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2-3화 : Time is as almighty as God is.(3)
흑주와 남해오신룡이 나타난 이후, 우리 부대의 행보는 갈수록 눈에 띄이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속속 다른 반천복화 세력들도 합류해 오기 시작한 데다, 그 즈음 결정적으로 대천마 측에서 내가 미리 날렸던 ‘1대1 맞짱 요청’에 OK 답장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굳이 호초나 마도랑군을 잡아 대천마에게 압력을 넣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나는 행군의 속도를 줄이면서 부대 편성과 관리에 더 주력하고 있었다. 반나절 정도까지 따라잡았던 호초와의 거리가 다시 점점 멀어져 가자 결국 소령이가 참지 못하고 내 막사(회의용으로도 쓰기 위해 꽤 크다.)를 찾아왔다.
“…그럼 이제 호초를 잡는 일은 더욱 뒤로 미뤄지는 건가요?”
역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따지는 소령이.
“얘기했듯 호초를 잡는 건 비화곡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일의 일부일 뿐이야. 천마와 그의 제자 마도랑군을 제압하면 천하가 아무리 넓다한들 호초는 결국 숨을 곳이 없지 않겠어? 그리고… 사실 호초는 그저 ‘칼’이었을 뿐, 진짜 잘 못은 ‘칼을 휘두른 자’에게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런 정론(?)에 이런저런 말을 덧붙여 ‘복수 무용론’을 펼쳐서 한참을 얘기해 봤지만 끝내 녀석은 수긍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나는 막사를 나가는 소령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알겠나? 호초를 자기 주인에게로 끌어들였던 저 아이로서는 그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러니 이제 호초를 응징하거나 혹은 용서할 자격은 저 소령이에게 있는 거야.”
이건 소령이보다 조금 먼저 막사에 들어와 있다가 나와 소령이의 대화를 듣게 된, 구 수라혈불(修羅血佛)이며 현 삼장 화상에게 한 말이었다. 흑주보다 이틀 늦게 합류한 진하연을 따라 왔던 삼장은 대답도 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불경을 외고 있었다. 외모로 봐서는 호초와 이 임꺽정 스타일의 화상은 도저히 매치가 안 되지만… 본인 말로는 분명히 그녀가 ‘친 딸’이라고 한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호초를 살리겠다고 소령이를 어쩔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아. 나중에 설사 나나 대교가 없다 하더라도… 소령이에게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 붙어 있으니 말이야.”
“아미타불~ 이 모든 것이 제 업보인데 어찌 그런 망상을 할 수 있겠소.”
“…내 권한으로 소령이에게 호초를 손대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수는 있어. 물론 소령이가 옛친구를 자기 손으로 죽인다면 그건 분명히 녀석에게 상처가 되어 남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만 소령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채 또 남의 명령에 따르게 된다면… 그건……”
“아미타불-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알겠소. 역시 곡주께선 자신의 수하들을 너무나 아끼는 분이오. 심지어 자신을 배신한 제 여식까지도 용서해 주시니 어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으음- 역시 왕년의 퇴마승(退魔僧)답게 말을 안 해줘도 지난번에 본 진하운과 내가 동일 영혼이라는 걸 아는 군. 그렇지만 이렇게 나와 단 둘이 있는 자리에 서도 굳이 ‘곡주’라고 까지만 칭하는 걸로 봐서 사람들에게 최종 비밀까지 까발릴 것 같지는 않고… 사실 이제 와서는 삼장 화상이 내가 전혀 다른 제 3의 인물이라 주장한다고 해도 믿어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와 대교, 싸가지 진 빼고는 말이다. 나는 삼장 화상을 내보내고 난 다음 대천마와 맞짱 뜨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얼마 후에는 내 막사를 나가 진하연이 원판의 신체와 머무는 막사로 향했다. 최종 결전을 앞두고…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대천마와 내가 합의 결정한 결전의 장소는 비화곡에서 약 5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귀거평(歸居平)이라는 다소 이상한 이름의 벌판이었다. 그 곳의 지형을 잘 아는 이들의 얘기로는 중심부의 약간 높은 구역을 기준해서 사방으로 완만한 경사가 져 있어 양측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다 해도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는 게 용이한 장소라고 한다. 결국 평야를 가장한(?) 아주 야트막한 산이라고 할까? 어쨌든… 소양호를 떠난 지 한 달 만에 난 문제의 귀거평에 도착했다.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어서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반대편 평야에 집결한 비화곡과 대천마를 지지하는 사마외도의 병력들 규모는 우리측과 비슷해 보였다.
결전 전야. 나는 내 막사에 그 동안 나와 인연이 깊은 중요 인물들을 모두 초대했다.
“하하하~ 본 장로도 그 음흉한 천마 노물과는 언제 고 승부를 겨뤄보고 싶었소이다.”
여전히 호탕하게 술을 푸며 큰소리를 치는 야후장로와 그 옆의 지천공 총관… 연옥도에서는 두 사람이 과연 우리측에 붙어 줄까 걱정했었고 총관과는 비록 가상현실에서지만 맞짱 한판 찐하게 뜨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원판으로서도 부활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걸 알자마자 군소리 없이 우리 진영에 합류해 주었다. 사실 난 내가 떠나기 전에 총관을 차기 곡주 후보로 밀어 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총관은 이미 월용당주이자 야후 장로의 양녀인 소운연과 결혼한 몸인데다, 내가 연옥도에 있는 사이 국화빵처럼 닮은 2세를 얻었다고 한다.
“…지총관, 아들 이름이 무엇이오?”
“처음엔 장인께서 ‘진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헌데… 운연이 다니는 사찰의 해동 출신 고승께서 우리 부부의 이름을 따 ‘천운’이라 하는 것이 좋다하여 그리 바꾸었습니다.”
“…잘 했소. 매우.”
뭐, 꼭 이름대로 가는 건 아니라지만… 암튼 두 사람의 아기도 바뀐 이름처럼 좋은 운빨을 받아 부모처럼 똑똑하고 강한 남자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총관과 건배했다. 어쨌든 그래서 총관의 곡주추대 계획은 초기에 패스…! 비화곡주라는 자리는… 권력의 혈연승계를 막기 위해 직계 후손이 없거나 있어도 연을 끊어야 오를 수 있는 외로운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비화곡의 전통 때문에… 그리고 원판 사부가 보기에 충분히 권력 다툼의 한 축이 될 만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아마도 그런 이유로 유일한 혈육인 원판과 헤어져야 했던 진하연…….!
“…괜찮니? 안색이 좋지 못하구나.”
내 말에 진하연은 애써 조용히 웃어 보였지만 결국 별다른 대꾸도 없이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저 녀석과 진유준으로서 만난 것은 불과 보름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 사이 난 정말로 녀석과 의 남매를 맺었다. 떠나야 할 시기를 코앞에 두고 더 이상 연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녀석과 처음 만난 날 함께 술 한잔하면서 얘기하다 보니 이상하게 죽이 잘 맞아서 결국 만난 그날로 그렇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쪽에서 보자면 비록 극악녀라고 해도 가족으로서는 맘에 드는 녀석이고, 진하연도 대교 말처럼 날 원판이 맺어 준 정혼자로 생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 무지 좋은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소저는… 아무래도 오라버니의 병세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지 않겠나.”
그러면서 자신이 대신 나와 한잔하겠다고 술잔을 내미는 이 남자… 사실 이 엄청난 신분의 남자가 우리를 찾아 온 것이 그 사이 일어난 일 중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다.
“태자 저… 아니, 조공!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대송 황실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삼태자 조명환. 처음 만났을 때는 잘해야 순정파 왕자님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인물이었지만…
“사내가 한 번 정한 일을 어찌 후회하겠나. 물론 자네에게만 말한… 황실과 백성을 위한 다는 것도 핑계일 뿐, 난 단지 자유로운 한 남자로서 하연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 것뿐이지. 하하하~!”
나는 예전에 진하연이 삼태자에게 서찰을 보내는 걸 보면서 불안해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도 설마 그 서찰이 황실에 커다란 피보라를 몰고 올 정도로 무서운 서찰이었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당시 삼태자로서 권력싸움의 중심에 서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던 이 남자는 하연이 보낸 서찰 속에 담긴 몇 가지 음모를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단신으로 묘강이라는 이역에 팽개쳐진 한 소녀… 그녀가 성장하며 묘랑이라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노하우가 십분 활용된 권력암투술(?)… 그 위력은 너무나 엄청났고… 결국 삼태자가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후계자로 확정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잔인하고 냉혹한 수법들이었지. 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결국 하연은 백성을 다스리는 위치에 두기에 너무 위험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네. 물론 나라는 인간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잔인한 일들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모진 남자가 못된다는 것도 깨달았고 말야.”
그래서 다 앉은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확실히 핑계나 그저 어리석은 선택일 수도 있겠고… 절대 권력을 버렸다는 이유로 더욱 진하연에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런 모든 걸 각오하고 진하연에게 순수한 한 남자로서 도전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철없는 순정파… 그러나 너무나 멋진 황태자를 위해 건배……!
내일의 결전을 앞두고 분위기를 업 시킨다는 핑계로 만든 자리였지만, 역시 결전 전야라 일찍 끝을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 넓은 막사에 남은 것은 나와 대교, 그리고 싸가지 진뿐이었다.
“헤에~ 당신 참 사교성 좋네?”
약간 알딸딸한 얼굴의 싸가지 진은 이제 누가 따라주지도 않는데 혼자 독한 술을 홀짝홀짝 잘도 마시고 있었다.
“이 시대에서 가장 큰… 아니 가장 큰 거 맞나…? 하여가안- 그런 왕국의 후계자까지 파티에 초대할 정도라니 말야.”
“댁도 만만치 않잖아. 현 소림사의 최고 고수를 허니라고 부를 정도이니 말야.”
“후후- 암튼, 신기하네. 나름대로 조심했다고 해도… 결국 이 정도의 일을 벌여 온 사람이… 아직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으니 말이야.”
“…그 ‘시간 살해’라는 가설… 그런 일이 정말 그렇게 많았어요?”
“훗-! 그렇데요. 시간 여행을 한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못하는… 그런 현상의 원인… 시공간 유지 시스템의 원류를 우린 아직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했어요. 알고 보니 타임머신이란 것도 다른 목적의 실험에서 파생된… 결국 운이 좋아서 만든 것에 불과하더라구요. 후후후- 실망~했겠죠? 그만큼이나 멀고 발달된 미래의 과학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구나- 하고 말이죠.”
“뭐, 다소 그런 생각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일단 나온 결론이나 확실히 합시다.”
술 취한 여자를 추궁하게 좀 찝찝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상태가 더 본심을 알기 쉬울 것 같았다.
“그동안 나름대로 계속 생각해 봤는데… 당신은 지난번 소림사에서 ‘쉽게 돌아 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라고 했었죠? 그 전에는 내가 이 곳에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기록적인 일’이라고 했던 적도 있고……”
“맞아요. 당신이 유일한 실험체… 아니 그런 표현은 싫어하려나..?. 하여간 당신이 처음이예요. 이렇게 오래 특정 시간대에 머물며 많은 활동을 했음에도 무사한 경우는 말이죠. 아, 물론… 이렇게 몇 번이나 시공간을 오가고 있는 나 자신도 가설에서 벗어난 경우의 하나지만… 음… 이건 아무래도 내게 당신을 본래의 시대로 복귀시킬 의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건 또 어떤 가설이나 이론에 근거한 거죠? 아니, 아니… 그보다 내가 아직 시간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이유가 지금까지는 역사가 변경될 정도의 일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몽몽에게 기록된 걸 봐서는 믿어지지 않지만… 일단 그렇다고 봐야죠.”
“그래요, 그럼. 앞으로 내가 주의해야 할 건 뭐죠? 그리고 시간여행이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이 시대의……”
내가 잠시 망설이자 대교가 손을 내밀어 내 팔을 잡아왔다.
“그러니까 이 대교를 데려간다고 했을 때 그렇게 쉽게 허락한 건 뭐죠? 그 것도 단지… 실험을 해 본다는 개념인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소요 에너지의 여유 분을 챙긴 건 이런 걸 예상해서 그런 게 아니었지만… 당신이 누굴 데려 가고 싶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반가웠어요. 지금까지 그런 다중 역행 실험은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었거든요.”
“제기랄-! 당신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한 방 먹여 줬을 거야!”
“자아- 이걸 봐요.”
싸가지 진은 손목의 타임머신 제어기를 들어 보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소림사에서 내가 당신들을 데리고 타임머신을 가동시키려 했을 때… 그 때부터 이게 제대로 작동을 안 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오동작이나 작동 불능이 없었던 게 말이죠. 알겠어요? 당신은 아직 시간에게 이 시대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 받지 못했어요.”
“그, 그건 대체 무슨……”
“어쩌면 당신이 이 시대에 온 것조차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시간이란 이름의 신이 의도한 였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당신에게 여기서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봐요. 그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뇨? 지금까지 난 단지 살아 남기 위해……”
난 더 이상 말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머리 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유는 몰라도 정말 시간인지 신인지가 이제까지 내 운명을 가지고 논 거라면……
“썅-! 그러니까 결론이 뭐냐 말야? 내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야? 뭐야? 아님 대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대교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침착하세요. 이 분 얘긴 그런 것이 아닐 거예요.”
“그, 그래도……”
“훗~! 나도 아직 잘 몰라요. 단지 내일 모든 것이 결정될 거라는 예상은 할 수 있겠죠. 당신이 내일 싸울 상대에게 져서 죽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시간이 정해 놓은 살해 시점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거죠.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당신을 데리고 돌아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당신이 지금까지 한 일의 여파… 내일 벌어질 어떤 사건을 지켜보는 증인이 되라는 건지… 시간의 생각이 어떤 건지 알 수 있게 되겠죠.”
“미치겠군! 시간의 생각이니, 허락이라니!”
“나도 미치겠어요!”
버럭 맞 고함을 친 싸가지 진은 갑자기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가에 눈물 같은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술병을 입에서 떼자마자 거칠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뭐 분하지 않은 줄 알아요? 내가 왜 계속 냉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왔는 줄 알아요? 부끄러워해서 그래요! 명색이 과학자라는 게… 아무리 지금까지 전공이 아니었던 분야라 해도 그렇지! 전부 시간인지 신인지 그런 규명되지 않은 존재의 뜻이라고 말해야 하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명색이 상위 2퍼센트 이내의 인재라는 게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단지 손 빨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게 얼마나 더러운 건지 아냐구요!”
싸가지 진은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다시 술을 들이키더니 급기야 탁자 위에 엎어져 피실피실 웃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신이든 뭐든… 정말 전능한 존재가 있어… 인간의 시간 파괴를 금지하고 싶었다면 타임머신 제작 자체가… 불가능했어야 했어요. 하지만 시간은… 신은 자신의 세계에 인간이 관여하는 걸 허락했어요. 그리고… 살해해 온 거예요. 후후후- 대체 그는…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요……?”
빌어먹을…! 뭔가 막연히 불길한 생각이 계속 들긴 했지만 막판에 뭐 이런 경우가……
“…그렇다면 걱정할 일은 없겠네요.”
대교였다. 녀석은 어이없게도 밝게 웃으며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유준님… 당신은 내일 반드시 천마 노괴를 쓰러트리고 승리할 거예요. 그렇게 비화곡을 다시 비화곡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그리고 당당하게 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으- 대교야 너, 지금까지 들은 얘기를 제대로 이해한 거니? 내일 싸움에서는 내 실력보다 시간이란 괴물의 뜻에 따라 내가 죽을지 살지가 결정된다는 얘기였다고, 지금!
“제가 듣기에는… 결국 하늘에서 인간에게 하늘이 해야 할 일을 일부라도 넘긴 거라는 얘기 같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이겠지만 뭔가… 뭔가 인간이 좀 더 성장하길 바라는… 그런 뜻이 숨어있지 않을까요? 전 잘은 모르지만… 불가에서도 흔히 인간의 성불을 위해 부처님께서 고난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잖아요.”
“대교 너……”
“후후- 전 믿어요. 제가 택한 분은 틀림없이 하늘이 내리는 어떠한 시련도 극복하고 거듭날 수 있는 분이라고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 멍하니 대교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싸가지 진은 갑자기 미친 듯 깔깔깔깔~!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흘려가며 계속 깔깔대던 싸가지 진은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한 손을 들어 그 손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당쉰~! 어떤 의미에서든… 정말 대단한 여자군! 좋아, 좋았어! 나도 지지 않겠어! 후-흐훗! 신인지 뭔지… 날 건드린 거얼~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반드쉬… 반드시 그 빌어먹을 작자의 힘을 낱낱치! 규명해 주겠썻!”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불가능한 맹세’인 것 같았지만 싸가지 진은 다시 얼마간을 깔깔대고 웃다가 결국에는 벌렁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대교는 넘어진 충격으로 기절한 건지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하여간 완전히 퍼져버린 싸가지 진을 부축해서 일어나며 다시 내게 말했다.
“이 분은 제가 보살필게요. 걱정 말고 푹 쉬세요. 내일… 하늘과 싸워 이기시려면요.”
만일… 대교가 정말 나에 대한 믿음만으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거였다면 나는 오히려 커다란 부담감에 짓눌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교는… 조금 전까지 내 팔을 붙들고 있던 대교의 손은 분명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 대교 너야말로 걱정하지마. 난 내일… 반드시 이겨 보이겠어. 상대가 그 누구라도!”
나는 대교가 다시 한 번 내게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고 나간 막사에 홀로 남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소위 타임(TIME)씨를 떠올려 보았다. 비로소 그게 내 상상력이 꿈으로 나타났을 뿐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싸가지 진의 얘기를 들으며 최악의 가정을 했었다. 비화곡이란 단체는 분명히 우리 시대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집단이다. 이렇게 강대한 조직이 우리 시대에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면… 어쩌면 난… 어떤 이유에선지 신이 비화곡 제거를 결정하고 파견한 용병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대천마… 비화곡 역대 최강이라는 원판의 사부와도 자웅을 겨루었던 그 무서운 마인이 내가 강호로 돌아와 마군황의 자리에 오르는 등의 일을 하고 다니는 동안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사실… 난 그동안 그걸 막연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마군황이 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의문이 생겼었다. 확신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는 내가 힘을 키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내일 대천마에게 패해 죽는다면… 그럴 경우 신앙과도 같은 마군황을 잃은 지하 무림이 과연 얌전히 물러나 줄까? 아니 그 전에 대교가, 흑주가, 진하연이… 모두가 과연 참을 수 있을까? 대천마가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는 둘째 치고라도… 내가 지금까지 전쟁을 억제하는 방법으로서 준비해온 ‘비슷한 수준의 세력’은 어쩌면 비화곡 전체의 멸망을 가져오는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썅! 이봐 타임씨!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런 엿 같은 일 때문에 날 끌어들인 거라면! 난 결코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야…! 아니… 결코 당신 뜻대로 되게 하지 않겠어! 나는 연옥도에서 가지고 나왔지만 이제껏 깊숙이 지니고만 있었던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다음 날… 결전의 아침! 나는 밤새 운기조식을 했지만, 좀 더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날 데리러 온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유체이탈로 다른 막사에 누워있는 원판의 몸을 일으켰다. 원판의 몸으로 진하연과 대교에게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가자 그동안 내가 만나고 사귀며 때로는 칼을 섞어 싸웠던 상대들이 원판의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온 천지를 진동시키려는 듯 함성은 점점 커져만 갔고 맞은 편의 비화곡 병력들은 침묵에 쌓인 채 날… 아니 예전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연아… 네가 내 말을… 그대로 모두에게 전달…해 줘. 내… 유언을.”
그동안 나는 틈틈이 원판의 몸으로 진하연과 작전을 상의하는 한편 ‘다시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연기를 해 보여왔다. 그러나… 역시 사랑하는 혈육의 죽음은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진하연은 주저앉아 소리 없이 오열하고 있을 뿐이었고 대교가 대신 내 말을 수많은 군중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에게 이번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나든 결코 비화곡 식구들끼리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누가 비화곡주가 되던 상관없이 그런 비극이 발생한다면 나는 죽어서도 결코 모두를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이 난폭한 무리들에게 내 말이 얼마나 먹혀 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동안 내가 겪어 본 비화곡의 마인들은 죽어가는 곡주의 유언을 무시할 정도로 그렇게 더러운 양아치들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하연아. 난 말야… 다음 세상… 그게 언제가 되었든… 네가 다시 내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
진심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대교 이상의 사랑을 보여 준 하연이를 난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원판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내가 정말 하연의 오라버니이고 싶었다.
번쩍! 본래 진유준의 몸으로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천천히 막사 밖으로 나왔지만 모두의 시선은 원판과 진하연으로부터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하연이에게 용서를 빌고… 그리고 그동안 나 같은 놈에게 씌여 원치 않는 짓을 했을 원판의 몸에게 가볍게 경례를 보냈다. 고맙다, 임마. 너… 그렇게 재수없게 생긴 것만은 아니었어. 사실… 나보다는 백만 배 낫다는 거 나도 인정해. 다음에는 꼭 본래의 영혼과 만나라구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나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맞은 편의 거대한 비화곡 무리와 그 앞의 대천마를 향해 걸어 나갔다. 꽤 오랫동안 이를 갈아왔던 내 살인자… 최강의 마인이 지금은 그렇게 밉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얼마 후, 나와 대천마는 엄청난 숫자의 마인들에게 둘러싸인 비무장에 마주 섰다. 대천마는 원판의 마지막 모습에 동요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과 달리 희미하지만 분명히 여유가 느껴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 후후… 연기가 제법 그럴 듯 했소, 곡주. >
< …역시 알고 있었소? >
< 암중에 수라혈불에게 방법을 전해 주라 시킨 자가 바로 나인데 어찌 몰랐겠소. 한낱 계집에 정신이 팔려 자기 사부와의 약속조차 잊은 듯한 곡주를 보다 못해 직접 손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 적잖이 우려도 했소. 만약 그대로 곡주가 새로운 몸에 들어가지 못한단다면 난 선대 사천대령신군과의 약속을 완전히 지킨 것이 되지 못할테니 말이오. >
< 평생 단 한 번의 패배를 안겨 주었던 상대에게… 그의 제자가 무공을 얻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한 약속 말이군. >
그랬다. 난 얼마 전 원판의 몸으로 대천마가 하연이에게 보내 온 물건들 접하면서 원판의 기억 일부를 끄집어 낼 수가 있었었다. 대천마는 그 약속을 오랜 세월 지켜왔고… 그래서 원판은 대천마에 대한 대책을 특별하게 세워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기억만으로 이 대천마가 최소한 진하운 = 진유준 공식을 알고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 그 약속… 정말 그 약속 때문에 그토록 진하운에게 새로운 몸을 주려 했던 거요? >
< 후후후~ 물론 그러하지만… 내 자신의 욕심 또한 있었던 걸 부인하지는 않겠소. 세월이 흘러 백발이 늘어감에도 사라지지 않는 이 욕심…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사천대령신군처럼 끝없이 강한 자와 칼을 맞댔을 때에야 느낄 수 있는… 천하제일미녀를 품는 것보다 더한 충족감… 그 감각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소. 더구나 그 상대가 사천대령신군의 제자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않겠소? >
< 그런데 문제는… 난 진하운이 아니오. >
< 그게 무슨……? >
< 수라혈불의 주술은 실패했소. 난 진하운이 아니라 본래 진유준이란 남자요. >
< 그, 그럴 리가…… >
대천마는 처음으로 당혹한 표정이 되어 우리 측 진영의 수라혈불에게 무서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수라혈불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지 곧 피식 웃어 버린다.
“이제와 그런 말장난으로 노부의 심기를 흐트러트리려 하다니……”
“당신이 믿건 못 믿건…! 난 진하운의 대리로서 당신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겠소. 과연 그렇게 달콤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나는 말을 마치고는 비로소 대천마를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내가 급격히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대천마의 안색이 일변했다.
“오오~! 그 나이에 벌써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동했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바로 어제 밤 그리 되었소.”
연옥도에서 챙겨 온 마지막 공청석유 덕분이라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대천마는 계속 탄성을 터트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못 말리는 강적 중독자에게 생사금마도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꽈르릉~ 천둥 같은 소리가 나와 대천마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대결… 그 것은 정말이지 난생처음 겪어보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연옥도의 혹독한 수련 기간 동안에는 물론이고 독기에 휩싸여 정글도를 휘둘렀던 마군황 시험… 소림사 백팔나한진을 상대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묘한 감각이 날 휘감아 돌고 있었다. 임독양맥이 타동 된 내 몸은 마치 내 손과 발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며 생사금마도결의 진수를 펼쳤고, 대천마 역시 그 만의 놀라운 절기를 쉴 사이 없이 토해냈다. 그건… 광기였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만족케 할 상대를 찾아 헤매던 대천마의 광기가 내게로 옮겨 온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백인지 몇 천, 몇 만의 초가 오갔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상대의 무슨 초식에 내가 무슨 초식으로 대항하는지 그런 개념조차 점점 사라져갔다. 나는 마치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떤 공간에서 나와 대천마 둘 만이 있는 듯한 환각 속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하아아- 하아~”
나는 먼동이 터 오는 동쪽 하늘을 향해 가쁜 숨을 토해내야 했다. 그런 내 앞에는 대천마가 무릎을 꿇은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부러진 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두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 순간 사방의 군중들로부터 하늘이 들썩일 정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봤냐? 들리냐, 이 소리가? 내가 이겼다는… 또 살아 남았다는 증거이다, 이 빌어먹을 타임씨얏~!
“헛허~! 노부가… 노부가 패했구려.”
대천마는 힘없는 음성으로 탄식했지만 웬지 그리 분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대천마 당신보다 강한 게 아니야. 내가 단지 조금… 조금 더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지.”
솔직히 말해서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고, 또한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참! 나 어제 밤 약물 복용(?)했지? 음… 으음… 에, 뭐… 그 일은 그냥 덮어 두기로 하자.
“음… 어쨌건 난 정말 진하운이 아니오.”
“왜 또 그런 말을… 아, 설마 이대로 비화곡을 떠나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천마는 내 뒤 쪽 멀리서 내 등을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대교를 찾아보는 것 같았다.
“이럴 수가…! 노부가 평생에 걸쳐 무공만을 추구하며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던… 그런 것에 진정 강한 힘이 숨어 있었다는 것인가…? 허,허허허허허어어~!”
대천마는 기뻐하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한참을 웃어댔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당신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면 되잖소. 낙룡파에서의 당신 말대로 당신은 너무도 정정하여 당분간 하늘도 부를 뜻이 없는 듯 하니 말이오.”
내 말에 대천마는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될 말이오. 비화곡의 역사에 반역자가 용서받는 전례를 만들 수는 없소.”
“아, 잠깐!”
나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다가갔지만 이미 한발 늦은 상태였다. 대천마는 말하는 도중에 스스로 자신의 심맥을 끊었는지 정좌를 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숨져 있었다. 제기… 정말이지… 이 못 말리는 노인네 같으니라 구…….!
최종 결전이 있은 지 열 흘. 나는 대교의 가족들과 싸가지 진을 대동하고 어느 인적 없는 산 속에 앉아 있었다. 내 빛 바랜 복수와 비화곡 탈환 작전이 대천마의 자결로 끝이 난 후에도 나는 바로 고향으로 출발할 수가 없었다. 대천마와의 대결 직후 싸가지 진의 타임머신 제어기가 정상 작동을 시작하여 속이 시커멓게 될 만큼 걱정했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역시 뒷수습 과정이 궁금해 곧바로 가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낙룡파에서 죽을 당시… 때마침 외부 자체 훈련 중이어서 살아남았다는 혈랑대, 반발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인질이라는 명분으로 살려 뇌옥에 가둬 두었던 혈신(血神) 명관약 장로를 위시한 반대파 장로들… 이런 경우를 봐도 역시 대천마는 비화곡주 자리를 탐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비화곡 정상화는 비교적 빠르게 진행 될 수 있었고 당연히 대천마를 깬 나를 곡주로 추대하겠다고 난리였지만 아무리 대교와 알콩달콩 살아도 2세를 볼 수도 없는 그런 자리는 절대로 사양이었다. 이제는 야후 장로와 혈신 장로를 중심으로 한 장로들이 공동으로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다는데… 물론 말썽의 소지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원판으로서 마지막으로 했던 열변(?)이 통했는지 비화곡 전체가 비교적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니 믿어 볼 수밖에.
“헌데… 하연 아가씨는 앞으로 과연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가족들과의 마지막 자리에서 자신 손으로 끓인 차를 가족들 앞에 놓고 있던 대교가 그렇게 물어왔다. 아무래도 자신만 행복해 진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진하연… 그 불쌍한 녀석은 결국 혼이 반쯤은 나간 듯한 얼굴로 자신의 심복인 묵혼자와 천응이 모는 마차에 몸을 싣고 떠났다. 그녀는 죽은 원판을 데리고 중원의 어느 곳도, 묘강도 아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난 원판이었을 때도 그 곳을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했었다. 어렴풋이 보였던 건… 말로만 듣던 북해빙궁처럼 사철 눈부시게 하얀 눈으로 덮인 어떤 풍경밖에는…… 나는 또한 하연이의 마차를 쫓아 길을 떠난 삼태자 조명환이란 남자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광대한 천하의 주인 자리를 버리고 단지 심복 류혼 만이 따르는 길을 주저 없이 떠난 그 무모한 남자를 말이다.
“틀림없이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야. 그런 대책 없는 황태자께서 따라 나섰으니 말이야.”
나는 웃으며 그렇게 말한 후, 대교의 가족들을 새삼 주욱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대교에 대한 당부를 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조용히 웃으며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이들에게는 내 최종 비밀까지 숨길 수가 없었는데… 다들 잘 이해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두 분… 잘 먹고 잘사슈. 우리도 그럴 테니까.”
내 싸가지 없는 말에 사영이 키득대며 모용란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소교 넌, 앞으로 네 주위를 좀 돌아봐. 웬지 요즘 네 애잔 파워가 급상승해서 비화곡 남자들 대부분이 상사병에 걸려 난리가 아니더라.”
내 짓궂은 말에 소교가 곱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 소령이 너… 그래, 호초를 용서해 준 건 정말 잘 했어. 그녀가 비록 잘 못은 했지만… 뱃속의 아기까지 세상을 볼 수 없게 하는 건 옳지 않으니……”
호초와 그녀의 남편인 마도랑군까지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던 장면을 다시 떠올렸는지 소령이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소령이도 이젠 얘기 들었겠지만 천우신… 꽤 괜찮은 친구니까 잘 좀 봐줘. 아, 미령이 넌 백상 좀 작작 괴롭혀!”
나는 입술을 삐죽이는 미령이의 이마에 마지막으로 꿀밤을 한 대 먹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대교가 가족들과 조용히 작별인사를 나누는 사이 싸가지 진에게 확인했다.
“그러니까, 인간의 시간 여행은 그렇게 사고가 많은데 비해 ‘물건’들은 별 문제가 아니라는 거… 확실하죠?”
“그랬대요. 여행 과정의 데이터가 담긴 매체나 다른 시대 물건만 달랑 전해져 오는 일이 많아서 그나마 시간 연구가 유지되고 있었던 거예요. 어쩌면 그 것마저도 우리에게 실상을 알리려는……”
“시간의 배려? 혹은 말 그대로 심술궂은 경고일 지 모른다는 거죠?”
“훗-! 맞아요.”
음… 비화곡에서 장로들에게 받아 등에 지고 갈 선물들은 그렇다 치고, 이제는 정이 왕창 든 정글도를 두고 가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지금도 비화곡 성지에 남아있는 생사금마도결을 나중 누가 되었든 내 전인(웬지 쑥스럽군)이 익힌다 해도 꼭 정글도로 펼쳐야만 되는 건 아니니까… 음, 그래도 역시 쪼잔한 사부나 선배라고 투덜대려나?
“에이- 모르겠다. 욕하려면 하라지 뭐. 이제 그만 갑시다.”
나는 싸가지 진의 왼 팔을 잡았고 대교는 그녀의 오른 팔을 잡은 상태에서 싸가지 진이 제어기에 내 고향의 좌표를 입력했다. 그리고 그녀가 엔터 키 같은 걸 누르는 순간 번쩍! 하얀 섬광이 눈앞을 덮쳤다. 그 때와 똑같은 섬광과 기묘한 위화감… 이런… 이런 느낌은……?
“뭐죠? 지난번하고는 뭔가 틀린 것 같은데?”
나는 소리치면서도 이런 이상한 빛의 공간 속에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온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뭐예요, 대체?”
“맙소사! 갈 수가 없어요!”
“무슨 헛소리야! 갈 수가 없다니!”
“몰라요! 이상해요! 멈춰지지도 않고… 이동도 안돼요!”
싸가지 진은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경우는… 이런 경우는 설마……”
나는 한 손으로 서둘러서 등에 맨 배낭을 풀기 시작했다.
“소용없어요. 이건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싸가진 진의 시선이 대교에게로 향해 있었다.
“왜 대교를 봐! 에너지는 충분하다고 했잖아!”
“자료에는- 이런 경우가 딱 한 번 기록되어 있어요! 그 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함께 갔던 로봇만……”
“닥쳣! 당신 또 뭔가 수작부리는 거지? 당장 이거 멈춰!”
“안된다니까요! 제어가 안돼요! 이대로는… 이대로는 우리 모두 시공간의 틈에서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구요!”
나는 우리를 덮고 있는 빛의 장막 너머에 시선을 집중해 보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대교의 가족들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한 번 떠올린 후 결국 이를 악물었다. 몽몽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손에 집중시킨 나는 진의 손목에 있는 제어기를 내리쳐 버렸다.
“아앗-! 무슨 짓이예요!”
싸가지 진이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진짜 놀라 고 절망한 것은 나였다. 믿을 수 없지만 내 내력이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막혀 제어기를 파괴하지 못한 것이다.
“미치겠네! 뭐한 거예요? 제어기가 갑자기 왜 이런 동작을… 아아- 이대로는 정말……”
제어기의 작은 화면 속의 숫자며 눈금이 폭주하여 정신없이 바뀌고 있었다.
“전… 가는 것이 허락 받지 못한 건가요?”
크지 않은 대교의 음성이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대교! 가만있어! 아니… 맞아. 오히려 손을 놓으면……”
나는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손을 놓았다. 그러나 진의 제어기를 중심으로 진을 감싸고 있는 빛의 줄기가 그대로 나에게 연결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저도 손을 놓아 볼게요.”
“안돼! 뭔가 이상해! 놓지마 대교!”
나는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대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웬지… 느껴져요. 저는 지금 당신을 따라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놓치마! 그 손 놓치마!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대교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으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대교가 진의 팔을 놓는 장면이 거짓말 같았다. 그 직후 대교의 모습이 화악 떠밀리듯 빛의 너머로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거짓말 같은 악몽이었다.
“대교오오오오~!”
나는… 고향에 돌아 왔다. 몇 년 만인데도 어제처럼 익숙한 풍경의… 내가 복무했던 부대 근처의 숲이었다.
“아아- 미친 듯 폭주하던 제어기의 눈금이 어떻게 한 순간 본래대로 맞춰 질 수가 있지?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렇게까지 관여하는 건… 이런 건……”
진이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딴 건 관심이 없었다. 나는 숨이 막혀 버린 것처럼 갑갑한 가슴을 안고 주저앉았다. 눈을 감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암흑이 머리 속을 덮쳐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눈을 떴다.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그렇지, 대교?
“미, 미안해요.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나는 등뒤에서 정글도를 뽑아 땅을 짚고 일어섰다.
“당장 돌아가! 당신의 시대로!”
“그, 그야……”
“내가 거기서 당신을 기다렸던 기간… 딱 그만큼만 기다려 주겠어. 그 안에 다시 날 데리러 와.”
“다, 당신 설마……”
“그래. 다시 대교에게 돌아가려는 거야.”
“하지만… 당신도 방금 겪었잖아요. 이건 우리 시대의 과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닥쳣! 떠들 시간 있으면 당장 돌아가서 방법을 찾아내. 당신 시대의 그 위원회인가 뭔가 하는 상위 기관에게 내 말을 전해. 그딴 기계를 만들었으면 끗까지 책임을 지라고!”
“……”
“아직 방법은 몰라. 하지만 난… 난 반드시 당신들… 당신들 미래에 복수할 방법을 찾아낼 거야! 알겠어? 그러기 전에 당신이든 누구든 와서 날 다시 대교에게 보내 달란 말야!”
“당신 정말……”
“이 거지같은 일의 원인을 규명해 내겠다고 했지? 당신도 당신이 한 말을 지켜.”
진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나도 내가 시작한 실험이 실패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
나는 진이 전에 본 것처럼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늘을 보았다. 아까 같은 암흑이 아닌 대교의 모습이 하늘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리던 고향의 가을 하늘아래에서 미친놈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난 이대로 포기하지 않아. 반드시 돌아 갈 게, 대교. 반드시… 반드시 돌아 갈 게… 대교야… 언젠가 반드시… 돌아 갈 게 네 곁으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가슴속의 불길도 사그러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절반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온 탓일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