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5-3화 : 기피대상 1호의 등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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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5-3화 : 기피대상 1호의 등장.(3)


  1. 기피대상 1호의 등장 (3)

야후장로 일가족의 일이 다소 걱정되긴 했지만 역시 남의 가정사에 관여하는 건 내키지 않았고 내일도 바쁜 참이라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 내가 들른 곳은 원판만의 성지이자 지금은 내 본래 육체가 잠들어있는 와룡전(臥龍殿)이었다. 최소한 한 달 이상 나가는 거니 그러기 전에 잠깐 상태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와룡전은 성지와는 달리 본단이나 마을들과도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굴인데, 본래 산 속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을 원판이 발견하여 자신만의 소굴로 꾸민 것이다. 대교 자매들을 포함한 모든 인원을 입구 앞에 대기시킨 나는 입구 위의 바위에 새겨진 와룡전이란 글자를 올려다보며 잠시 갈등했다.

전에 대교를 공연히 성지에 데리고 갔다가 대교나 나나 오만 가지 고생을 했던 걸 생각하면 다소 허무하게도… 여기 와룡전에는 비화곡 바깥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다. 본단의 지하성지와는 달리 이무기가 사는(지금은 없지만) 연못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어서 비밀리에 밖으로 나갈 가장 완벽한 루트이긴 했지만… 음, 역시 이 안으로 다른 사람들을 데려가는 건 내키지 않는다. 대교나 흑주라면 괜찮을 것도 같지만 그것마저도 꺼려지는 걸 보면 나도 원판처럼 ‘나만의 비밀 아지트’를 갖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 같다.

“모두 대기해. 잠시… 한 다경 정도면 돌아올 테니까.”

대교는 전에도 그랬듯이 얌전히 명령을 따랐지만, 흑주는 고집을 부려 또 내 뒤를 따라 나선다. 그러나 흑주가 내 발자국을 밟아 뒤쫓아 올 수 있는 건 입구로부터 안쪽 수십 미터에까지 원판이 설치해 놓은 진(陳) 중 두 번째 정도까지이다.

몽몽의 지시와 업그레이드된 내 자신의 기억에 따라 걸음을 옮기던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오호~ 흑주가 이번엔 지난번보다 10미터 정도 더 따라왔다. 거기부터 다시 내 종적을 놓쳤는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조금 안돼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머지 진을 통과해 나갔다.

원판 녀석이 정말 천재는 천재인 것이, 몽몽의 데이터에 따르면 여기 설치된 진은 모두 14가지이고 그게 전부 이 시대 데이터에 없는… 말하자면 녀석의 창작이라는 뜻이다.

진을 모두 통과한 후 다시 얼마간 복잡한 동굴을 걷다 보면 사방 30미터 정도의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그 한복판 얼음 구덩이 속에 나 진유준의 육체가 누워있는 것이다.

…제기, 이제는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역시 얼음 속에 고이(?) 잠든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보통 불쾌한 것이 아니다.

[ …스캔 결과. 주인님의 육체 상태는 정상입니다. 생명유지 장치의 작동도 이상이 없습니다. ]

저게 정상으로 보이냐?라는 투덜거림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녀석 탓도 아니고, 또 오히려 몽몽이 없었다면 영혼이 빠져나간 내 몸을 저렇게 썩지 않게 잘 보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저 얼음 구덩이는 원판 녀석이 준비해 놓은 거지만 그 안에 담겨진 육체가 벌써 1년이 넘게 저렇게 유지되고 있는 건 몽몽의 분신, ‘하위체 1호’의 공이다. 이것도 몽몽이 나중에 알려줘서 안 거지만… 현재 내 몸 안에 박혀있는 몽몽의 하위체는 잘해야 팥알 정도 크기인 것 같았다.

그게 내 신경계에 안착하여 생명유지에 필요한 신경 신호를 낸다고 하던데, 구체적인 미래 의학의 개념은 잘 모르겠다. 에너지는 인체에서 생성되는 전기에너지를 쓴다고 하고… 하여간 나중 얼음 구덩이 근처의 상자 안에 있는 호리병의 액체를 부어서 얼음을 녹였을 때 별다른 이상 없이 꺼낼 수 있다고 몽몽은 장담한다.

상자 안에는 나중 얼음을 녹일 때 쓸 마화신수(魔火神水)라는 액체가 담긴 호리병도 있고, 또 물과 접촉했을 때 그와 반대의 빠른 화학작용을 일으켜 순식간에 저런 완벽한 얼음을 만들어내는 빙염마령액(氷念魔靈液)이 담긴 호리병도 있다.

호리병에는 각각 그런 명칭이 붙어 있었지만 몽몽 말로는 우리 20세기에도 개발되지 못한 화학식이 적용되어야만 만들 수 있는 특수 화합물이라나? 음… 아무리 원판이 천재라도 지가 직접 화학 실험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했을 것 같고, 어디서 우연히 만들어진 걸 수집해 놓은 거 아닌가 싶다.

옛날 전설이나 동화 같은 데 보면 산신령이나 뭐 그런 존재가 주인공에게 불길을 일으키거나 반대로 주변을 얼려버리는 수정구슬 같은 걸 주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저 마화신수나 빙염마령액 같은 게 옛날부터 자연적으로 생성되거나 누군가가 우연히 만들어내어 사용된 것이 그런 전설이나 동화로써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보지만… 뭐, 진실은 아무래도 나와는 상관없겠지.

중요한 건 현재 내가 확보한 상태라 언제든 사용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마화신수는 두 병, 빙염마령액은 한 병밖에 안 남아서 아주 확실한 상황이 아니면 섣불리 사용하기 어렵겠지만……

에효~ 문득 고개를 들어 공터의 위쪽을 올려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원판이 영혼 교체 주술을 사용할 당시 내가 숨어있던 저 바위 턱… 제기, 내가 그때 뭐 하러 그딴 거 구경하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원.

“몽몽… 그 여자 ‘진’, 정말 다시 돌아올까?”

지금까지 몇 번이고 했던 질문을 다시 꺼내자 몽몽에게서는 역시 같은 대답이 나온다.

[ 제가 판단한 저의 본 사용자의 행동 패턴이라면, 돌아올 가능성이 90.6%입니다. ]

“…그래, 그렇게 믿으마. 믿어… 야지.”

솔직히, 나보다는 몽몽 이 녀석을 가지러라도 오긴 할 것 같았다. 날 만나는 바람에 ‘몽몽’이라는 괴이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녀석이지만 원래 녀석의 정식 명칭은 ‘NSBG3274001’.

몽몽은 29세기에서도 매우 드문 형태와 기능을 가진 초소형 지능 로봇이라는 데다 본래 사용자인 ‘진’이 시간여행을 위해 특별히 만든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있으며 진이 시간여행을 하는 동안의 경험 데이터도 있으니 사실상 29세기에서도 ‘몽몽’은 ‘단 한 대’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음… 근데, 원판도 진씨고 나도 진씨… 그리고 그 미래 여자 이름도 ‘진’이다. 이것도 무슨 인연인 걸까?

몽몽 말로는 29세기에는 인간들 이름도 몽몽처럼 영문 약자와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고 ‘진’은 지가 그냥 붙인 애칭 같은 거인 모양이지만……

[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

“응? 궁금…? 니가?”

[ 예. 사용자의 생존과 무관한 질문이라 하지 않았습니다만, 제게 붙이신 ‘몽몽’이란 이름의 유래가 무엇입니까? ]

이거야, 원. 갈수록 사람 같아진다고 했더니만 이제 로봇이 ‘호기심’까지 보이다니! …뭐, 물론 숨길 일도 아니긴 하지만……

“…진돗개였어. 내가 군대가기 2년 전까지 기르던 개는… 아니, 실은 그 녀석 말고도 내가 아끼는 물건이나 어릴 적 선물 받은 장난감 로봇 같은 거에도 같은 이름을 붙이곤 했지. 으음… 생각해보면 어릴 적 ‘네시’라는 공룡 로봇에 처음 ‘몽몽’이란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 20세기에도 dinosaur 형태의 로봇이 존재했습니까? ]

“아니, 그럴 리가 있냐. 그냥… 내가 상상한 거였어. 그때 웬지 작고 귀여운 공룡 형태의 로봇이 무지 갖고 싶었거든. 대충 어떻게 생겼냐하면……”

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던 로봇 몽몽의 형태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몽몽은 그걸 형상화하여 내 눈앞에 영상을 띄웠다. 흠… 몇 번 더 수정하면 정말 내가 어릴 적 생각했던 이미지가 정확히 나오겠는걸? 나중에 심심할 때 한 번 해봐야겠다.

“…야, 근데 너 갑자기 왜 그게 궁금했냐?”

[ …이유를 말하라고 하시면… ‘없음’입니다. ‘모순’입니다만, 다른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

“호오~ 너 진짜 로봇답지 않아졌다? 그거 알아? 20세기, 아니 더 전인가…? 하여간 인간은 곧 ‘모순’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어.”

[ 제 데이터에도 있습니다. …저의 인공 지능에 ‘모순’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식 사용자이며 최초 프로그래밍 자인 ‘진’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

“흐음~ 여러 가지로 알면 알수록 특이한 놈이다, 너. …그래. 넌 아무래도 ‘네시’ 형태보다는 ‘요정’ 형태가 더 어울리겠다.”

[ 요정(fairy)… 잠시 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

몽몽의 요청에 녀석이 부착된 손을 눈 높이로 들어 올리자 녀석의 위에 즉시 여러 가지 형태의 요정 영상이 떠올랐다. 내 시신경을 이용하는 것보다 에너지 소비가 크다고 자주 쓰지 않던 입체 영상 기능이었다.

“아, 잠깐! 그거, 그게 제일 낫겠다.”

내가 고른 것은 만화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크기는 사람 손바닥만 하고 등에 투명한 날개가 달려 날아다니는 요정 말이다.

[ 이 형태를 앞으로 저의 ‘제1 구현 형태’로 해도 좋겠습니까? ]

“니 마음에도 든다면 얼마든지. 후후… 아무래도 팔찌 모양이나 니 전 주인 모습보다야 좋겠지.”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안 그래도 전에 한 번 몽몽의 가상 현실 속에서 녀석의 영상을 ‘도우미’로 구현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몽몽이 디폴트로 선보인 자기 자신의 영상은 본래 주인인 미래 여자 ‘진’이었고 난 “치워라, 열 받는다.”라고 했었다.

후후~ 몽몽 녀석 2미터 정도 거리까지는 입체 영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니… 요정 영상, 아니 몽몽은 날개를 퍼덕여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날 중심으로 주변을 날기 시작하더니 살짝 내 어깨나 머리 위에 앉기도 한다. 몽몽이 움직이는 괘적을 따라 물방울 같은 빛의 덩어리가 몽실대는 잔상을 남기는 것하며 귀여운 몸짓과 얼굴 표정… 녀석, 20세기의 만화 영화를 많이 참고했나 보다.

“나참… 어떻게 흑주보다 니가 더 빨리 ‘자아’를 가지는 것 같냐?”

[ 제가 자아를 가졌다고요? ]

이 녀석, 이젠 아예 귀여운 표정으로 말까지 하네?

“그래. 아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어째 난 그런 느낌이다.”

[ 저의 프로그램은 수많은 데이터의 집합체일 뿐입니다. 주인님의 견해는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

“그래… 뭐,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앞으로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지금처럼 무늬라도 로봇이 아닌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새삼 한 번 친해 보자구.”

[ …알겠습니다, 주인님. ]

훗~ 보면 볼수록 실감나네. 뜬금없이 애완요정(?) 한 마리 얻은 기분인 걸?

몽몽의 변신(?) 덕분에 매우 드물게 웃으며 와룡전을 나서니 처음엔 흑주, 다음엔 대교가 초조하게 날 기다리고 있다가 반겼다. 요정 몽몽과 놀다가 약속했던 시간을 많이 초과했던 것이다.

“표정이 밝으신 것으로 보아 ‘진유준’님의 상태가 많이 좋아지신 모양입니다.”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은 것 같아.”

대교 자매들은 ‘진유준’과 ‘진하운’이 의형제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 천하의 독각와룡과 의형제를 맺은 건 물론이고 곡주가 직접 자신만의 공간에 요양을 시키는 상황인지라 ‘하사 진유준’은 현재 비화곡주의 사상까지 변화시킨 ‘엄청나게 신비한 기인’으로 소문이 나 있는 상태다. 그런 편이 아무래도 나중에 본래 몸을 찾았을 때 유리할 것 같아서 내가 일부로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린 거지만 말이다.

와룡전 방문 및 내 육체 점검을 끝낸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행을 이끌고 비화곡을 나섰다. 뭐… 사실 비화곡을 나서는 비밀 루트는 많다. 워낙에 적이 많은 비화곡인지라, 지하성지나 와룡전의 비밀 통로만큼 은밀하진 못해도 강호인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후미진 출구가 몇 군데 있는데 내가 이번에 택한 곳은 마극파천대가 자주 이용한다는 10KM 정도의 산길이었다. 곳곳에 마극파천대에서 파견된 병력이 매복하고 있는 산길을 지나고 나면 평화로워 보이는 농촌 마을이 하나 나온다. 이것 역시 비화곡의 비밀 기지로 마을 주민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농민들이 절반 정도고 나머지 반은 무공을 숨긴 비화곡의 고수들이다.

음… 막상 나오니까 웬지 기분이 묘하다. 처음 나올 때처럼 극도로 긴장한 상태가 아니라 그런지 오히려 감상적이 되는 걸까?

비화곡 쪽을 돌아보는데, 마치 정말 내 집을 떠나 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면서 섭섭하달까, 아쉽다고 할까…

훗~ 아무리 어쩌니 해도 1년 동안이나 먹고살던 곳이라 그런가? 하긴… 난 심지어 제대할 때 부대를 돌아보면서도 그랬으니……

“가자, 대교.”

어쩐지 내 표정이 애써 집을 떠나 모험을 나선 어린애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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