 새 붕대… 그건 그 꼴이 된 지 얼마 안 지났다는 걸 의미했다. 천인군도의 전대 짱 중 일인이라는 과거를 따질 것도 없이 바로 반년 전 내 눈앞에서 혈랑대의 고수 백상과 황성을 어린애들 다루듯 가볍게 눌러버렸던 초고수를 대체 누가……?’

“곡주… 우리 영감의 다리를 팔아먹은 건 우리의 사랑스런 제자 흑주라오.”

‘…이런… 빌어먹을 소살파파 할망구.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드디어 흑주가 우리 부부를 넘어섰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살파파가 정말로 기쁘다는 듯, 오호호~ 웃음을 날리자 거기 화답하듯 거두마군도 껄껄걸~ 흐뭇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옆에서 멀뚱거리고 선 광박사가 더 정상인으로 보인다. 저 놈의 비정상 부부, 전에 만났을 때부터 대충 알아봤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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