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2-2화 : Time is as almighty as God is.(2)
5-8. Time is as almighty as God is.(2)
호초..!
대교 자매들을 위해 급조된 비연대의 일원으로서 존재감조차 없었다가 낙룡파에서 뜬금없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배신자로 돌변하여 나의 원판으로서의 1차 죽음을 초래했던 여자. 그녀는 그 사건 한 방으로 낙룡파에 있었던 모두… 특히 자신의 직속 상관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소령이에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현재… 그녀는 우리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이제 반나절 정도 거리로 좁혀진 것 같네.”
천우신이 그렇게 알려와서 나는 부대의 강행군을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우리가 소양호를 떠나 호초의 은거지를 향해 출발한 후 하루 정도가 지났을 때, 그녀의 남편인 마도랑군 우경서도 우리의 목표를 눈치챈 것 같았다. 곧바로 도주를 시작하여 비화곡으로 향하고 있는 우경서, 호초 부부를 쫓기 시작한 건 오늘로서 열흘 째였다. 그 동안 몇 차례 우경서가 자신의 부하들을 보내 습격해 왔지만 우린 그걸 간단히 격파하며 차츰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아직 다들 그리 지치지 않았습니다. 쉬지 말고 쫓아야 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지마 소령아. 어차피 호초는 우리 손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렇지만……”
“마도랑군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야. 무리해서 추적했다가 지친 몸으로 상대해서는 곤란하단 말야. 그리고… 호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벌을 받고 있는 거야. 그녀도 우리의… 특히 소령이 너의 칼이 자신의 바로 등 뒤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말야.”
나는 그렇게 소령이를 달랜 다음, 다른 이들처럼 적당한 나무를 하나 찾아 기대앉았다. 소양호를 떠난 후에도 계속 소교를 의식하여 나와 거리를 두고 있던 대교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교가 대교의 팔을 잡고 직접 끌고 온(?) 것이었고, 대교가 하는 수 없이 내 부근에 앉자 소교는 내 쪽으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돌아선다.
저 아이는 알까…?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슬프고도 아름다워 보이는 지.
“…피곤하지 않으세요? 강행군을 하면서도 지금까지의 적의 습격을 거의 직접 막아내셨는데……”
“난 괜찮아. 대교 너야말로 힘들 텐데… 좀 쉬도록 해.”
난 적의 공격이 시작되면 항상 먼저 앞으로 나서서 놈들의 공격이 나에게 집중되도록 했다. 하지만 대교 역시 최대한 살인을 피하기 위한 내 뜻을 알고 따랐기 때문에 나 정도, 아니 그 이상의 고생을 해왔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아 줘. 우리가 함께 돌아갈 곳은… 그래 그 세계에도 싸움이 없지는 않아. 하지만 최소한 나나 우리 가족은 그런 걸 모르고 살 수 있었어.>
<무공이나 칼이 없는 보통 사람들도 항시 보호받을 수 있는 세계라니… 정말 평화로울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나라도 전쟁에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야. 또 이 곳의 사마외도 인들처럼 폭력으로 먹고사는 자들도 분명히 많고……>
<훗~!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닌가요?>
<그, 그런가? 도원향 같은 곳이라고 꼬셔도 부족한 판국에… 그래도 설마 마음을 바꾸는 건 아니겠지?>
<후후-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제는 당신께서 계시는 곳이 곧 ‘저의 세계’인 걸요.>
나는 다시 한 번 대교를 만나게 해 준 운명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전음으로 대화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교는 물론이고 우리 진영 내에도 무수한 솔로부대원들이 존재하므로 그 앞에서 지나친 염장질은 위험하다…라는 걸 나는 소림사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휴식을 끝내고 다시 출발하면서 나는 힐끗, 싸가지 진을 보았다. 역사 자료를 토대로 미리 중국식 옷을 만들어 입고 왔다지만 역시 실제와는 틀려서 눈에 확 띄는 것이 거슬렸다. 딴 거 구해 줄 테니 갈아입으라고 해도 생깠던 싸가지 진은 다시 출발한 후 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 통신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후후- 어때요.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우리 시대의 개량종과는 다르지만 이 곳 말도 꽤 괜찮네요.]
싸가지 진은 그녀 시대의 승마 자격증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 무지 빨리 익숙해져서 잘도 우릴 따라오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동 시의 위치를 진영의 가장 중심에 두며 사영과 모용란이라는 너무나 과분한(!) 보디가드까지 대동 시켰고… 음, 근데 저 여자도 한 가지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사실 난 몽몽의 임시 사용자이고 원 주인은 엄연히 저 여자다. 그래서 소양호에서 출발하기 전에 몽몽의 반환을 요구받았을 때, 난 머뭇거리면서도 끝내 몽몽을 건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걱정 말아요. 데이터 백업 받고 나서 다시 돌려 줄 테니 말예요. 실은… 당신이 몽몽이라 부르는 이 NSBG3274001 기종이 아직까지 구동 중인 걸 알면 돌아가는 즉시 압수될 거예요. 그럴 거면 차라리 당신에게 주는 게 낫죠. 후후- 몽몽도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 같고 말이죠.”
그리하여~ 의리파 로봇 몽몽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내 팔목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싸가지 진의 오른 팔에 장착되어 있는 또 다른 최신형 미래 로봇은 몽몽보다 급이 낮다면서도 크기가 몽몽의 두 배가 넘는 거로 봐서 난 아무래도 미래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고급 로봇의 영구 사용자가 된 것 같았다.
음- 생각해 보면 소림사 금역에서 내가 얻은 것도 결국 싸가지 진의 덕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때… 묘선 대사는 돌아가는 내가 지하동굴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계속 전음을 보내 달마역근경의 일부 구결을 알려 주었었던 것이다. 나중 아무리 분석해 봐도 무공 구결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나도 애초에 새로운 무공을 힘들여 익힐 생각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이 시대에 왔다가 간… 꽤 훌륭한 기념 선물인 셈이었다.
[ …당신도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참고 따라와 줘요.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떠날 수 있을테니까요. ]
[ 어머- 웬일로 친절한 말씀을 다하시네? 후후~ 사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보다 당신 정말 묘한 사람이에요. 데이터 검색해 보니 당신은 그 동안 수많은 위기를 만났음에도 역사 변경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자신과 몽몽의 앞선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어요. 물론 나중에는 20세기의 병기를 만들어 활용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이 시대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한 거구요. ]
[ 그게 당연한 거 아니요? 난 당신의 조심성 없는 행동들이 더 이해할 수가 없어요. ]
[ Time is as almighty as God is…… ]
[ 응? 그러고 보니 당신, 지난번 언제인가도 그런 말을 했죠? 그땐 잘 못 들었었지만… 시간은 전능한 신과 같다……? ]
[ 그래요. 비슷한 말로 들리겠지만, ‘시간이 신이다’…라고 하기도 하죠. ]
[ 그게 대체 무슨…… ]
[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몇 가지 이론들을 함축해서 표현한 말이긴 하지만, 일단 알기 쉬운 한 가지 예를 들면… 지금까지 꽤 많은 시간여행자가 다른 시간대에서 그 어떤 짓을 했어도 미래에는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
음… 시간 여행에 대한 건 남은 일 다 해결하고 나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얼결에 얘기가 나왔군.
[ …혹시 뭔가 바뀌었는데 미래 사람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
[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요. 몇 번인가는 아예 의도적으로 대규모 ‘역사 변경 실험’까지 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해요. ]
[ 의도적인 역사 변경 실험…? 모두 실패…? 그럼 나나 당신도 여기서 어떤 돌출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던 미래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얘기? ]
이 쒸-! 그럼 내가 그동안 괜히 엄청 스트레스 받으며 역사 변화를 신경 써온 게 그냥 뻘 짓일 뿐이었다는 건가?
[ 그렇지만 분명히 당신은 현명한 판단을 한 거예요.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함부로 역사 변경을 시도했었다면… 어쩌면 이미 시간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르죠. ]
[ 뭐요? 시간에게 살해를 당해? ]
[ 후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랬죠? 우리 시대의 상급 기관들이 시간여행을 금지하고 있다고요. 그건… 시간 여행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무사히 복귀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
[ 자, 잠깐! 뭔지 몰라도 그런 위험한 요소가 있다면, 그럼 왜 당신은 함부로 행동한 거요? ]
[ 이래 뵈도 전 ‘과학자’니까요. ]
맙소사! 이 여자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 그럼 당신의 그 막 나가는 행동들이 ‘실험’이었단 말이야? 시간이 역사 변경을 막기 위해 당신을 죽이는가 어쩐가를 보는? 당신 미친 거 아냐? ]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니 싸가지 진은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날 따라 멈추고 있었다.
[ 이봐, 당신! 실험 정신도 좋고 다 좋은데… 지금 당신은 혼자 몸이 아니라 우릴 내 고향 시대로 돌려보내 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야! 근데 이게 무슨…… ]
[ 후후~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시간에게 살해당할 거 같았으면 벌써 예전에 당했어요. 난 단지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란 걸 재확인했을 뿐이에요. ]
[ 나, 참! 어찌 되었든 그런 위험한 행동을 왜 해요? 그것도 목숨을 걸고! ]
싸가지 진은 피식 웃더니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하여간 저 싸가지는 도무지 이뻐해 줄 기회를 주지 않는다.
< 몽몽! 너 이제 정말 완전히 저 여자로부터 독립한 거지? >
[ 예. 진의 소유자 설정은 모두 해제되었습니다. ]
< 해킹은? >
[ 이번에는 미리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
< 좋아, 앞으로는 저 여자 더 철저히 감시해. >
[ 알겠습니다. 진이 말한 ‘시간 살해’ 가설은 제 데이터에도 있지만 진이 인정할 만큼 높은 확률로 증명된 것은 몰랐습니다. ]
하긴, 몽몽에게는 본래 시간 여행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았었다. 저 여자도 날 만난 시간여행을 하기 전까지는 시간여행을 단지 역사 연구의 도구로서만 생각해서 그 쪽 자료의 입력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랬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어떤 이유에선지 소위 해킹으로 몽몽에게서 시간여행에 관한 데이터를 일부 지워 놓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헌데… 시간이 신이라느니, 시간이 살해한다느니… 미래 첨단 과학 이론이 뭐 그래? 게다가 자기가 뭐,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그런 비과학적인 설정은 우리 시대의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나올 법 하지만 몽몽처럼 특별한 로봇이나 진짜 타임머신이 만들어질 정도의 미래에서는 보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이 정립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하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으음- 내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전 부대의 움직임이 함께 멈춰 버렸군.
“아무 것도 아니야.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다들 경계를 더 철저히 하라고 해.”
나는 대교에게 겉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전음으로는 싸가지 진에 대한 감시를 더 신경 쓰라고 덧붙였다. 대교는 새삼스런 내 명령에 의아해 하면서도 즉시 전 병력에게 경계 강화의 명령을 전달했다. 싸가지 진은 그런 우리의 움직임을 보며 ‘내가 뭘 어쨌다고?’라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역시… 저 위험하고 알 수 없는 자칭(?) 과학자를 더 혼자 두지 않고 확보해 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우리가 갈 예정의 방향에서 갑자기 신호탄이 터져서 타이밍 좋게 적이 나타났나 싶었다. 그러나 잘 보니 백색의 신호탄… 아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마군황이 되자마자 진하연이 각지의 반천복화 세력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리긴 했다지만 아직 내 앞에 나타날 때는 아닌데……
“핫하~! 너희들이었구나.”
“저희 남해의 철부지들이 왔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웃기부터 했고, 본래는 다섯 명이었다가 이제는 네 명이 된 남해오신룡 녀석들도 웃으며 재회를 기뻐하고 있었다.
“진하사님이 막내를 맡긴 사람이 누군지 알았을 때는 저희 모두 정말 놀랐습니다.”
“후후- 종소가 그녀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이상, 몇 년만 지나면 일지만큼이나 멋진 숙녀가 되어 있을 걸?”
내 말에 미룡(美龍) 일지가 곱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룡(俠龍) 정권, 교룡(蛟龍) 대오, 철룡(鐵龍) 사성… 모두가 어린 시절 왜구들에게 고향 마을이 멸망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서 오늘날 자신들과 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협객이 된… 너무나 대견한 녀석들이다.
내가 부대에 합류한 남해오신룡들과 즐겁게 담소하며 얼마간을 더 이동했을 때였다.
“아, 진하사님! 새로운 신호입니다. 헌데……”
대교가 말끝을 흐린 것은 신호가 뭔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적색 신호여서 이번에는 확실히 적의 출현인가 했더니 곧바로 이어서 황색의 ‘긴가민가 함’이라는 의미의 신호가 올라왔던 것이다.
“하하하~ 어쩌면 누님이 벌써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님…? 정권이 누님이라 칭할 만한 사람은… 설마……
신호탄이 터진 곳은 우리가 가던 숲 길이 일시적으로 끝나고 넓은 평야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선발대인 보천구룡대는 평야 입구 부근에서 당혹스런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중심으로 한 본대가 도착하자 즉시 좌우로 길을 텄다. 처음엔 천하의 보천구룡대도 놀라 적색 신호탄을 터트렸던 이유… 평야 지대의 그 넓은 공간을 온통 검은 복면의 인간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이 광경은 도대체……
“후아~ 누님도 참. 천인군도(賤人群島)의 정예고수를 전부 끌고 오고 말았군요.”
정권의 설명이 있기 전부터 나는 이 엄청난 무리의 앞에 서 있는, 그들과 꼭 같은 복장을 하고 있으나 분명히 다른 한 인물을 보고 있었다. 한 손에 고려의 활을 들고… 긴 머리 결로 깊고 깊은 광채의 검은 눈동자 중 하나를 감추고 있는……
“흑주! 너… 천인군도를 네 것으로 한 거냐?”
흑주는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흑주…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빌어먹을…! 나도 마군황이 되는 미친 짓을 해봐서 안다. 무공이 강하다고 혼자서 강대한 집단을 정복한다는 건 무협지에서처럼 멋지기만 한 일이 아니다. 흑주, 넌 어째서 한 번 떠났던 지옥의 경험을 다시 자처하면서까지… 그렇게 과거의 주인을 잊지 못하는 거냐.
“나도… 잊을 수 없을 거야. 고맙…다, 흑주.”
나는 끝내 그 정도 말 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